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94)
194화
비랑이 장건에게 안긴 것을 본 다른 두건인, 적풍이 그 두건을 벗으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이거, 우리 조카가 이렇게 날랜 줄 몰랐는데!”
“오랜만이오, 적풍.”
장건은 그에게도 눈인사를 건넸다. 그는 장건에게 안긴 조카를 보며 연신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비랑의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마냥 반갑고 즐겁기만 한 모양이었다.
적풍에게 인사한 장건은 눈을 돌려 부족 연합의 대전사와 흐르는 뼈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흐르는 뼈는 장건 품에 안긴 비랑을 보며 약간 어색한 듯 웃고 있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흐르는 뼈. 그리고 대전사.”
“음, 나도 반갑네··· 그런데··· 이거 아는 사이라고 듣기는 했는데···”
“아주 가깝게 아는 사이였군.”
대전사 미쳐 날뛰는 말이 흐르는 뼈의 말을 마무리했다. 그는 흐르는 뼈와는 다르게 약간 음흉하게 웃고 있었는데, 그 미소가 마치 장건을 놀리고 있는 듯했다.
장건과 그들은 원주민의 말로 대화를 나눴다. 천막 안에 있던 중원인들이 그 대화를 들으며 조금 어색해했다. 알아들은 말보다 못 알아들은 말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중 장건에겐 낯선 남자 하나가 슬쩍 미쳐 날뛰는 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대전사. 우리에게도 저분을 좀 소개해 주시지요.”
“음? 아, 그래. 우리 연합의 친구 장건이다.”
대전사가 간단하게 소개하자 그들은 오오, 하는 탄성을 내지르며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장건에게 다가와 포권을 하며 인사했다.
“만나서 정말 반갑소, 장 대협! 나는 고원성에서 가죽 거래를 하는···”
“명성이 자자한 장 대협을 이렇게 만나다니! 나는 곡물 장사를 하는···”
“흐허허! 내 소문의 창룡도가 이리 젊은이인 줄 몰랐소이다. 본인은 광산업을 하는···”
장건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마치 가용산이 여러 명으로 나뉘어 그에게 말을 거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반갑다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닥치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라 장건은 일일이 마주 고개를 숙여 주었다.
그때 쿵-하는 둔탁한 울림이 천막 안을 뒤흔들었다. 약간 소란스럽던 상인들의 입이 다물어지고, 모두의 시선이 소리의 근원에게로 집중되었다. 거기엔 의자 팔걸이를 내려친 유설이 있었다.
그녀는 비현실적이리만큼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떨어지시오.”
사람들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유설의 목소리가 너무 낮았던 것도 있고, 그녀의 말이 맥락 없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딱 두 사람은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왜요?”
장건 품에 꼭 안겨있던 비랑이 그 반짝거리는 황금빛 눈으로 유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표정과 말투만 보면 더없이 순진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을 마주한 유설의 무표정은 으직 깨졌다.
유설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나, 남녀가 유별한 법인데, 어찌 이런 자리에서 망측한 행동을 벌이는 것이오?”
천막 안 사람들에게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인지 유설은 하오체를 썼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천막 안 사람들 모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물론 진짜 그들이 입을 다문 건 그 말투보다는 유설의 눈가가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점이 더 큰 이유였다.
“유별? 망측? 제가 중원 말에 익숙하지 않아서···”
비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유설의 말이 어려워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의 몸은 조금 더 바짝 장건에게 달라붙고 있었다.
그를 본 유설의 입가에선 떨림이 사라지고 도리어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두 눈은 전혀 웃고 있질 않으니 누가 봐도 즐거워 짓는 웃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입에서 위험한 말이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비랑.”
장건의 낮은 목소리였다. 비랑은 고개를 돌려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차분한 눈과 비랑의 황금색 눈이 마주쳤다. 잠시 그렇게 장건을 올려다보던 비랑은 호수처럼 맑고 평온한 장건의 눈빛에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네. 미안해요.”
“사과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오.”
비랑은 잘못한 아이처럼 손을 꼼지락대며 흘끗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장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고, 결국 비랑은 폭 한숨을 내쉬더니 유설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어설프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중원인의 방식에 좀 서툴러서.”
그녀가 사과하자 화를 내려던 유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그녀와 장건을 번갈아 보다가 비랑이 그랬던 것처럼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죠. 중원인들에게 큰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그러죠.”
