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25)
225화
* * *
어두운 방 안에서 촛불 하나가 힘겹게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창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검은 방은 자신 안에서 반짝이는 그 촛불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밀어붙였다. 촛불은 흔들렸고, 더 움츠러들었다.
그때 그 거무스레한 방바닥에서 무언가 스윽 몸을 일으켰다. 흐릿한 촛불의 밝기는 그것을 그림자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어떤 덩어리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든 덩어리의 정체는 어떤 여인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정중앙을 기점으로 어린 소녀의 얼굴과 노파의 얼굴로 나뉘어 있었다.
“어떻던가?”
그때 지금까지 그저 방안의 검은 얼룩처럼 보이던 구석에서 거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천천히 촛불 쪽으로 다가왔다. 나무 껍데기를 덮어놓은 듯한 얼굴이 드러났다.
“···남궁유현이 배신했군요. 당신 말대로.”
소녀와 노파의 얼굴을 가진 자, 사공은 지금까지 바닥에 두고 끌어안고 있던 물그릇을 앞으로 밀어내며 그렇게 대답했다. 강동공은 그 대꾸가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기침이라도 하듯 켁켁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말했지. 그 핏줄 중 한 놈이 배신했다면 나머지 놈들도 다 그럴 수 있다고. 가문이라는 이름 아래 묶여있는 놈들은 어쩔 수 없어. 결국 다 더러운 배신자의 핏줄이지.”
“남궁유현이 항상 온건파이긴 했죠. 지금 여기서도 충분히 먹고살 만하다며···”
“역겨운 돼지 새끼! 천년 전에, 그리고 지난 천년 간 흐르고 흐른 피 앞에서 어디 감히 그딴 말을! 내 대왕의 의식이 끝나면 친히 그 돼지를 칼로 저며 젓갈을 담가야겠다!”
사공은 그 갑작스러운 욕설이 농담이나 화가 나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강동공은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공자의 가르침이 한 제국의 혈관을 타고 중원을 교화하기 전 사람이었다. 그가 사람을 젓갈로 담가 먹겠다는 건 그만큼 화가 났다는 말이기도 하고, 또 정말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 사실에 약간 진저리를 느낀 사공은 강동공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와 함께 의식을 준비하던 강동공이 갑자기 편집증에 가까운 태도로 서쪽 군단의 상태를 확인해보라 한 것이 전날 저녁이었다. 사공은 당장 의식을 준비할 시간도 모자라는데 이상한 난리를 피우는 강동공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결국 시간과 많은 제물을 준비해서 천리안을 발동시켜야 했다.
그리고 지금 강동공의 편집증이, 편집증이 아님이 증명된 순간 사공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상황이 심각했다.
각 가문의 수장은 모두 무력화되었으며 서쪽의 군대는 그런 상황도 모르고 계속 동쪽으로 물러서며 시간만 끌고 있었다. 거기에 배신자 남궁가는 동진군의 정예들과 의식을 파괴하기 위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천리안을 얼핏 스쳐 간 농장 도시들 또한 분위기가 이상했다. 저택들이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서쪽 군대는 정해진 때가 되면 원주민 노예병을 앞세워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 사공은 그나마 그 사실에 위안을 느꼈다. 그 싸움만 제대로 치러져도 의식은 별문제 없을 터였다.
“그래, 꼭 내가 먹을 필요는 없지. 그보다는 그 자식놈들에게 먹여주는 게 더 좋겠군. 좋다. 그럼 그 자식들을 먼저 잡아 와야겠군.”
“···자식들?”
잠시 딴생각에 빠져있던 사공의 시선이 강동공을 향했다. 그는 나무 껍데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웃는 것 같았다.
“남궁가로 병력을 파견하라. 그 가문을 불태우고 돼지의 자식들을 잡아 와. 그놈의 젓갈을 자식들에게 먹여주든지, 아니면 자식들의 젓갈을 그놈에게 먹여주어야겠다.”
사공은 언제 동진군의 특공대가 이곳 패왕보를 공격할지 모른다든가, 의식을 준비하는 손은 지금도 부족하다든가 하는 이유를 들며 반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강동공이 하고자 한다면 그녀는 말릴 수 없었다.
