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05)
205화
“케헥···”
유설의 검이 마지막까지 버둥거리던 마인의 목을 꿰뚫었다. 왼팔을 제외한 사지가 모두 잘려 나가고도 바닥을 기며 그녀를 공격하려던 자였다. 검을 뽑아내고 옆으로 휙 털어낸 유설은 착잡한 눈으로 시체를 바라보았다. 주변에서 흔들리는 횃불들의 빛과 그림자 덕분에 그것은 조금 전까지 살아있던 사람이라기보다는 그저 어떤 덩어리 같았다.
“후우···”
그녀는 선조들이 왜 마공을 경계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마공에 완전히 몸을 맡긴 마인은 말 그대로 괴물 같았다. 단순히 그 힘이 강하고 빠른 것은 차치하고 팔다리가 잘려 나가거나 본인의 내장이 질질 흘러내려도 어떻게든 상대를 죽이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 때문에 그랬다.
“괜찮으십니까?”
“···응.”
다른 마인을 마무리한 진하가 검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갑옷 위로 검은 피가 잔뜩 튀어 있었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시 묶으며 말했다.
“피해 상황을 정리해야 할 듯합니다. 무림맹은 대충 봐도 피해가 상당하고, 저희 쪽 병사들도 꽤 다친 모양입니다.”
“···살아있는 마궁의 병사는?”
“없습니다. 전원 숨을 끊기기 전까지 날뛰더군요.”
“전원?”
유설이 시체를 내려다보며 한 질문에 진하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 조금 더 살펴봐야겠지만 지금까진 모두 죽었습니다.”
“저들의 지휘관은?”
“마인들이 날뛰기 시작할 때쯤 무림맹의 포위를 뚫고 도주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이렇게 병사들을 미쳐 날뛰게 만들고는 도망쳐버렸어요. 이걸 전략이나 전술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유설은 진하의 보고를 들으며 본인도 검을 집어넣었다. 눈은 여전히 그 앞에 시체를 향하고 있었다.
“황군이 무공을 익힌 병사들로 이루어지며 그 전까지의 전략전술을 바꿔나간 것처럼, 이들도 지난 백 년 동안 마공을 익힌 병사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전략을 찾은 거겠지. 비록 그것이 자살 돌격에 가까운 전략이라 해도. 그리고 사실 초왕의 부활까지 시간을 끌려는 거라면 아주 성공적인 시도잖아? 우린 이 난장판을 정리하느라 여기서 며칠을 허비해야 할 거야.”
“···마인魔人답다면 마인답군요.”
유설의 담담한 말에 진하도 씁쓸히 대꾸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하늘이 달과 별로 환하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풍경 아래 횃불을 든 병사들이 다친 동료들과 이미 죽은 동료들을 수습하고 있었고, 이천에 가깝던 마궁의 기병대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 벌판을 뒤덮고 있었다.
그 기병대 숫자만큼의 검은 들소들도 한낱 고깃덩어리가 되어 벌판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는데, 개중에는 전투 중에 어찌저찌 기수의 손길을 피해 살아남은 녀석들도 있었다. 그런 녀석들은 주변으로 다가오는 황군 병사들의 손길에 콧김을 푹푹 내쉬며 경계하다가도 덜컥 코뚜레가 잡히면 얌전해졌다.
“···군영으로 돌아가시죠.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그래···”
진하의 말에 유설도 시체에게서 눈을 뗐다. 하지만 그렇게 고개를 돌리자 보인 것은 더 많은 시체들이었다.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미쳐 날뛰던 마인들의 시체와 그런 마인들을 상대한 병사들의 시체. 유설은 자기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부상자와 시신을 수습하며 조용하던 병사들 사이에서 묘한 소란이 퍼져나갔다. 감정을 다스리던 유설은 그 소란을 듣고 눈을 떴다.
“무슨 일이지?”
“바깥쪽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그 소란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곧 저 멀리 어둑한 벌판에서 이쪽 횃불의 빛 속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오는 말 한 마리와 그 위에 앉아서 흔들거리는 남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남자의 얼굴을 본 유설의 두 눈이 커졌다.
* * *
“···저자가 어떻게 살아있지?”
“정찰대를 살리기 위해 남아서 적 전초 부대의 시선을 끌었다던데···”
“뭐야? 그럼 그놈들을 다 따돌리고 지금 돌아온 거라고?”
장건과 조조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동안 그 둘을 본 무사들은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무림맹과 황군 가릴 것 없이 다들 놀라운 눈으로 장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투가 있기 전 적을 발견하고 복귀한 정찰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군영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장건이 복귀할 수 없으리라 예견했었다. 동진군에서 장건이 홀로 일백 기의 마인 기병대와 맞서고 살아있으리라 짐작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돌아온 것이다.
