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06)
206화
“···깨어있었나요?”
“덕분에 깼소.”
여인, 암룡삼호라고도 불리는 그녀는 장건의 이마 위를 스치던 손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그 움직임은 마치 처음부터 장건의 머리칼을 만진 적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녀가 말없이 온몸으로 항변하는 동안 장건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누워있는 곳은 조금 큰 천막 안 이었고, 한쪽에 놓여있는 탁자나 이런저런 가구들로 보아서 그곳은 적어도 장군급 인사가 사용하는 천막이었다. 천막 한쪽에 놓인 화로가 은은히 타오르고 있어 천막 안은 따듯했다. 거기에 그의 왼손 어림에는 비랑이 팔을 베고 엎드려 자고 있었다.
장건은 새근새근 잠든 비랑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가 얼마나 잤소?”
“사흘이요.”
“생각보다는 얼마 안 지났군.”
짧게 대꾸한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걸 본 소향이 침상 반대편으로 돌아가며 그의 몸을 누르려 했다.
“잠깐. 아직 일어나지 않는 게 좋아요. 의원이 자칫 죽을 수도 있는 부상이라고 했으니까.”
“그 정도는 아니었소. 아니, 오히려 그 덕분에···”
소향은 장건의 장건의 가슴팍을 손으로 누르려 했고, 장건은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거리가 훌쩍 가까워졌다. 그렇게 덜컥 가깝게 붙어버린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장건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고, 소향은 가늘게 떨리는 눈으로 그의 두 눈을 번갈아 보았다.
먼저 눈을 피한 것은 소향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정말 괜찮은 모양이군요. 다행이에요.”
장건은 눈을 피하는 소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외랑대에는 양굉 그 자식을 제외하고도 얼굴을 감춘 암룡대원이 꽤 많았지. 하지만 당신은 외랑대에 없더군. 어디 있었소?”
“···우리 일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지 모르나요? 당연히 나는 동진군 내부의 다른 곳에서 나름대로 작전을 진행하고 있었어요. 모든 암룡대가 외랑대로 집결한 것은 아니에요.”
“날 피한 건 아니고?”
소향이 장건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곧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당신을 왜 피하겠어요? 당신과 우리가 적대적인 관계도 아니고. 그저 내 일이 바빴을 뿐이에요. 오늘에야 겨우 시간이 나서 잠깐 당신 상태를 보러 온 거고요.”
그 미소는 그런 착각을 하는 장건이 재밌다는 듯, 더불어 약간이지만 한심하다는 듯했다. 덕분에 장건은 눈을 꿈뻑거리다가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음, 그렇군.”
“좋아요. 어쨌든 생각보다 훨씬 멀쩡한 모양이군요. 지금 군영에서는 다들 당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내 이야기?”
소향은 몸을 돌려 한쪽에 있는 탁자로 다가갔다. 그 위에는 물 주전자와 잔이 놓여 있었고, 그녀는 그 잔에 물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잡아온 마궁의 지휘관만 해도 대단한 공인데, 이틀 전에는 정찰대가 적 기병대 시체 백여 구를 발견했어요. 바로 당신이 남아서 시간을 끌어보겠다던 그 전초 부대였죠. 그래서 지금 군영의 무인들은 당신의 무공에 왈가왈부 말이 많아요. 누군가는 무림맹주를 뛰어넘는 무림의 초신성이라 칭송하고, 누군가는 당신이 뭔가 속임수를 썼을 뿐이라 욕하죠. 또 누군가는 심지어 당신이 마궁의 첩자고, 이번 전투와 더불어 뭔가 계략을 꾸민 것이 아니냐 의심하기도 해요.”
“당신 생각은?”
그의 되물음에 소향은 그에게 물잔을 내밀며 대답했다.
“난 당신을 알죠. 당신은 마인들의 첩자 노릇이나 할 사람은 아니에요. 그리고 아무리 마궁이라고 해도 첩자 하나 심자고 병력 이천을 갈아버리는 짓거리를 할 리도 없고요.”
장건은 물잔을 받아 입술을 축였다.
“어울리지도 않게 유명인이 되었군.”
그 말에 소향은 순간 멈칫했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그건 아닌 듯한데.”
장건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동안 미소를 지어주던 그녀는 곧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이렇게 깨어난 것도, 멀쩡한 것도 봤으니 이만 물러나야겠군요. 그럼 편히 쉬세요.”
“음. 잘 가시오.”
소향은 뒷걸음질로 물러나며 묘하게 진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만날 땐 오랜만이라는 말 하지 않기로 해요.”
그녀의 그런 미소를 본 장건은 옅게 웃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향은 그렇게 장건의 미소를 보며 천천히 천막을 빠져나왔다.
“···”
그녀는 천막을 걷고 나와서 잠시 멈춰 섰다. 갑자기 제자리에 우뚝 멈춘 그녀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두 눈은 꾹 감겼고 내쉬는 호흡은 가늘게 떨렸다. 조금 전까지 한껏 긴장하던 사람이 그 긴장이 풀린 모습이었다.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한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그제야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는 벌판 위에 세워진 크고 작은 천막들 사이로, 깊은 밤 횃불과 횃불 사이 그림자 틈으로 멀어져갔다.
