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16)
216화
새파랗게 불타는 장건의 시선에 그들이 선 숲속 공터는 고요해졌다.
이미 당사량의 독기로 그 주변에 동식물들은 모두 죽었다. 풀은 싯누렇게 말라비틀어져 부스러졌고, 모든 잎이 떨어진 나무들은 이제 그 나무 모양 묘비가 되었다. 본래라면 찌르르 울었어야 할 풀벌레들도 진즉에 죽어서 죽은 풀 사이에 누워 있었다. 지금 이 공터에서 살아있는 것은 장건과 당사량, 공손요뿐이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던 장건은 곧 완전히 몸을 돌렸다. 당사량과 공손요는 어째선지 우뚝 선 장건의 모습이 본래 모습보다 몇 배는 크다고 느꼈다. 사실 실제로 궁의 마공 중에는 신체 일부분의 크기를 잠시 키우는 무공도 있었다. 익혀갈수록 덩치가 더 커지는 것도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지금 장건의 모습은 단순히 그런 것과는 달랐다.
바뀐 것은 기세였다. 조금 전까지 당사량과 맞서 싸우던, 분명히 이 자리에서 칼과 주먹을 휘두르며 싸우고 있었음에도 어딘가 초탈한 분위기를 풍기던 무인은 이제 없었다. 그의 기세는 이제 세상을 뒤덮을 듯 강렬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를 마주한 공손요는 자신의 쇠 채찍을 좌르륵 한 번 털어내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공을 익히진 못했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어디서 잡스러운 것을 주워 익힌 모양이군요.”
분명 차갑고 이성적인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당사량은 그 밑에 은은히 깔린 떨림을 느꼈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저 장건의 기세가 신공, 그러니까 무림인들이 말하는 마공이 아님은 당사량과 공손요 모두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 다 한 가문의 정점에 이른 무인으로서 그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지금 장건의 무학, 정확히는 궁에서 무시하던 서부 무림의 무공이 자신들의 것을 뛰어넘었음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공손요는 이 와중에도 궁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당사량은 그런 충성심 넘치는 공손요의 모습에 다시 한번 광신도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대 일 상황이 되었는데 굳이 이 이점을 포기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손요도 그 뜻을 느끼고 반대편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건을 중심에 두고 당사량과 공손요가 좌우로 갈라져 움직이는 동안, 장건은 그런 두 사람을 한 번씩 번갈아 보고는 하늘을 향해 시선을 올려다보았다. 강렬히 빛나는 두 눈과는 달리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이었다.
그리고 공손요는 그것을 빈틈으로 보았다.
길게 늘어져 바닥을 쓸어가던 공손요의 쇠 채찍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튀어 올랐다. 상대를 물어뜯으려는 독사가 둥글게 말았던 자신의 몸을 쭉 펴듯이 공손요의 쇠 채찍 끝이 번쩍 장건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공손요의 움직임과 동시에 당사량도 발끝에서 내력을 폭발시켰다. 당사량의 뒤로 시커멓게 죽은 흙이 거세게 일어나 흩날렸다. 그렇게 땅을 박찬 당사량은 온몸에 암녹빛 독기를 뒤집어쓰고 하나의 포탄이 되어 장건에게 날아갔다.
채찍이 파고드는 것과 당사량이 날아드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어느 한쪽을 막으려면 다른 한쪽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두 공격 모두 치명적인 속도와 힘을 가지고 있어 어중간하게 둘 모두 막거나 피하려 한다면 도리어 아무것도 막을 수 없을 터였다.
그 순간 하늘을 올려다보던 장건이 움직였다.
제일 먼저 그의 오른손에 들려있던 청룡이 번쩍 은빛 원반이 되어 당사량에게 날아들었다. 두 발 모두 허공에 떠 있던 당사량은 전신에 휘돌던 내력을 왼손에 집중시켜 그 은빛 원반과 마주쳤다.
독기와 마기가 혼탁하게 뒤섞여 권기拳氣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저 내뿜어졌을 뿐이니 외기外氣라고 해야 할지 모를 내공의 결집과 청룡의 칼날이 만났다.
