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21)
221화
장건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문 너머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며 튀김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특별할 것 없는 간식거리였지만 아이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였다.
“안타까운 아이들이지. 그저 부모가 노예이기에 자신들도 노예가 될 운명이었던 아이들. 하지만 이제 궁이 무너지고 서쪽의 군대가 들어서면 저 아이들도 나름의 삶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네··· 조금 더 빨리 이랬어야 했는데···”
남궁천은 장건의 시선을 따라 환한 햇빛 아래 반짝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끝에 가서는 거의 중얼거리듯 읊조리는 듯했다.
그리고 장건은 그 아이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서하와 조카들을 떠올렸다. 녀석들이 잘 지내고 있을지, 수련은 열심히 하고 있을는지, 혹 너무 열심히 해 다치지는 않았을지 등등 잡생각들이 솟아났다. 어차피 이곳과 신사천이 수천 리 떨어져 당장 소식을 주고받거나 상태를 확인할 수도 없었기에 그건 정말 쓸데없는 잡념이자 번민이었다.
그러나 장건은 그런 작은 생각과 마음이 쓸데없다 하여 애써 지우지 않았다. 그가 저 꼬마들을 보며 서하와 조카들을 떠올린 것은 녀석들이 그의 가족이었기 때문이고, 그렇게 가족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걱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생각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그건 정말 벗어던져야 할 번뇌겠지만 장건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상념들은 일어났던 것만큼 자연스럽게 마음 저편으로 흘러갔다. 마치 강물이 흐르듯, 구름이 떠가듯.
동시에 장건은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어떤 흐름을 느꼈다.
마음과 생각은 홀로 살아가는 자에게도 있다. 하지만 그건 대부분 지금 나와 내 주변을 살피며 당장 살아가려는 생존 욕구에 가깝다. 물론, 한 생명이 어떻게든 살아가고자 하는 그 몸부림은 숭고함마저 느끼게 하는 울부짖음이다.
그러나 내가 아닌 남을 생각하며 떠오른 상념들은 그런 본능에 가까운 고함보다는 감정을 담게 된다. 웃고, 울고, 화내고 기뻐하는 것. 그 모든 감정과 생각들이 모두 아름답지만은 않고, 때론 지치고 피곤하다. 어느 때는 모두 밀어내고 홀로 그저 황량한 벌판으로 떠나버리고만 싶다.
하지만 결국 그런 상처를 안아주는 것은 또 다른 사람이었다. 그 덧없는 슬픔과 번민들을 저 멀리 흘려보내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곁에서 손을 잡아줄 타인이었다.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 나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 옳고 그름으로, 흑과 백으로 명백하게 나눌 수 없는 마음. 그렇기에 돌고 도는 태극太極이고, 흘러가는 행운유수行雲流水다.
그 순간 장건은 이제야 서하에게 전수해줄 내공심법의 기초를 세웠음을 깨달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을 기초로 하는 사상무공으로 내공심법을 만들겠다 생각한 게 벌써 한참 전인 것 같은데, 지금에서야 그 기본 골조를 세우게 된 것이다.
그때 촤르르르하며 기름 튀기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벌써 반죽을 끝낸 양굉이 그 밀가루 반죽을 기름에 툭툭 집어넣고 있었다. 하얀 밀가루 반죽은 자글거리는 기름에 노릇노릇 익어갔다. 양굉은 기다란 젓가락으로 그 튀김들이 골고루 익을 수 있게 살살 굴려주고 있었다.
장건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용을 불렀군.”
“엉?”
뜨거운 기름 앞에서 땀을 흘리던 양굉은 그 소리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장건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깨닫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소?”
“길을 만들어주긴 했지만 꽤 빠른데.”
장건의 말이 칭찬임을 깨달은 양굉은 헤죽 웃었다.
“그렇소? 아, 뭐. 치열한 실전 속에서 피어난 재능이랄까. 어찌저찌 하다보니 되었수다.”
그는 그렇게 넉살을 떨고는 다시 튀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뭐냐··· 내가 이걸 뭐라고 부르면 되겠소? 삼매진화장? 권?”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
튀김을 굴리던 양굉은 멍한 표정으로 다시 장건을 돌아보았다.
“···뭔가 엄청 대단한 무공 같소.”
“이제 네 거다.”
