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23)
223화
바람이 불었다.
저택 마당의 풀들이 그 바람에 사르르 흔들렸다. 한쪽 구석에 우뚝 서서 그늘을 늘어뜨리고 있던 나무도 바람을 맞아 흔들리며 차르르-하는 잎과 가지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시원한 바람과 적당히 밝은 햇빛, 멀끔한 저택과 무성한 초록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돗자리라도 하나 가지고 나와 깔고 드러누워 시간을 보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장소였다.
그 목가적인 풍경 속에 두 칼잡이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장건과 단칼이었다.
장건은 칼을 허리춤으로 당겨 잡고 살짝 몸을 튼 자세 그대로 단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은 물론 착 가라앉은 눈동자도 전혀 움직이지 않아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이 없었다면 그냥 석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단칼은 그렇게 화려하기는커녕 제대로 자세를 잡은 것인지 의문인 장건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오른발을 뒤에 두고 무게 중심을 준 채 오른손의 검을 쭉 뻗어 장건을 겨눴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검지와 중지를 모아 검결지를 만들어 오른손 손목과 교차되게 두었다.
일격에 온 힘을 쏟아야 하는 서부 무공이나, 쓸데없는 낭비를 지양하는 황군 무공을 익힌 자들이 보면 고개를 갸웃하거나 괜히 멋을 부린다고 욕할 자세였다. 그러나 장건은 욕하지도, 그렇다고 비웃지도 않았다. 그저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무심한 장건과는 다르게 단칼은 조금 당황한 눈빛이었다. 그가 아는 마인들은 저렇게 차분하거나 깊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난폭하고 흉험했다. 그나마 점잖다는 남궁가 역시 난폭보다는 냉혹하다는 말이 어울리기에 그러한 말이 나올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마주한 장건은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존재했던 자연물처럼 보일 정도로 정적이었다. 단칼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때 조금 전 그 둘이 부수듯 박차고 나왔던 저택의 문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저택을 등지고 있던 단칼은 사람들이 몰려나오는 인기척에도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당장 정면의 장건의 눈이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눈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인기척을 볼 때 그의 동료들이라기에는 너무 많았다. 그의 동료들은 대여섯씩 나뉘어 저택과 창고 등 이곳 농장을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단칼은 더 참지 못하고 움직였다.
“이야압-!”
땅을 박차고 나간 단칼은 검을 들어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내려치는 단순한 일격을 선보였다. 번쩍 허공에 그려지는 섬광이 예리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피하거나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진 않았다. 서부의 무림인 중엔 이 정도 일격을 선보일 수 있을 자가 많았다.
하지만 장건은 벌써 실망하기보다는 조금 더 두고 보자는 생각으로 청룡을 비스듬히 들었다. 단칼의 사선 베기를 흘려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장건의 청룡과 단칼의 검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단칼의 검은 비스듬한 청룡의 칼날을 타고 미끄러지지 않았다. 그 날카로운 예각이 서로 맞부딪친 순간, 갑자기 그 칼날이 파르륵 떨리며 무수한 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직후 제일 첫 번째 검격이 흐려지고 새로운 검의 그림자들이 나타나며 장건의 급소를 노렸다.
장건은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그 칼날 그림자들을 걷어냈다. 놀랍게도 그 칼날들은 맞부딪친 순간 신기루처럼 흩어져버렸다.
환검幻劍이었다.
“아니, 저게 무슨···?”
저택에서 나와 장건과 단칼의 대결을 바라보던 무림인들은 순간이지만 마치 새로운 팔과 검이 여럿 돋아난 듯한 단칼의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기 눈을 의심하는 듯 손을 들어 눈을 비비적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잘 보면 크게 당황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순우현을 비롯한 황군과 고수라 불리는 몇몇이었다. 그들은 놀라기는 했어도 당혹감은 없었다.
그렇게 누군가는 두 눈을 그게 뜨고 누군가는 흥미로워하는 와중에 장건은 계속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단칼의 공격이 연이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흐야앗!”
단칼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며 검초를 쏟아냈다. 그건 매 일격 일격이 상대의 목숨을 끊으려 온몸을 날리는 듯한 서부의 무공과는 확실히 달랐다. 단칼의 검이 그리는 찌르기, 베기, 그가 내디디는 발걸음, 검결지를 쥔 왼손 등등, 그의 동작들은 전신 모두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장건으로부터 차근차근 자신의 우위를 점해가는 방식이었다.
그의 검이 파르륵 흔들리면 다음 순간 하나였던 칼날은 둘이 되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동시에 장건을 노렸고, 그를 피해 뒤로 물러나면 자연스럽게 단칼의 발이 따라오며 장건이 물러설 방향을 제한했다.
단칼은 아주 가까이 붙거나 갑자기 훌쩍 물러나며 장건과 자신의 거리와 공간을 뒤흔들었으며 그 틈으로 실체가 불분명한 검을 찔러넣었다. 그렇게 장건은 뒤로 물러나면 물러날수록 더더욱 불리한 위치로 밀려 나갔다.