검이나 칼 같은 무기가 몸에서 떨어지면 그 칼날에 머금어져 예기를 더하던 내공은 한순간에 흩어져버린다. 그 때문에 무림인들이나 황군에선 활과 화살을 주공으로 쓰지 않는다. 활의 관리는 둘째치고서, 기껏 무공을 배우고 내공을 키워도 활은 그저 활의 성능 이상을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주 강한 내력을 실었다면 어느 정도 거리까지는 그 힘이 유지될 수 있었다. 모용가의 비검 건곤백룡비검같은 경우 마공 특유의 넘쳐나는 내력을 이용해 날아가는 검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어쨌든 당사량은 은빛 원반처럼 날아든 청룡의 모습에 큰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강한 회전을 주었다는 것은 그 칼날에 내력을 남기는 것보다 멀리, 그리고 빠른 속도를 위함일 가능성이 높았고, 그렇다는 것은 장건이 자신보다 공손요를 먼저 상대하기로 결정한 후 이쪽에겐 시간을 끌 견제 수단으로 칼을 던졌다고 보는 게 옳았기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 당사량의 왼손과 청룡이 만났고, 희게 번쩍이는 칼날은 당사량의 독왕기毒王氣와 왼손을 깔끔하게 잘라 버렸다.
“큭!”
당사량이 당혹감 섞인 신음과 함께 간신히 몸을 뒤틀어 청룡의 칼날을 피하는동안 몸을 돌린 장건과 공손요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공손요의 쇠 채찍은 아홉 개의 관절을 가지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연하고 스산한 움직임으로 장건에게 파고들었다. 게다가 그 쇠 채찍 뒤로도 공손요의 왼손에 들린 길고 가는 칼이 기다리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이어지는 연환 공격이었다.
그에 맞서는 장건은 뱀처럼 파고드는 쇠 채찍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차가운 금속 뱀은 자신을 덮치는 손을 피해 교묘히 움직이며 그 예리한 이빨을 박아넣으려 했다.
그러나 그런 쇠 채찍보다 장건의 왼손이 더 신비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언뜻 느릿하게만 보였으나 실상은 공간의 맥을 짚는 움직임. 그 부드러운 손짓에 금속 뱀은 공격성을 잃어버렸다. 다음 순간 공손요의 쇠 채찍은 장건의 왼손에 붙잡혔다.
공손요는 주무기가 붙잡힌 상황에서도 멈칫 한 번 하지 않았다. 곧장 쇠 채찍을 끌어당기며 반대쪽 칼을 휘둘렀다. 가축을 도살하듯 깔끔하고 단호한, 아주 단순하고 강력한 일격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일격이라면 장건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의 오른손이 공손요의 칼날을 향했다. 그리고 꽈릉-하는 천둥이 울렸다.
“꺼흣-”
혼원벽력장이 공손요의 칼을 부숴버렸다. 그녀의 칼이 박살 나며 조각난 파편들이 흩날렸다. 비산하는 칼날 틈에서 공손요가 뒤로 물러서려 하자 장건이 왼손에 쥔 쇠 채찍을 끌어당겼다. 공손요는 와락 끌려가다가 재빨리 손을 놓았지만, 이미 장건과 너무 가까워진 상태였다. 장건의 발이 하늘로 치솟는 벼락처럼 그녀의 턱을 올려 찼다.
공손요는 채찍을 놓은 손으로 재빨리 턱을 방어했다. 하지만 그렇게 막았음에도 그녀의 몸은 허공으로 높이 떠서 뒤로 나가떨어졌다.
“···”
격돌 후 공터는 다시 고요해졌다.
장건을 중심에 둔 두 마인들은 주저앉은 채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당사량은 왼손이 엄지 부분만 남았고, 공손요는 턱이 부서졌는지 고통에 겨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두 사람 모두 처음 위치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은 장건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불타는 눈을 한 장건은 그 시선을 마주 보면서 천천히 심호흡했다.
