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04)
204화
* * *
“저놈들 뭐야?”
유설은 굶주린 짐승처럼 날뛰기 시작한 마인들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맨손으로 병사들의 몸을 찢어버리는 완력도 황당했지만, 그보다 유설을 더 당황하게 한 건 이런 마궁의 전략이었다.
그녀의 상식상으로는 이렇게 포위된 상황에서는 그 포위망의 약한 부분을 찾아 송곳처럼 뚫고 나가야 했다. 애초에 전원 기병대였으니 그런 역동적인 기동을 보여주는 게 맞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병력 손실이 있겠지만 전멸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마궁은 그런 손실을 감수하고 일부를 살리기보다, 그 일부마저 포기하고 황군에게 더 큰 피해를 안겨주는 걸 선택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황군의 피해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유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소모전을 하자는 건가? 아니면 뭔가 다른 함정?”
지금 이곳에 있는 황군은 신대륙에 주둔하고 있던 황군의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만약 이 군세가 와해되면 당장 신대륙에는 일시적으로나마 한 제국의 영향력이 사라짐을 말했다. 거기에 무림맹의 주 병력 또한 함께 있으니 무림맹 질서마저 무너질 것이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장군.”
“예?”
유설은 갑자기 들려온 순우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뒤쪽에서 그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마공을 익힌 마인의 성정은 대부분 폭급하고 사나워지지. 작은 손해를 보아도 성을 내며 다음 수를 생각하기보단 차라리 판을 엎어버리기 일쑤요. 물론 온갖 기기괴괴한 마공이 많으니 그런 범주를 벗어난 마공도 있을 수 있소. 남궁천 그 종자가 익힌 마공이 그 일례지. 하지만 대부분의 마공은 상리常理를 벗어난 힘이라 그걸 익힌 사람의 마음도 뒤틀어버리기 마련이오.”
후방에서 나타난 순우현은 평소 품이 넉넉하던 소매와 발목을 끈으로 단단히 묶은 모습이었다. 그는 유설을 보며 빙긋 웃었다.
“쉽게 말해 생각 없이 일단 들이박고 마는 놈이 된다는 말이외다. 전술가보다는 본능만 남은 짐승이 되는 게지. 그러니 저들의 공격에서 어떤 전술전략을 찾기보다는 그냥 힘으로 맞부딪쳐주면 그만이오.”
그는 옆에 있던 병사에게서 슬쩍 창을 빼앗아 들더니 유설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휙 전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병사들의 어깨를 밟으며 전열로 나아간 작은 노인은 이후 곧바로 제 몸보다 몇 배는 기다란 창을 휘둘려 마인들을 썰어 버리기 시작했다.
유설은 두 눈을 꿈뻑거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옆에 있던 진하를 돌아보았다.
“할아범이 웬일이지? 뒷짐 지고 구경이나 할 줄 알았는데.”
“···글쎄요. 막상 병사들이 죽는 걸 보니 그러실 수 없으셨던 게 아닐까요?”
“그런가?”
다시 순우현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유설은 곧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고는 검을 뽑았다. 그리고 진하를 보지도 않고 물었다.
“이젠 공을 뺏으니 어쩌니 하지 않을 거지?”
“···예. 가시죠.”
유설의 질문에 진하도 자신의 검을 뽑았다. 직후 두 사람 모두 말안장에서 뛰어올라 마인들이 날뛰는 전장으로 몸을 날렸다.
* * *
“장건!”
제갈 가주가 장건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건 전장에서 애써 살려 나왔던 가문의 일원이 한순간에 죽어버렸기 때문도 있었고, 동시에 장건이 여기 있다는 것이 그를 쫓았던 모용광현과 오가기병 일백 기에게 무슨 의미인지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건은 그 부르짖음을 듣고도 뭔가 대답해줄 생각은 없는지 유령처럼 달리던 말을 계속 달리며 점점 가까워졌다. 장건과 그의 말 조조는 묵직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검은 벌판 위를 미끄러져 왔다.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뒤를 따르던 나머지 두 기수가 그렇게 외치자 제갈 가주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기수는 곧장 들소의 고삐를 장건 쪽으로 당기며 각자의 무기를 치켜들었다. 장건은 여전히 두 눈과 칼에서 시퍼런 빛을 번쩍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랴-!”
머-어-어-!
기수들이 고삐를 당기는 동시에 옆구리를 차자 들소들이 몸을 돌려 장건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장건의 좌우로 달려오며 창칼을 겨눴다. 들소들의 뿔도 어두운 와중에 하얗게 반짝이며 조조를 향하고 있었다.
“죽어라, 황제의 개!”
장건과 기수들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커다란 두 들소의 덩치 때문에 장건과 조조는 그 사이에서 으깨질 것만 같았다. 기수들도 그것을 노리는지 달리는 와중에 점점 더 자신들의 사이를 좁혔다.
그러나 그 순간, 두 기수는 장건과 그의 말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밤이 되어 어둑한 하늘과 덕분에 검게 물든 벌판 위에서 정말 유령처럼 질주해 오고 있었다.