“저런··· 장 무사를 도와야···”
“일 대 일 대결이 아닌가? 함부로 끼어들 수는 없는 일이야.”
사람들이 보기에 장건은 지금 요란하고 어지러운 단칼의 무공에 휘말려 정신없이 뒤로 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낯선 무공에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몇몇은 그를 도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불안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건은 뒤로 물러나고는 있어도 당황하고 있진 않았다. 그는 그저 단칼의 무공과 그 안에 그려지는 심상을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단칼의 검과 보법, 그 몸놀림의 결합은 복잡하고 요란했다. 곧은 직선을 그리는 서부 무공과 달리 그의 검은 다른 것을 그리고 있었다. 이미 마음속에 검을 빚고 있는 장건이었기에 언뜻 난잡하게도 보이는 그 그림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험준한 바위 산맥이었다. 돌과 암석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자라난 높고 가파른 봉우리. 오르기 위해선 걷는 것이 아니라 기어 올라가야 하는 거친 바위산. 장건의 머리에 지금 이곳 신대륙의 산맥과는 다른 어느 중원의 험산이 그려졌다.
단칼의 검은 그 산등성이의 급격한 낙차를 그렸고, 발걸음은 그 산 꼭대기의 아찔함과 동시에 바위의 단단함을 나타냈다.
곡선으로 음양을 그리는 태극처럼, 천지를 관통하는 한줄기 벼락을 그리는 혼원벽력처럼. 단칼의 무공 또한 단순히 상대를 제압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기 수행과 그 마음을 현실로 구현하는 사상무공의 형태를 그려가고 있었다.
장건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단칼의 무공이 만들어가는 심상이 흥미로웠다. 과연 이 무공이 그리는 것이 그저 풍경일 뿐일지, 아니면 그 끝에 뭔가 더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는 조금 더 알아보기로 했다.
지금까지 물러나기만 하던 장건의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그의 칼 청룡이 푸르른 빛으로 번뜩 반짝이며 단칼과 맞서기 시작했다.
“헛!”
단칼은 기겁했다. 지금까지 방어에 치중하던 장건의 칼이 그의 검이 그랬던 것처럼 신기루를 그려내기 시작했던 탓이었다.
아니, 단칼과는 달랐다. 정확히는 더 화려하고 세련된 신기루였다. 단칼의 검이 두 번, 세 번의 변화를 그릴 때 장건의 칼은 그 세 배, 네 배의 환상을 그렸고, 단칼의 발이 한 지점을 점령할 때 장건의 발은 다른 모든 곳의 가능성을 짚었다.
또한 장건의 몸도 단칼이 그랬던 것처럼 어떤 심상을 그렸다. 그건 단칼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한 산맥이었다. 언젠가 신대륙 북부에서 보았던, 중원인들의 동부 진출을 늦춘 거대한 산줄기. 그 머리 위에 언제나 하얀 만년설을 얹고 있는 산맥이 장건의 몸을 도화지로 멀리 동부 어느 평야에서 현현하고 있었다.
“으윽!”
단칼의 그 화려한 검세에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장건을 몰아붙이던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뒷걸음질 치기에 바빠진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리 단칼의 무공이 낯설다지만 장건이 밀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생각한 것이다.
팔짱을 끼고 대결을 지켜보던 제운성이 중얼거렸다.
“역시. 하기는 저 무사가 장건을 꺾을 수준이었다면 마궁이 서부를 노릴 여유가 없었겠지···”
주변에 있던 무림인들과 순우현이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궁 가주를 제외한 마가의 가주들이 모두 장건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 압도적인 절정 고수는 홀로 판을 뒤엎어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단순히 정면 대결을 피해 유격전만 반복해도 근거지가 있는 측은 피해가 막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자기들끼리 고개를 끄덕거리는 동안, 단칼은 뒤로 밀려나다 못해 몸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장건의 칼이 더 많은 변화와 허초를 그렸기에 단칼은 겨우겨우 자기 목숨줄만 지키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단칼을 밀어붙이는 장건은 조금 실망하고 있었다. 단칼의 검에서 조금 전 보여준 험산의 심상 이상의 것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게 전부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칼의 무공을 그 청화진인이라는 도사가 창안한 무공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무공을 만든 자는 어쩌면 날씨 좋은 날 산에 올랐다가 깊은 감상을 느끼고 그것을 무공으로 엮어낸 것일지 몰랐다.
어쨌든 이미 큰 우위를 점하고 있던 장건은 이제 마무리하기 위해 청룡을 휘둘렀다. 칼날이 한순간에 다섯 갈래로 나뉘어 마치 한 송이 꽃처럼 보였다. 그 다섯 칼날이 단칼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장건은 그를 죽이지는 않아도 더 움직일 수 없게 부상을 입힐 생각이었다.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시퍼런 칼날 꽃잎을 보며 단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한 표정이었다.
다음 순간, 단칼의 검이 장건의 칼날 꽃잎 속으로 쑤욱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둥글둥글한 꽃잎을 그렸다. 장건의 것과는 조금 다른 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풀 한 포기 자라기 어려운 바위산 꼭대기 얕은 흙무더기에서 피어난 조그만 꽃이었다.