호흡이 격해졌거나 기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장건은 지금 너무 흥분하지 않기 위해 심호흡하고 있었다.
조금 전 공손요의 기습이 있었을 때, 등짝에 화끈함을 느낀 그 순간 죽음의 위기 속에서 자신과 장건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던 내면의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장건이 진짜 이 무공들의 주인이 아니라며 노성을 내지르던 것이 지난밤이었건만 지금 이 순간 거인과 장건은 하나였다.
거인의 피부와 근육, 뼈와 살을 이루던 무의 이치들. 그 모든 것들이 이젠 장건의 육신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장건은 자신이 그 거인이 된 듯 세상을 뒤덮고 산과 강을 헤집어버릴 힘을 느꼈다. 뭐든 할 수 있을 듯한, 그리고 누구든 앞을 가로막는다면 부숴버릴 수 있을 듯한 전능감이 그의 온몸에서 치솟았다.
그 누구도 그의 무武 앞에서 오만하게 굴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제국의 황제라고 해도. 그 오랜 시간 동안 기껏해야 더 쉽고 빠르게, 더 많은 사람 죽이기 따위나 연구해온 머저리들은 그의 무공 앞에 머리를 박고 조아려야 할 것이다. 천년 동안 고작 빠르고 효율적인 칼질이나 숭상해온 그 천치들과는 다르게 그의 무공은 하늘을 날고 태극을 그리며, 때론 개벽을 일으키는 벼락을 부른다.
신대륙에선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기껏 바다를 건너 새로운 세계를 만났음에도 중세인들의 상상력은 덜떨어지기 그지없었다. 한 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나 백 년이라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새로운 무공이 화려하게 꽃피우기는커녕 더 짧고, 더 강렬한 일격에 매달리는 머저리들에 비하면 그의 무공은 한없이 우월했다.
그리고 우월한 자는 열등한 자들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
“네 이놈! 장건-!”
그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당사량이 거칠게 울부짖었다. 그렇게 장건의 이름을 부르짖은 당사량은 오른손에 강한 독기를 일으켜 피가 철철 흐르던 왼손에 들이밀었다. 그 독기와 만난 상처에서는 지글지글 끓는 소리가 나더니 곧 피가 멎었다.
그 행위는 보는 것만큼 큰 고통이 뒤따랐는지 당사량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악문 이빨에서는 뿌드득하는 소리가 났고, 크게 치뜨다 못해 찢어져 버린 눈가에선 핏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당사량은 그 고통만큼 더 큰 힘을 얻었다는 듯 전신에서 암녹빛 독기의 소용돌이 내뿜으며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이젠 그의 몸을 장작으로 하는 초록색 불길이 일어나고 있는 듯 보였다.
턱이 박살 난 공손요도 두 손으로 바닥을 밀치며 가볍게 일어섰다. 그녀의 눈에서도 시퍼런 안광이 흘러나왔는데, 그녀의 몸 주변으로는 어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잠시 박살 난 턱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곧 양손으로 자신의 허리띠를 붙잡아 휙 당겼다. 그러자 그 안에 숨어있던 낭창거리는 칼 두 자루가 휘리릭 뽑혀 나왔다. 검과 채찍의 장점, 그리고 단점 모두를 가진 연검이었다. 쌍연검을 든 그녀의 자세가 곧 달려들 듯 낮아졌다.
무신과 하나가 된 장건의 눈은 둘의 자세에서 그들의 뜻을 읽었다. 그의 눈에는 마치 폭발이라도 일으키듯 거센 불길을 쏟아내고 있는 그들의 단전이 보이기도 했다. 이미 큰 수준 차이가 보이는 이상 두 마인은 목숨을 건 일격으로 승부를 볼 셈인 것이다.
장건은 굳이 그걸 피하지 않았다. 빨리 승부가 나면 그도 편하고 좋았다. 도리어 문득 애써 용쓰는 두 머저리의 모습이 재밌어서 가볍게 놀려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입을 열고자 했다.