양굉은 뭐라 대답은 못 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장건은 그런 양굉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나중에 그 무공으로 헛짓거리를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내가 직접 찾아갈 줄 알아.”
“···조, 조심하겠소.”
장건의 협박 비슷한 이야기에 양굉은 이 권법을 정말 심사숙고해서 쓰기로, 나중에 무공이 늘어도 절대 함부로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듣자 하니 장건이 지난번 마가의 가주들을 해치울 때 그의 칼이 혼자 날아서 마인들의 목을 베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양굉은 어느 날 맑은 가을 하늘에서 칼 한 자루가 날아와 자기 목을 베어버리는 일이 없길 바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양굉은 다시 튀김 쪽으로 눈을 돌리며 슬며시 울상을 지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왠지 먼 훗날 진짜 고수가 되어도 장건을 두려워하며 힘을 숨기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하는 불길한 미래가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때 여태까지 아이들을 바라보던 남궁천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장건.”
장건의 눈이 그를 향했다. 남궁천은 멍하니 말했다.
“···저들이 우리 가문을 용서할까?”
그를 따라 다시 마당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녀석들이라 그저 손에 쥔 군것질거리에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흘려 머리가 굵어지면 저 녀석들도 자신들의 선조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실감할 것이다.
“누군가는 용서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러지 못할 것이오. 확실한 건 다른 마가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겠지.”
장건의 덤덤한 대꾸에 남궁천은 두 눈을 꾹 감았다. 마공을 벗고 늙어버린 노인은 한없이 약해진 듯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건이 화제를 바꿨다.
“남궁 가주는 어떻소? 상태가 좋지 않다던데.”
“···오래 살지 못할 것이네. 기껏해야 한두 달 정도. 하지만 가주는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그냥 죽을 생각인 듯해. 회복하려면 마공의 힘을 빌어야 하는데, 이제 무림 쪽으로 전향하는 주제에 그럴 순 없다고 하더군.”
“음.”
그가 직접 죽음을 선택했다면 장건도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다. 자기 손으로 선택할 수 있는 죽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그때 마당에 있던 아이들이 와-하는 소리를 내며 우르르 도망치는 게 보였다. 마치 장건이 처음 등장했을 때 같았다. 문 쪽으로 다가가자 도망가는 아이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무사 하나가 보였다. 그는 순찰대원 산호였다.
“어, 장 무사. 장 무사도 여기 있었네요? 제가 사람들을 만나러 간 거 아니었습니까?”
“볼일 다 보았소. 여긴 무슨 일이오?”
“아, 남궁 노사가 여기 있다고 해서···”
남궁천이 장건 뒤에서 빼꼼 등장했다.
“이 늙은이는 왜 찾으시나?”
“아, 남궁 노사. 지금 정천대와 남궁가 모두 모여서 회의 중입니다. 노사의 지혜도 필요한 시간이죠.”
남궁천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뭐가 문젠가? 쉴 만큼 쉬었으면 곧바로 동쪽으로 이동해 남궁호에 배를 띄우고 패왕보로 이동하면 그만인데?”
“그게, 부족 연합의 대전사께서 다른 문제를 제기하셨습니다.”
“다른 문제?”
산호는 누가 듣는 사람은 없는지 확인하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보이는 꼬마들은 멀찍이 떨어져 나무 뒤에 숨어있어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없을 듯했다.
“···지금 서쪽에 있을 마궁 병력의 상당수가 원주민 노예병이라는 건 아시죠? 대전사는 그 젊은이 수천 명을 살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십니다. 다 죽여버리면 안 된다고요.”
남궁천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해결하나? 우린 고작 백 명 조금 넘는 숫자에 당장 패왕보의 의식을 막아야 하는데?”
“근데 공주님과 황군이 노예로 끌려간 원주민 청년들을 학살하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말에는 대부분 동의하는지라···”
남궁천이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에이, 답답한 사람들. 일단 해결할 수 있는 일들부터 해결해야 할 것 아닌가? 순우 선생은 뭘 하는 게야?”
장건은 순우현이 왜 그 주제를 무시하지 못하는지 알 것 같았다. 방금 산호가 말한 대로 마궁의 군대는 상당 부분 원주민 노예병으로 채워져 있고, 그들은 억지로 끌려온 병사들이었다. 훗날 그 전투를 되돌아보았을 때 무공도 모르고 억울하게 끌려온 양민을 학살하게 될 유설과 동진군은 적잖은 비난을 받을 것이 확실했다. 순우현은 유설이 그런 짐을 지도록 놔두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당장 무림정천대의 임무는 항우의 부활 저지였다. 그들은 이 토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지전능 특수부대가 아니었다.
