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19)
219화
* * *
“아, 이거 받게.”
방을 나서려는 장건에게 순우현은 뒷짐 지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얌전히 칼집 안에 잠든 청룡이 들려 있었다.
“어디 갔나 했소.”
“정말 좋은 칼이더군. 폐하의 무기고에도 이런 물건은 많지 않을 게야.”
장건은 그걸 받아 들며 말없이 옅게 웃었다. 장건은 살면서 이 청룡보다 좋은 칼을 보지 못했는데, 순우현은 그냥 괜찮은 칼이라는 정도로 칭찬하고 있었다. 하긴 천년 동안 중원의 온갖 명품들이 흘러 들어갔을 황궁이다. 상상 이상의 보물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장건은 그런 보물들을 한가득 쥐여준다고 청룡과 바꿀 생각이 없었다. 청룡은 그의 칼이었고, 그는 청룡의 주인이었다.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칼집 안 청룡이 위이잉-떨렸다.
순우현이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뭐한 건가?”
“내가 한 것이 아니오.”
장건은 그렇게만 대답해주고 방문을 나섰다. 순우현은 그런 장건과 청룡도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한발 늦게 장건을 따라 방을 나섰다.
“같이 가세. 자넨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잖나.”
방 밖으로 나오자 널찍한 복도가 나왔다. 양옆으로 긴 복도가 있고, 그 복도와 연결된 방 여럿이 있는 구조였다. 복도의 가운데로 걸어가자 저택 중앙에서 각 층을 연결하는 계단이 나왔다. 장건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그 계단을 내려갔다.
순우현이 뒤로 따라붙으며 말했다.
“자네 이 저택 와봤나? 어떻게 알고 내려가나?”
“대충 알 것 같소.”
알쏭달쏭한 대답에 순우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동안 장건은 저택 일 층으로 내려와 곧 한쪽에 있던 커다란 대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저택 거실에 모여서 회의하던 무림인들의 시선이 단번에 그에게로 쏠렸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거실 회의의 모습은 지난날 모닥불 회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참석 인원의 대부분은 거실 여기저기에 흩어져 앉거나 서 있었고, 그 중앙에서 무림정천대의 수뇌부 대여섯이 회의를 주도해 나가는 모양새였다. 아마 무림인들은 그들의 회의를 지켜보다가 의문점이 생기면 손을 들고 질문을 할 것이다. 그 의문이 합당하다면 수뇌부는 회의 방향을 조금씩 수정하고, 부당하다면 부당한 이유를 설명할 터였다.
본래 많은 문파의 연맹체인 무림맹도 이렇게 열린 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맹주와 원로들의 권위 때문에 아무나 입을 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무림정천대에서 가장 강한 권위를 가진 것은 황군이었고, 그 황군에겐 본질적으로 맹주나 가장 말단 무사나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어쨌든 협객이라는 것들은 무법자에 가까운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황군은 회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지 않았다. 토벌 이후 무림맹의 영향력 확대를 생각한 순우현이 강압적인 언사를 삼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회의를 주도하는 것은 무림맹의 수뇌부였지만, 말단 무사가 뜬금없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해도 황군 눈치를 보느라 그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진풍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의식을 찾은 모양이군, 장 무사. 몸은 좀 괜찮나?”
거실의 침묵을 깬 것은 맹주 혁련위진의 인사였다. 그는 겉으로 보기엔 장건이 빨리 의식을 되찾아 기쁜 듯 보였다. 하지만 장건은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자신의 몸을 훑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마 지금 그의 몸 상태가 어떤지 파악하고자 하는 것일 터였다.
“덕분에.”
장건은 그리 짧게 대답하고는 누군가를 찾듯 거실 안을 쭈욱 둘러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혁련위진이 말했다.
“마침 잘 되었군, 자네 이야기도 하고 있었는데. 이리 와서 회의에 참석하게.”
그러나 장건의 시선은 그런 혁련위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거실 안 무림인 사이에서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 자신의 말이 무시당한 걸 깨달은 혁련위진의 표정이 굳었다. 그걸 본 맹주 주변에 있던 무림맹 무사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외랑대원 장건! 맹주님 말씀이 들리지 않나!”
“허허, 됐네. 장 무사는 그럴 자격이 있네.”
“하지만 맹주님···”
“장 무사는 마가의 홀로 가주 넷을 쓰러뜨렸네. 이번 토벌의 최고 공적이지. 어쩌면 중원의 황제 폐하가 관직을 내리실지도 모를 일이야.”
“그렇다고 아직은 일개 낭인인 자가 무림맹주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건···”
“어허, 됐다고 하지 않았나.”