“···”
장건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에 작은 당혹감을 느낀 순간, 조금 전과는 다르게 그것이 진짜 빈틈임을 느낀 당사량과 공손요가 땅을 박찼다.
당사량은 오른손을 칼날처럼 일자로 세워 쭉 뻗었다. 그 손끝에는 그가 지금까지 온갖 독을 먹고 소화하며 쌓아온 독기의 정화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암녹빛 독기와는 다르게 맑은 연녹색으로 반짝이며 아주 작은 한 점으로 모여 있었다. 그러나 그 조그만 빛이 얼마나 거대한 힘을 가졌는지 그 손끝 주변의 공간이 언뜻 일그러지는 듯 보일 정도였다.
공손요의 몸에선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두 손에 들린 긴 연검은 그 바람의 움직임에 마치 바닷속 해초처럼 흔들렸다. 그 움직임은 새로운 바람을 만들었고, 그렇게 일어난 새로운 바람에 연검 또한 다시 새로운 궤적을 그렸다. 결과적으로 공손요가 장건을 향해 그리는 쌍연검의 궤적은 매 순간순간 새로운 시작점과 종말점을 그리는 무한한 연환검식이었다. 시작과 끝이 모든 순간 이어지기에 어느 한 부분을 보고 다음 순간을 예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두 무공을 마주한 장건의 내면에서는 거센 노성이 터져 나왔다. 목소리만으로 세상을 뒤집어엎을 거인의 분노였다. 그리고 그 분노는 지금 그가 가지지 못한, 그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무의 이치에 느낀 당혹감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분노한 거인은 적들을 피하기보다 정면으로 맞상대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그릴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일격으로 저들을 깨부수기로 한 것이다.
장건의 양손에서 별빛이 빛났다.
다음 순간 세 무공 고수가 충돌하며 거센 파동이 터져 나왔다. 제일 먼저 밀려난 공기가 뒤에 있던 공기와 겹치며 하얀 수증기를 만들었고, 바닥에 수북이 쌓여있던 낙엽은 물론 흙바닥 또한 그곳을 중심으로 둥근 동심원을 그리며 밀려났다. 가까이 있던 나무들은 이미 썩어버린 탓에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와자작 박살 나며 뒤로 날아갔다. 천지가 쪼개지는 듯한 굉음은 그 이후였다.
흙바닥이 들고 일어나며 휘몰아친 흙먼지 덕에 그 일대의 시야는 엉망이었다. 돌이 굴러가며 타닥거리는 소리와 뿌드득하며 썩은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만이 그 흙먼지 속에 울렸다.
물론 그런 흙먼지가 오래가진 않았다. 애초에 그곳 바닥에 깔린 흙은 축축한 부엽토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걷힌 흙먼지 속에서 드러난 세 무인은 모두 멀쩡하지 않았다.
일단 독기의 정화를 일으켰던 당사량의 오른손은 그 팔꿈치 근처까지가 사라진 상태였다. 그 반만 남은 팔뚝은 장건의 오른손과 만나 있었는데, 그건 장건이 그린 강기罡氣에 그 손이 그대로 갈려 나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당사량은 장건의 강기를 뚫고 그의 손과 접촉했다.
공손요 또한 멀쩡하지 않았다. 그녀의 쌍연검은 박살 나서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장건의 왼손은 그녀의 가슴팍 한가운데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장건의 강기를 상쇄하고 두 손으로 그 왼팔을 붙잡고 있었다.
두 마인에게 치명상을 입힌 장건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이름도 모르는 공손요의 연환검식은 그의 옆구리와 왼 어깨에 깊은 자상을 남겼다. 더 심각한 것은 시커멓게 변색되고 있는 오른손이었다. 당사량의 독기가 기어코 그의 신체를 중독시킨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겉모습만 봐서는 장건의 승리로 보였다. 당사량은 양손이 무력화되었고, 공손요도 치명상을 당했다. 장건은 이제 그 둘을 떨쳐내기만 하면 될 듯 보였다.
그러나 세 사람은 그 자세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사량과 공손요의 두 눈은 패배한 자의 것이 아니었다. 둘은 여전히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세 사람은 지금 내공 대결에 접어든 상태였다.
