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95)
195화
* * *
비랑은 자리에 앉아서 양손으로 턱을 받히고 가만히 장건과 양굉 두 남자가 하는 짓을 바라보았다.
“으아아아-!”
양굉이 괴성을 지르며 장건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옷은 흙투성이에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붉은 얼굴에는 답답함과 짜증, 분노 등이 한가득 담겨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그렇게 잔뜩 화가 난 동작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 상대가 목장 싸움꾼 정도였다면 꽤 빠른 일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마주하고 있는 남자는 장건이었다.
“어억!”
양굉의 주먹은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차이를 두고 장건의 뺨을 스쳐 지났다. 동시에 지금까지와 같이 장건의 손가락에 옆구리쯤을 푹 찔린 양굉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진짜 싸움이었다면 장건의 손은 멈추지 않고 양굉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양굉이 비틀거리자 장건은 뒤로 한 발짝 물러서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지금 이 싸움은 이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하나?”
비랑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숙부인 적풍이 보였다. 얼굴이 불그스름한 것이 조금 전까지 저쪽에 있는 외랑대 무사들에게 넉살 좋게 술과 고기를 얻어먹고 온 모양이었다. 비랑의 눈이 장건 쪽으로 되돌아갔다.
“별로 가능성이 있어 보이진 않아요.”
“거참. 어제도 종일 뒹굴었으면서··· 저 친구 보기보다 끈기가 있는 친구였구먼.”
부족 연합의 중추인 대전사 미쳐 날뛰는 말과 흐르는 뼈는 외랑대에 이름을 올린 이후 부족 연합으로 돌아갔다. 멀리 동쪽으로 원정을 떠날 원주민 전사들을 추리기 위해서였다. 내일 토벌대가 출발하기 전에 그들이 합류하면 외랑대는 이제 단순히 낭인뿐만 아니라 원주민 전사들까지 포함된 혼성부대가 될 터였다.
“음, 끈기라기보다는··· 간절함이지 않을까요?”
“간절함?”
“어떻게든 한 대만이라도 때려보겠다는 간절함이요.”
비랑의 말에 적풍이 으하하 웃었다. 확실히 지금 양굉의 표정을 보면 버티겠다는 끈기보단 정말 한 대만 때려보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날 장건이 양굉에게 했던 약속 때문이었다.
비랑은 어제 장건과 양굉이 대화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
“···한 발짝 이상 움직이지도 않고, 한 손만 쓰는 데다가, 그마저도 주먹이 아니라 손가락만 쓰시겠다?”
장건은 긍정의 의미로 가만히 양굉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양굉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눈이었다.
“그래봐야 무슨 의미가 있소? 장 형의 그 손가락에 반병신이 된 놈들이 한 수레는 될 텐데. 그 뭐냐. 분근착골? 그거 다 손가락으로 한 거 아니요. 그리고 도대체 불씨 붙이는 기술이랑 이게 무슨 상관이요?”
“분근착골은 안 쓴다. 그리고 네가 삼매진화 가르칠 거 아니면 방식을 따지지 마라.”
“···좋소. 장 형이 많이 양보해줘서 그렇게 한다고 치고. 그래서 내가 만약에 장 형한테 유효타를 먹이면?”
“출발 전에 성공하면 공주에게 말해서 이번 토벌대에서 빼주지.”
양굉은 살짝 솔깃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장건이 스스로에게 이런저런 제한을 걸어둔다고는 해도 지금껏 봐온 그의 무공을 생각하면 옷깃이나 스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장건의 말이 이어졌다.
“생각 잘해라. 이건 네가 후환 없이 날 공격할 유일한 기회일 거다. 뭘 어떻게 해도 이번엔 다 넘어가 주마.”
“···턱주가리를 처맞아도 넘어가 주겠다는 말이오?”
“내가 한입으로 두말하는 거 본 적 있냐.”
양굉의 얼굴에서 솔깃함이 커졌다.
“음. 장 형이 거짓말하고 그러는 건 못 봤지. 그럼··· 꼭 한 대만 때릴 수 있는 거요?”
장건은 피식 웃었다.
“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해봐.”
“···장 형이 먼저 해보라고 했소. 그러니 나중에 이걸 빌미로 괴롭히고 그러지 않는 거요.”
확답을 바라는 양굉의 말에 장건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제야 양굉의 얼굴에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그 대신 남은 것은 번들거리는 독기였다. 그렇게 잠시 후 두 사람은 모닥불 쪽에서 조금 떨어진 빈 곳에서 마주 보고 섰다.