장건이 말했다.
“갑시다.”
“응? 자네도 가려고?”
골골대는 소리를 내며 하나만 남은 팔로 허리를 두드리던 남궁천은 두 눈을 끔뻑거렸다. 장건은 보통 그런 회의에 끼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전사를 설득하려면 내가 있는 게 좋을 것이오.”
“으음, 그건 맞군. 그럼 함께 가세.”
그렇게 두 사람이 나가려 하자 양굉이 급히 그들을 불러세웠다.
“자, 잠깐, 장 형! 이거 하나 먹고 사쇼!”
양굉은 그새 다 튀겨낸 밀가루 튀김을 채로 건져내서는 툭툭 기름을 털어내고 장건에게 내밀었다. 그걸 본 장건은 피식피식 웃으며 튀김을 받아 입에 물었다. 따끈따끈하고 고소한 밀가루 튀김이 적당히 씹기 좋은 식감으로 입안에서 굴러다녔다. 반죽을 숙성시킨 것도 아니고, 뭔가 다른 조미료를 넣은 것도 아니기에 대단히 맛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건은 그걸 입에 물고 우물거리며 양굉에게 고개를 까딱여 줬다. 양굉은 히죽 웃더니 곧 옆에 있는 바구니에 튀김을 건져 넣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저것들도 아이들의 뱃속으로 들어갈 터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건은 몸을 돌렸다.
“저··· 나도 하나···”
문 앞에서 기웃거리던 산호가 그렇게 말하다가 밖으로 나오는 장건과 남궁천에게 밀려 나오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쉽다는 눈빛으로 문 안쪽을 흘끗거리며 앞장서는 두 사람을 뒤따랐다.
그렇게 밖으로 나와 원주민 숙소 마당을 가로지르던 장건은 어느 순간 슬쩍 마당 한쪽 구석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이제 나무 뒤에서 나와 양굉의 주방으로 달려가는 아이들과는 다르게 어둑한 창고 처마 밑에 몸을 숨기고 이쪽을 바라보는 소녀 하나가 있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다른 아이들과 어른들을 바라보던 그 소녀는 장건이 자신을 바라보는 걸 깨닫고 움찔 놀라더니 스윽 건물 모퉁이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그 소녀가 다시 고개를 내밀어 봤을 때는 이미 장건과 남궁천, 산호 모두 사라진 후였다.
“어이! 너도 이리 와서 이거 먹어!”
그때 소녀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 한번 화들짝 놀랐다.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튀김을 오물거리는 아이들과 그 튀김을 나눠주고 있던 양굉이 있었다. 양굉은 다른 아이들이 막무가내로 가져가지 못하도록 튀김 바구니는 높이 들고는 그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소녀는 몸을 돌려 도망쳤다.
그걸 본 양굉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엉? 내, 내가 무섭나?”
앞에서 그 중얼거림을 들은 꼬마 하나가 냉큼 대꾸했다. 아까 양굉이 코를 닦아준 꼬마였다.
“아뇨. 안 무서운데요.”
“뭐여? 그럼 어떤데?”
“웃기게 생기긴 했어요.”
“뭐라고? 요 녀석이.”
양굉은 꼬마에게 튀김을 하나 쥐여줬다. 녀석은 히죽 웃었다.
“인제 보니 잘생긴 거 같아요.”
양굉이 크게 웃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가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 * *
장건은 회의실 겸으로 쓰는 저택 거실의 큰 문을 마주 보았다.
맹주 혁련위진을 가볍게 꺾어주고 이런 회의에는 관심 없다는 듯 문을 박차고 나간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되돌아온 것이다. 물론 장건은 정말 이 회의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그렇게 되돌아오고도 낯뜨거움을 느끼지 않았다.
앞장선 산호가 문을 열었다. 거실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눈이 그들을 향했다.
“엇··· 장건···”
몇몇은 남궁천 옆에 있는 장건을 보고 당황한 듯 보였다. 특히나 당혹스러워 보이는 것은 한쪽 구석 의자에 앉아있던 혁련위진과 그의 측근들이었다. 당황하지 않은 대부분의 무인들은 그런 혁련위진과 장건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건은 거실 한쪽 벽으로 다가가 거기 등을 기대고 섰다. 회의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 바깥에 선 것이다. 또 몇몇은 그런 장건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대부분은 그가 그렇게 바깥에 서는 것만으로 회의의 중심이 그쪽으로 확장되었음을 느꼈다.
