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18)
218화
* * *
그 농장의 이름은 애하화愛荷華였다.
어딘가 애틋하고 아름다운 뜻이 담겨있을 것과는 달리, 그저 이 주변에 있던 원주민 부족의 이름을 대충 비슷한 중원말로 음차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 부족은 마궁의 손에 박살 나 이곳과 주변 농장들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그곳 애하화 농장은 신장강의 물길을 끌어와 벼와 밀, 콩 농사는 물론이고 과수원을 일궈 과일을 생산하기까지 했다. 당연히 그 일을 하는 것은 마궁에게 끌려온 그 일대 원주민들이었고, 마인들은 그들이 피땀을 흘려 일군 작물들을 편안한 저택에 누워서 받아먹었다.
만약 마궁이 서부 해안 도시들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역이라도 하려 했다면 원주민들의 처지는 더 심각해졌을 것이다. 계속해서 무역을 위한 잉여 작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착취당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많은 원주민들은 정말 죽을 때까지 일만 하다 눈을 감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그들이 비참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마궁의 마인들은 아무도 일하지 않았다. 사소하고 간단한 일부터 힘들고 귀찮은 일까지 모두 원주민 노예를 부리며 그 과정에서 반항하는 자는 간단히 마공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전사들은 어머니 대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맞서 싸웠으나 결국 쓰러져 죽었다. 주술사들은 어둑한 지하실에서 고문당하며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온 부족 주술의 비밀을 털어놓아야 했다. 그들을 보살피던 정령들은 비현실의 세계에서 갈고리에 꿴 생선처럼 이 땅으로 끌려와 도살당했다. 어미와 아이는 각기 다른 농장으로 끌려가며 생이별하고, 동족을 배신하고 비굴하게 허리를 숙인 자들은 채찍을 들어 자신의 친척들을 때리며 학대했다.
백 년 전 서쪽에서 온 침략자들은 그렇게 강철과 마공의 힘으로 이 땅을 파괴했다.
“···정말 끔찍한 일이네. 결국 이쪽 호수 근방에 있던 부족들은 모두 멸망했고, 그나마 노예가 되지 않은 자들은 모두 남쪽으로 도망쳤다더군. 지금 무림맹 사람들은 지금 이들의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그때 누군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마궁의 농장 도시들에 대하여 설명하던 적풍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곧 밖에서 약간 어설픈 중원말이 들렸다.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오세요.”
문 너머의 목소리에 적풍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고, 비랑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후 쟁반을 든 소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눈길에 잠시 멈칫했으나 곧 시종일관 눈을 내리깔고는 침상 곁에 있던 탁자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허리를 깊게 숙이며 말했다.
“물러가겠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허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착잡한 눈으로 그런 소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비랑은 아차 하더니 말했다.
“그래요, 가서 쉬어요.”
그렇게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소녀는 허리를 펴고 뒷걸음질로 방을 떠났다. 그녀가 방문을 닫자 비랑은 탁자 위에 놓인 쟁반에서 죽그릇과 숟가락을 집어 장건에게 다가왔다. 장건은 그런 죽과 숟가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었다. 제 손으로 죽을 떠 장건에게 먹일 생각이었던 비랑의 손가락이 겸연쩍게 꼼지락거렸다.
장건이 물었다.
“방금 그 아이도?”
“···그렇네. 듣자 하니 이 농장의 건장한 남자들은 모두 서부 원정에 끌려갔고, 지금 농장에 남아있는 건 여자와 노약자들뿐이라더군.”
“노약자라고?”
적풍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남자가 없지만 농장은 계속 굴리기 위해서라던데. 어른들은 모두 농장에 나가 있고 지금 이 저택에서 일하는 건 거의 다 저런 아이들이네.”
“내 말은 그게 아니었소.”
“뭐?”
장건은 적풍의 반문에 대꾸하지 않고 죽을 떴다. 혹 장건이 신사천에 있다는 제자를 떠올리고 소녀에게 신경 쓰는가 했던 적풍은 눈을 끔뻑거렸다. 그렇게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코를 긁적거리며 중단되었던 설명을 이어나갔다.