오래된 석관 속에서 저 고목 인간이 깨어난 순간부터 궁의 최고 결정권자는 그녀도, 각 가문의 가주들도 아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왕이 부활하면 저 고목 인간이 그의 최측근이 될 테니까. 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되살아났을 때 익숙한 얼굴이 있다면 가까워지는 건 당연했다. 물론 그 얼굴 피부가 옛날보다는 훨씬 거칠어졌지만.
사공은 천천히 일어나 가만히 허리를 숙였다. 조금 전 강동공이 시킨 그대로 하겠다는 뜻이었다. 이후 그녀는 느릿한 뒷걸음질로 물러나 흐린 촛불의 영역을 벗어나며 컴컴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때가 오는군. 때가 오고 있어··· 천하에 널려있는 돼지들을 죽이고 유 씨의 천하를 부술 때가···”
그녀가 물러난 뒤에도 강동공은 작은 촛불이 다 녹아 사라질 때까지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먼 과거와 미래를 그리며 중얼거렸다. 녹아내린 촛농은 오래지 않아 흘러내렸고, 심지에서 타던 불씨는 흔들거리며 작아졌다.
잠시 후 마침내 깜빡거리던 불꽃이 꺼졌다. 방 안은 새카맣기만 했다. 그르렁거리는 듯한 중얼거림만 그 검은 공간에 작게 울렸다.
“···때가 옵니다, 대왕이시여.”
* * *
애하화 농장에서 출발한 무림정천대는 남궁가의 안내를 따라 동쪽으로 내달렸다.
신장강 너머의 땅은 전에 보았던 광활한 벌판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여전히 높은 동산 하나 찾기 힘든 땅이 이어지는 것은 같았다. 하지만 전보다 숲과 나무를 보기 쉬워졌고, 조금 더 습해졌다. 물론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로 습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건조한 대기에 익숙한 서부 무림인들이 약간의 텁텁함을 느꼈을 뿐이다.
그들의 선두는 무공은 물론 한쪽 팔까지 잃어 가장 골골댔어야 할 남궁천이었다. 그는 마치 무공을 잃기 전 기력을 되찾아간다는 듯 신나게 말을 달리고 사람들을 이끌었다. 남궁가의 무사들 또한 가주인 남궁유현을 대신해 그의 말을 잘 따랐다.
잠시 말이 쉴 수 있도록 속도를 조금 늦췄을 때 남궁천이 말했다.
“항상 지평선을 주시하시오. 우린 지금 제갈가의 영역을 지나고 있소. 이 일대는 대부분 평야 지대면서도 곳곳에 나무와 숲이 있어 숨은 채 적의 움직임을 감지하기 좋소이다.”
“제갈가에 이 일대를 감시할 여력이 남아있나?”
남궁천은 씨익 웃으며 순우현을 돌아보았다.
“사실 그렇진 않지. 괜히 우리가 이렇게 당당하게 말을 타고 달리는 게 아니외다.”
“허. 그런가? 사람에 비해 땅이 너무 넓은 게군. 그렇지?”
순우현의 질문에 남궁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있는 다섯 호수는 제일 북쪽에 있는 당가호를 제외하면 거꾸로 된 요凹자 모양을 그리고 있소. 본래 우린 그 호수 안쪽으로 들어가는 볼록한 땅 가운데에 살았지. 그러다가 주변 원주민 부족들을 병탄하고 각 가문의 신공, 아니 마공이 정립되면서 각 호수 주변으로 흩어진 거요. 우리 숫자에 비하면 이 땅은 확실히 너무 넓소.”
순우현은 자기 머릿속에 있는 황군 지도 속에서 남궁천의 말을 이해하려는지 두 눈을 좁히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남궁천도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우린 이렇게 계속 동쪽으로 가서 본가, 남궁가로 갈 것이오. 그리고 거기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더 나아가 남궁호와 모용호가 연결되는 지점으로 올라가는 것이오. 패왕보는 남궁호와 모용호 사이 강줄기 가운데 세워져 있소. 그곳의 풍광이 또 각별하지···”
순우현처럼 대충 지도를 그려보던 장건은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서 혼자 피식 웃었다. 어딘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거 전생에도 못 본 폭포를 보겠군···”
잠시 후 남궁천은 한쪽 손으로 말고삐를 쥐고 옆구리를 차며 외쳤다.
“자! 다시 갑시다! 갈 길이 멀었소! 이젠 정말 신나게 달려야 늦지 않을 것이오!”