벽에 등을 기대로 팔짱을 낀 장건은 거실 안을 쭉 둘러보았다. 조금 전 혁련위진 주도의 회의 때는 없었던 남궁가의 일원들이 파리한 안색의 남궁 가주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고, 대전사 미쳐 날뛰는 말과 원주민 전사들 역시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중 적풍과 비랑이 장건을 보고 슬쩍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했다.
남궁천은 그 남궁 가주와 가문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의자에 앉아있던 무사 하나가 얼른 그 의자를 양보했다. 고맙다 눈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은 남궁천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그래, 이야기는 들었소. 당장 패왕보로 나아갈 경로를 짜는 게 아니라 서쪽에 있을 원주민 병사들을 구할 방도를 찾고 계신다고?”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마궁이 무너지면 자유를 되찾을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농장을 보고 알았는데, 그들이 그 싸움에서 다 죽어버리면 이들에겐 남자가 아주 많이 부족해질 것이다.”
대전사 미쳐 날뛰는 말이 곧바로 대답했다. 남궁천은 고개를 돌려 남궁유현과 순우현의 얼굴을 확인했다. 두 사람 모두 대전사의 고집이 대단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가로젓고 있었다.
남궁천은 다시 대전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전사께선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이오?”
“일행을 나눠야 한다.”
“···나누자고?”
미쳐 날뛰는 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쪽의 군대에게 소식을 전하고 우리 동족을 구할 사람들, 이 일대 농장 도시들을 돌며 마궁의 억압을 풀어낼 사람들, 그리고 본래 목적대로 마왕의 부활을 막을 자들. 그렇게 셋으로 나누어야 한다.”
“이보시오, 대전사. 지금 노예로 부려지고 있는 사람들의 고됨과 억지로 끌려간 노예병들의 안타까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당장 대왕, 아니 항우의 부활 의식이 며칠 남지 않았소. 비록 패왕보와 연결된 호수가 우리 남궁가의 것이라 일단 배를 타면 방해가 없을지라도, 거기까지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 않소. 그렇게 인원을 나누면···”
“난 단순히 동족들의 고통 때문에 그들을 구하자는 게 아니다.”
대전사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원주민 전사 하나가 거실 중앙에 놓여있던 편지지 하나를 들어 남궁천에게 가져왔다. 남궁천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걸 받아 들어 읽었다.
곧 그의 눈에 경악이 들어찼다.
“이게··· 무슨··· 설마 다른 농장들에도 이런 명령서가···?”
자연스럽게 그를 바라보던 장건은 슬쩍 고개를 뺐다. 그래봐도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진 않았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이번 달 보름. 농장의 노예들로 가능한 한 많은 피를 볼 것. 연공의 재료로 쓰던, 그냥 참수하든 최대한 많은 죽음을 내릴 것. 여자와 아이, 노약자를 가릴 것 없음. 저 종이의 내용이네.”
장건이 고개를 돌려보니 그 목소리의 주인이 보였다. 제운성. 제가의 일원인지 무림맹의 일원인지 불분명한 자. 그리고 어째선지 혼자 장건을 친구로 여기고 있는 듯한 자.
그는 장건처럼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까딱여 눈인사를 하고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에 도착한 패왕보의 전령이 가지고 있었지. 그를 심문한 결과 다른 농장들에도 같은 명령서가 배달되었음을 알 수 있었네. 아까 오전에 맹주가 서부 무림인들을 먼저 모아두고 확인하려던 사항도 저 명령서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보려는 것이었지.”
“무슨 의민데?”
제운성은 대답 없이 슬쩍 앞으로 턱짓했다. 남궁천의 경악이 이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설마 의식의 힘을 더하려고···? 길일을 기다릴 수 없으니 아예 길한 날을 만들어버리겠다? 가문 무사들과 노예들의 죽음마저 모두 활용해서··· 하지만 거기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멀긴 하지만 결국 같은 대지에서 벌어질 일이다. 그리고 그들이 깨우려는 존재는 전쟁의 별. 의식이 치러지는 동안 죽은 자들의 정신은 모두 밤하늘을 타고 그 별에게 휩쓸릴 것이다.”