그때 무사들이 조조의 안장 뒤에 짐짝처럼 얹어져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뒤에 한 명 더 있는데?”
“엇? 저놈은?”
“지휘관, 마인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도망치던 적들의 지휘관이다!”
장건을 운 좋게 살아 돌아온 정찰병 정도로 바라보던 무사들의 시선이 대번에 변했다. 비록 지금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홀로 남은 행동과 이후 도망친 적 지휘관을 사살한 공적 등은 놀라운 것이었다.
거기에 제갈 가주를 가만히 바라보던 누군가가 외쳤다.
“···살아있다! 적 지휘관의 시체가 아니라 생포한 거야!”
터덜터덜 다가오는 장건을 보며 웅성거리던 무사들이 조용해졌다. 그들은 모두 놀랍다는 눈으로 장건을 바라보며 주춤주춤 물러나 그의 앞길을 열어주었다. 조조가 그 열린 길로 나아갔고, 장건은 그 위에서 반쯤 감긴 눈으로 흔들거렸다.
뒤늦게 다가온 무림맹 무사나 황군 병사들에게도 빠르게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미쳐 날뛰는 마인들을 상대하고 급격한 피로에 빠진 채 시신을 수습하던 무사들은 그 시체들에서 주의를 돌리고 싶은지 조금씩 장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사지에서 돌아온 영웅을 맞이하는 듯했다.
“장 무사!”
그때 유설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며 우르르 사람들이 비켜섰다. 장건의 눈이 나는 듯 다가오는 그녀에게로 향했다.
“세상에! 그거 피예요?”
밝은 표정으로 다가왔던 그녀는 꺼멓게 굳은 장건의 가슴팍 옷자락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그게 아니더라도 장건의 몸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많았다. 그가 뚫고 온 수라장을 보여주는 듯했다. 심지어 조조의 목덜미에도 큼지막한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도망치던 자를 잡았소. 아마 애써 깨우지 않는다면 이삼일 정도는 의식이 없을 것이오.”
“예?”
유설은 갑자기 이어진 장건의 말에 반문했다. 하지만 장건은 두 번 설명할 생각이 없는지 안장 뒤쪽에 얹어져 있던 제갈 가주를 바닥으로 밀었다. 의식이 없던 그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철푸덕 바닥으로 쏟아졌다. 유설도 그제야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앞으로 나서서 황군을 모욕하던 덥수룩 수염, 바로 적의 지휘관이었다.
“···아니, 저자를 어떻게···”
“조조가 조금 다쳤소. 의원이 봐줬으면 하는데.”
“예? 아, 물론이죠. 그런데 먼저 장 무사부터 좀 봐야···”
유설의 입에서 긍정적인 대꾸가 나오자 장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고갯짓은 조금씩 앞으로 기울었다.
“음. 그럼 난 이제 좀 쉬어야겠소···”
“···잠깐, 장 무사! 자, 장건!”
앞으로 기울던 장건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안장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장건이 그렇게 떨어지는 와중에 흐려지는 시야 끝에서 본 것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훌쩍 가까워지는 유설의 얼굴이었다.
* * *
흐린 시야 속에서 왱왱거리는 소리로 대화가 들렸다.
“···무림맹의 피해가 상당합니다··· 죽은 사형제들을 이런 허허벌판에 묻어줄 수 없다고 항의하는 자들도 많고요···”
“···토벌이 끝나고 돌아갈 때 시신들을 회수할 거라고 해. 우리 쪽 병사들도 그렇게 하니까···”
“···정리가 끝나고 병사들이 회복하려면 일주일은 걸릴 듯합니다. 물론 부상자들을 제외하고···”
“···저기, 근데 진하야. 굳이 여기에서도 그렇게 보고를 해야 해? 이따가 내 천막으로 돌아가서 하면···”
“···아, 예, 죄송합니다. 그렇게 하시, 어? 저기 깨어난 듯한데요?···”
“···앗! 정말? 장건! 내 말 들려요?···”
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의 의식은 도망치듯 수면 아래로 잠겼다. 흐릿하던 시야가 다시 검게 물들었다.
그 시야가 다시 회색빛으로 물든 것은 잠시 후였다. 아니, 한참 후였는지도 몰랐다. 그는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흐린 시야 대신에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 촉감이었다. 어떤 손이 가슴의 상처를 조심스레 어루만지고 있었다.
약간 잠긴 목소리가 귓가를 속삭였다.
