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2)
22화
곧바로 숲으로 달려가려던 장건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먼저 숲에서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건!”
비랑이었다. 그녀는 총총거리는 뜀걸음으로 장건에게 다가오다가 주변을 보고는 작은 감탄을 흘렸다.
“이게 다···”
숲길 한가운데에는 당견상이 던지고 장건이 튕겨낸 크고 작은 날붙이 수십 개가 사방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거기에 방금 목이 잘린 시체도 있었고.
“···끝났군요.”
장건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비랑은 그런 장건을 가만 바라보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해독제! 중독된 사람들의 해독제를 찾아야 해요!”
“칼잡이들이 살아있소?”
“···다 죽이진 않았어요.”
그럴 것 같긴 했다. 정령의 힘을 쓰는 전사들은 공간이 제한된 칼잡이들을 쉽게 제압했을 것이다.
“그럴 필요 없소. 저놈이 공갈을 친 거니까.”
“예? 공갈? 거짓말이었다고요?”
장건은 당견상의 시체에 다가가며 말했다.
“칼잡이 놈들이 흥분한 상태라 쉽게 넘어간 모양인데, 진짜 공기 중에 대충 흩뿌려 사람을 죽일 정도의 독은 흔하지 않소. 아주 비싸고 귀하지. 돈이 어지간히 썩어나지 않는 이상 아무 때나 쓸 물건이 아니란 이야기요.”
비랑이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장건은 당견상의 품을 뒤적거렸다. 부족 사람들을 돕고 나서 뒤질 생각이었는데 이미 털어버린 모양이니 그냥 볼일을 보면 될 듯했다.
당견상의 품에선 이미 던져버린 것 말고도 또 다른 암기가 한 무더기 쏟아져 나왔다. 그 외에는 작은 돈주머니와 조그만 사각형 종이봉투가 전부였다. 신분을 짐작하게 해줄 물건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장건은 작은 종이봉투를 집어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노란색에 붉은빛이 얼룩덜룩한 또 다른 종이가 보였다. 꺼내 보니 종이 부적 대여섯 장이었다. 장건이 이게 뭔가 싶어 그 부적을 살펴보는데 그걸 본 비랑은 갑자기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장건이 물었다.
“왜 그러시오?”
“그, 그거. 그거 뭐죠?”
장건은 비랑이 종이 부적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뭔가 자신이 놓쳤나 싶어 부적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냥 노란 종이에 붉은색으로 못 알아들을 글자를 적어둔 것에 불과했다. 장건은 거기서 뭔가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비랑에게 부적을 들어 보여주었다.
“···이거 말하는 거 맞소?”
“으으! 저리 치워요!”
비랑은 화들짝 놀라 질색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마치 그 더럽고 엿 같은 것을 들이밀지 말라는 것 같았다. 장건은 어이가 없었다. 그가 보기엔 그냥 종이였을 뿐이다.
“···뭣 때문에 그러는 것이오?”
“장건은 안 느껴져요? 그 종이 뭔가 끔찍해요. 그게, 뭐라 설명할 수는 없는데, 소름 끼치고 역겨운··· 아으, 어쨌든 그거 나한테 들이밀 생각 하지 말아요!”
장건은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인가 싶어 눈에 내공을 집중해보기도 하고 종이를 들어 냄새를 맡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래된 종이 특유의 퀴퀴한 향 말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심지어 부적 자체에 내공을 불어넣어 보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다른 종이가 그러듯 좀 뻣뻣해졌을 뿐이다.
“뭐가 뭔지 모르겠군.”
고개를 저은 장건은 그걸 다시 종이봉투에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외눈 구름이라면 비랑보다는 잘 설명해 줄 것 같았다. 장건은 그 외 수익인 돈주머니도 챙겨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갑시다.”
* * *
칼잡이 서른 중 죽은 것이 딱 절반인 열다섯. 나머지는 무기를 뺏기고 어디 하나 부러지거나 퉁퉁 부은 얼굴로 마을 외곽에 세워둔 울타리 안에 처박혔다. 그들은 우울한 얼굴로 자기들끼리 모여앉아 부족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 비랑이 그 울타리 안에서 다친 이들에게 부목을 대주고 있었다.
장건이 그런 비랑과 칼잡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옆으로 적풍이 다가왔다.
“옷이 좀 찢어졌구먼. 어디 다친 곳 없나? 내가 보기엔 저 칼잡이 서른보다도 그 시커먼 놈 하나가 위험해 보였는데 말이야.”
“별거 없던데.”
적풍의 걱정스러운 말투에 장건은 슬쩍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암기니 마공이니 이것저것 있었던 놈이지만 결국 장건의 칼질 한 번에 목이 달아났으니 별것 없었다고 해도 좋았다.