그는 늙수그레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기운찬 모습으로 제일 먼저 달려 나갔다. 그 뒤를 무림정천대와 남궁가의 무사들이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따라 달렸다. 남궁천의 말대로 갈 길이 멀었다. 패왕보의 의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도착하려면 정말 쉼없이 달려야 했다.
그리고 장건은 그렇게 달려가는 남궁가 사람들을 보며 묘한 감상을 받았다.
사실 저들은 지금 죽으러 가는 자들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패왕보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 얼마나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점도 있었고, 그곳에서 어찌 큰 공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결국 마공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황군 덕분에 지금 여기서 달리는 무사들은 대부분 처형되거나 최소한 마공을 폐해야 한다는 점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남궁 무사들의 태도는 어찌 되었든 가주가 그런 결정을 내렸고, 그러니 군말 없이 따르겠다는 듯 보였다. 그건 자신들이 나고 자라 살아왔던 세상을 제 손으로 부수는 것이나 다름없음에도 말이다.
잠시 뒤로 처져 그들을 바라보던 장건은 이내 툭툭 조조의 옆구리를 쳤다. 푸르륵 콧김 한번 내뿜은 녀석은 이내 다른 말들을 모두 제치고 제일 선두까지 내달렸다. 조조는 신난다는 듯 옆으로 혀까지 길게 빼물고 벌판을 가로질렀다.
“콜록, 콜록···”
모닥불을 앞에 둔 남궁천이 몸을 웅크리고는 하나뿐인 손으로 입을 가렸다. 덕분에 기침 소리는 약간 잦아들었지만, 이미 그 소리를 들을 사람은 모두 들은 후였다. 게다가 손으로 입을 막으며 쇠접시 위로 숟가락을 떨어뜨린 덕분에 덜그럭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 모닥불에 앉아 식사를 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남궁천에게 모였다. 장건과 두 원주민 전사, 그리고 양굉이었다.
양굉은 먹던 접시를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쇼? 낮에 그렇게 신나게 달리더니 밤이 되니 기력이 딸리는 모양이요. 이거 다 죽어가네.”
“콜록, 이런, 크흠, 큼···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콜록!”
남궁천은 다가오는 양굉을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으로 노려보며 계속 기침했다. 하지만 양굉은 그런 눈빛이나 말투에도 실실 쪼개며 다가가 품에서 마른 천을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기침이 멎질 않는 남궁천은 양굉을 노려보면서도 그가 내민 천을 거칠게 낚아채 입을 가렸다. 쿨룩거리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보다 못한 비랑이 접시를 내려놓고 다가오려 했다.
“제가 좀 봐 드릴까요? 중원인 방식의 치료법은 아니어도···”
남궁천은 잘려 나가 짧은 왼팔로 입가를 막으며 비랑에겐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는 그렇게 기침을 하면서도 고개를 저었고, 비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내려놓았던 접시를 다시 집었다.
잠시 후 남궁천의 기침이 멎었다. 그는 비랑에게 말했다.
“크흠, 커허험··· 뜻은 고맙네. 하지만 이건 치료할 수 있는 상처가 아니야··· 그저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을 뿐이네.”
비랑은 들었던 접시를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고통이라도 조금 덜 수 있는 방법을···”
남궁천은 고개를 저어 비랑의 말문을 막았다. 비랑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접시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 비랑을 본 남궁천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뜻은 고맙네. 그냥··· 괜히 이 늙은이 하나 때문에 괜히 기력을 낭비하진 말라는 말이야.”
“어떻게 그래요? 친구가 아픈데.”
“···친구?”
미소 짓던 남궁천의 표정이 멍해졌다. 비랑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말했다.
“우리 친구 아니었나요? 얼마 전엔 같이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했는데. 우리 부족에선 그 정도면 친구라고 해요. 혹시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그러나요? 중원인이라···”
“아니, 아니네. 그런 건 아니야. 그저···”
남궁천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저··· 난 마가 사람이라··· 쿨룩! 쿨럭!”
다시 그의 기침이 이어졌다. 그는 천을 들어 입을 막으며 말이 끊겼다. 하지만 한쪽에서 듣고 있던 장건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아들었다. 그는 아마 이 땅에서 수많은 원주민을 몰아내고 노예로 부린 마궁의 마인인 자신을 어떻게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커흐흠··· 크음···”
기침이 멎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가 입을 막았던 천에는 붉은 얼룩이 생겼다. 그걸 본 양굉이 어울리지도 않게 씁쓰레한 표정으로 남궁천이 떨어뜨린 접시를 주우며 말했다.