양굉은 주먹을 들며 자세를 낮추고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조심하시오. 내 주먹엔 눈이 없소.”
“지랄 말고 와라.”
킁-하는 콧김을 한 번 내뿜은 양굉은 천천히 장건의 주변을 돌며 기회를 엿보다가, 어느 순간 훅 달려들었다. 낮게 파고드는 몸과 거기서 불쑥 솟아오르는 주먹이 생각보다 위협적이었다. 생각해보면 장건에게야 만날 털리지만 양굉도 나름 산전수전을 거치며 살아남은 무림인이었다.
무공을 새로 배우기엔 늦었니, 어쩌니 하며 약한 척을 하던 것과 달리 번뜩 치고 들어오는 주먹은 충분히 사람 턱주가리를 으깨버릴 힘이 담겨 있었다. 양굉이 시작부터 전력을 다한 것이다. 기습이라면 기습이라고 할 만한 공격이었다.
물론 그를 마주한 장건은 허리를 뒤로 살짝 꺾는 것으로 주먹을 피하고 오른손 검지로 양굉의 가슴팍쯤을 푹 찔렀다.
“억!”
양굉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그는 반사적으로 장건의 후속타를 예감하고 두 팔로 머리를 가렸다.
“···”
하지만 후속타는 없었다. 팔을 치우고 보니 장건은 양보했던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상태였다.
“···끄응, 이게 맞나 모르겠네···”
흔들림 없는 장건의 모습을 본 양굉은 손가락에 찔린 부위가 생각보다 아프진 않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슬그머니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장건이 정말 약속대로 하리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양굉은 조금 전 장건이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주먹을 피한 걸 보았다. 아마 진짜 고수들만이 가진다는 효율적인 간격이나 거리 감각 같은 것이리라. 양굉도 고수와 하수를 나누는 그런 능력에 대해 들어본 적 있었다.
그의 입가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의 생각에 진짜 고수고 나발이고 그들도 사람이었다. 무슨 일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한 번씩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었고, 간격을 잘못 잴 수도 있었다.
싸움이라는 건 짧은 순간에도 굉장한 힘을 소모한다. 때문에 아무리 장건 같은 고수라 해도 오랫동안 신경을 집중하다 보면 한 번은 실수하리라는 게 양굉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그의 주먹이 지난 수모를 갚아줄 순간이 되리라.
그때 양굉의 계산은 그랬다.
“···허억, 허억···”
양굉은 숨을 헐떡거리면서 어제의 그 생각이 조금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장건은 무슨 강철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치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양굉이 공격해오면 언제나 아슬아슬한 차이를 두고 피해버리고는 그의 몸 한군데를 푹 찔러버렸다. 어제 반나절을 그렇게 보내고 오늘도 벌써 반나절째 그러고 있었다.
“시발···”
짧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양굉은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다시 자세를 잡았다. 어제오늘 계속 겪으면서 느낀 것인데, 그래도 점점 그의 주먹과 장건의 간격이 미세하게나마 줄어들고는 있었다. 개미 다리만큼 미세한 차이였지만 양굉은 그게 장건이 긴장을 놓고 있는 것이라 여겼다. 그렇다면 아직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저 장건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줄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묘하게 힘이 넘쳐나고 있었다. 장건의 손가락에 찔린 부분들이 화끈거렸지만 덕분에 더 열이 뻗혀 힘이 솟는 것 같기도 했다.
단순히 화가 치솟는 것도 있었다. 이게 그 삼매진화라는 잡기와 무슨 상관인지는 몰라도 어제오늘 내내 외랑대와 주변 무사들은 종일 나뒹구는 그를 보며 적잖은 비웃음을 보냈고, 아무리 낯짝이 두꺼운 양굉이라 하더라도 그 모든 비웃음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낼 순 없었다.
결국 그 시선에 대한 부끄러움과 변함없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 출처를 알 수 없이 치솟는 힘 때문에 양굉은 점점 더 흥분에 휩싸였다. 나름 날카롭던 주먹은 시간이 지날수록 막무가내 몸 던지기로 변해간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그런 흥분상태도 영원하진 못했다. 늦은 오후의 노을이 군영을 붉게 물들일 즘 양굉은 완전히 탈진해서 바닥에 시체처럼 엎어졌다. 그는 숨도 거칠게 내쉬지 못할 정도로 지쳐서 죽어가는 곤충처럼 파르르 떨기만 했다.
“···시···발···”
그와 반대로 시작할 때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장건은 그런 양굉을 내려다보며 품에서 연초를 꺼내 천천히 말았다.