직후 장건은 두 기수가 어찌 반응하기도 전에 그 둘 사이를 꿰뚫고 지나갔다.
네 번의 빛이 번쩍이며 잘려 나간 기수의 머리와 들소의 뿔이 벌판 위로 흩뿌려졌다. 뿔이 잘린 들소들이 길게 울며 점점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녀석들과 달리 목이 잘린 기수들은 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스르륵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렇게 잠깐 사이에 오가기병 셋을 처리한 장건은 툭툭 고삐를 당겨 조조의 속도를 늦췄다. 신호를 받은 녀석은 얼른 속도를 늦추고 숨을 헐떡거렸다. 푹푹 거친 숨이 나오는 걸 보니 녀석도 낮에 있었던 전투로 많이 지치긴 한 모양이었다. 사실 그건 장건도 마찬가지였다.
장건이 속도를 늦춘 데에는 호흡을 고르려는 것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부하들을 보낸 제갈 가주가 도망치거나 공격해오기는커녕 그 자리에 멈춰서서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서쪽 하늘을 짙푸르게 물들이던 희미한 햇빛마저 사라지자 밤하늘 위엔 지금까지 숨어있던 작은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나타난 반쪽짜리 달도 자신의 몸을 하얗게 빛내며 끝없이 어두워질 것만 같았던 하늘을 다시 가득 채웠다. 태양만큼 환한 빛은 없었으나 그 밤하늘은 저마다의 작은 별빛으로 낮보다 더 북적거렸다.
덕분에 그저 검기만 하던 벌판 위에도 달빛이 내려앉으며 낮만큼은 아니어도 풀들이 초록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구름마저 흐르며 그림자를 만들어내니 대낮에 손색이 있을지언정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는 벌판이 되었다.
장건이 그 벌판 위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으니 이쪽을 바라보던 제갈 가주가 불쑥 입을 열었다.
“광현이, 모용 가주는 어떻게 되었나?”
장건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시선 그대로 대답했다.
“죽었다.”
“···자네 손에?”
“그래.”
대답을 들은 제갈 가주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비비적거렸다.
“···장군이 둘, 가주가 하나, 오가기병대 일백, 그 외 사공을 비롯한 자잘한 인원이 수십. 이거 이 땅을 정벌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다름 아닌 자네였군. 황군이 아니라.”
“시비는 그쪽이 먼저 걸었어.”
제갈 가주는 그 대꾸에 고개를 들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크게 웃었다.
“으허허허! 그럼 자넨 그저 거기에 맞상대했을 뿐이라는 건가? 본 궁의 대계를 이렇게까지 망쳐놓고?”
사람 좋게 웃던 그는 다음 순간 갑자기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며 버럭 외쳤다.
“본 궁의 사람을 수백 명씩 죽여놓고 그게 네놈이 할 말 전부냐? 그저 우리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
장건의 시선이 그제야 제갈 가주를 향했다. 때마침 흐르던 구름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내렸다. 그 어둑함 속에서 장건의 두 눈만 시퍼렇게 빛났다.
“그래.”
굳은 눈으로 한참을 그 시선을 노려보던 제갈 가주는 어느 순간 다시 크게 웃었다.
“으허허! 이거 재야를 떠돌던 강자를 알아보지 못한 우리 잘못이 아주 크구먼! 그래, 강자라면 그래야지! 강한 힘만이 이 천하를 진정 평화롭게 할 수 있는게야! 이미 저 중원의 황제가 그걸 증명하고 있지 않나?”
장건은 그런 제갈 가주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항우를 되살린다는 건가? 천 년 중 가장 강했던 마인이라?”
“천 년? 아니! 대왕께서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없을 무적의 영웅이시다! 그분께서 돌아오시면 저기서 껄떡거리는 유가의 개들은 폭풍 앞 갈대처럼 쓰러지리라!”
짤막한 질문에도 거칠게 울부짖는 제갈 가주의 모습에 장건은 피식 웃었다.
“이상하군.”
“···뭐라?”
장건은 청룡을 손안에서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항우는 이미 천 년 전에 그 유가의 개들에게 패배했는데.”
제갈 가주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입가에 비웃음을 띠며 말문을 열었다.
“천 년 전 유방과 그의 군대는 대왕을 죽이지 못했다. 대왕의 군대가 패배한 것은 대왕께서 부족하셨던 것이 아니라 그저 그때 하늘이 대왕을 저버렸기 때문이었지. 그리고 죽음에서 되돌아오신 대왕은 이제 더는 하늘의 뜻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진정한 천하의 주인이 되실 것이다.”
장건은 고개를 살살 가로저었다.
“더 신나게 사람들을 쳐 죽이겠다는 말을 잘도 하는군.”
“네놈도 마침내 부활하실 대왕을 마주한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그러긴 힘들겠군.”
“왜?”
이번엔 장건이 되묻자 제갈 가주는 허리춤의 큰 칼을 뽑아 들었다.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이미 네놈의 몸은 한계에 다다랐다. 낮에 있었던 싸움이 참으로 처절했을 듯하군. 보지 못해서 아쉬울 정도야.”