비랑은 겸연쩍게 대꾸하고는 딴청을 피웠다. 덕분에 천막 안 사람들의 분위기는 조금 이상해졌다. 사람들이 유설과 비랑, 그리고 장건의 눈치를 보며 묘한 적막이 흐른 것이다.
그때 장건이 입을 열었다.
“계곡에서 여기까진 거리가 꽤 되는데. 어떻게 오게 된 것이오?”
그 질문에 적막한 분위기가 참기 힘들던 적풍이 냉큼 대답했다.
“어르신이 보내서 왔네.”
“어르신이면, 외눈 구름?”
적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어르신께서 별과 달, 새벽하늘을 보며 예견하자니, 산맥 너머 동부의 대평원에서 펼쳐질 큰 싸움을 보셨다고 하네. 지금까지 이 땅에선 한 번도 없었던 거대한 싸움이라더군.”
한 번도 없었던 거대한 싸움. 확실히 통일된 왕조가 없던 이 신대륙에서 수천 명이 한꺼번에 맞서 싸우는 전투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마궁이 자신들의 앞마당에서 수비하는 게 아니라 직접 동진 토벌군을 맞이하러 서쪽으로 진군해오고 있음을 말했다.
그때 적풍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그 싸움이 아니네, 장건. 아니, 물론 그 싸움도 중요하지만··· 그 싸움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릴 존재가 더 먼 동쪽에서 깨어나고 있다 하셨네. 자네들 말로 하자면··· 마왕魔王?”
적풍은 원주민 말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계곡 부족의 말과 동부 부족 연합의 말은 조금 달랐기 때문에 고원성 상인들은 그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미 그 이야기를 알고 있을 미쳐 날뛰는 말과 흐르는 뼈는 아주 진지해 보였다.
“어르신께서는 대평원에서 있을 싸움에서 승리한다고 하여도, 만일 그가 깨어나는 걸 막지 못한다면 이 땅에선 매일매일 그 정도, 아니 그보다 훨씬 크고 끔찍한 싸움이 일어나게 되리라 하셨네. 그 존재는 전쟁을 부르는 별이요, 학살자들의 왕이니··· 자네에게 반드시 이 사실을 알려주어야만 한다고 하셔서 우리가 오게 된 것이네.”
적풍이 말끝을 흐렸지만, 장건은 잠시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유난히 원주민들과 얽히는 일이면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느낌이 있었다. 정령들이 그랬고 벌판에서 만났던 악령이 그랬다. 그런데 이번엔 아예 마왕이 깨어나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장건의 눈이 옆에 있는 흐르는 뼈를 향했다.
“···어르신도 비슷한 미래를 보셨습니까?”
“밤하늘을 보며 세상의 훗날을 그려보는 것은 내 특기가 아니네. 하지만 그런 나도 저 멀리 동쪽에서 붉은 별이 뜨는 것은 보았지. 아주 붉은 별이었어. 마치 피가 흐르는 듯 보일 정도로.”
그 대답을 들은 장건은 머리가 뻐근해지는 느낌에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마궁, 대계, 학살당한 원주민들, 사냥당하는 정령들, 만나는 마인들마다 진정한 주인이니 어쩌니 하던 이야기들. 기기괴괴한 마공과 주술들. 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그리고 나온 결론은 역시 조금 전 느꼈던 것처럼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 생각이 맞을지도 몰라요.”
목덜미를 주무르던 장건은 불쑥 끼어든 유설의 말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의 가벼운 모습은 모두 지우고 동진군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모든 가능성을 따져보는 지휘관이 되어 있었다.
“···그게 말이 되겠소?”
“사실 말이 되고 안 되고가 그놈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어쨌든 놈들은 마공을 익히며 머리가 돌아버린 놈들이고, 그래서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원주민들에 이어 두 사람의 대화에 상인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눈치만 살폈다. 그들은 황군의 지휘관이자 공주인 유설에게 인사를 하는 동시에 고원성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찾아온 이들이었는데, 정작 그 이야기는 전혀 꺼내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오간다고 여겼기 때문에 모두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집중은 유설이 그들을 바라보지도 않고 슬쩍 손을 들어 올린 순간 깨졌다. 그녀 뒤에 시립하고 있던 황군들이 갑자기 앞으로 나와 상인들을 몰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대부분은 당황하고 몇몇은 벌컥 화가 치솟은 모양이었지만, 끝끝내 항의하진 못했다. 잠시 후 천막 안에는 장건과 원주민들, 유설과 황군만 남았다.
