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01)
201화
* * *
“다 같은 생각인가요? 정말 나만 그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고요!”
유설이 탁자를 강하게 내려치며 그렇게 외쳤다. 천막 안에 쿵-하고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 안에 서 있는 황군의 장수들은 모두 입을 다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본 유설의 눈썹 끝이 위로 치솟아 역팔자를 그렸다. 보기 드문 그녀의 분노였다.
“···죄다 그렇게 입을 다무시겠다? 좋아. 그럼 어디 누구 하나 분질러져 봐야 주둥이를-”
“유설 장군.”
지금까지 뒤쪽에 앉아 조용히 회의를 지켜보던 순우현이었다. 유설은 입술을 꾹 다문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순우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가기병이라 불리는 마가魔家의 정예가 훌쩍 가까이 다가왔소, 장군. 장건 그 친구 하나만을 위해 병력을 움직일 수는 없다는 말이외다. 동진군의 목표는 마궁의 토벌이지 않소?”
“···하지만, 장 무사는 마궁과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순우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많은 공을 세운 것은 맞소. 이 토벌이 끝나고 가장 큰 보상을 받을 자가 바로 장건 그 친구지. 하지만 지금 우리는 마공을 익힌 옛 마가의 군세를 앞두고 있소. 그냥 말도 아니고 거대한 들소를 탄 마인들의 군세.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장군? 그 친구가 큰 공을 세운 건 맞지만, 결과적으로 이 토벌이 실패해 버리면 그런 공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외다.”
유설은 그 말에 더 굳게 입술을 다물며 순우현을 노려보았다.
장건과 움직이던 정찰대 무사들이 적의 출현 소식을 가져온 것이 조금 전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고를 받은 유설은 장건이 뒤에 남아서 마궁의 주의를 끌기로 했다는 이야기에 당장 그를 구출하기 위해서 동진군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황군 장수들은 장건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인다는 말에 그 판단을 다시 생각해주길 청했다. 이유는 조금 전 순우현이 말한 그대로였다. 일개 무림인, 정확히는 황군 소속도 아니고 무림맹 소속의 낭인을 위해 병력을 움직여 마궁의 기병대에게 빈틈을 보일 순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동진군이 진을 치고 있는 장소는 다른 주변보다 야트막하게나마 언덕진 장소였고, 그것은 어쨌거나 기병 돌진을 해올 마궁을 상대로 상당한 이점을 제공해줄 터였다. 그런 이점을 포기하고 상대 기병대가 큰 힘을 발휘할 지형으로 제 발로 나아간다는 것은 깊게 병법을 익히지 않아도 대단한 실책임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유설은 동진군의 총지휘관으로서 자기 뜻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다. 지금 천막 안에 들어와 있는 황군 장수들이 괜히 침묵으로 자신들의 뜻을 주장하는 게 아니었다. 유설이 정말 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따라야 했다. 그게 황군의 규율이었다.
하지만 유설은 그런 난폭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경우 장수들의 의견을 종합해 그중 제일 타당한 의견을 받아들이고, 다른 장수들 또한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있도록 충분한 설득을 걸치는 사람이었다.
전날 난데없이 염호성으로 시찰을 나갔던 것처럼 뜬금없이 행동하는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황군 장수들의 군사적 식견을 믿었고, 또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 식견을 따르는 것이 맞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신대륙 주둔군의 수준이 다른 주둔군들보다 부족하다지만 그건 결국 황군의 높은 기준선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한 제국의 황군은 중원 최강의 군단이었다.
그때 순우현은 그렇게 입을 꼭 다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유설을 보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또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왜 그를 구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게요? 그 혼자서도 충분히 위기를 헤쳐나오리라는 생각은 안 드시오?”
“···예?”
유설은 찌푸리던 인상을 펴고 멍한 표정을 짓다가 얼른 대꾸했다.
“아니, 상대는 들소를 탄 마인들 백 명이에요. 평범한 양민이 백 명 우르르 몰려와도 위협적인데, 그들은 마궁의 정예라고요. 장 무사가 아무리 고수라지만···”
“아무래도 장군께서는 그의 실력을 정확히 모르시는 모양이구려. 들개 따위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숲속에선 결국 호랑이에게 사냥당할 수밖에 없소이다.”
순우현의 비유에 유설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멋진 비유를 쓰고 싶은 건 알겠는데요, 할아범. 장 무사가 호랑이일 순 있지만 이 주변은 숲이 아니라 온통 광야고, 마궁의 기병대는 겨우 들개 정도가 아닐 텐데요. 남궁천의 정보를 할아범도 들었잖아요? 그들은 마궁의 정예에요.”