그 꽃잎은 진짜 신기루처럼 청룡의 검세 속으로 스며들어 장건의 뺨을 스쳤다.
“···”
장건의 이마에서 뺨에 닿던 머리카락 몇 가닥이 토도독 끊어져 떨어졌다. 이후 그의 뺨에 가는 실선이 그려졌다. 핏방울도 맺히지 않을 정도로 가는 상처였다.
장건은 왼손을 들어 그 뺨을 살짝 매만지고는 단칼을 바라보았다. 단칼은 숨을 헐떡거리며 검을 뻗은 채 자신이 뭘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장건은 그걸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럼 더 해봐야지.”
멈췄던 장건의 칼이 다시 휙 단칼을 향해 파고들었다. 단칼은 기겁하며 검을 들어 그 공격을 막았다. 이후 조금 전과 같은 공방이 다시 이어졌다. 허초와 허초가 부딪치고 칼날로 그린 산맥이 충돌했다. 굳은 의지와 분노 가득하던 단칼은 이제 멍한 표정으로 정신없이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한 가지 달라진 것은 장건과 단칼 어느 쪽도 뒤로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바쁘게 발걸음을 디디고 복잡한 공방을 이어갔지만 결국 마당 한가운데를 벗어나진 않았다. 그리고 덕분에 어느 쪽이 더 우세하다고 쉽게 읽을 수도 없어진 덕분에 지켜보던 무림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음? 이게 무슨 냄새지?”
그때 한 무사가 코를 킁킁거렸다. 그 모습에 다른 이들 역시 코를 들고 냄새를 맡으려 들었고, 곧 그처럼 어떤 향을 맡게 되었다.
“이거 꽃향기 같은데.”
“매화? 매화인가?”
하지만 그 무사는 곧 부정당했다.
“뭔 소리야, 이게 어떻게 매화인가? 국화 향이지.”
“아닌데. 진달래 같은데.”
“진달래는 무슨. 이거 예전에 천후성 쪽에서 맡았던 꽃향기야. 뭐라더라? 해바라기라던가?”
몇몇 무사들이 그렇게 뜬금없는 논쟁을 펼치는 동안 그 꽃향기가 어디서 나는지 파악한 순우현은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장건과 단칼의 공방을 바라보았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말하길, 그 향은 두 사람의 검에서 나는 향이었다.
“검에서 나는 향··· 검향劍香이라···”
순우현은 그게 어찌 가능한 것인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자신의 것과는 다른 방향의 무공임을, 꼭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 무공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결국 그는 허허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두 사람의 공방에 집중했다. 그처럼 앞에서 펼쳐지는 대결에 집중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 모두 어찌 검에서 향이 피어나는지 놀라워하면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선의 집중이 무색하게도 둘의 공방은 점점 느려졌다. 원인은 숨을 헐떡대는 단칼 때문이었다.
결국 잠시 후 그는 더 검을 뻗지 못하고 풀썩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허억··· 허억···”
그가 그렇게 주저앉아 버리자 장건도 자연스럽게 멈췄다. 단칼은 땀범벅에 몸 여기저기 작은 부상을 입은 채 멀끔한 모습의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숨을 헐떡대면서도 장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장건은 가만히 그 시선을 마주 보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 호흡이 가라앉은 단칼이 꿇어앉은 그대로 장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 스승님, 청화진인께서는 내 검에서 향을 피워내는 날이 진정 이 매화검梅花劍의 시작이라고 하셨소. 당신께서는 험준한 바위산 얕은 흙더미 속에 겨우 그 씨앗을 심었을 뿐이니, 내가 그 나무를 키워 꽃을 피워주시길 바라셨지.”
“스승이 귀천하셨나?”
단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을 이었다.
“꽤 오래전에. 하지만 난 그 유언을 듣고 명심하겠노라 말해놓고 정말 그게 검에서 향을 피워내라는 것이라 믿진 못했소. 뭔가 스승님이 은유적인 표현을 하셨거나, 아니면 망층하게도 죽음을 앞두시고는 헛소리를 하셨다고 생각했지. 사실 검에서 꽃향기를 피운다는 게 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멍하니 장건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잠시 후 그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궈졌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이 불민한 제자의 오만함이었을 뿐이니, 내 그분을 뵙고 드릴 말씀이 없군. 고맙소, 장건. 덕분에 나 혼자 이뤄내지 못했을 경지를 맛보았소··· 이만 끝내시오.”
그는 마치 죽음을 달게 받아들이겠다는 듯했다. 그리고 장건이 그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흘 리기도 전에, 저쪽 무림인들 사이에서 누군가 후다닥 달려 나왔다. 그 인물은 얼른 장건과 단칼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 조그만 체구의 주인공은 조금 전 저택 거실에서 장건에게 무공을 익혔음이 발각되었던 소녀였다.
이쪽을 올려다보며 그 동그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을 본 장건은 결국 헛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