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17)
217화
* * *
“이거 이 친구 괜찮을는지 모르겠군···”
순우현은 조금 전 굉음이 터져 나온 방향으로 움직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전투는 끝났다. 무림정천대의 기습과 남궁가의 전향은 성공적이었다. 물론 완승이라도 표현하기에는 죽고 다친 병력의 숫자가 꽤 많았지만, 어쨌든 무림정천대는 마궁의 추적대를 물리쳤다. 이제 남궁가의 도움을 받아 그대로 마궁 안으로 파고들어 항우 부활 의식만 막아내면 됐다.
“그 굉음의 정체를 모르지 않습니까, 순우 선생. 듣기로 장 무사의 무공에서 천둥소리가 터져 나오던데, 아마 그 무공의 소리가 아니었겠소.”
순우현이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그와 함께 움직이는 무림맹주 혁련위진이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원주민들의 대전사도 함께였는데, 그들 세 사람 모두 장건을 돕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나머지 무림정천대원들은 지금 싸움터를 정리 중이었다.
“중간부터 공손 씨의 우두머리가 사라졌는데, 그 여자와 당가의 우두머리가 힘을 합쳐 장건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지금 우리가 가고 있지요.”
말을 끊다시피 대답하는 혁련위진의 목소리에 순우현은 슬쩍 눈가를 찌푸렸다. 차분한 척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묘하게 흥분한 듯한 혁련위진의 목소리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단 급한 것은 장건 쪽이었기에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달렸다. 조금 전까지 마인들과의 격렬한 전투 중이었으니 흥분했을 만하다고 여겼다.
약간 뒤로 처져 있던 미쳐 날뛰는 말은 말없이 달리며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은 우거진 숲이 별안간 확 트인 공터로 변한 장소에 도착했다. 높은 나무와 잎에 가려 약간 어둡던 시야가 갑자기 훤해진 햇빛에 잠시 마비되었다.
그 시야가 다시 멀쩡해진 순간 그들이 본 것은 서로 뒤엉켜 선 장건과 두 마인, 그리고 그들을 앞두고 선 제상천의 모습이었고, 동시에 어디선가 날아든 빛살이 장건을 제외한 세 사람의 목을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었다.
순우현은 그 짧은 순간 허공에서 번쩍 그려진 궤적을 보고 아득함을 느꼈다.
“무슨···?”
빛살 다음은 바닥에 떨어져 데구루루 구르는 머리통이었고, 그다음은 풀썩풀썩 쓰러지는 시체들이었다.
이제 서 있는 것은 장건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이쪽 세 사람을 향했다.
순우현은 엉망진창이 된 주변 풍경과 바닥에 쓰러진 두 마인의 모습, 그리고 역시 엉망진창인 장건의 상태를 보고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벙긋거렸다.
“장건 자네···”
그렇게 이쪽을 보던 장건이 갑작스레 풀썩 쓰러졌다. 순우현이 그 모습을 보고도 조금 전 본 광경에 압도되어 잠시 멍하니 서 있는 동안, 미쳐 날뛰는 말은 재빨리 장건에게 달려갔다. 그는 침착하지만 빠른 손길로 현재 장건의 부상들을 확인하더니 허리띠 주머니에서 가루약과 붕대를 꺼내 응급조치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차 한 순우현도 얼른 장건에게 다가갔다. 쓰러진 장건과 약을 뿌리고 붕대를 감는 대전사의 모습, 그리고 그 옆에 박혀서 아직도 미약하게 떨리고 있는 칼의 모습이 보였다.
순우현은 그 떨리는 칼날의 모습을 보며 제상천이 죽기 전에 했던 것과 같은 무공을 떠올렸다. 신화나 옛날이야기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무공. 이기어검. 하지만 차마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혹시라도 이 자리에 있는 두 사람이 그 단어를 듣고 함부로 떠들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황제 폐하에게 충성하는 자로서 그건 너무 불경한 생각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떨림이 잦아드는 칼날을 바라보던 순우현은 혹시나 혁련위진이 그와 같은 단어를 떠올리진 않았을까 싶어 흘낏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약간 당황했는데, 그건 혁련위진이 장건이나 그의 칼에 관심을 보이기보다는 그 앞에 죽은 제상천을 수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순우현의 시선을 느꼈는지 혁련위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거 참··· 상황이 이상하게 굴러가는군.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조금 전 제상천 가주를 살해한 것이 장 무사인 듯한데···”
얼핏 안타깝다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순우현은 그게 꾸며낸 모습임을 짐작했다. 그리고 수백 년, 어쩌면 천년을 뛰어넘어 중원에서 수만 리 떨어진 곳에서 되살아난 전설의 무공이 저 남자에겐 당장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혁련위진의 태도는 마치 장건의 명성에 흠집을 내기 위한 빌미를 잡았다는 듯했다.