“···걱정하지 말라면서요? 이게 무슨 꼴이에요? 다른 정찰대가 흔적을 발견했어요. 도망치기는커녕 그 기병대 백과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면서요? 어리석은 사람···”
나도 그렇게까지 싸울 생각은 아니었어. 그들 모두를 죽일 생각도 아니었고. 하지만 멈추질 않더군.
“···그 공주님은 물론이고 황군의 장군들과 무림맹주, 거기에 대전사도 당신을 기다려요. 아니, 사실 지금 이 군단의 사람들 모두 당신을 기다리고 있죠··· 물론 나도요···”
기다림이란 단어가 떠오르자 그의 흐린 시야에 신사천에 있을 장가 상회가 그려졌다. 장운 부부와 단상운 부부, 동생 장연, 개구쟁이 아이들. 그리고 서하. 그의 제자. 어째선지 훌쩍 큰 녀석이 그려졌다. 아마 녀석도 어른이 되면 그가 그런 것처럼 이 땅을 여행하며 무공을 쌓아가지 않을까?
그때 갑자기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니, 익숙한 목소리였다.
“···앗! 지금 뭐 하는, 아니 손이 왜 거기 가 있는데!···”
“···상처를 봐주고 있었을 뿐이에요···”
“···거짓말! 그런 손놀림이 아닌데! 어디서 감히 여우짓을!···”
“···지, 진정하세요, 아가씨. 바깥 병사들이 듣습니다···”
그 목소리들이 소란스러워지며 다시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의식이 멀어지며 소란 또한 멀어졌다.
그 검은 시야에 변화가 생긴 것은 다시 한번 잠시 후인지, 한참 후인지 모를 시간 이후였다.
새카만 세상 속에서 어떤 빛 한 점이 반짝이더니, 곧 붉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불길은 금세 덩치를 키워 커다랗게 이글거렸다. 그렇게 후끈한 열기가 더해지길 잠시. 불길이 스스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회전은 순식간에 불길을 한 점으로 응축시켰다. 검은 세상을 붉게 태우는 듯했던 불길이 한순간에 작은 점으로 모였다. 그리고 그 붉은빛이 새파랗게 변하더니 이내 번쩍-벼락을 쏟아냈다.
한 점을 중심으로 쏟아지던 푸른 불길과 벼락은 한계 없는 검은 세상을 가로지르며 무수한 빛깔을 그렸다. 그것은 푸르러 보이기도 하고, 붉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 둘과 전혀 상관없는 수많은 색으로도 보였다. 그건 마치 검은 밤하늘에서 다양한 색의 별들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듯했다.
그런 빛과 색의 향연이 이어지길 한참. 점점 환해지던 그 빛깔들은 어느 순간 하나의 덩어리로 뭉쳤다. 덩어리는 이 색과 저 색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하달지, 아니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현란하달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하나가 된 빛의 덩어리는 제일 처음 빛이 시작된 점을 중심으로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것은 위로, 차가운 것은 아래로.
회전은 그 모든 것을 다시 하나의 점으로 몰아넣었고, 그렇게 거대한 덩어리가 하나의 점으로 모인 순간 다시 푸른 불길과 벼락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대신 이번엔 전처럼 중구난방의 혼란이 아니라 분명한 길을 그렸다.
그는 그것이 본인의 몸, 그리고 그 혈도들을 그리고 있음을 느꼈다.
푸른 불길과 벼락으로 이루어진 그림자와 그가 마주 보았다.
* * *
어두운 밤, 조심스러운 손길이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섰다. 천막 안에는 화로가 타고 있었지만 고요했다.
안으로 들어선 손길의 주인은 금세 멈칫했다. 예상했던 사람 외에 한 사람이 더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사람은 지금 엎드린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아마 원주민 전사 중 장건과 유난히 친하다는 여인일 것이다.
“···비랑?”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깊이 잠든 그녀는 작게 잠투정을 부릴 뿐 깨어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선 인물은 그녀가 깨어나지 않으리라 안심했는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정확히는 엎드린 그녀 앞에 장건을 향해서였다.
그 인물은 여기저기 붕대를 감은 채 바로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장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하고픈 말이 많은데 그걸 다 말할 수 없어 그냥 입을 다물어버린 듯했다.
잠시 후 그 인물의 손이 조심스럽게 장건을 향했다. 천천히 다가간 그 손은 닿을 듯 말 듯한 아찔함으로 장건의 이마를 스쳤다. 그의 머리칼 몇 가닥이 그 손을 스쳐 지났다.
“간지럽군.”
손길의 주인이 덜컥 굳었다. 닫혀있던 장건의 입술이 열려 나온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장건은 지금까지 감겨있던 눈을 뜨고 그 손길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직접 얼굴을 볼 때마다 하는 말 같군. 오랜만이오, 소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