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96)
196화
* * *
동부의 평원은 사람의 원근 감각을 어지럽혔다.
멀리 보이는 지평선과 하늘의 경계선은 뚜렷했다. 그러나 그 지평선까지 뻗어있는 초원은 자신의 몸을 모두 비슷한 색으로 덧칠한 덕분에 하나의 큼직한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 안에 담겨 있을 은근한 언덕과 불쑥 패인 구덩이들은 덧칠된 색깔 속에 묻혀서 가까이 다가가 보기 전에는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
그 풍경은 마치 파란 윗입술과 누르스름한 아랫입술을 가진 거인이 그 입을 앙다물고 울퉁불퉁 우물거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적풍이 외쳤다.
“말이 지쳤소! 잠깐 쉽시다!”
장건은 그 외침에 조조의 고삐를 툭툭 당겼다. 털털 뛰어가던 녀석은 그 손짓에 천천히 멈추더니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달려온 다른 정찰대원의 말들이 땀을 줄줄 흘리면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그걸 본 조조는 머리를 살살 흔들며 푸르륵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이 마치 요즘 젊은것들은-하며 한심해하는 늙은이 같았다.
“어이구. 거참 잘났다.”
그 모습을 본 장건이 비꼬기 겸 핀잔을 놓았으나 조조는 자신이 잘난 걸 여태 몰랐냐는 듯 뻔뻔하게 고개를 높이 들며 콧김을 내뿜었다. 녀석이 아예 그렇게 철판을 깔자 장건도 뭐라 더 구박을 놓기보다는 그냥 툴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 보면 둘이 그냥 대화를 하는 것 같소. 고 녀석이 말인지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된다니까.”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양굉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의 눈은 마치 장건과 조조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듯 초롱초롱 반짝거렸다. 장건은 그가 왜 갑자기 호들갑을 떠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가끔이 아니지 않나요? 조조는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본인 의사 표현을 할 수도 있으니 그와의 의사소통은 충분히 대화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요.”
대답은 엉뚱하게 옆에서 나왔다. 두 사람 가까이 붙어있던 비랑이었다.
“···그게 신기하다는 거지! 어떻게 말이 사람이랑 말을 하나? 그쯤 되면 영물 아닌가?”
비랑은 별생각 없이 입을 열었지만 양굉은 얼른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다.
“양굉은 대화 못 하나요?”
“엉? 나? 아니 못 하는 게 당연··· 아니 대화를 못 한다고 하면 좀 이상하지. 정확히는 말이랑 말이 안 통하는 게 당연한 거지. 말이랑 말이 통하면 그건 말의 말을 이해한다는 거니까 말의 말을··· 말··· 말을 말이, 그러니까 말과 말이··· 아니 시발···”
양굉이 혼자 말을 하다 꼬이자 비랑은 조금 안쓰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적당히 대화를 맞춰주려고 해도 혼자 말아먹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동시에 양굉의 떠듬거림을 막는 장건의 말이 있었다.
“지랄 말고 준비해라.”
“···알았소.”
정찰대는 동진군 본대보다 훨씬 앞서 나가야 했다. 본대의 이동속도가 엄청나다는 것과 이 지역의 지형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 동진군은 정찰부대를 여럿 활용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원주민 전사들을 길잡이로 두고 무림맹이나 황군 무사들이 그를 보조하거나 이 지역의 정확한 지도를 만드는 식이었다.
장건의 정찰대는 그중에서도 제일 최선두에서 앞장서 달리는 부대였다. 물론 부대라고 해봐야 겨우 여덟 명이 전부였다. 장건과 양굉, 적풍과 비랑, 대전사 미쳐 날뛰는 말과 지난번 합류한 전사 강물 바위, 그리고 무림맹의 무사와 황군의 인원이 하나씩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무림맹과 황군의 인원도 장건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오늘도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거부터 시작하는 거요?”
“넌 하체가 너무 부실해. 그래서 장가는 가겠냐?”
자세를 잡아가던 양굉이 입술을 길게 늘이며 장건을 바라보았다. 차마 인상을 쓰거나 노려보진 못했다.