싸움이 끝난 건 이틀 전이었다. 당가와 공손가의 마인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 격렬히 저항했고, 결국 무림정천대는 이기긴 했으나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내부의 전향자와 기습이라는 이점을 가지고도 미쳐 날뛰는 마인들의 힘에 적잖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물론 그를 바탕으로 이뤄낸 성과는 고무적이었다. 마궁의 정예병력을 몰살시켰고, 그 최고 지휘관 중 하나는 전향시켰으며, 나머지 둘은 목을 베었다. 남궁 가주의 정보대로라면 아직 가주 아래 지휘관인 공손 장군과 모용 장군, 제갈 장군이 서쪽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으나 어쨌든 이제 마궁은 최고 결정권자들을 잃게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순우현 등 무림인 쪽 인사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길 원했다. 부상자와 사망자를 수습해야 하는 건 물론 장건이 깨어나길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날? 왜?”
죽을 뜨며 이야기를 듣던 장건이 눈썹을 까딱이며 물었다. 적풍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일단 계속 듣게.”
그 상황에서 이곳 농장을 은신처로 삼자 제안한 것은 남궁가 측이었다. 당연히 무림인 측은 반발했지만, 남궁가의 이름이면 원정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농장이나 관리하는 자들 입을 막는 건 간단하다는 설명과 어쨌든 인원들을 수습할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지 않냐는 설명에 순우현이 결단을 내린 것이다.
“원래 우리가 매복하고 있던 길 끝에 신장강을 건널 다리가 있고, 그 너머에 농장이 있다고 했지? 여기가 그 농장이네. 오는 데 반나절도 안 걸렸지.”
그렇게 마궁의 농장으로 숨어든 무림정천대는 지금 휴식하며 다음 목표, 항우의 부활 의식이 준비되고 있다는 패왕보霸王堡로 나아갈 계획을 정비하고 있었다. 남궁가의 주장대로 농장을 관리하던 자들은 남궁이라는 이름에 냅다 머리를 박을 뿐 그들과 함께한 무림정천대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하는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방안에 처박혀서는 노예들을 시켜 시중을 들 뿐이었다.
“남궁 가주가 살았소?”
“아, 죽진 않았네. 하지만 골골거리고 있지. 들어보니 마공을 이용하면 회복할 수 있다던데, 그러자면 사람을 희생시켜야 해서 그냥 그렇게 죽을 작정이라더군. 순우 선생에게 자신들의 전향 의지를 증명한다면서. 중원인들은 무슨 일이든 왜 항상 그렇게 목숨 거는 걸 좋아하는 건가?”
“글쎄. 배가 불러서 그런 거 아니겠소.”
적풍은 장건의 건조한 대꾸에 피식 웃었다. 장건은 가끔 냉소적일 때가 있었다.
“어쨌든 순우 선생은 자네가 깨어나는 대로 자신을 불러달라 했네. 자네를 보고 할 말이 있다고.”
“그게 뭐요?”
“음, 그게··· 사실 지금 무림인들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 지금 자네 손에 결딴이 난 마궁의 가주가 몇인가? 사실상 지금 전쟁은 자네 혼자 치르고 있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잖은가? 그런데-”
그때 원주민 소녀가 닫고 떠났던 방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왜소한 노인 하나가 등장했다.
“오! 깨어났군, 장건! 잘 잤나?”
노인은 순우현이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등에 멘 비파를 딸랑거리면서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장건은 죽을 뜨던 손을 내리고 인사했다.
“객잔이 따로 없군요.”
순우현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적풍과 비랑은 갑작스레 등장한 그를 보며 표정이 굳었다. 순우현은 웃는 낯으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장건을 잘 보살펴 주었네. 그래서 미안하네만, 잠시 둘이 대화를 할 수 있겠나?”
비랑과 적풍은 굳은 표정으로 그와 장건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뭔가 말하고 싶은 듯 머뭇거렸으나, 눈이 마주친 장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이 방을 나가고 장건은 들고 있던 죽그릇을 옆 탁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뻐근한 통증에 잠시 눈을 감고 신음을 흘렸다. 순우현은 뒷짐을 지고 서서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건은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빙빙 돌려 풀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 느긋하게 몸이 낫는 걸 기다리는 것보다 이렇게 풀어주는 것이 좋았다.
순우현은 아무말도 없이 본인 볼일만 보는 장건을 보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장건이 순우현은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왜 한숨을 쉬시오?”
“···왜 제상천을 죽였나?”
“그가 날 죽이려 들어서.”
순우현은 장건의 즉답에 잠시 말문을 닫았다. 하지만 곧 장건다운 대답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가 먼저 칼을 뽑았겠지. 사실 나나 다른 사람들도 다 짐작하고 있었네. 그가 자기 아비를 죽였다는 의혹이 자네 입에서 나와 무림맹주가 퍼트렸음은 알만한 자는 다 알고 있었으니까.”