남궁천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술법이 성공할 리 없소. 그리고 사공은 술법의 달인이고, 그런 한계를 분명 잘 알고-”
“너희들이 위대한 대지의 정신들을 현실로 끄집어내 죽여버린 것은 말이 되는 짓거리였나? 그렇게 죽어 나간 정령들이, 위대한 정신들이 몇인가? 그 시체들로 빚어낸 주술이 무슨 짓까지 벌일 수 있을지 몰랐다는 말인가?”
남궁천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를 바라보는 대전사의 두 눈이 피처럼 붉은 선홍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늘부터 의식까지 남은 시간은 엿새다. 듣자 하니 내일 새벽에 출발하면 넷째 날 밤에 의식이 준비되는 곳에 도착할 수 있다더군. 하지만 그렇게 의식을 막아도, 다른 농장들에선 학살이 벌어질 것이다. 또한 서쪽 마궁의 군대를 향해서도 최대한 뒤로 물러나다가 그날 밤 회전을 벌이라는 전령이 갔다더군. 무슨 말인지 알겠나? 저들에게 이건 이제 싸움이 아니다. 그저 전쟁의 별을 깨우려는 거대한 의식일 뿐이지.”
거실 안이 조용해졌다. 모두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무림정천대와 남궁가의 무사 중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대략 백 명. 전력이 될 수 없는 부상자를 제외하면 그 정도가 남았다.
패왕보라는 곳에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남궁가에서도 잘 알지 못했다. 패왕보는 남궁호와 모용호가 만나는 강 중앙에 새워진 작은 요새였고, 온전히 사공의 담당이었기에 남궁 가주도 그 전력을 몰랐다.
그렇다고 동진군 본대에는 전령만 보내고 농장을 돌며 관리병을 무찌를 쪽엔 최소한의 병력만 붙일 수도 없었다. 신장강 일대에 농장 도시는 다섯. 그곳의 관리자들을 닷새 안에 모두 몰아내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다섯 도시를 돌기 전에 무림인 쪽이 지치거나 패배할 수 있었다. 그럼 그 농장 도시에서는 보름날 학살이 벌어지는 것이다.
동진군 측으로 간 전령도 먼저 마궁의 군대를 지나쳐야 하기 때문에 혹여라도 붙잡히게 되면 큰 낭패를 볼 터였다.
“···사람이 모자라는 것이군.”
남궁천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들 그렇게 침잠한 가운데 누군가 슬쩍 손을 들었다. 그는 순찰대원 산호였다.
“저··· 남궁가의 병력을 더 운용할 수는 없는 겁니까?”
“우리 병력의 대부분은 서쪽에 있네. 지금 가문에는 아직 무공을 익히지 않은 아이들과 최소한의 병력이 있을 뿐이지. 큰 도움이 되진 못하네.”
시퍼런 안색의 남궁유현이 선선히 그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다른 사람들 모두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이, 이미 산호가 들어오기 전 같은 질문을 한 자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이 자리의 무림인들은 누군가를 포기해야 한다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다른 농장 도시를 돌며 원주민들을 구하고 의식이 치러지는 걸 두고 보든가, 의식을 막고 농장 도시의 학살을 외면하는 것이다.
아무도 어느 쪽을 포기하자고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단순히 이 자리에 원주민들을 대표하는 전사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 외에도, 여기 있는 무림인 대부분은 그런 희생을 가만두고 보지 못할 사람들이었다. 혁련위진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들 대부분이 혈기 넘치는 젊은이였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누군가 입을 열었다.
“농장 도시들을 구합시다. 난 애초에 그 술법이라는 게 진짜 성공할지도 의문이었습니다. 항우가 언제적 사람입니까? 천년도 더 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시체가 흙이 된 지도 벌써 수백 년일 텐데, 그 죽은 자가 돌아온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럼 저 마궁은 그런 헛짓거리를 위해 수천, 수만 명을 죽이려 하고 있다는 말인가? 자네가 진짜 술법을 본 적이 없는 모양인데, 그것들은 정말 기기괴괴한 현상을 일으키며 현실을 뒤섞어버리네. 게다가 항우는 역사상 최악의 마인 아닌가? 훗날 부활할 것을 안배해 두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괴물이야.”
목소리가 커졌다.