“···시발··· 이게 진짜··· 그 불붙이는 거랑··· 무슨 상관···”
“대충 기틀을 잡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배워가야지.”
“···뭐요?”
양굉은 무슨 힘인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어쨌든 그가 장건에게 유효타를 먹이진 못했으니 토벌대 탈출은 물 건너갔고, 아직 그 삼매진화라는 걸 어떻게 쓰는지는 감도 잡히질 않으니 배워가야 한다는 말은 맞았다. 결국 양굉은 다시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어제오늘 도대체 뭘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장건은 연초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뿜었다.
“수고했다. 오늘은 이제 쉬어라.”
양굉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힘도 없었다. 장건은 그런 양굉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 뒷덜미를 잡아 그의 소형 천막 쪽으로 던져주었다. 툭툭 손을 털고 있으려니 지금까지 그와 양굉을 지켜보던 두 원주민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 옆에는 어디서 얻어온 것인지 이런저런 먹을거리가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장건과 양굉의 대련을 무슨 공연 구경하듯 한 것이다.
“끝났어요?”
“오늘은.”
비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걸 또 해요?”
“몸 안에 길을 만들어 두었으니 형을 익히면 자연스레 그 길을 쓸 수 있을 것이오. 빼던 것치고는 기본기가 나쁘지 않아서 오늘 같은 일을 또 할 필요는 없겠지.”
“그런가요?”
비랑은 생글생글 웃으며 장건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당신이 이야기하는 것이니 듣기 좋다는 듯했다. 장건은 살짝 웃었다.
“어쨌든 계속 굴려야 한다는 말이오.”
양굉은 자신의 소형 천막에 장건이 던져준 그대로 상체만 들어가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는 움찔 몸을 떨며 슬금슬금 기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비랑과 적풍이 그걸 보고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쉬고 있으시오.”
“응? 또 어디 가나?”
양굉을 천막 안에 던져준 장건은 연초를 문 채 몸을 돌렸다. 그러자 적풍이 그의 행선지를 물었다.
“잠깐 만나고 올 사람이 있소.”
장건은 그렇게만 말하고 터벅터벅 외랑대 주둔 구역을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적풍은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비랑은 조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양굉의 수련이 끝났으니 이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적풍이 그런 조카를 위로했다.
“이제 계속 붙어서 볼 텐데 뭘 걱정하는 게냐?”
“···계속 붙어서 볼 사람이 저뿐만 아니니까 그렇죠.”
“아하.”
조카의 대꾸에 유설을 떠올린 적풍은 뭐라 위로를 할까 하다가, 그냥 별말 없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어쨌든 그는 조카 편이었다.
* * *
외랑대 구역을 벗어난 장건은 긴 연초 연기를 꼬리처럼 늘어뜨리며 황군 쪽으로 움직였다. 군영을 물들이던 붉은 노을은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숨어버리며 이제 그 부근 하늘과 구름만 옅게 덧칠하고 있었고, 그 아래 지상은 묘하게 어둑한 푸르름으로 그늘져 있었다.
여기저기 크고 작은 천막들과 모닥불 앞에서 늘어져 쉬고 있던 황군들은 무림맹 쪽에서 다가오는 조그만 불씨에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그 장본인이 장건임을 확인하고는 다시 축 늘어졌다. 경비를 선 인원들도 확인을 위해 다가왔다가 장건임을 보고는 눈인사만 하고 몸을 돌렸다.
장건은 문득 제운성이 말했던 소문이 그냥 나진 않았겠구나 싶었다. 어쨌든 그는 정말 낭인 부대 소속이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게 황군의 존중을 받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진짜 무림맹과 황군의 중재자 역할을 할 생각은 없었다. 대충 봐도 그런 자리는 머리가 깨져나갈 자리였다. 장건은 그런 피곤한 일에 힘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장건은 반쯤은 무관심에 가까운 황군의 시선들을 지나 어느 마차에 가까워졌다. 그 마차 앞에는 모닥불이 하나 피워져 있었고, 그 자리엔 두 노인이 마주 앉아서 뭔가를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두 노인은 모닥불을 조명 삼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큼. 한 수만 물러주게.”
“허허. 바둑에 무르기가 어딨소. 그쪽에선 그런 식으로 두나 보오?”
“나도 아까 한 수 봐주지 않았나. 좋게좋게 넘어가세.”
“어허. 그건 봐준 거지 무른 게 아니잖소. 돌을 둔 것과 아예 안 둔 건 다른 거지.”