“제가 사람들이 그걸 문제 삼고 있소?”
순우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섬 소저와 제가의 무사들은 침묵하고 있네. 아마 자네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거겠지. 지금 무림맹 무사들 사이에서 이상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건 무림맹주 혁련위진이야.”
장건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짜증이고 뭐고 그 양반 지치지도 않는가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무림맹이 정말 성장하려면 아마 맹주부터 갈아치워야 할 것이다.
“···그래, 자네도 대충 무슨 일인지 알겠지. 아마 이번 토벌이 끝난 뒤를 생각하는 모양이던데, 자네의 공에 어떻게든 흠을 좀 내보자는 생각인 듯하네.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 신사천에는 아직 제가의 힘이 많이 남아있고 그 힘과 맹주 본인의 권력을 이용하면 자네에게 적잖은 타격을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장건은 순우현의 말에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는 침대맡에 걸터앉아 몸 여기저기를 꿈틀거리기 바빴다. 곧 자리에서 일어난 장건은 방 한가운데로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내 공에 흠을 내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시오. 상관없으니까.”
“···자네?”
순우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는 한층 가라앉은 눈으로 장건을 바라보았다.
“지금 토벌대에서 자네만큼 큰 공을 세운 자가 없다는 건 알지?”
“다들 좀 더 분발하셔야겠군. 한낱 낭인보다 못하니 무림 동도들이 비웃겠소.”
장건은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방 가운데 있던 탁자를 들어 옆으로 구석으로 옮겼다.
“이 토벌이 끝나면 자네가 받을 포상에 관심 없다는 건가? 조금 비약이지만 폐하께서 잘 봐준다면 자네는 이 일대의 군왕이 될 수도 있어.”
“난 토벌이 끝나면 집에 갈 것이오. 기다리는 제자가 있어서.”
순우현의 눈빛이 묘해졌다.
“···자네, 내가 지난번에 했던 말 기억하나?”
탁자를 밀어내고 방 한가운데 선 장건은 천천히 두 무릎을 구부리며 대답했다.
“이번 토벌에서 최대한 공을 세우라던 것 말이오? 지금보다 더 공을 세우려면 바다 건너 대진까지 토벌해야 할 것 같은데.”
“갑자기 대진이 왜 나오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내 이야기의 뜻을 짐작하지 못했나? 내가 공을 세우라 한 것은 자네가 황실에 반항할 뜻이 없음을, 충실한 제국의 신민임을 증명하라는 이야기였네. 그런데 그 포상을 다 거부하고 재야로 숨어들어 버리면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렇게 포상이고 뭐고 다 거부해버리면 폐하의 관심이 안 좋은 쪽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말이네.”
순우현의 열변이 쏟아져나오는 동안 장건은 느릿느릿 두 손발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순우현은 그 느긋하고 둥글둥글한 동작들에서 자연스럽게 황실 무공과는 다른 무공의 길을 보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 유설 아가씨와의 혼인이라도 준비하게. 그럼 그런 자네의 소탈함도 오히려 장점이 될 테니까.”
“난 아직 혼인 생각 없소.”
순우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뭣이? 그럼 아가씨 입술을 가져가 놓고 그냥 모른 척할 생각이었단 말인가!”
“훔쳐 가긴. 따져보면 훔친 쪽은 그쪽이지.”
장건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면서도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건 권법이라기보다는 느긋한 춤을 보는 듯했다.
화를 내볼까 하던 순우현은 얼른 전략을 바꿨다. 화를 낸다고 장건이 곤란해할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그럼 이 친구야, 이제 약관에 이른 처자의 입술을 훔쳐 가고도 그냥 도망칠 생각이었단 말인가? 어느 쪽이 먼저 들이박았는지는 굳이 따지지 말게. 여자 쪽이 그렇게 다가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네의 도둑질에 크게 당했다는 말이니까. 그리고 유설 아가씨의 어디가 부족해서 그러는 건가? 집안이야 당연히 천하에서 견줄 곳이 없고, 그분 미모도 장안에서 손에 꼽히는 정도인데··· 혹 닷 푼 소설에 푹 빠지신 것 때문에 그런가? 물론 그 취미가 고상한 것은 아니지만 그게 누구 피해 주는 것도 아니고-”
“유설 공주의 문제가 아니오. 내 문제요.”
열변을 이어가던 순우현이 멍하니 되물었다.
“자네 문제?”
“혼인이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그 사랑에 남은 평생을 배우자에게 충실하리라 맹세하는 것이오. 그리고 가정을 꾸리는 거지.”