그 무사는 혁련위진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얼른 고개를 숙이며 승복의 뜻을 표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무림맹주를 무시하는 장건을 참기 힘들다는 듯 묘한 불만의 몸짓을 보이고 있었다.
당장 두 사람의 모습만 보면 한낱 낭인인 장건이 토벌대에서의 공적을 앞세워 오만방자하게 무림맹주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실 안에 있던 무림인 중 몇몇은 그런 모습에 공감한다는 듯 두 눈을 찌푸리며 장건을 바라보았다.
물론, 장건은 두 사람이 무슨 연극을 하든 잔치를 벌이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처음부터 찾던 사람을 찾아 그에게 다가갔을 뿐이다.
“나 기억하시오?”
“···흐, 잊어버릴 수가 없지.”
수염이 산적처럼 덥수룩하게 난 무사였다. 그는 거실 한쪽 구석에 앉아있었는데, 장건이 다가와 말을 걸자 껴안고 있던 검집으로 바닥을 찍으며 그 얼굴에 어울리는 우락부락한 몸을 일으켰다.
“그쪽은 내 이름 기억하시나?”
“제광량. 규율원인가 뭔가 했던 듯한데.”
“율법원이었어.”
장건은 고개를 까딱였다.
“그렇군. 섬 소저는 어디 있소?”
제광량, 못난 제상천을 따라 토벌대에 합류해서 무림정천대까지 온 제가의 무사는 그 말을 듣고 당장에 화가 난 짐승처럼 이빨을 드러냈다. 두 눈에선 불꽃이 튀는 듯했다.
“네놈이 그분을 왜 찾아?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약혼자가 어쩌다 죽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소.”
제광량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검 손잡이를 붙잡았다. 잔뜩 부풀어오른 팔뚝이 당장이라고 검을 뽑을 것 같았다.
“감히···”
하지만 그는 끝내 검을 뽑지는 않았다. 당장 검을 뽑아도 장건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아는 탓이었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상당히 냉정한 무사였다.
거실의 시선이 단번에 그 둘에게로 쏠렸다. 지금 제가의 무사들은 모두 저택 한쪽에 자신들만의 구역을 만들고는 거기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제광량은 그중 유일하게 회의에 참석한 제가 무사로, 회의 내용을 알리기 위해 자리만 채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장건이 나타나 제상천의 죽음에 대하여 말을 꺼내고 있으니 무림인들 모두 흥미진진하다는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머리에 조금 전 혁련위진이 무시당하던 장면은 벌써 흐려지고 있었다.
그걸 느낀 혁련위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잠시지만 표정을 감출 생각도 하질 못했다. 그리고 모두 장건과 제광량에게 시선이 쏠린 와중에 그런 맹주의 표정을 본 세 사람이 있었다. 그의 측근 제운성, 순찰대원 적세인, 그리고 거실 입구에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순우현이었다.
“···그분은 제가의 가모家母이시다. 함부로 부르지 말라.”
제광량은 검 손잡이에서 파르르 떨리는 손을 떼며 그렇게 말했다. 장건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섬 부인이라고 하겠소. 만날 수 있겠소?”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여쭤볼 수만 있을 뿐.”
“그럼 그렇게 해주시겠소? 어쨌든 제상천의 마지막을 알려주어야 할 듯하니.”
잔뜩 일그러져있던 제광량의 표정은 천천히 무표정으로 변했다. 역시 겉모습과 달리 꽤 냉정한 인물이었다.
“그렇게 하지.”
“음.”
긍정의 답을 들은 장건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마치 볼일 다 봤으니 떠나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 떠나기 전에 우리에게도 해명을 해야 하지 않겠나, 장 무사?”
몸을 돌렸던 장건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의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혁련위진의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그의 말에 아무 반응이 없던 장건이 스르륵 몸을 돌렸다. 장건의 시선을 마주하게 된 혁련위진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제가의 가주께서는 대대로 무림의 명숙이셨네. 제가는 지난 백 년 사이에 무림맹이 만들어지는 것에도 큰 도움을 준 가문이기도 하지. 그러니 자네가 그런 무림명숙을 살해한 정황이 분명한 지금, 정의를 위해 결성된 무림맹의 이름을 걸고 그 진상을 명명백백히 확인해야만 하네.”
거실에 모여있는 무림인 중 어리석은 자는 맹주의 말이 그럴듯하다 느끼며 장건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냈고, 머리가 돌아가는 자는 맹주가 이 사건을 빌미로 장건을 견제하려 함을 깨달았으며, 현명한 이는 편협해진 맹주의 시야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이 안타까워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은 문무백관이 목소리를 높이는 장안이 아니라 무림이었다.
“음. 그 헛소리 어디에 내가 그쪽에게 해명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군. 그러나 답을 얻고 싶다면 당신에겐 간단한 방법이 있소.”