그렇게 천막 안이 한결 쾌적해지자 유설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우리 같은 생각을 하는 건 맞죠?”
“마궁의 그 대계가 항우의 부활이라는 것 말이오?”
유설은 싱긋 웃었다.
“맞아요.”
그 웃음을 본 장건은 그녀가 이 이야기를 전혀 놀라워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마궁의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남궁천이 유설의 손아귀에 있었고, 가문의 씨를 살리고자 하는 그는 자기가 아는 걸 모두 털어놓았을 것이다.
유설은 일찍 알았다면 무림맹에 입성했을 때부터, 늦어도 동진군이 출발하기 전에는 그 대계가 뭔지 알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사실 황실 서고에 그런 이야기가 있긴 했어요. 항적은 괴물 중의 괴물이고, 마인 중의 마인이니 어떤 사악한 술법으로 되살아날지 모른다고. 하지만 그런 오래된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누구 하나 그게 진짜 항적의 부활을 말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죠.”
의자에 앉아있던 유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학자들은 그게 제 이의 항적이 나타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라 해석했어요. 마공을 익힌 마인들이 늘어나면 그중에 또다시 항적처럼 산을 뽑는 괴물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말이라고, 그러니 마공을 경계하고 그들의 후손을 감시하는 이야기라고요.”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누군가를 찾듯 천막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찾던 이가 없는지 의자 뒤에 서 있던 진하에게 질문했다.
“할아범은 어디 갔어?”
“그··· 병사들의 기강을 살펴본다고···”
“그래?”
유설은 다시 장건을 바라보며 말했다.
“순우 할아범은 이미 만났죠? 할아범도 중원에 있을 적에는 그런 주장을 하던 사람이었죠. 사실 천 년 전 사람을 부활시킨다는 게 누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겠어요? 하지만, 뭐. 그놈들은 그걸 하더라고요. 이 신대륙에 와서 실행할 여력을 얻었는지, 아니면 그 기회를 만들고자 신대륙으로 왔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천막 한가운데 선 그녀는 부족 연합의 두 사람과 계곡 부족의 두 사람을 쭉 돌아보았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숙였다.
“···여러분에겐 미안할 뿐이에요. 중원에서 도망친 자들 때문에 끔찍한 일을 겪게 되었으니까요. 부족하지만 대신 사과할게요.”
그 예상치 못한 사과에 그들 모두 잠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내 미쳐 날뛰는 말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적거리며 대꾸했다.
“그쪽이 사과할 일은 아니다. 용서를 빈다면 그건 잘못한 자들이 해야 맞다.”
순간 천막 안에 있던 황군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대전사의 행동은 너무 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설은 고개를 들고 아무렇지도 않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고요.”
그녀의 시선이 다시 장건을 향했다.
“어쨌든 이분들도 토벌대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지금 많이 쇠약해진 남궁 노사를 대신해서 동부의 길을 안내해줄 거예요. 장 무사가 정찰대 임무를 맡았으니 함께 움직이게 될 것이고요.”
“···외랑대에 합류한다는 말이오?”
유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얼핏 그녀의 시선이 비랑을 스쳐 지났고, 비랑은 그 시선을 보고도 딴청을 피웠다. 유설의 말이 이어졌다.
“···대충 이야기는 끝난 것 같네요. 이틀간 휴식 후 본격적으로 진군할 거예요. 그동안 이분들이 군영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부탁드릴게요.”
천막에서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홀로 왔던 장건은 등 뒤에 네 사람을 주렁주렁 달고 외랑대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외랑대에 도착하니 외랑대주 갈우선은 그들을 보고 놀라지도 않고 새 서류를 내주었고, 네 사람 모두 장건의 도움으로 어설프게 서명하며 외랑대에 이름을 올렸다.
장건이 떠나기 전 한 말 때문에 혼자 괴로워하고 있던 양굉은 갑자기 우르르 늘어난 인원에 얼굴이 활짝 폈다. 아무래도 본인의 잡일이 줄 것이라 생각한 듯했다. 네 사람의 짐정리를 도와주던 장건은 그런 양굉 앞에 섰다.
장건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양굉에게 말했다.
“시킨대로 긴장 잘하고 있었냐? 이제 시작하자.”
밝아지던 그의 표정이 다시 허옇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