장건의 움직임은 말을 이어가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느릿느릿하지만 끊어짐이 없고, 부드럽지만 약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난 유설 공주를 사랑하지 않소. 그녀 또한 나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까지 깊은 것은 아닐 것이고. 결정적으로 난 어느 왕부에 들어앉아 방랑을 멈출 생각이 없소. 그러니 우리 둘을 엮어봐야 두 사람 모두 불행해질 뿐이오.”
순우현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장건의 연공은 조금 전까지 부상을 당해 의식이 없던 자가 보여주는 연공이라기엔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이번 토벌이 끝나면 제자에게 돌아가겠다 하지 않았나?”
“녀석이 다 크면 다시 떠날 것이오. 아마 몇 년 걸리겠지.”
뒷말은 평생 걸리는 혼인과는 다르다는 것일 터였다. 결국 순우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난 이제 모르겠군. 그럼 자네 마음대로 하게. 나중에 폐하께서 자넬 잡아 오라 명하시면 난 거부하지 않을 게야.”
면면부절 이어지던 장건의 권법은 그가 처음 시작할 때와 같이 두 무릎을 살짝 낮추고 두 손을 가슴께로 들어 올린 자세가 되어 끝났다. 장건은 그 상태로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후 눈을 뜨고 바로 서서 순우현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말 하려고 찾아오셨소?”
“···그것도 있고, 자네 상태를 좀 보려고 온 게지. 걱정했는데 아주 멀쩡한 것 같군.”
장건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순우현은 그 꼴을 보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주 멀쩡한 것 같으니, 지금 나하고 함께 가세.”
“어딜?”
“항우의 의식이 진행되는 곳이 패왕보라는 말은 들었나? 그곳으로 나아갈 계획을 짜는데 혁련 씨 그 친구가 자꾸 자네를 빼는 방향으로 다른 이들을 선동하고 있네.”
장건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냥 밀어붙이는 건 어떻소? 황군 태학사가 그렇게 하자는데 누가 뭐라 할 것이오?”
“나야 이번 토벌이 끝나면 장안으로 돌아가지만 다른 아이들, 그러니까 황군은 계속 이곳에 머물며 무림맹과 공조해야 하네. 지금 이곳에 모인 무림인들은 당장 신대륙 무림의 실세들이고, 그들과 굳이 척을 저가며 내 의견을 강제하고 싶지는 않아. 앞으로 이쪽 지방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면 황군이나 무림맹이나 서로의 도움이 절실할 게야.”
장건은 연공 후 뻐근하던 오른팔이나 붕대에 감긴 상처들이 확연히 나아진 것을 느끼며 어깨를 빙빙 돌렸다. 누구와 한 푸닥거리 정도는 할만할 듯했다.
“뭐, 그럼 갑시다.”
* * *
“그래서, 그들이 누구더냐?”
“남궁가라 주장하는 자들은 남궁가가 맞아요. 그렇지 않다면 감칠 그 지독한 감독관이 그렇게 겁먹진 않았을 테니까.”
“그들이 데려온 자들은?”
“어느 가문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어요. 그냥 계급 낮은 마인들인가 싶었는데, 잘 보니 남궁가 마인들과 동등한 입장으로 대화를 하더군요.”
“음··· 상관없다. 가문과 친한 이들이니 그들도 가문일 터이지.”
“하지만···”
“왜 그러나?”
“···그들은 그리 난폭해 보이지 않던데요. 몇몇은 다른 부족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들과 함께 있으니 남궁가 사람들도 유난히 친절하고요. 원래 그 씨족이 그런 편이긴 하지만···”
남자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들어 소녀의 두 뺨을 감쌌다.
“남궁 씨들이 그런 편이긴 하지. 하지만 그래봐야 그들도 지난 백 년 동안 우리와 선조들을 착취한 괴물들이라는 건 다르지 않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우린 기회가 없어. 저들이 떠나기를 기다리면 좋겠지만, 다른 농장들과 모두 같은 날 일어나야만 해. 아니면 서쪽으로 떠났던 자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단 말이야.”
남자의 눈을 바라보던 소녀는 스르륵 눈을 내리깔았다.
“···네.”
남자는 손을 내려 허리춤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 소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지?”
“···알아요.”
“미안하다. 이런 위험한 일을 맡겨서.”
손에 쥔 그 작은 병을 바라보던 소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 눈빛에 굳은 의지가 돋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잘 해낼게요.”
참으로 단단한 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