“이거 혼자 잡수실 수 있겠소? 좀 도와드릴까?”
“···지랄 말게. 내가 양 손이 다 없는 것도 아닌데.”
남궁천은 그렇게 말하며 양굉의 접시를 뺏어 들었다. 양굉은 알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남궁천은 말없이 양반다리 위에 접시를 올려놓고 한 손으로 그 안에 든 잡탕을 퍼먹었다. 그는 식사가 끝나고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늦은 밤. 장건은 입가에 연초를 문 채 타닥이는 모닥불 속으로 삭정이를 던져넣고는 스윽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몇 불침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잠들어 있었다. 낮게 코 고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 규칙적인 소리는 소란스럽다기보다는 도리어 고요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사실 그리 긴 고요는 아니었다. 오늘 해가 떠 동쪽 하늘이 푸르스름해지기 전에 모두 깨어나 다시 출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남궁가가 있다는 남궁호까지는 가려면 정말 신나게 달려야 했다. 어쩌면 이들의 말 중 일부는 거기 도착할 때쯤 거품을 물고 죽을지도 몰랐다.
그때 모닥불에 등을 보이고 누워있던 남궁천이 혼자 몸을 웅크리고 쿨룩거렸다. 식사 후 한참 괜찮더니 또 기침이 나는 모양이었다.
장건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생각해보면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건데, 두렵진 않소?”
웅크려 누워있던 남궁천은 그 질문에 움찔 굳었다. 하지만 이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돌아앉아 장건을 마주 보았다.
“커흠, 음. 그게, 큼. 그게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장건은 입에 문 연초를 깊게 한번 빨아들이고 후 연기를 뿜으며 모닥불에 시선을 두었다.
“정확히는 남궁가 무사들 모두에게 묻는 것이오. 남궁가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라지만 마궁이 무너지고 나면 여기 있는 무사들 중 살아남을 자가 몇이나 되겠소.”
“···많지는 않겠지. 아마 살아남아도 지금 내 꼴일 테고.”
“그런데도 패왕보를 향해 달려가는군.”
몸을 일으켜 앉은 남궁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에서 무림정천대가 피운 모닥불이 반짝였고, 그 주변에 몸을 웅크리고 누운 사람들이 있었다. 남궁천의 눈은 그렇게 먼 곳을 쭉 훑고는 가까운 곳에 누운 비랑을 향했다.
그녀는 턱 가까이 이불을 덮고는 도로롱 작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남궁천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혹자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전향한 우릴 욕할지도 모르지. 우리가 전향하지 않았더라면 대왕의 부활도 순조로웠을 것이고, 그럼 궁의 승산도 더 켜졌을 테니까. 살아남은 우리 후손 또한 옛 마가의 자손들이라는 허물을 벗기 힘들 테고···”
남궁천은 손에 든 천을 들어 입가를 닦았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양굉을 바라보았다. 양굉은 모포를 반쯤 걷어차고 자유분방한 자세로 자고 있었다. 남궁천은 피식 웃었다.
“···아마 여기 있는 녀석 중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자가 있을 것이네. 전향하는 것보다 궁과 함께하는 것이 더 승산 있다고 생각하는 녀석이.”
“그런데 불만을 드러내는 자가 없군.”
남궁천의 눈이 장건을 바라보았다.
“가주의 결정이란 그런 것이네. 저 제가의 가주도 죽기 전까지 어리석은 행태를 보였으나 제가의 무사 중 그 누가 가주의 뜻을 거슬렀나? 우리는 한 핏줄로 이어진 가족이면서, 운명을 함께 하는 공동체네. 가주를 설득하려 노력할 순 있어도 그저 자신의 기분을 풀러 불만을 드러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네. 그래봐야 불화만 깊어지지, 뭐가 더 있겠나?”
그 대답에 장건은 말없이 연초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 불티가 입가에 닿자 장건은 연기를 뱉으며 꽁초를 모닥불 속으로 튕겨 넣었다.
“가주가 정하면 그저 따른다··· 난 이해 못 할 방식이군.”
“하지만 이게 우리의 삶이네.”