“이 광야가 장건 그 친구의 숲일 것이오. 몇 년 동안이나 신대륙을 떠돌며 살았다 하니. 그리고 그 일백 기의 기병대를 굳이 다 상대할 필요도 없소이다. 그저 잠시 시간을 끌고 빠져나오면 그만 아니오? 그 정도는 저 얼빠진 무림맹의 무림인들도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럼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건데요?”
순우현은 가만히 유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말했다.
“그를 믿으시오, 장군. 그는 이런 곳에서 죽을 무인이 아니외다.”
유설은 그 눈을 잠시 마주 보다가, 휙 고개를 돌려 장수들을 바라보았다. 슬그머니 굳은 자세를 풀고 있던 그들은 그 시선에 다시 꼿꼿이 서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유설은 허리에 손을 걸치고는 그 모습들을 쭉 한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병사들에게 전투를 준비시키세요. 무림맹 측에도 곧 싸움이 있을 것이라 전하고요. 전투는 이곳에서 치릅니다. 전향자의 정보에 따르면 적은 최소 천오백에서 최대 이천의 들소 기병대예요. 병사들에게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주지시키고 적을 마주했을 때 당황하지 않도록 하세요.”
“명을 받듭니다!”
유설의 말에 천막 안 장수들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설은 그런 장수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전투가 마무리된 후에도 장 무사의 소식이 없으면 그땐 반드시 그를 찾아 움직이겠어요. 설마 이것마저 반대하진 않겠죠?”
“장군의 뜻대로 하소서!”
“···이젠 대답 잘하는군요.”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눈가를 감싸 쥐고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장수들은 그 모습을 보고 그저 송구스럽다는 듯 눈을 내리깔 뿐이었다.
그때 황군의 병사 하나가 천막 입구를 걷어내며 다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곧장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보고를 올렸다.
“이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검은 들소를 탄 기병대로 확인됩니다! 그 수는 이천여 기!”
“벌써? 설마 이대로 우릴 들이박겠다는 건가?”
그 보고를 받은 유설은 성큼성큼 걸어서 천막 밖으로 걸어 나갔다. 천막 입구를 걷어내고 나온 그녀의 눈에 지평선 근처에 걸쳐있는 태양과 석양빛에 붉게 물들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군영이 들어왔다. 그녀 뒤로 순우현이 따라 나와 말했다.
“당장 전투를 준비해야 할 듯하오, 장군. 저들은 날이 어두워진다고 해서 싸움을 미룰 자들이 아니니까.”
“···어두워진 와중에도 적아를 구분할 자신이 있다는 걸까요?”
순우현은 고개를 저었다.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거겠지. 물론 정말 그럴 자신이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마공의 기괴망측함은 예상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어쨌든 이젠 싸움을 시작할 시간이오, 장군.”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그걸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자들은 또 처음 보네요. 동쪽으로 한참을 더 가야 본격적인 싸움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유설의 눈에 문득 천막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장건과 움직이던 정찰대의 원주민 전사들로 황군 장수들과의 회의를 위해 잠시 밖으로 내보낸 이들이었다. 개중에는 유설 그녀와 묘한 신경전을 벌였던 비랑도 있었다.
유설과 눈이 마주친 비랑은 무슨 말을 기대하는 것인지 두 눈을 반짝거렸다. 아마 지금 황군이 움직여 장건을 도우러 움직인다는 말을 기대한 것일 터였다.
유설은 그 눈을 피해 옆에 있는 대전사 미쳐 날뛰는 말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이제 곧 본격적인 전투가 있을 거예요. 상대 기병대의 돌격이 예상되는 싸움이니, 부족 연합의 전사들은 후방에서 대기하는 게 좋겠어요.”
“왜? 우리도 같이 싸우겠다. 큰 싸움이 있으리라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온 것이다.”
대전사의 의문에 유설은 고개를 저었다.
“황군은 오랫동안 함께 호흡을 맞춰 훈련해온 전사들이에요. 당신들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다른 전사들이 섞이면 그 호흡이 깨질 수 있다는 거죠. 어차피 최초의 돌격 이후엔 난전 비슷한 것이 벌어질 테니, 싸움을 피할 수는 없어요.”
그녀의 설명에 대전사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동안 갑자기 비랑이 끼어들었다.
“장건은요? 그를 구하기 위한 전사들은요?”
“···난 그를 믿어요.”
짤막한 대답에 잠시 두 눈을 깜빡거리던 비랑의 얼굴이 곧 해쓱해졌다.
“그게··· 아직, 아직 제 중원어가 서툴러서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좀 더 쉽게 말해주겠어요?”