* * *
다음날 장건이 깨어난 것이 알려지자 유설과 진하가 의원을 데리고 찾아왔다. 그 의원은 장건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마공을 익혔소?”
“의원이시니 아니란 것도 아실 텐데.”
장건의 담담한 대꾸에 중년의 의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황군 전속 의원으로, 하와이에서부터 황군과 함께 움직인 사람이었다.
“물론 나도 아니라는 거 잘 알지··· 하지만 이런 회복 속도라니? 너덜너덜하던 혈도나 단전이 거의 다 아문 것은 물론이고 가슴의 창상 또한 이 기세대로라면 사나흘 안에 흉터가 질 것이오. 그건 분명 비범한 회복이지. 물론 홀로 마인 기병대 일백 명을 상대할 정도의 무공이면 아주 못 믿을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상태가 좋다는 거죠?”
의원은 중간에 끼어든 유설의 말에도 짜증 비슷한 기색 하나 없이 머리를 숙였다.
“예, 장군. 안정된 상태로 붕대나 잘 갈아주고 탕약 한두 번 먹으면 될 것입니다.”
유설은 환하게 웃으며 장건에게 말했다.
“다행이에요! 혹시 이대로 영원히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잖아요!”
장건은 조금 떨떠름하게 웃었다. 며칠 전 자신의 상태가 그렇게 심각했었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의원은 그 말을 들으며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이미 장건의 회복에 대한 예측이 틀렸잖아요? 뭐가 또 틀렸을지 알아요?”
“큼큼··· 저는 다른 환자들이 많아서 이만.”
유설의 일침에 의원은 멋쩍게 헛기침을 하며 천막을 떠났다. 그가 떠난 후에도 유설은 한참을 장건에게 자신이 얼마나 걱정했는지를 떠들다가 아직 할 일이 많다는 진하에게 이끌려 천막을 떠났다.
물론 그녀는 진하에게 끌려 나가는 와중에도 비랑을 잊지 않고 물귀신처럼 그녀를 함께 데리고 나왔다.
“왜죠? 난 어젯밤에도 여기 있었는데요.”
“···의원이 한 이야기 못 들었어요? 장건이 안정을 취해야 한다잖아요!”
비랑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순순히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 와중에도 장건에게 황금빛 눈을 반짝거리며 눈짓하다가 유설의 도끼눈을 마주 보긴 했다.
잠시 소란을 피우던 사람들이 사라지자 침상 위에 앉아있던 장건은 풀썩 뒤로 누웠다. 그의 눈에 천막의 천장이 들어왔다. 특별한 문양 같은 건 없고, 그저 기둥과 줄에 걸친 누런 천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장건은 멍하니 그 천창을 바라보다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검은 세상이 보였다.
그리고 그 검은 세상의 한가운데서 빛 한 점이 피어나더니 이내 푸르른 불과 벼락을 쏟아냈다. 그 푸른 불과 벼락은 검은 세상을 종잇장 찢듯 가로지르며 거미줄처럼 뻗어나갔다.
잠시 후 장건의 눈에 펼쳐진 광경은 새카만 세상 위에 푸른 불길과 벼락으로 혈관과 근육을 이룬 거인이 우뚝 선 채, 다른 존재의 긍정과 부정 따위는 한낱 실바람 따위도 되지 못한다는 듯, 자신은 그저 홀로 독존獨存하는 존재라는 듯, 그렇게 검은 세상을 자신의 불빛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 장면이었다.
장건은 그 거인이 삼재공으로 시작하여 삼매진화, 태극권, 혼원벽력, 창궁무애검, 제왕검형, 백보신권 등등 그가 지금까지 배우고 만들고 익힌 모든 무공의 총화總和가 만들어낸 환상임을 알았다. 그의 몸과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던 무공들이 의식이 날아갈 정도로 극한까지 몰리는 생사결 속에서 혼탁하게 섞이고, 마침내 각각의 무공들이 뼈와 근육, 혈관을 이루는 거인이 탄생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 거인은 그의 무공이자 그의 분신이었다.
그렇게 아득히 검은 세상 속에서 홀로 불타오르는 거인을 바라보길 한참. 장건은 곧 그 거인이 자신을 마주 보고 있음을 느꼈다. 푸른 불티와 뇌전을 튀기는 거인의 얼굴 부근 어디에서도 눈 비슷한 것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장건은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장건이 그 사실을 깨닫는 동시에 거인에게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압박감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장건이 지금까지 겪어온 그 어떤 고통과 두려움보다 강력했다. 마치 어느 신화 속 원숭이가 산 아래 갇힌 것처럼 장건 또한 자신의 몸 위로 거대한 산맥이 올라와 자신을 내리누르고 있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온몸이 무른 과일처럼 으깨질 것 같았다.
장건은 그렇게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내공을 일깨워 그 압박감에 저항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내공은 이쪽이 아니라 저쪽에 있었다. 이쪽에는 백보신권도, 제왕검형도, 창궁무애도, 혼원벽력도, 태극권도, 항룡장이나 삼재공도 없었다. 그저 장건, 그뿐이었다.