혁련위진을 돌아본 장건은 왼손으로 허리에 맨 청룡의 칼집을 가볍게 추슬렀다. 칼을 뽑기 전에 가다듬는 자세였다. 그리고 그 자세가 말하는 바는 분명했다.
답을 얻고 싶다면 칼을 뽑아라.
“···”
혁련위진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흘낏 거실 안 무림인들의 반응을 살폈는데, 그의 측근을 제외한 대부분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맹주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그의 언동에 넘어가 장건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내던 자도 있었다. 칼로 답을 얻으라는 장건의 태도에 모두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장건과 혁련위진 사이에 있던 무림인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 길을 텄다. 마치 당장 이 거실 안에서 싸우라며 자리를 만들어주는 분위기였다.
혁련위진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장건을 노려볼 뿐 잠시 말이 없었다. 장건은 그 시선이 아주 작게, 그러나 눈이 빠져라 자신을 살피고 있음을 느꼈다. 아마 이틀 전 크게 다쳐 조금 전까지 침대에 누워있던 놈이 무슨 자신감인지 파악하고자 하는 눈길일 것이다. 지금 싸우면 자신이 이길 수 있을지도 가늠하려는 것일 테고.
장건은 굳이 기세를 일으키거나 공격적인 자세를 잡지 않았다. 굳이 혁련위진을 도발하거나 강한 척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검을 뽑는다면 장건도 마주 칼을 뽑을 뿐이다.
마침내 혁련위진의 오른손이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장건은 그가 결심이 섰음을 느꼈다.
그 순간 거실 입구에 서 있던 순우현은 누군가 다가오는 걸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은 순우현을 보고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이내 문턱을 넘어 안쪽으로 들어가 담담하게 장건을 불렀다.
“장 무사.”
익숙한 목소리에 장건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동시에 빈틈을 본 혁련위진은 본능적으로 검을 뽑았다. 황제가 수만 리 너머 협객에게 내린 보검 의룡義龍이 시퍼런 섬광을 그렸다.
“···”
거실 안이 조용해졌다. 맹주 혁련위진의 움직임을 본 자나 보지 못한 자나 모두 당장 펼쳐진 장면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로누운 의룡검이 파르르 떨렸다. 그 칼날은 허공을 꿰고 있을 뿐이었다. 혁련위진의 일격은 장건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 그의 자세는 오른손에 검을 들고 앞으로 쭉 뻗은 깔끔한 찌르기 자세였다.
그리고 장건은, 왼쪽 어깨 너머로 혁련위진의 찌르기를 흘리고는 그의 안쪽으로 파고들어 오른손의 검결지로 쿡, 목젖을 찌르고 있었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으나 누가 이겼는지는 너무나 분명한 장면이었다.
이미 지난 공적들로 대단한 고수라 이름이 높아지던 장건이었으나 지난 십수 년이 넘도록 무림의 최고 고수라 칭송받던 혁련위진의 이름값에는 모자라던 것이 사실이었다. 오히려 장건 홀로 세우는 공적 때문에 마가의 가주들이 사실 별 볼 일 없는 놈들 아니었냐는 말까지 나오던 실정이었다.
물론 이제 그렇게 말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잠시 목젖을 짚은 자세를 유지하던 장건은 곧 옆으로 스윽 빠져나왔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옷깃을 털어낸 그는 조금 전 자신을 부른 여인에게 다가갔다.
“섬 부인.”
그런 장건과 혁련위진을 번갈아 보던 섬지영은 이내 고개를 살살 가로저으며 몸을 돌렸다.
“따라오세요.”
뭐라 설명도 없이 따라오라는 말에도 장건은 별다른 대꾸 없이 뒤를 따랐다. 산적 무사 제광량이 얼른 그들을 따라 거실을 나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그들이 나간 후 거실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혁련위진은 검을 뻗은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고, 무림인들은 장건이 별다른 말도 없이 떠나버린 것을 보며 그가 이 승리를 정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보다 못한 혁련위진의 측근 무사들이 다가가 그를 부축하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조금 전 큰 목소리를 떠들던 것과는 달리 그 위로는 속삭임에 가까웠다.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던 그때, 순우현이 짝-하고 크게 손뼉을 치며 거실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래, 무림의 방식은 아주 재밌게 봤네들. 가능하다면 장안의 조회 시간에도 이런 식으로 사안을 처리했으면 아주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물론 그딴 안건을 올리면 황제 폐하께선 내가 노망이 들었다며 황도 예비군에 처박아버리겠지만.”
그는 큰 목소리로 무림인들의 시선을 끌며 거실 한가운데 도착했다.