유설은 한손을 허리에 얹어두고 바닥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장 무사를 지원하는 병력은 없어요. 당장 마궁의 군세가 가까워진 마당에 병력을 뺄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난 그가 적들을 따돌리고 본대로 복귀하고 있다고···”
그때 비랑이 뭐라 못 알아들을 소리를 외쳤다. 중원의 말이 아니라 원주민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걸 말할 적 표정과 어투로 보아 아무리 좋게 봐줘도 유설에게 욕을 하고 있다는 건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 주변에 있던 황군들의 표정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토벌대의 총지휘관이자 공주인 유설이 한낱 양민, 그것도 원주민 따위에게 욕을 먹은 것이다.
유설을 따라 천막 밖으로 나왔던 장수 하나가 굳은 표정으로 말도 없이 허리의 검을 잡았다. 울긋불긋 일어난 손등의 혈관으로 보아 당장이라도 검이 뽑혀 나올 기세였다.
그러나 그 기세는 유설이 한 손을 살짝 들어 보인 것만으로 간단히 중단되었다.
“화가 나는 건 이해해요. 하지만 그의 무공과 그의 친구 조조를 알면서도 그가 무사히 빠져나오리라는 건 믿을 수 없나요?”
원주민 욕을 내뱉던 비랑은 입술을 꾹 다물고 유설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한 유설은 조금 전 자신이 순우현을 노려볼 적에도 저랬을까 싶었다. 그렇게 한쪽은 노려보고 한쪽은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이 교환되길 잠시. 비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 혼자서라도 그를 도우러 가겠어요.”
“불허不許.”
비랑은 조금 전까지와 다르게 단호한 유설의 말을 듣고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비랑을 보며 유설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군영 밖으로 움직이는 건 아주 위험해요. 혹여나 마궁의 군세에 붙잡힐 수도 있으니까요. 장 무사를 만나지도 못하고 적들의 인질이 될 수 있다고요. 그렇게 장 무사가 돌아와 그쪽을 찾는데 없다면? 그럼 내가 그를 어떻게 보겠어요?”
그 설명을 듣고 비랑이 머뭇거리는데, 그 옆에 있던 적풍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만하거라. 저 여인의 말이 옳다. 너는 장건 그 친구를 믿지 못하는 거냐?”
“하지만···”
“내가 본 그는 돌아올 자신이 있어 보였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비랑은 그런 적풍의 설득에 그와 유설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바닥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설은 그녀와 원주민 전사들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곧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움직이세요! 황실의 반역자들이 코앞까지 들이닥쳤으니까!”
“예! 명을 받듭니다!”
황군의 수뇌부들은 그렇게 다시 한번 한목소리로 대답하며 군례를 하고는 우르르 군영으로 흩어졌다. 그들이 움직이자 저녁을 준비하던 병사들 모두 잽싸게 싸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전투준비! 전투준비-!”
“전투준비-! 적들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유설은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군영을 쭉 한번 둘러본 후, 마궁의 마인들이 몰려오고 있을 동쪽을 바라보고 섰다. 원주민 전사들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비랑은 복잡한 눈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전사들의 뒤를 따랐다.
유설의 뒷모습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자가 한명 더 있었다. 태학사 순우현은 그렇게 공주 유설의 장군으로서의 역량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끝까지 탄 연초가 입술에 닿았다. 화들짝 놀란 장건은 자기도 모르게 연초를 뱉어버리며 정신을 차렸다.
“이런.”
마지막으로 멀쩡히 남았던 종이에 연초를 말고 입에 물었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에는 반쯤 의식이 없었다. 아무래도 상처를 입은 채 무리하게 검기성강을 이뤘던 것이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조조는 느릿한 걸음으로 터벅터벅 걷고 있었고, 장건은 그 위에서 조조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거리고 있었다.
“얼마나 온 거야?”
장건의 혼잣말에 조조는 대답이라도 하듯 푸르륵 머리를 흔들었다. 본인도 잘 모르겠다는 듯했다.
그런 녀석의 목덜미를 슬슬 긁어준 장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충 동진군 본대 쪽으로 온 것은 맞는 듯했다.
“혼자서도 길 잘 찾았네. 잘 했···”
오랜만에 조조를 칭찬해주려던 장건은 문득 귓가에 울리는 소리가 있음을 듣고 말을 멈췄다. 그리고 곧바로 조조의 허리를 툭 찼다. 녀석은 귀찮다는 듯 콧김을 내뿜으면서도 순순히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렇게 둘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올라섰고, 저 멀리 시작된 황군과 마궁의 전투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