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20)
220화
어두운 지하실, 흔들리는 횃불만이 두 남녀를 비추고 있었다. 남자, 장건의 눈은 덤덤하기 그지없었으나 여자, 섬지영의 두 눈에서는 섬뜩한 한기가 흘러내렸다.
그 차가운 눈빛의 섬지영이 말했다.
“상천 오라버니는 당신을 싫어했죠. 단순한 질투심도 있었고, 제가를 이 토벌대에 반쯤 억지로 합류시킨 것 때문도 있었죠.”
제가가 토벌대에 합류한 것은 제상천이 아비를 암살했다는 의혹을 무기로 쥔 무림맹주와 제운성이 그 의혹을 빌미로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황군과 무림맹 사이의 힘의 균형을 조금이라도 이쪽으로 기울여보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혹을 무림맹주의 손에 쥐여준 것이 바로 장건이었다.
“하지만 이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었어요. 토벌에서 공을 세우고, 이후 이 땅의 안정에 기여하면서 제가의 영향력을 새로 키울 기회였죠. 이쪽은 중원처럼 누군가의 것을 뺏어올 필요도 없어서 더 쉽고 빠른 성장이 가능했을 거예요. 우리 제가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발판이 되어줄 땅이었죠.”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장건은 제상천이 대외적으로 주장하던 동부기회설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억지로 참여한 토벌에 화만 내고 있을 때, 섬지영은 그것을 도리어 기회로 뒤집을 수 있다며 그를 설득한 것이다.
제상천이 죽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농장 도시들은 마궁이 파멸하면서 자유를 되찾을 것이고, 이후 서부와 교류하며 자신들이 가진 땅의 힘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혼란과 이합집산이 있을 테지만 결국 신장강 유역의 농업 도시들을 휘어잡는 자가 앞으로 이 신대륙의 패권을 쥐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토벌대에 합류해 앞장서 싸운 제가는 누구보다 빠르게 그 패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싸움이 끝나면 무림맹은 자신의 연합체를 조정해야 할 것이고, 황군은 마궁의 토벌과 치안 안정을 마치는 대로 다시 서부 해안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상천 오라버니는 앞장서 이 토벌을 이끌어갔어요. 일이 잘 풀리면 옛 왕가였을 적 힘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했었죠··· 문제는 우리뿐만 아니라 무림맹주도 그런 미래를 예견했다는 점이었어요.”
장건이 남궁천과 함께 남궁가를 설득하기 위해 한밤중 떠났던 날. 그날 맹주 혁련위진은 직접 제가의 무리로 다가와 제상천과 독대했다. 제가의 무사들이 자신들의 가주를 위해 설치한 천막 안에서.
“···나도 그 대화를 직접 보고 듣진 못했어요. 하지만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두 사람이 천막을 나올 때는 정적보다는 동업자처럼 보였죠. 그리고 이후 일어난 일을 보면 그때 혁련위진 그 늙은이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불 보듯 뻔했어요. 상천 오라버니를 부추긴 거죠. 정말 장 무사가 죽거나 그 과정에서 상천 오라버니가 죽거나 어느 쪽이든 본인의 미래엔 이득이었을 테니까. 어쩌면 둘 모두 죽길 바랐을지도 모르죠.”
이튿날 매복과 싸움이 이어지던 때, 섬지영은 보았다. 장건이 당가의 가주를 이끌어 숲속으로 멀어지던 때 제상천과 혁련위진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제상천은 제가의 무사들을 혁련위진과 함께 움직이도록 명령한 후 본인도 숲속으로 멀어져갔다.
그 이후 벌어진 일은 장건도 잘 알았다. 직접 제상천의 목을 베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말려볼 생각은 안 들었소?”
장건의 말에 섬지영은 다시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니는 고집이 굉장한 사람이었죠. 오라버니가 정녕 하고자 한다면 나도 말릴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난 오라버니와 맹주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움직일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기껏해야 두 사람이 함께 장 무사의 공적을 깎아내리리라 생각했었죠. 그러니까, 직접 칼을 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장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생각은 합리적이었다. 당장 그 매복과 싸움 중에 장건이 따로 떨어지게 되리라는 것은 미래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제상천과 맹주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둘은 전날 밤 동맹 비슷한 관계를 맺고 앞으로 함께 장건을 견제하기로 했다가, 그 장건이 무림정천대와 떨어지는 상황이 오자 기회를 엿보려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장건이 두 마가주와 내력 대결에 들어가는 걸 본 제상천은 정말 그 순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고, 그대로 장건의 이기어검에 목이 잘려 나갔다.