“음.”
아무래도 부하들의 공격을 허락했던 이유가 지금 장건의 상태를 보기 위함이었던 듯했다. 그리고 그걸 확인하고 나서는 직접 그를 상대할 자신이 있어서 그 자리에 남았던 것이다.
자신을 노려보는 제갈 가주를 잠시 마주 바라보던 장건은 다시 고개를 살살 가로저으며 조조의 안장에서 내려섰다. 그를 본 제갈 가주도 옳다구나 들소의 등에서 내렸다. 저 말의 속도는 들소가 쫓아갈 수 없었다. 만약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쳐 버리면 제갈 가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제 발로 거기서 내려주니 그의 입장에서 도리어 고마움을 느낄 상황이었다.
바닥에 내려선 제갈 가주는 그 덩치가 참 장대했다. 갑옷을 입고 있어서 더욱 그런 면이 두드러지는 점도 있었으나, 어쨌든 그 덩치와 키가 겉으로만 보아도 장사壯士임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그는 지금까지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옆으로 휙 내던졌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칼과 산적처럼 덥수룩해 벌판의 바람에 흔들리는 수염이 참으로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나는 제갈가의 가주다. 오늘 여기서 네놈을 죽이고 이미 죽은 광현과 당장군, 그리고 사공과 수많은 형제자매의 넋을 위로하겠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몸 위로 거뭇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큰 칼을 든 거한이 온몸에서 패도적인 기세를 쏟아내니 그들이 말하는 항우가 지금 이 자리에 되돌아온 듯했다.
그리고 그런 기세를 마주한 장건은 별다른 저항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이따금 폭풍 앞에 흔들리는 가랑잎처럼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제갈 가주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의 몸은 한계에 이르러 있었다. 일백 명의 마인과 마가의 가주를 상대한 것은 그에게도 큰 부상을 남겼다. 장건은 아직도 단전이 찌릿찌릿하고 온몸에 힘이 없었다. 가슴의 상처는 이젠 아프지도 않았다. 조금 전 오가기병 셋을 상대한 것도 그에겐 큰 무리를 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뒤로 내빼는 제갈 가주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조조의 옆구리를 찼다. 지휘관급 인물은 잡을 수 있을 때 잡아야 하는 법이었다.
“흠!”
잠시 장건의 상태를 노려보던 제갈 가주는 곧 땅을 박차고 장건에게 달려들었다. 가공할 내력을 가진 마인답게 그가 밟은 땅이 와락 뒤집어지고 그의 몸은 포탄처럼 장건에게 날아들었다.
그렇게 허공에 쭉 일자로 그어지는 선을 그리던 제갈 가주는 장건에게 가까워진 순간 갑자기 여덟 갈래의 그림자로 나뉘기 시작했다. 전날 장건이 천기미리보라 이름 붙여주었던 제갈가의 비기 팔분미혹술이었다. 그리고 장건이 기다리던 것도 그것이었다.
제갈 가주의 보법은 이름도 모르던 그 제갈가의 무사보다 뛰어났다. 발끝을 땅에 두고 마치 나뭇가지처럼 몸을 분화시키던 그와는 달리 제갈 가주는 중심이 되는 발이 셋으로 늘어나며 스물네 개의 그림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상태에서 그의 대도가 덩치에 걸맞지 않은 속도로 장건의 몸을 노렸다. 수십 갈래의 칼날에 장건은 금방이라도 난도질당할 듯했다.
그리고 장건은 그 칼날의 폭풍 속에서 딱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읏!”
제갈 가주의 스물넷 그림자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제갈 가주는 칼을 앞으로 뻗은 채 멈춰서 굳어 있었고, 장건은 그에게 가깝게 붙어 왼손으로 가슴팍을 찌르고 있었다. 찰나의 고요가 흐르고, 다음 순간 제갈 가주의 갑옷이 투두둑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나갔다.
“···팔분··· 미혹술의··· 생문生門을 어찌···?”
“저번에 봤거든.”
제갈 가주가 허탈하게 웃었다.
“한 번 봤다고··· 그걸···?”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장건의 점혈이 그의 갑옷을 부수고 그 안에 혈을 짚어낸 것이다.
그가 쓰러지자 장건도 몸을 바로 세우고 들고 있던 청룡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툭툭 손을 털다가 기절한 제갈 가주를 들쳐메 조조의 안장 뒤에 얹었다. 녀석이 무겁다고 투레질을 했다.
“잠깐만 들쳐 매. 지금 나도 죽을 것 같으니까.”
장건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조조도 더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이후 장건도 안장 위에 올라타자 녀석은 털털 뛰어 황군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곳에선 장건의 싸움이 끝난 것처럼 마궁과의 전투도 끝난 것인지 더는 마인들의 괴성이 울리고 있지 않았다.
장건과 조조가 달빛 아래 그렇게 떠나자 주인을 잃고 남은 들소들만 자기들끼리 풀을 뜯으며 길게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