그건 어쩌면 이미 이 토벌을 서부의 승리라고 여기고 그 이후 논공행상을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저 동진군 내에서 커지고 커진 장건의 명성을 자기 자리의 위협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순우현은 무림맹주에게서 무림인이나 협객보다는 장안의 정치꾼들 모습을 보았다. 그가 황제에게 의룡검을 하사받은 이유가 그의 무공과 협행 때문임을 생각하면 참 황당한 순간이었다. 그는 혁련위진에게 본래부터 별 기대가 없었음에도 새삼 묘한 실망을 느꼈다.
순우현의 손이 이젠 완전히 떨림을 멈춘 장건의 칼을 챙겼다.
“이건 당사자 이야기를 좀 들어봐야 하지 않겠나? 장건 이 친구가 함부로 남을 해칠 사내는 아닌데. 아니, 애초에 그 친구는 왜 여기 있는겐가? 자기 가문 무사들은 어디 두고?”
“아무래도 제상천 가주가 장 무사를 돕고자 했던 듯한데···”
“그럼 그의 시체는 자네가 챙기게. 일단 이 장소에서 벗어나야 할 듯하군. 대기 중에 미약한 독기가 흐르고 있어. 오래 있어 봐야 좋을 것 없을 게야.”
혁련위진은 자신을 완전히 아랫사람 부리듯 하는 순우현의 태도에 잠시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그 표정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고, 그는 곧 잘려 나간 제상천의 머리와 몸뚱이를 수습했다.
그가 시체를 수습하는 동안 대전사와 순우현은 장건의 응급처치를 마쳤다. 순우현이 한 것은 품에서 아주 가는 금침 몇 가닥을 꺼내 시커멓게 변한 장건의 오른팔 위에 뜨문뜨문 꽂은 것이었는데, 그 금침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새카맣기만 하던 팔뚝의 색이 금세 옅어지고 있었다.
미쳐 날뛰는 말은 조심스럽게 장건을 업어 매고는 말했다.
“우리 쪽 아이들 중에 주술을 배우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가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음. 가능하다면 중원인 의원에게 보이고 싶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 방법뿐이군.”
그렇게 대전사가 장건을 들쳐 매고, 혁련위진은 제상천의 시체를 수습하자 그들은 수하들이 모여 있을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떠나던 순우현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죽은 두 마인의 시체가 보였다. 그리고 그들과 장건이 만들어낸 폐허도. 그는 새삼 마공의 힘과 그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이 느끼며 몸을 돌렸다.
그들이 떠나자 그 공터는 아주 조용해졌다. 고수들의 생사결로 인한 파괴로 풀과 나무는 죽었고, 땅은 뒤집어졌다. 지금 이 자리에 살아있는 존재는 없는 듯했다. 바람마저 불지 않으니 그곳이 진정 죽음의 땅이었다.
그렇게 영원히 죽은 것들만 굴러다닐 듯하던 순간도 잠시. 그 난리 통에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엉망으로 까뒤집힌 흙과 나무의 무더기에서 꼬물꼬물 벌레 하나가 기어 나왔다. 이름 모를 그 벌레는 흙더미를 빠져나와서는 자신의 더듬이를 까딱거리며 잠시 상황을 살폈다.
그 벌레는 곧 더듬이에 걸린 향을 따라 움직였고, 만찬과 만났다.
잠시 후 소식을 들은 다른 숲의 청소부들도 모여들었다. 그들에겐 자신들이 씹고 뜯는 존재가 살아있을 적에는 수많은 부하를 부리며 신대륙의 정복을 노리던 마가의 가주라는 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저 숲에 먹을거리가 생겼으니 그걸 해치울 뿐.
숲은 그렇게 한차례 홍역을 치르고도 차분하게 순환을 이어갔다. 거기에 지배와 힘의 논리는 아무 가치가 없었다.
* * *
장건은 어느 초원 위에 팔을 베고 누워있었다.
햇살은 적당히 반짝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 시원했다. 코를 스치는 풀 냄새도 좋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먼 하늘 위에서 느긋하게 흘러가는 구름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가능하다면 저 구름 흘러가는 것이나 한참 바라보며 쉬다가 스르륵 낮잠이나 한번 잤으면 했다. 그러면 괜찮은 하루가 될 듯했다.
그런 하늘 가장자리에서 불쑥 얼굴 하나가 끼어들었다. 그 얼굴은 열서너 살은 되었을까 싶은 소년이었는데, 가만 보면 장건과 똑 닮아서 사람들에게 그의 아들이라고 해도 믿을 듯했다.