당사량의 독공과 공손요의 마공이 장건의 몸뚱이로 치달아 들어오며 그의 기혈을 찢어발기고 내장을 망가뜨리려 했다. 장건의 단전에서도 그에 맞서 내력을 쥐어짜고 있었다.
사실 기의 지배나 내력의 활용은 장건의 수준이 압도적이었다. 만약 두 마인이 한 명씩 장건과 내력 싸움을 했다면 잠시도 버티기 어려웠을 터였다. 그러나 두 마인은 동시에 장건을 공격하고 있었고, 목숨을 걸고 일으킨 거센 마기의 불길은 장건도 쉽사리 이겨낼 수 없는 화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싸움이 길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곳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허. 이거 돌 하나로 둘도 아니고 셋을 잡을 상황이군.”
시퍼런 불길을 토하는 무신의 시선이 그 새로운 인물을 향했다. 난장판이 된 숲을 가볍게 뛰어서 다가오는 그 인물의 이름은 제상천이었다.
“내공 싸움에 들어간 건가? 굉장하군. 보통 수준의 고수들이 아니면 그럴 수 없다고 알고 있는데.”
여유로운 척 말하고는 있었으나 그의 귀에선 피가 흘러내린 자국이 있었다. 조금 전 충돌로 일어난 굉음에 고막이 상한 것이다. 언제 어디서부터 뒤를 쫓아왔는지는 몰라도 당장의 제상천은 그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장건에게 어떻게든 자신의 우위를 자랑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장건이 제상천을 본 것처럼 다른 두 마인도 그를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 모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세 사람의 내력이 얽힌 수준은 이미 간단하게 몸을 뗄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이젠 어느 한쪽이 이기기 전에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장건의 눈에 저열한 기쁨 가득한 제상천의 얼굴이 보였다. 제가의 가주. 자기 아비를 죽이고 가주가 된 패륜아. 약혼자가 없었다면 진즉에 후계자에서 나가떨어졌을 머저리. 등 떠밀리듯 동진군에 합류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떨거지.
무신은 이딴 병신에게 당하게 되는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센 고함을, 사자후를 토하고자 했다. 그 함성 한 번이면 지금 자신을 얽매고 있는 두 마인과 저 병신을 찢어버릴 수 있다는 듯.
그러나 무신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장건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신, 거인, 뭐라고 부르든 장건의 또 다른 일면이 형상화된 그 존재는 다음 순간 자신이 의식의 경계선 아래로 왈칵 빠져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해방감과 전능감은 무력감이라는 수면이 되어 그의 몸을 얽맸다.
그런 상황에 당혹감을 느끼기도 전, 거인은 다시 한번 급변해 검게 변한 세상과 자신 앞에 마주하고 선 장건을 볼 수 있었다.
그 장건은 한쪽 다리를 짝다리를 짚고 삐딱하니 서서는 한 손은 허리띠를 붙잡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턱을 긁적거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 앞에 나타난 거인, 이제는 그와 똑같아졌기에 그렇게 부르기 조금 웃기게 된 존재를 바라보았다.
그 존재는 장건의 무공이 하나로 뭉쳐 만들어진 무의 화신이면서, 동시에 그가 가진 우월감과 오만함의 결정체였다. 전날 이 무공들의 주인이 장건이 아니라 외친 것은 결국 그런 우월감을 해치는 평소 장건의 생각을 공격한 것이었다.
이런 우월감이나 오만함이 생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중원이나 신대륙이나 무공을 익혔다는 자들의 수준은 장건에게 실망감만 안겨주었다. 그렇다고 황군과 비교하자니 그런 무공 생태계를 만든 자들이 바로 그 황군이었다. 결국 그들과 하나가 된다고 다를 것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결국 장건은 자신만의 무공을 쌓아 올렸고, 그 근간을 지탱해준 것은 전생의 기억들이었다. 그건 그가 이 땅의 다른 무림인들과는 아주 다르다는 구분인 동시에 그들과의 벽을 만드는 주원인이었다.