양굉이 이쪽 정찰대에 포함된 것은 장건 때문이었다. 고원성에서부터 시작된 양굉의 삼매진화 수련은 이렇게 정찰대가 잠시 휴식하거나 본대로 복귀했을 때도 이어졌다. 양굉은 대체 손가락에서 불 피우는 것과 이 수련이 무슨 상관이냐고 따져 물었으나 그때마다 돌아온 것은 장건의 손바닥이었고, 양굉은 뒤통수를 부여잡으며 순순히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처음 시작할 때처럼 주야장천 장건의 손가락에 푹푹 찔리는 일은 더 없었다. 양굉은 이제 장건의 시범에 따라 어떤 동작들을 펼쳐야 했다. 대부분 기초 체력을 키우는 운동들이었다.
“시작해.”
다른 정찰대 사람들이 한쪽에 모여 앉아서 쉬는 동안 양굉은 장건의 감시 아래 앉았다 일어나기나 팔굽혀펴기 같은 동작을 이어나갔다. 장건의 감시 때문에 대충하는 동작은 없었지만, 표정은 푹푹 썩어가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던 무림맹 무사, 산호가 불쑥 말했다.
“거참. 장 형에게 지도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황금이니 뭐니 바리바리 싸 들고 올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저딴 태도라니.”
“하하하! 뭐, 아무리 귀중한 기회라고 해도 본인이 싫으면 그만 아닌가? 그리고 자네도 지금 가서 지도해달라 하지 않잖아?”
“그렇긴 하죠. 아무래도 제가 저런 기초를 수련할 시기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난 터라.”
적풍이 산호와 대화하며 말에서 풀어낸 안장을 턱 내려놓았다. 말이 조금이라도 편히 쉴 수 있도록 그리 한 것이다. 그는 이어서 어깨에 걸쳐두었던 물주머니를 들어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스윽 입가를 닦았다. 이후 물주머니 입구를 닫으려던 그는 문득 시선이 느끼고 산호를 바라보았다. 산호는 말없이 그 물주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풍은 바로 물주머니를 산호에게 던져주었다. 그렇게 물주머니를 받은 산호는 적풍이 그랬던 것처럼 벌컥벌컥 물을 마시고 끅-하는 짧은 트림까지 토했다. 그 소리에 원주민 전사들은 으하하 웃었고, 산호 본인도 실실 쪼갰다.
사실 그들 정찰대는 의사소통이 원활하진 않았다. 미쳐 날뛰는 말이 중원어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있었고, 중원어를 아는 적풍이나 비랑 또한 자기들끼리 대화할 적에는 그냥 본인들 말을 썼다. 게다가 이제 만난 지 겨우 며칠 지났을 뿐이라 서로의 언어가 아직 낯설었다.
하지만 그들은 전사들이 대부분 그렇듯 종일 힘들게 달리다가 가끔 멈춰 시답잖은 농담, 혹은 장난을 치면서 친해져 갔다.
물론 그렇게 친해지지 못한 인물도 있었다.
“그, 임 군사도 편히 좀 쉬시죠?”
원주민 전사들과 실실 쪼개던 산호는 슥슥 코를 만지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행군사마 임사영이 검을 끌어안고 장건과 양굉의 수련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무림맹 측에서 나온 인물이 산호라면 그녀는 황군 측에서 나온 인물이었다.
그녀는 산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예 들은 척도 하질 않았는데, 덕분에 먼저 말을 걸었던 산호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며 멋쩍게 어깨만 으쓱거렸다. 그렇게 산호가 임사영의 무시를 뒤로하고 간식이나 먹을까 하며 짐가방을 뒤적거릴 때였다.
“기초는 언제 다져도 모자라지 않소. 오늘 흘린 땀 한 방울이 언젠가 생과 사를 가르는 아주 작은 차이가 될 테니 말이오.”
임사영은 장건과 양굉의 수련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덕분에 산호는 가방을 뒤지던 손을 멈추고 그녀와 주변 다른 전사들의 눈치를 보았다.
“배우고 익히는 자의 태도를 놀리기 전에 지금 본인이 어디 어느 자리에 왜 멈춰 있는지부터 알아야 할 것이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장건 쪽으로 다가가 뭐라 잠시 말을 걸더니 곧 조금 옆으로 떨어져서 본인도 수련을 시작했다. 대단한 검법을 수련하는 것도 아니었다. 양굉이 하는 것처럼 기초 체력 훈련을 하고 있었다.
산호는 가방을 뒤적거리던 것도 잊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저 친구도 악의가 있어서 한 말은 아닐 거야. 너무 마음 상하지 말게.”