“허허.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적풍은 그 가벼운 농을 알아듣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장건처럼 비랑과 포로로 잡힌 칼잡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덕분에 다치는 사람 없이 이번 일을 넘길 수 있었네. 고맙네, 장건.”
“아직 끝난 게 아니지 않소. 무림맹 지부장을 불러 사정을 설명해야 할 텐데.”
“그래도 그 설명에 누가 더 죽거나 다치진 않을 것 아닌가. 그 중원인, 강륭이었나? 그자의 품에서 처음 작성되었던 불공정 거래증서도 나왔고, 저 칼잡이들도 있으니 정당방위였음을 증명할 수 있을 거야. 그럼 된 거지.”
“내가 전에 한 말도 잊지 마시오.”
“이 계곡 소유권을 확실히 하라는 거? 알겠네. 꼭 그렇게 하지.”
장건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적풍이 그를 불렀다.
“어디 가나? 배 안 고프나? 식사할 시간인데.”
“외눈 구름을 좀 만나야겠소.”
적풍이 웃으며 말했다.
“저녁 잔치에 늦지 않게 오게.”
장건은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돌려 끄덕이고 걸어 나갔다. 적풍은 다시 포로들에게 눈을 돌렸다가 비랑과 눈이 마주쳐 그녀를 도우러 가야 했다.
눈빛만으로 자기 삼촌을 불러들인 비랑은 점점 멀어지는 장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넓고 단단한 등이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하던 그녀는 잠시 후 저녁에 어떻게 하면 자연스레 그의 옆자리에 앉을지 고민했다.
적풍은 자길 불러놓고 혼자 딴생각을 하며 얼굴을 붉히는 비랑을 보며 고개를 살살 가로저었다. 조카가 자기 품을 떠날 때가 되었나 싶었다.
그리고 그들을 뒤로한 장건은 곧장 외눈 구름의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막 가까이 도착한 그는 일단 천막 밖에서 외눈 구름을 부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장건은 주술이라는 것이 천막도 투시하게 해주는 것인지 궁금함을 느끼며 안으로 들어갔다. 전에도 보았던 알록달록한 치장들과 전과는 달리 깨끗한 얼굴의 외눈 구름이 보였다. 그는 양 눈을 모두 뜨고 있었다. 천막 한가운데 모닥불이 그 두 눈을 비추며 흔들거렸다.
“먼저 고맙다는 말부터 하겠네, 장건. 정말 고마워. 덕분에 부족 사람 아무도 다치지 않고 일이 끝났네.”
“이미 붉은 바람에게도 말했지만 완전히 끝난 건 아닙니다. 무림맹 지부장을 불러 정당방위와 계곡의 소유권을 얻어야 할 테니까요.”
외눈 구름은 장건이 앉으며 한 말에 헤죽 웃었다.
“다 잘 될 것이네. 이 계곡에서의 평화로운 우리 삶은 이어질 것이야.”
장건은 어딘가 예언 같기도, 희망 같기도 한 그 말에 잠시 하얗고 붉게 반짝이는 외눈 구름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품에서 조그만 종이봉투를 꺼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계곡의 황금이 진짜 목적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저 이곳에서 부족 사람들을 쫓아낼 구실이었을 뿐이죠. 제일 위험했던 놈 품에 이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랑은 이걸 보고 엄청 꺼리더군요. 뭔지 좀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외눈 구름은 말없이 손을 내밀어 종이봉투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고 느릿한 손길로 그 안에 담겨있던 부적을 꺼냈다. 그는 다섯 장 정도 되는 그 부적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았다.
다섯 장 모두 살핀 그는 다시 봉투 안에 부적을 집어넣고 장건에게 내밀었다. 그동안 굳게 닫혀있던 그의 입술은 장건이 그걸 받아들자 그때서야 열렸다.
“그건 다섯 장이 하나로, 아주 사악한 힘으로 짠 주술이군. 놈들이 진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겠어.”
장건은 그의 입이 계속 열리길 기다렸으니 거기까지 말한 외눈 구름은 말없이 모닥불만 바라보며 뭔가 생각에 잠겼다. 지난번에 그렇게 말이 많더니 오늘을 또 왜 이럴까 하던 장건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뭡니까?”
“어? 아아. 그래. 말해줘야지. 이따 저녁에 오랜만에 잔치를 벌일 생각에 잠깐 정신을 놓았구만. 이게 얼마 만에 하는 잔치인 줄 아나? 두 달 전에 흔들리는 나무와 성급한 강물이 결혼할 때 이후론 처음이네. 원래는 길어도 한 달이면 한 번씩은 했는데 말이야. 잡아두었던 고기도 뜯고 아랫마을에서 사 온 술도 마시고 그러네. 그 뭐더라? 죽엽청? 깔끔한 사슴 가죽을 두 장이나 주고 사 온 게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괜찮더라고. 붉은 바람이 꿍쳐둔 것이 몇 병 있으니 이번 잔치는 아주 볼 만 할 거야···”
장건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엄지로 눈썹을 긁었다. 한창 말하던 외눈 구름은 그걸 보더니 아차 하고 눈치가 보이는지 작은 헛기침을 했다.