그 얼굴이 장건을 내려다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풀밭에서 낮잠 자기? 이럴 거면 무공은 왜 익혔는데? 그냥 아무 목장이나 들어가서 소몰이나 했으면 됐을걸.]불만 가득한 그 표정을 본 장건은 피식 웃었다. 초원에 누워 빈둥거리는 건 빈둥거리는 것이고, 무공은 무공이었다. 무공을 익혀 강대한 힘을 얻는다고 꼭 그 힘으로 무얼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장건에게 무공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었다.
[그럼 억울한 사람들 돕는 건? 그럴 수 있는 건 무공을 익혔기 때문 아니야? 무공을 배우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을 것 같아?]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럴 수 있기에 도왔다. 여유가 있어 남을 도왔을 뿐이고, 그걸 굳이 다른 조건에서도 그럴 수 있었겠냐며 폄하하고 싶진 않았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힘주어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게 부끄럽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참 피곤하게 산다.]소년은 뚱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곧 풀썩 장건 옆에 앉아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장건은 눈을 감고 옆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슬며시 미소 지었다.
선하고 숭고한 생각도, 지저분하고 추악한 생각도 모두 그의 마음이었다. 그사이에 굳이 어떤 벽을 치고 한쪽을 없애버려야 할 것으로 취급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용납할 수 없는 자는 타인도 용서할 수 없다.
거인이 말하던 우월한 자, 더 나은 사람은 아마 단순히 더 빠르고 강한 자가 아니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스스로의 마음부터 날것 그대로 들여다보아야만 했다. 그것이 관계의 시작일 터였다.
“어? 웃고 있네요?”
“좋은 꿈이라도 꾸나 보지.”
“그런 걸까요? 어? 눈을 뜨는데요?”
장건은 그 대화가 왠지 언젠가 이미 들어보았던 대화라고 생각하며 눈꺼풀을 걷어 올렸다. 익숙한 얼굴 둘이 시야 안에 가득 찼다. 두 사람의 눈이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잘 잤어요?”
“···비랑.”
장건의 목소리는 깊게 잠겨서 갈라졌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비랑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옆에 있던 적풍도 웃었다.
“하하하! 난 보이지도 않나?”
“적풍. 이거 어쩐지 익숙한 풍경이군요.”
“어? 아, 그렇군. 조카 녀석이 자넬 처음 업어왔을 때도 지금 같았지. 뭐 그때랑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적풍이 허허 웃는 동안 장건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전신의 감각을 일깨웠다. 곧바로 지금까지 회복에 전력을 다하던 육신이 번쩍 깨어나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장건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벌써 일어나려고요? 조금 더 누워있어도···”
“괜찮소.”
장건은 자신을 계속 눕히려는 비랑의 손길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리고 잠들었던 단전을 일깨워 전신 기혈로 내공을 움직였다. 그의 의지가 서자 단전의 내공은 번개처럼 온몸을 휘돌았다. 눈 한 번 깜짝하는 동안 일주천이라 할만한 것이 끝났다. 장건은 곧 자신의 상태를 조금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공손요에게 당했던 자상은 일단 잘 아물어가고 있었다. 당장 격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면 빠르게 회복될 듯 보였다. 당사량 독기의 정수에 중독되었던 오른손도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아마 기절하기 전 보았던 세 사람이 무언가 손을 써준 듯한데, 덕분에 이쪽은 자상보다 더 빨리 회복될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주먹을 쥐어보며 상태를 확인한 장건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약간 당황했는데, 지금 그가 누워있는 곳이 푹신하게 짚을 채우고 깨끗한 천을 씌운 침대였던데다가 주변을 보니 여느 객잔의 여관방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어디요?”
약간 멍하니 묻는 장건의 질문에 비랑과 적풍은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고민하는 듯 보였다.
잠시 후 적풍이 본인 턱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그 뭐냐. 남궁 노사가 말한 강 너머의 땅 기억하나? 그 신장강이라 이름 붙인 곳을 넘어서면 마인들이 원주민들을 착취하는 농장 도시들이 있다던. 여긴 그 농장 도시의··· 장원? 관리인 저택?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군. 어쨌든 남궁 노사와 남궁 가주 덕분에 우리 모두 여기 숨어있는 중이네. 지난 싸움에서 다친 사람이 많거든.”
그 대답을 들은 장건은 문득 오른편에 창문이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오후의 햇살이 환한 가운데 그가 있는 삼층 방 창문 너머로 드넓게 펼쳐진 농장이 보였다. 그리고 그 농장 안을 오가는 사람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