멍한 산호를 보며 적풍이 얼른 그를 위로했다. 안 그래도 지난 며칠간 정찰을 하며 아무 대화가 없던 둘인데, 괜히 이렇게 서로 감정이 상하면 좋을 것 없었다. 적풍은 원주민 전사였지만 중원인들의 생활을 잘 알아서 지금 동진군 안에 황군과 무림맹이 은근히 보이지 않는 눈치 싸움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들 정찰대가 지금 동진군의 첨단을 맡은 상황에서 소속원들끼리의 불화는 아주 좋지 못한 징조였다. 적풍은 적도 아니고 아군의 내분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의 기우인 모양이었다.
“···하아.”
“사실 전사라면 체력 기르기에 게으르면 안 되는··· 자네 뭐하나?”
“···임 군사, 너무 예쁘지 않나요?”
“뭐?”
적풍의 표정이 멍해지는 동안 산호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반쯤 풀린 눈으로 임사영을 바라보았다. 흐물흐물해진 입가와 은근히 반짝이는 눈빛에서 그의 마음이 드러나는 듯했다. 그 눈빛과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임사영은 이쪽엔 신경도 쓰지 않고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 산호의 얼굴을 본 적풍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곧 못 봐주겠다는 듯 눈가를 감싸 쥐며 계곡 부족의 언어로 중얼거렸다.
“하여간 중원인들은··· 아니지, 그냥 이 친구가 덜떨어진 건가?”
그 말을 들은 원주민 전사들은 가볍게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산호의 눈은 임사영을 떠나지 않았다.
“헥, 헤엑··· 저기, 장 형.”
“뭐.”
한참 시키는 대로 수련을 하던 양굉이 무릎을 붙잡고 엉거주춤 서서 말했다.
“이, 이거, 이렇게 수련하는 건 좋다 이거요. 그런데··· 이렇게 엉뚱한 곳에 힘 빼다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 힘이 빠지면 안 되지 않소?”
“중요한 순간?”
“그··· 우린 정찰대지 않소? 그럼 적을 만날 수도 있는 거고··· 혹 함정에 걸릴 수도 있고···”
“위험해지면 말이 달리지 네가 달리냐?”
양굉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안장에 앉아 있는 것도 힘이 들어가는데···”
“죽기 싫으면 매달려 있어야지 별수 있나.”
“그, 그런···”
장건은 낙심한 양굉을 보며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이제 다음.”
그 지엄한 명령에 따라 양굉은 푹푹 썩어가는 표정 그대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건 지금까지의 기초 체력 수련과는 달랐다. 두 손바닥을 펼치고 느릿하게 움직이며 어떤 자세들을 잡아가는 동작이었는데, 어딘가 오묘하고 복잡해 보이면서도 양굉의 손발이 워낙 어설픈지라 못난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이었다.
옆에서 호흡을 가다듬던 임사영이 그걸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황군 무공을 익힌 그녀에겐 저런 동작의 무공 수련이 참 쓸데없는 훈련으로 보였다. 입군 전에 수련한 무공이나 입군 후 수련한 무공이나 그녀가 익힌 무공은 모두 빠르고 강한 동작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황군 무공에서도 균형감각과 신체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느리게 수련하는 과정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그 과정들 중에도 저렇게 춤을 추는 듯한 동작을 넣진 않았다.
하지만 임사영은 거기에 뭐라 시비를 걸지 못했다. 일단 장건은 뭘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대학사를 무릎 꿇린 무인이었다. 저 춤에 뭔가 임사영이 알지 못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장건은 저렇게 양굉을 수련시키며 임사영이나 산호, 원주민들에게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어차피 못 알아볼 테니 훔쳐볼 테면 얼마든지 보라는 것인지, 장건은 양굉에게 시범을 보일 때나 자세를 잡아 줄 때나 뭔가 숨기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황군 무공의 유출에 경기가 나도록 교육을 받은 임사영 입장에선 그런 담담한 모습이 뭔가 알 수 없는 감회를 느끼게 했다.
그때 양굉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그는 썩어가던 표정을 지우고 뭔가 심각한 얼굴이 되어서는 먼 곳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임사영은 순간 뭔가 싶어서 그가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까먹었냐.”
장건의 덤덤한 질문을 듣고 나서야 임사영도 진실을 알았다. 그냥 다음 동작을 까먹은 양굉이 뻘짓을 한 것이다.