전신을 짓이겨버릴 듯한 압박감보다 훨씬 더 끔찍한 공허가 몰려왔다. 새로운 생을 얻게 되고, 무공을 시작한 이후로 그가 이뤄왔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저기 저 거인의 모습으로 승화했다.
마침내 거인의 손이 움직였다. 그 손은 너무나 거대해서 현실이라면 동쪽 지평선 끝부터 서쪽 지평선 끝까지 닿을 듯했다. 장건은 그 손을 마주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푸른 불길과 벼락으로 이루어진 손은 곧 장건의 세상을 모조리 덮어버렸다. 모든 것이 불타고 녹아버렸다. 재조차 남지 않을 듯했다.
“장 형! 이보쇼, 장 형!”
장건의 눈이 스르륵 뜨였다. 그는 눈꺼풀을 두어 번 깜빡거리고는 자신을 부른 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괜히 어딘가 띠꺼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남자는 양굉이었다.
“거, 괜찮소? 거의 다 나았다 해서 찾아왔는데, 악몽이라도 꾸셨나 보오?”
“벽을 만났지.”
“벽?”
장건은 담담했다.
“그래, 벽.”
“···그, 뭐냐. 무공 얘기요? 존나 고수들이 하는 그런 상승무공의 현학적인 담론?”
장건의 목소리가 멀쩡해 보이자 양굉은 그가 괜찮다고 느꼈는지 실실 쪼개며 개소리를 했다. 장건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아니. 살아가면서 어떤 벽을 마주하는 건 무공을 익힌 무인이나 객잔의 숙수, 상회의 상인, 심지어 밭을 일구는 농부까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 벽을 외면하지 않는 거야.”
실실 쪼개던 양굉의 표정이 살며시 굳었다.
“···뭐요? 뭐 심각한 거요?”
“됐고, 왜 왔냐.”
양굉은 다시 웃었다.
“에헤이, 장 형 멀쩡한지 보러 왔다니까. 내가 그렇게 정 없는 놈으로 보이시나? 이래 봬도 이 신대륙 무림에 이 몸의 넘치는 정과 매력에 홀려서 내 정보원이 된···”
“지랄 말고.”
장건의 말이 그렇게 짤막해지자 양굉도 순간 입을 다물었다. 잠시 장건의 눈치를 보던 그는 결국 별거 아니라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뭐냐. 그렇게 대수로운 건 아니고. 그 삼매진화 있잖소?”
“그래. 삼매진화. 하라고 한 수련은 계속 잘 하고 있냐?”
“아 그건 걱정 말고. 매일매일 아침저녁으로다가 열심히 하고 있소.”
대번에 튀어나온 대답에 눈가를 만지작거리던 장건의 눈이 양굉을 마주 보았다. 그 눈빛은 ‘네가? 정말? 열심히 했다고?’라는 눈이었다. 하지만 양굉은 그런 것은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진지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장 형. 나한테 뭘 가르친 거요?”
“···뭐?”
장건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렇게 되물었다. 그 되물음에 양굉은 코밑을 훔치고 입술에 침을 바르며 설명을 이어가려 했다. 장건도 그런 양굉의 준비태세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이야기가 나오는 것보다 먼저 등장한 목소리가 있었다.
“장 무사! 여기 있나?”
장건의 시선이 천막 입구로 향했다. 거기엔 태학사 순우현과 무림맹주 혁련위진이 있었다. 그 둘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장건의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그가 일어나 앉아있는 걸 본 순우현이 대뜸 말을 이었다.
“자네 깨어났군. 좋아, 그럼 바로 가세.”
“···어딜 말이오?”
“어디긴? 자네가 재워둔 마인에게 가야지. 지금 함부로 건드리질 못해서 심문도 시작 못했어.”
장건은 아, 하고 짧은 소리를 냈다. 이틀 정도면 깨어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깨어나질 못했다니 아무래도 힘 조절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냥 깨워볼 생각은 안 했소?”
“그걸? 자네가 찔러놓은 혈도가 몇 갠데? 함부로 건들다가 말도 못 하는 병신 만들 일 있나?”
순우현의 대꾸에 결국 장건은 고개를 끄덕이고 침상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옆에 있던 외투를 집으며 멍한 표정으로 선 양굉에게 말했다.
“네 이야기는 조금 나중에 듣자.”
“어, 어어. 그럽시다···”
장건이 따라붙자 순우현은 앞장서 천막을 걷어내며 질문을 이어갔다.
“그 혈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 마인을 살펴보니 일곱 군데에 이르는 혈도를 거의 동시에 짚었더군. 그건 어떻게 한 건가? 가슴팍과 등을 동시에 찌르다니? 나는 도저히 어떻게 할지···”
그렇게 장건과 순우현, 혁련위진이 떠나자 천막 안에는 떨떠름한 표정의 양굉만 남았다. 그는 멍하니 천막 입구를 바라보다가 본인의 오른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중지와 엄지가 비비적거리자 희미한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