“자. 이제 하던 거 계속 하세나. 오대호 동쪽 끝에 있다는 패왕보까지 경로를 짜야 하지 않나. 음? 그런데 남궁가 사람들은 어디 있나?”
“그··· 일단 서부 무림인끼리 정리를 좀 하고 부르자 하여서···”
순우현은 그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길을 아는 게 그들인데, 그들을 빼놓고 계획을 짜자고?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당장 남은 마궁의 세력을 피해서 최단 경로를 짜야 할 시간 아닌가? 의식까지 며칠이나 남았다고.”
“그게···”
대답을 하던 무림맹 무사는 흘낏 혁련위진을 바라보았다. 입으로 하는 게 아닌 몸짓으로 하는 의사 표현이었다.
그를 본 순우현은 고개를 살살 가로저으며 말했다.
“허, 참. 그럼 얼른 가서 그들을 불러오게. 정중히.”
“예. 남궁 노사를 모셔오겠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회의를 이어가려는 동안 혁련위진과 그의 측근들은 거실 한쪽으로 물러났다. 혁련위진은 조금 전의 압도적인 패배가 충격적이었는지 부하가 내민 의자에 앉아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림인들은 그런 혁련위진의 모습에서 그가 늙었음을, 그리고 그의 무림맹주 집권이 끝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거기서 또다른 생각과 생각이 피어나는 와중에, 한 남자는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혁련위진의 측근들과 한 발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그 남자의 이름은 제운성이었다.
* * *
섬지영은 제가에게 할당된 거실과 방을 지나면서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그녀와 마주친 제가의 무사들이 인사에도 역시 간단하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녀의 걸음은 어느 방문 앞에 도달해서야 멈췄다.
“···여긴 장 무사와 나, 단둘이 들어가겠어요.”
그녀가 방문을 붙잡고 한 말에 지금까지 그들의 뒤를 따라오던 제광량이 허리를 숙이며 물러섰다.
이후 문이 열렸고, 그 문 너머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섬지영은 옆에 있던 나무통에서 횃불 하나를 꺼내 화섭통으로 불을 붙이고는 지금까지처럼 별다른 말도 없이 뚜벅뚜벅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장건은 그녀의 그런 태도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뒤를 따랐다.
얼마 안 되는 계단을 내려가자 본래 지하 저장고 정도로 썼을 듯한 지하실이 나왔다. 그리고 그곳에 하얀 천으로 가려진 시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천으로도 머리와 몸이 분리된 것을 가릴 순 없었다.
횃불을 든 섬지영은 그 하얀 덩어리 앞에 서서 멍하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본 장건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상천 가주 덕분에 다른 두 마인을 물리칠 수 있었소. 하지만 그는 그 이후 나와 싸우길 원했지. 전날 나 때문에 가문의 명예가 더럽혀졌다며. 그래서 싸웠고, 내가 이겼소. 그게 전부요.”
장건의 말에도 섬지영은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런 침묵에 장건은 자기도 모르게 품을 만지작거렸다. 있지도 않은 연초를 찾는 것이다.
그는 이 무림에서 사는 사람은 언제나 죽고 죽일 수 있는 칼날 위에서 살고 있음을 잘 알았다. 하지만 죽은 약혼자 앞에 선 여인에게 당신 약혼자는 뒈질만한 놈이었소, 하고 놀리듯 말할 정도로 모질고 염치를 모르진 않았다. 물론 제상천은 패륜아가 맞긴 했지만.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그때 섬지영이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장건을 마주 보았다. 장건은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아주 엉망이라는 걸 알았다. 지난 이틀 동안 얼마나 운 것인지 퀭한 눈가는 눈물 자국이 뚜렷했고, 입술은 말라 갈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옳고 그름보다도 오직 사랑을 위해 불타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녀는 장건을 그렇게 마주 보며 말했다.
“이미 순우 선생과 대전사에게 당시 상황을 들었어요. 장 무사가 마가의 두 가주에게 붙잡힌 상황에서 그 앞에 상천 오라버니가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지요. 상천 오라버니를 모른다면 다른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장 무사를 도우려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린 모두 오라버니가 원하는 것을 위해 무슨 짓까지 벌일 수 있는 남자인지 알죠.”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처연한 웃음이었다.
“그런데도 조금 전 상천 오라버니의 명예를 지켜주셨더군요. 그냥 사실을 밝히셨어도 대부분 수긍했을 텐데. 고마워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숙이는 걸 본 장건은 부정도 긍정도 없이 인사를 받아주었다.
“대답할 이유가 없었을 뿐이오. 맹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고.”
“다행이네요.”
“···다행?”
장건의 반문에 섬지영은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사랑이 식은 눈동자 속에는 차갑고 예리한 독심毒心만 빛나고 있었다.
“나도 그 노인이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