“내가 더 도와주었으면 하는 게 있소?”
장건은 그렇게 덤덤히 물었다. 왜 제상천이 그때 그 자리에 등장했는지 알게 된 것은 좋았다. 하지만 장건에겐 제상천이나 혁련위진이나, 그리고 이 토벌대의 공적이나 모두 얼마 후면 벗어던질 거추장스러운 혹 덩어리에 불과했다. 장건은 이제 잠시 멈추는 게 두렵지 않았고, 그래서 신사천의 형과 친구들, 그리고 서하에게 돌아가는 것 또한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돌아갈 집이 있는 방랑자였다. 신대륙의 패권과 무림맹의 정쟁은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필요하다면 아무렇지 않게 그 모든 것을 베어버릴 수 있었다. 작금 무림맹에 그보다 강한 자는 없으니 필요한 건 결심뿐이었다.
섬지영은 쓸쓸한 눈으로 그런 장건의 무덤덤함을 마주 보았다. 그녀에게도 그 무엇보다 의미 있고, 또 그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죽어 시체가 되어 있고,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그 원인을 제공한 자에게 향하는 복수심뿐이었다.
“···장 무사가 더 해줄 건 없어요. 이미 조금 전 대결로 맹주의 근간은 흔들리고 있을 테니까. 그저··· 혹여나 그 늙은이를 돕지는 말아요. 그는 자신의 업보를 되돌려받는 것일 뿐이니.”
장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혁련위진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할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그에게 자존심이라는 게 남아있다면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럼 이제 올라갑시다.”
“···난 여기 더 있어야겠어요. 배웅해주지 못해 미안해요.”
섬지영은 제상천을 향해 눈을 내리깔며 그리 말했다. 장건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올라왔던 계단으로 나아갔다. 그는 계단을 오르기 전 뒤를 돌아보았다.
작게 옹크린 미망인의 등이 흔들리는 횃불의 그림자에 얼룩덜룩해 보였다. 위로의 말을 건넬 수도 있었지만, 장건은 그러지 않았다. 저 여인을 미망인으로 만든 게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멀어지는 걸음 소리를 들으며 섬지영은 멍하니 제상천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위에 덮인 하얀 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멍한 눈동자 속에서 차가운 불티가 튀는 듯했다.
그렇게 죽은 지아비를 바라보든 그녀의 손은 자신의 배를 가만히 쓰다듬고 있었다.
* * *
장건은 제광량의 눈인사를 받으며 방을 빠져나왔다.
방을 나와 복도를 지나서 저택을 빠져나오니, 그 앞에 펼쳐진 정원과 여기저기 오가는 원주민들이 보였다. 대부분 어린 소년소녀나 늙수그레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장건을 보고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 모습이 참 익숙해 보였다. 그만큼 굴종의 시간이 길었다는 의미일 터였다. 장건은 그런 인사에 마주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원주민들은 대번에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이들은 그 인사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모습이었고, 노인들은 뭔가 트집이 잡힌 것은 아닌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자기 몸을 더듬거렸다.
장건은 굳이 뭔가를 더 설명하지 않았다. 얼마 후 유설의 동진군 본대가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노예 농장은 해체될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이들 대부분은 농장에서 농부로 일하겠지만, 적어도 그건 노예로 착취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장건은 아무렇지 않게 저택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크고 널찍한 저택과 그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창고, 그리고 그 옆에 작게 붙어있는 원주민 숙소가 보였다. 몇몇 꼬마들이 그 숙소 마당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 뭔가 오물거리다가 갑자기 등장한 장건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서 우르르 도망쳤다.
장건이 그 모습을 가만 보고 있으려니 원주민 숙소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등장했다. 그의 손에는 바구니가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밀가루 반죽을 기름에 튀겨낸 반죽 튀김이 잔뜩 담겨 있었다. 고소하면서도 서너 개 먹으면 배가 차는, 간식으로나 식사로나 좋은 음식이었다.
“야 이 먹보들아! 이게 뭐라고 이렇게 처먹는 거야? 너희 벌써 밀가루 반 포대를 처먹었··· 장 형?”