“···이거 참. 늙으면서 느는 건 주름과 말밖에 없어. 이거 은인을 앞에 두고 딴소리가 길었구먼.”
그는 다시 큼큼 헛기침하더니 말을 이었다.
“자네는 끝내 만나지 못했지만, 이 계곡에는 정령님이 한 분 계시네. 우리 전사들의 가슴을 열어주시고 나에게 영감을 주시는 분이지. 그분은 자연의 일부이자 전부이고, 동시에 우리의 선조이면서 후손이시네. 그분은 언제나 삶의 지혜와 즐거움을 가르쳐주시며 베풂의 행복과 서로의 사랑을 응원해 줘. 사실, 우리가 계곡을 떠나지 않으려는 것도 그분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네···”
거기까지 말한 외눈 구름은 고개를 들어 천막 천장에 동그랗게 뚫린 연기 구멍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지. 자네들 땅에선 우리 정령님 같은 존재를 영물이라고 부른다고. 거기에 자연에서 그저 평화롭게 살아가는 그분들을 억지로 끄집어내고 배를 갈라 잡아먹는다지? 오로지 그 무공이라는 것의 상승을 위하여.”
장건은 그가 뭘 말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주술의 목적은 정령님을 땅으로 끌어 내리고 고통을 주는 것이네.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의지를 흩어버리는 사악한 힘이네. 비랑이 거리낌을 느낀 것도 당연할 게야. 녀석은 나 다음의 주술사가 될 예정이니···”
외눈 구름은 붉은빛과 남청색으로 나뉘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재빠른 까마귀가 계곡과 함께 정보를 팔았던 모양이야··· 어쨌든, 이제 그 주술은 자네 것이네. 사악한 이를 물리치고 얻은 것이니 자네 마음대로 쓰는 것이 맞겠지··· 그저 이기적인 부탁을 하자면, 이곳에서만은 쓰지 말아 달라는 것뿐이네.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해주는 그분을 헤치지 말아 달라는 말 외에는··· 내가 더 해줄 조언은 없군.”
장건은 그의 말을 들으며 종이봉투를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위험한 물건이라면 일단은 그냥 종이에 불과하니 장건이 넘겨주었을 때 얼른 모닥불에 던져버리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정령을 위협할 물건을 아무런 대비 없이 그냥 외부인인 장건에게 넘기는 건 언 듯 무책임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장건은 그것이 외눈 구름이 보일 수 있는 최대의 존중임을, 그것이 설사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본인의 것이 아니니 함부로 다루지 않는 이들의 방식임을 느꼈다.
그래서 장건은 꼭 이곳이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영물을 잡을 수 있을 물건을 망설임 없이 그냥 앞에 보이는 모닥불에 던져버렸다.
외눈 구름의 눈이 커졌다.
“···듣기로, 무림인들은 영물로 만든 영약에 목숨을 건다던데.”
“난 안 겁니다. 어차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고.”
장건은 탁탁 손을 털어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가 초탈한 그 모습에 외눈 구름이 말했다.
“자네··· 떠나려고? 지금?”
“내가 할 일은 모두 끝난 것 같군요.”
“저녁 먹고 내일 떠나는 게···”
장건은 외눈 구름에게 가볍게 손을 모아 포권했다.
“그러면 저도 모르게 발이 무거워져 한참을 더 머물지도 모릅니다. 그런 신세를 끼칠 순 없지요.”
“자네가 머무는데 신세랄 것이 어디 있나? 자네라면 얼마든지 여기 있어도 되네.”
“안녕히 계십시오, 외눈 구름.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외눈 구름은 장건의 인사에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말했다.
“···알겠네. 잘 가게, 장건. 자네가 우리 부족과 정령님을 위해 해준 일은 정말 고맙네.”
장건은 옅게 웃어주고는 뒤돌아 천막을 나섰다. 외눈 구름은 장건이 한 것처럼 두 손을 모아 그 등을 보며 인사했다.
천막을 나온 장건은 곧바로 조조가 묶여있을 자신의 천막으로 걸었다. 챙길 짐이 많은 것도 아니니 곧장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장건은 그렇게 천막으로 걸어가는 동안 부족 사람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잔치를 준비하던 그들은 어른과 아이, 전사 가릴 것 없이 그에게 가볍게 인사하며 웃어주었다. 장건은 그들에게 마주 인사를 하며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그들을 보며 외눈 구름이 말한 것처럼, 평화로운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천막 옆에 도착해서 보니 조조 녀석은 며칠 안 뛰고 놀았다고 뭔가 피둥피둥해진 모습이었다. 녀석은 안장을 채우는 장건의 행동에 대충 상황을 짐작하는지 푸르릉거리며 괜히 투레질했다.