“그럼 영문도 모르고 죽어 나갈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보자는 소리요!”
“초패마왕이 부활해 일으킬 전쟁과 학살이 더 많은 사람을 죽일 게야! 그걸 막아야지!”
“아무리 그래도 죽은 자가 부활한다니! 그게 말이 되나! 그리고 천년 전 무공이 뛰어나 봐야 얼마나 뛰어나겠소!”
“항우의 전설을 모른단 말인가? 그는 칼을 휘둘러 강을 가르고, 맨손으로 산을 뽑아낼 거력을 뿜어내던 자였네! 내가 어디 이야기책 보고 하는 말이 아니라 역사서를 공부해서 하는 말이야! 역발산기개세는 문자 그대로 황실 편찬 역사서에 적혀있는 내용이란 말이네!”
마지막 말에 사람들의 눈이 순우현을 향했고, 두 눈을 꾹 감고 생각에 빠져있던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 저지를 주장하던 자가 조금 더 의기양양해져서 농장 구원을 말하던 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곧 눈을 내리 깔았는데, 그 옆에 있는 원주민 전사들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기 때문이었다.
장건은 그 모습을 보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옆에 있던 제운성도 그와 비슷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농장의 구원? 의식의 저지?”
“글세. 자기 발목의 족쇄는 스스로 부숴야 한다는 쪽인데.”
“···그, 무슨 뜻인가?”
“남이 족쇄를 풀어준다면 그건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족쇄에 속박되는 것과 같지. 하지만 스스로 일어나 족쇄를 부수고 벗어던진다면, 그 족쇄를 발판삼아 오롯이 홀로 설 수 있을 거다.”
제운성은 뭔 헛소리를 하냐는 눈으로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지금 백 년 동안 억눌린 농장의 원주민들이 어떻게 들고일어나겠냐는 의문 섞인 눈이기도 했다.
장건은 굳이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스윽 문쪽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를 따라서 고개를 돌린 제운성은 곧 그 문에서 똑똑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문 앞에 서 있던 무사가 문을 열었고, 차와 간식거리를 든 저택의 꼬마 하인, 하녀들이 눈을 내리깔고 등장했다.
무림인들은 조용해졌다. 당장 이 저택이 완전히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본래 저택을 관리하던 마인들은 남궁가의 이름에 겁을 먹고 창고와 자신들의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고, 때문에 저 시동들이 뭔가 듣고 쭐래쭐래 자기 주인에게 찾아가 털어놓는다면 소동이 벌어질 수 있었다.
어차피 내일 떠나기 전 그들을 정리할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당장 부상자들이 저택의 방을 차지하고 있는 와중에 소란을 피울 순 없었다. 무림정천대의 정확한 계획은 내일 새벽 그 관리병들을 모조리 마당으로 불러내 처리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 차와 간식거리를 본 무림인들은 쩝쩝 입맛을 다셨다. 아이들은 머리를 푹 수그리고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으며 무인들에게 간식을 돌렸다.
그때 누군가 간식을 집으며 시동에게 물었다.
“이거 누가 가져오라고 한 거야?”
“그, 지금이 간식 시간이라서··· 감칠 감독관님이 여기도 가져다드리라고 했어요.”
질문을 한 무사는 피식 웃었다.
“그 돼지 새끼? 웃기는군···”
그는 말끝을 흐렸다. 아마 뒷말은 곧 뒈질 놈이 누구 손에 죽을지도 모르고 잘 보이려 헛짓거리를 한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가 거기까진 말하지 않았지만 그 대화를 듣던 사람들은 모두 뒷말을 짐작했다. 그는 간식을 받아 입에 집어넣으며 시동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간식을 든 시동은 장건 앞으로도 왔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푹 머리를 수그린 아이였다. 옆에 있는 제운성이 얼른 아이가 내미는 간식을 받아들고 다른 이들이 그러하듯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주었다. 제운성은 집어 든 간식을 장건에게 내밀며 말했다.
“어제도 먹어봤는데, 꽤 맛있더군.”
하지만 장건은 살며시 손을 뻗어 그 간식을 받아드는 대신 앞에 있는 시동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그 손길에 자연스럽게 아이의 고개가 들렸다. 아이와 장건의 눈이 마주쳤다.
차분한 장건의 눈과 달리 아이, 소녀의 눈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장건이 말했다.
“너, 무공을 익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