두 팔을 동동 걷어붙이고 머리에는 수건까지 동여맨 채 땀을 흘리는 그 남자는 양굉이었다.
“장 형? 장건 그 친구가 벌써 깨어났나?”
그런 양굉의 등 뒤로 또 다른 인물이 하나 빼꼼 등장했다. 밀가루 튀김 하나를 입에 물고 있는 외팔이 노인. 남궁천이었다.
잠시 그 앞마당이 조용해졌다. 장건은 튀김 바구니를 든 양굉과 그 뒤에 남궁천을 멀뚱히 바라보았고, 두 사람도 벌써 깨어나서 멀쩡히 걸어 다니는 장건을 보고 멍한 표정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숙소 건물 옆에 있던 이름 모를 나무의 가지를 흔들었다.
장건은 문득 그곳으로 눈을 돌렸고, 그 큰 나무 뒤에 숨어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녀석들의 입에는 지금 양굉이 들고나온 것과 같은 밀가루 튀김이 하나씩 물려 있었다.
그 장건의 시선을 따라 아이들을 발견한 양굉이 정신을 차렸다.
“어어, 꼬맹이들! 일루와서 이거 받아 가라. 오늘은 이게 끝이야.”
그 소리에 나무 뒤에 숨어있던 아이들이 슬금슬금 걸어 나왔다. 녀석들은 살살 장건의 눈치를 보다가 그가 아무 말 없을 듯 보이자, 곧 우르르 양굉의 바구니로 달려와 그 튀김을 주워갔다.
“얌마! 넌 많이 먹었잖아! 동생한테 좀 양보해! 너도 임마! 그리고 입에 문 건 좀 다 씹고 다시 집어넣어라···”
양굉은 그리 퉁명스럽게 아이들을 챙겨주었다. 바구니 속 튀김은 금방 사라졌고, 아이들 입에는 기름기가 번들거렸다. 하지만 녀석들은 여전히 초롱초롱하게 눈을 반짝이며 입맛을 다셨다.
“오늘은 이게 끝이라니까···”
“정말요?”
아이들 중 유난히 조그만 꼬마 하나가 콧물을 주륵 흘린 얼굴로 양굉을 올려다보았다. 녀석의 얼굴을 본 양굉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입술을 우물거리며 망설이다가 갑자기 버럭 화내듯 말했다.
“에라이 이 귀찮은 놈들. 내 하루 일당이 외랑대에서만 은전 하나인데 어디까지 부려 먹으려고··· 그리고 밖에서 작전 나가면 얼마나 버는 줄 알어? 호구 하나만 물면 금전이 쏟아진다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쭈그려 앉아 꼬마의 코를 닦아주고는 얼른 다시 일어나서 탁탁 바구니를 털었다.
“마지막으로 튀겨줄 테니까 그만 징징거려. 알았어?”
“네!”
징징거린 적 없었던 아이들은 환하게 웃었고, 양굉은 장건을 향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엉거주춤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장건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가 보니 숙소 주방으로 보이는 공간에 풀어헤친 밀가루 포대 하나와 그 앞에 활활 타는 화덕, 그리고 거기 올려진 솥과 기름이 보였다. 남궁천을 제외한 사람은 보이지 않아서 양굉 혼자 밀가루를 반죽하고 튀겼음을 짐작하게 하는 모습이었다.
장건은 새 반죽을 시작한 양굉을 보고 피식 웃었다.
“너 뭐하냐?”
양굉은 평소처럼 헤헤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비굴해 보이진 않았다.
“아 글쎄 여기 애들은 배부르게 먹질 못한다잖소. 창고에 쌓인 게 쌀이고 밀가루인데. 죄다 잘 모셔뒀다가 나중에 서쪽으로 보급한다더만. 그 꼴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하나 뜯었소.”
장건은 옆에 앉아있는 남궁천에게 시선을 돌렸다. 튀김을 우물거리던 그는 장건의 시선을 느끼고 헤-웃었다. 그새 이빨이 빠졌는지 여기저기 듬성듬성했다.
“보급이 이뤄질 리가 없지 않은가? 조만간 다 박살이 날 텐데. 나중에 동진군이 들어오면 그들이 대신 먹겠지. 그 전에 아이들이나 좀 배불리 먹이려 내가 이 친구를 꼬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