“인마. 며칠 놀았으면 됐지. 너 살찐 거 못 느끼냐?”
장건의 말에 조조는 도리어 더 한탄하듯 머리를 흔들대며 한숨을 푹푹 내쉬어댔다. 놀아도 놀아도 노는 게 좋다는 것 같았다. 장건은 피식 웃으며 녀석의 갈기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웬 아이가 까르륵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장건이 고개를 돌려보니 부족 아이 하나가 장건이 앉던 나무 밑동에 앉아 양손으로 턱을 괴고 웃고 있었다.
아이는 눈이 마주치자 한 번 더 까르르 웃더니 물었다.
“걔 너무 재밌어. 엄청 똑똑해. 꼭 사람 같아.”
“···똑똑하기보단 영악한 거지.”
장건은 언젠가 했던 대답을 다시 하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아이를 마주 보는데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이는 그런 장건의 표정을 보더니 다시 웃었다.
“그 표정도 재밌다. 너도 재밌어.”
그 황금빛 두 눈은 정말 어린 아이처럼 천진난만하면서도 또 노인의 것처럼 오래된 지혜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는 장건이 자신을 충분히 살펴볼 시간을 준 것처럼 잠시 그렇게 웃고만 있다가, 불쑥 물었다.
“떠나는 거야?”
“···그래. 여기서 내가 할 일은 끝났으니까.”
아이는 턱을 괸 채 장난스럽게 고개를 끄떡거렸다.
“너는 방랑자구나. 길이 네 집의 바닥이고 하늘이 지붕이며, 네가 그 집의 유일한 기둥이야. 홀로 선 기둥이라. 뭔가 멋진걸.”
장건은 지금 자신이 마주 보는 존재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부족 전사들의 가슴을 열어주던 존재, 사랑과 지혜를 가르쳐준다는 존재.
“고마워, 방랑자.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도와줘서. 그리고 그걸 그냥 불태워서 내 친구들을 해치지 않아 주어서.”
계곡 부족의 정령을 마주 보던 장건은 그냥 슬쩍 웃었다.
“···종이에서 냄새가 나서. 그걸 품에 가지고 다니면 나한테서도 그런 냄새가 날 것 같더군.”
“흐-음. 하긴, 그래. 냄새나는 사람은 아무도 안 좋아하지. 그걸 만든 사람은 정말 인기가 없을 거야.”
장건의 대답에 싱긋 웃으며 농담을 한 아이 모습의 정령은 곧 자리에서 훌쩍 일어섰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와 꼭 쥔 주먹을 내밀었다.
“뭔데?”
“받아. 착한 사람은 언제나 보답을 받아야지.”
장건이 그 주먹 아래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정령은 그 위에 뭔가를 올려놓았다.
“원래는 아이들처럼 가슴을 열어줄 생각이었어. 근데 그건 네가 싫어할 것 같더라. 그래서 그냥 그걸 준비했지.”
손바닥을 확인해보니 뭔가 조그만 구슬이 놓여 있었다. 만져보니 진주처럼 반짝이는 것과는 달리 말랑말랑했다.
“네 뱃속에 담을 수 있을 거야.”
영약? 영단? 장건은 그걸 뭐라 불러야 할지는 몰라도 몸과 내공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맙단 인사를 하려고 정령에게 눈을 돌리니 그 자리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잠시 정령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장건은 구슬을 품에 챙겼다. 어디 볕 잘 드는 자리를 찾아서 먹고 심법으로 소화할 생각이었다. 정령이 나타났을 때는 조용하던 조조가 그 품에 킁킁거리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저리 치워 자식아. 실컷 놀고 먹었으면서 이것까지 탐내냐?”
조조를 밀어낸 장건은 채우던 안장을 마저 채우고 올라탔다. 그리고는 분주한 마을을 가만 바라보다가 이내 툭 조조의 허리를 치며 쯔쯔 혀를 튕겼다. 조조는 그 신호를 알아듣고 털털 마을 밖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그가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부족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적풍과 비랑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왔을 땐 이미 저 멀리, 계곡 아래로 떠나는 그의 뒷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잔치를 준비하던 부족 사람들은 모두 나와 붉어가는 저녁 석조 아래 멀어지는 방랑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수십 명이 모여서 한 곳을 바라보지만 아주 조용했다.
그들은 그가 아주 멀어져 점으로도 구분이 되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묵묵함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