양굉은 비굴한 미소를 지어가며 식은땀을 흘렸다.
“···헤, 헤헤. 뭐, 뭐더라. 바, 발차기였나?”
이후 양굉은 또다시 뒤통수를 맞아가며 장건의 시범을 보고 새로 동작을 외웠다. 그렇게 맞아가며 배운 덕분인지 휴식 시간이 끝날 때쯤 연결되는 하나의 동작을 완전히 외울 수 있었다.
물론 그 성과에도 장건은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서하에게 태극권을 가르칠 적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항룡장이 동작과 동작의 연결로 자연스럽게 내공의 회전과 마찰을 일으키는 방식이라는 점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것은 맞았다. 하지만 이미 지난날 타혈打穴을 받으며 몸 안에 인위적으로 항룡장의 길을 만들어 둔 상황에선 한시라도 빨리 스스로 그 길을 열어야만 했다. 안 그러면 얼마 뒤 다시 타혈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휴식을 끝낸 정찰대는 다시 말안장을 얹고 짐을 정리했다. 휴식 시간 내내 수련을 한 양굉은 반쯤 죽어가는 표정이었고, 다른 이들은 약간이나마 피로를 풀고 힘을 내는 얼굴이었다.
산호가 지도를 펼치고 말했다.
“음. 저쪽으로 가면 강줄기가 나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가서 확인하고 지도를 수정하죠. 그 이후 돌아가서 본대와 합류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그 지도가 맞는지 모르겠군. 이미 여러 번 틀리지 않았나?”
“어쩔 수 없죠. 제대로 측량한 것도 아니고 그냥 사람들 말을 모아서 만든 지도인데.”
대강 의견을 나눈 정찰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대략적인 방향을 잡았다. 그 과정에서 장건은 아무 의견을 내지 않았는데, 사실 휴식 중 양굉을 괴롭힐 때 말고 정찰대 임무 중 장건은 거의 있는 듯 없는 듯했다. 사람들과의 대화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난 며칠간 대부분의 의견 조정은 적풍과 산호가 맡았다. 두 사람 모두 모난 이는 아니어서 특별히 문제가 있진 않았다.
이번에도 그렇게 의견을 나누고 가까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강줄기를 향해 이동하려던 참이었다. 출발하려던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장건이 뒤쪽에서 멈춰서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비랑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장건?”
장건은 조조 위에 앉아 묵묵히 저 동쪽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도 그를 따라 동쪽을 향했다. 지평선이랄지, 언덕이랄지 모를 완만한 곡선 위에 시커먼 덩어리가 불쑥 올라와 있었다.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저게 뭐죠?”
비랑이 눈살을 좁히며 그 덩어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는 맑던 하늘이 어느샌가 우중충해지면서 회색빛 구름이 하늘을 가린 덕분에 멀리 떨어진 그 시커먼 형상을 제대로 알아보긴 쉽지 않았다.
그때 미쳐 날뛰는 말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들소다.”
“네? 들소요? 하지만···”
비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아는 들소도 분명 대단히 크고 강인한 동물이었지만, 저 언덕 위에 걸친 검은 그림자는 보통 들소보다 훨씬 컸다. 게다가 자세히 보면 그 시커먼 그림자 위에는 역시 시커먼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올라타 있었다. 그 사람이 창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알아볼 수 있었다.
“들소는 사람을 태우지 않는데···”
그때 비랑은 물론이고 정찰대 모두의 눈이 커졌다. 언덕 위에 홀로 외로이 올라와 있던 검은 덩어리 옆으로 새로운 그림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완만하게 그려져 있던 구릉선 위로 아주 검고 두터운 붓선이 덧칠되었다.
다음 순간 제일 먼저 올라와 있던 인물이 창을 들어 이쪽을 가리켰다. 정찰대 사람들 모두 그 창날이 이쪽을 가리켰음을 알았다. 그들이 곧 우르르 달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달리는 존재는 분명 신대륙 들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본래보다 훨씬 큰 덩치와 몇 배는 흉포해 보인다는 점은 달랐으나, 분명 들소의 형상이었다.
“마인들이오.”
사람들은 장건의 말을 듣고서야 이 먼 거리에서도 들소 위에 탄 자들의 눈을 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눈들은 시뻘겋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검은 들소와 마인들이 구릉 언저리를 시커멓게 물들이며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