“그게 그거지 무슨? 그렇게 빡빡하게 굴 건가?”
“승부의 세계는 본래 냉혹한 법. 아, 자네 왔나?”
이젠 시골 촌부처럼 보이는 남궁천이 다가온 장건을 발견하고는 반색했다. 하지만 순우현은 장건이 오거나 말거나 말을 이었다.
“아니! 자네 바둑 이딴 식으로 둘 건가?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허허, 순우 선생. 그래봐야 이 판을 내가 이겼다는 건 변하지 않소. 억울하면 봐주지 말았어야지.”
순우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 이래서 마궁의 종자들은···”
“듣는 종자 기분이 좋지 않구려. 슬슬 물러줄까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뻣뻣해지던 순우현의 표정이 이내 부드러워졌다.
“···이제 갈 날 며칠 안 남은 노인네끼리 뭘 이러쿵저러쿵 싸우겠나. 종자라 한 건 미안하네··· 사과도 했으니 한 수 물러주겠나?
“허허. 그럴까요?”
바둑판을 두고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두 노인의 모습에 장건은 턱을 긁적거렸다. 가장 서로를 부정해야 할 위치의 두 사람이 생각보다 사이가 좋아 보였다. 그때 허허 웃던 남궁천이 장건을 보며 말했다.
“자네 피는 걸 보니 나도 입이 심심하군.”
장건은 말없이 새 연초 하나를 말아 불까지 붙여서 그에게 내밀었다. 남궁천은 조금 어설픈 손짓으로 그걸 받아들어선 깊게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곧 폐를 토할 것처럼 쿨룩거렸다.
하지만 장건이나 순우현이나 그를 부축하진 않았다. 한참 기침하던 남궁천은 숨을 헐떡거리면서 연초를 모닥불 속으로 던져버렸다.
“···이걸 뭔 맛으로 피우나?”
장건은 옅게 웃으며 꽁지만 남은 연초를 남궁천이 그랬던 것처럼 모닥불 속으로 던졌다.
“바둑판은 어디서 났소?”
“어디서 나긴. 옆에 잠깐 가서 사 온 게지.”
남궁천이 한 수를 물러주며 고민에 빠져든 순우현이 바둑판에서 눈도 떼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바둑판을 노려보는 그 눈이 거의 사냥감을 노려보는 맹수 같았다. 그런 순우현과 달리 장건을 바라보던 남궁천이 말을 이었다.
“우리 둘이 어울리는 게 신기한가?”
“솔직히 그렇소.”
“허허. 깊이 생각할 게 뭐 있나. 내가 곧 죽을 사람이라고 막 대하는 거지. 방금 나보고 종자니 뭐니 하는 거 들었나? 내가 이렇게 막말을 들어가며 구차한 생을 이어가고 있네.”
그건 보통 노인이 이제 죽어야지-하며 불평하는 것과 비슷했다. 말과는 달리 진짜 구차해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남궁천은 이내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자네 바둑 좀 두나?”
장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아쉽군. 아무래도 훈수 둬주는 사람이 있는 게 더 재밌는데. 제갈가 사람들이 특히 그러는 걸 좋아하는데 말이야, 직접 두지는 않고 어디 바둑판이 열렸다 하면 술동이를 들고 찾아와서는···”
그때 바둑판을 노려보던 순우현이 거침없는 손길로 검은 돌 하나를 두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편안하던 남궁천의 안색은 그 돌의 위치를 보고는 스르륵 굳어버렸다. 반대로 순우현의 표정이 펴진 것은 당연했다.
“허허허. 자네 차례네, 남궁 종자.”
“흐으음···”
두 사람은 그 후에도 돌 하나를 둘 때마다 한 수를 무르니 어쩌니 하며 티격태격했다. 남궁천의 상태를 보러 왔던 장건은 하늘의 노을이 사라지는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말없이 돌아섰다.
그가 그렇게 어둑한 그늘 사이로 멀어지는 동안에도 순우현과 남궁천은 나이에 맞지 않게 시답잖은 싸움을 이어갔다. 그 모닥불 앞에는 두 노인뿐이었기에 뭐라 탓할 사람 하나 없었다.
* * *
다음날은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본격적인 행군을 시작하기에 앞서 황군과 무림맹 무사들 모두 각자의 짐과 보급품을 점검하고 어제까지 쓰던 군영을 정리했다.