그 기억들을 바탕으로 장건은 하늘을 날 듯 움직이고, 옛 서책에나 남아있는 도가의 가르침을 권법으로 그려내고, 손에서 용을 쏘아내는 무공을 만들 수 있었다.
하늘 아래 아주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니 그렇다고 장건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그 무공들로 악행을 한 것도 아니고, 나름 억울한 자들을 위해 힘을 썼으니 더더욱 부끄러운 것이 없었다.
저 존재가 거인이었을 적 그를 욕하던 것에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장건은 자신의 전생에게 부끄러움이 아니라 감사함을 느꼈다.
거인, 무신, 뭐라고 부르든 장건의 일부분인 그 존재가 말했다.
[그렇다! 지금 네 생각처럼 난 결국 네 일부다! 너도 네 무공이 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그렇기에 저 제가의 머저리나 무림맹의 늙은이, 그리고 황군 모두 네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장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사람이고, 가끔은 그런 망상을 해보기도 한다.
[그래! 그러니 그 생각대로 해! 네 뜻에 반하는 자는 무릎 꿇리고! 지금까지 수없이 도와왔건만 여태 네 이름을 모르는 자들에게 네 이름을 기억시켜! 천하제일인 장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장건은 피식 웃었다. 천하제일인 장건. 참 유치하지만 가슴이 뛰는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네 욕망에 충실해! 마궁을 토벌하고 서하가 다 큰 후에는 다시 방랑을 시작하겠다고? 그런 집도 뭣도 없는 삶에 뭐가 남는다는 말인가! 그런-]그 순간 턱을 쓰다듬던 장건의 손이 곧게 뻗어 그 존재를 가리켰다. 간단한 손짓일 뿐이었지만 그게 뭐라고 거인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정확히는 그를 바라보는 장건의 눈을 마주한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장건은 그렇게 무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구름이 될 순 없지만, 구름처럼 살 수는 있지. 난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
징그러운 미소를 짓고 장건의 눈을 보며 천천히 검을 뽑던 제상천은 깜짝 놀라 훌쩍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들은 것이 장건의 목소리가 맞았는지 믿을 수 없어서 외쳤다.
“뭐? 뭐라고?”
초점을 잃고 푸른 불길을 쏟아내던 장건의 눈이 스윽 움직여 그를 바라보았다. 제상천은 조금 전과는 달리 깊고 차분한 그 눈을 보며 파르르 손을 떨었다.
“어떻게 내력 대결 중 말을···”
그런 제상천의 얼굴을 보며, 장건은 마음속에서 들어 올린 손으로 가로로 긴 횡을 그렸다. 그의 마음이 그렇게 선을 그렸다.
“···”
자신을 바라보고 말을 하는 장건의 모습에 제상천은 잠시 놀랐지만, 그 이후 여전히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고는 이내 마음을 풀었다. 괜히 놀란 것에 더 화가 치밀어 웃음이 나왔다.
“···헛! 그래, 유언이라도 남기고 싶어나 보지? 어디 그러면-”
그때 저 멀리서 어떤 빛살이 날아들었다.
그 빛살은 제상천의 목덜미를 스치고 저 혼자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둥근 횡을 그려서는 공손요와 당사량을 지나고 마침내 장건의 앞에 꽂혔다.
그것은 청룡이라는 이름을 가진 칼이었다.
그 후 그 칼날이 위이잉 떨리는 순간, 장건을 둘러싸고 있던 세 사람의 목에 붉은 실선이 생기고, 곧 투두둑 잘려 나간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바닥에서 데구루루 구르는 제상천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어릴 적 읽었던 옛날이야기 속 신선이 썼다는 무공이었다. 그 신선은 허리에 검을 차고 있지만 손으로는 뽑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그의 의지가 서면 칼집에 잠들어있던 검이 저 혼자 뽑혀 악귀와 요괴들을 물리친다던 이야기.
그 무공을 이기어검以氣御劍이라 한다고 했었다.
제상천의 마지막 상념은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