황군은 이제 뒤에서 따라오던 보급 마차 대열을 기다리지 않고 그들이 이동할 수 있는 최고 속도로 이동할 계획이었는데, 지난 이틀간 동부 원주민들의 정보를 취합해 나온 바에 따라 황군은 적어도 열흘 후 마궁의 앞마당에 도착할 작정이었다.
머릿속에 대충 그 거리를 그려본 장건은 헛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그 정도면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무리 이동할 거리 대부분이 평야라고는 하지만 개인의 무구와 식량 등을 잔뜩 짊어진 보병들이 그렇게 이동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어쨌든 출발 전 장건도 짐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외랑대 쪽으로 열댓 명의 원주민들이 말을 타고 찾아왔다. 부족 연합으로 돌아갔던 대전사 미쳐 날뛰는 말이 전사들을 이끌고 돌아온 것이다.
노인이라 긴 여정을 나설 수 없었던 흐르는 뼈는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왔다.
“사람들을 잘 부탁한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대전사. 대전사야말로 몸조심해야 하오. 위험하면 장건 옆으로 도망치시고요.”
대전사는 으하하 웃고는 말을 달려 나갔다. 그 뒤로 고르고 고른 전사들이 따라 달렸다. 흐르는 뼈는 정령이자 대전사인 그의 뒷모습을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건이 그와 눈을 마주치고는 삿갓을 잡고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흐르는 뼈는 말없이 마주 고개를 숙였다.
흐르는 뼈를 뒤로한 장건은 조조를 달려 대열에 따라붙었다.
피곤함으로 해쓱한 얼굴의 양굉과 익숙해진 외랑대 무사들, 방금 합류한 대전사와 원주민 전사들,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모습에 약간 긴장한 듯한 비랑과 적풍 등이 장건의 눈에 담겼다.
조금 고개를 돌려 멀리 보면 무림맹의 전투 부대들이 나름의 규율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무림맹주와 원로원이 있었다. 한쪽에서 거의 따로 움직이는 제가의 세력도 보였다.
모두 말을 탄 무림맹과 달리 황군은 거의 대부분 자기 발로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복장과 움직임은 통일성이 넘쳐서 우르르 움직이는 무림맹과는 상당히 비교되었다. 저들의 선두에는 유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동을 시작해 고원성에서 조금 멀어진 순간, 황군의 선두에서 시작된 명령이 평원에 울려 퍼졌다.
“전군-! 속보速步-!”
“속보-!”
“전군 속보-!”
쩌렁쩌렁 울리는 지휘관들의 외침 이후 황군의 속도가 빨라졌다. 기합이나 함성도 없이 모든 황군은 묵묵히 뜀박질을 시작했다. 종국에는 그 속도가 말이 걷는 속도로는 따라잡을 수 없어서 무림맹도 가볍게 달려야 했다.
그리고 장건은 정찰대 임무에 따라 길을 앞장서는 원주민 전사들과 함께 그 모든 행렬보다 먼저 앞서 나갔다. 그의 앞으로는 저 멀리 지평선까지 완만한 구릉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장건과 조조는 그 끝없는 평원으로 달려 나갔다.
그 뒤로 동진군 수천 명이 따라 달렸다.
* * *
“그들이 출발했습니다.”
시커멓고 치렁치렁한 옷에 짐승의 이빨이나 깃털을 달아놓은 남자가 흙바닥에 놓아둔 물그릇에서 고개를 들며 그렇게 말했다. 그는 사공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한 실력의 술법사였다.
그리고 그의 보고를 들은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으로 시선을 주었다.
“으허허허! 이제 시작이군! 자-! 전-군-! 이동한다아-!”
중년인의 시선을 받은 큰 덩치에 산적 수염을 한 남자가 본인의 고삐를 옆으로 획 당기며 외쳤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마른하늘에서 천둥이 울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 그 천둥에 화답하듯 마인들의 외침 또한 평원에 울려 퍼졌다. 그건 지옥에서 올라온 군세가 함성을 내지르는 듯했다.
평원에 넓게 퍼져있던 마궁 오대 세가의 군단은 그렇게 짐승들처럼 고함을 내지르고 본인들의 탑승물을 출발시켰다. 그 탑승물들은 지난 백 년간 마궁의 입맛에 맞게 교배되고, 마공과 사악한 술법으로 개량된 존재들이었기에 본인들의 친척들과는 달리 큰 소음을 듣고도 놀라기는커녕 도리어 흥분해서 길게 울부짖었다. 무우우-하는 울음소리가 평원을 가득 메웠다.
그렇게 산만 한 덩치의 검은 들소 이천여 마리가 서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