장건은 모닥불에서 눈을 떼 남궁천과 시선을 맞추고 씩 웃었다.
“그 가문이 싫어 황야를 떠도는 떠돌이로서, 이해하진 못하지만 존중하겠소. 그 방식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그건 나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겠지.”
남궁천도 그 웃음을 보며 마주 웃었다.
“자넨 정말 특이해.”
“자주 듣소.”
장건의 대꾸에 그는 고개를 살살 저으며 웃더니 이내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가 눕는 걸 본 장건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 가득한 은하수를 바라보았다. 문득 별똥별 하나가 그 은하수 속에 짧은 빗금을 그렸다.
그날 밤 내내 남궁천은 가끔씩 낮게 기침을 했다.
* * *
애하화 농장에서 출발하고 무림정천대는 사흘 동안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며 죽어라 동쪽으로 달렸다. 첫날엔 제갈가의 영역을 지난다며 주변을 경계했지만,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생각할 즈음부터는 말의 입가에 거품이 나도록 달리기만 했다.
그동안 몇몇 무림인들이 불만을 표시하자 적어도 낮에는 펄펄 날뛰는 남궁천이 딱 잘라 말했다.
“가문에 도착하고 배를 타면 그때부터 쉬면 될 것이오. 적어도 하루 동안 배를 타니 휴식 시간으로는 충분하지. 그리고, 서부 무림인들 수준이 이게 전부였소?”
누가 봐도 의도가 뻔히 보이는 도발이었다. 하지만 그 의도를 알아도 참을 수 없는 도발이 있는 법이다. 서부 무림인들은 그때부터 입을 꾹 다물고 죽어라 달리기만 했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저녁. 사위가 점점 어둑해지는 가운데 정말 몇몇 말들은 거품을 물다 못해 정말 정신이 나가서 비틀거릴 즈음이었다. 어제부터 만난 강줄기를 타고 북동쪽으로 계속 올라가던 무림정천대는 어느 낮은 언덕 위에 올라섰고, 곧 멀리 보이는 연안선과 그 너머 끝없이 펼쳐져 수평선을 그리는 물의 집합을 볼 수 있었다.
“···저게 호수라고?”
“바다 아닌가? 수평선이 보일 정도의 호수를 호수라고 부를 수 있나?”
몇몇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남궁천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호수가 맞소. 물이 짜지 않으니까.”
“···저게 다 담수? 세상에, 오대호라며? 이런 호수가 넷이나 더 있다고?”
풍족한 물보다는 마른 황야와 벌판에 익숙한 서부 무림인들은 그 거대한 호수의 크기를 나름대로 가늠해보려 노력하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천은 고개를 살살 가로젓다가 연안선 한쪽을 보고 턱짓했다.
“저쪽이 우리 가문이오. 건물과 정박한 배들이 보이시오? 호수에서 생선도 잡고, 다른 가문이나 지역으로 이동할 때 쓰는 배들이···”
남궁천의 표정이 굳었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궁가의 무사들은 모두 표정이 굳었다. 그 표정을 본 장건도 연안선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모여있는 큼직한 탑과 건물들 사이에선 거뭇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제 막 피어오른데다가 검푸른 저녁 하늘에 가려 지금까지 달려오면서도 다들 그걸 보지 못했다.
“이럇!”
누가 뭐라 묻기도 전에 남궁천이 말을 내달렸다. 그 뒤로 남궁가의 무사들이 급히 따라붙었다. 무림정천대 무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뭐라 말리진 못하고 머뭇거렸다.
장건은 망설이지 않았다. 곧바로 조조의 옆구리를 가볍게 찼고, 지쳐서 거품을 무는 다른 말들과는 다르게 아직도 힘이 넘치던 녀석은 당장에 땅을 울리며 내달렸다. 그는 단숨에 먼저 달려 나가던 남궁가 무사들을 제치고 최선두로 앞서 나갔다.
그 모습을 본 순우현이 버럭 외쳤다.
“뭣들 하나! 어차피 배를 얻어야 해! 남은 시간 동안 말로 달려서는 패왕보까지 갈 수 없어!”
그리고는 제일 먼저 말을 달렸다. 다른 인원들도 정신을 차리고 그 뒤를 따랐다.
순식간에 선두를 앞지른 장건과 조조는 곧 호수 연안에 세워진 길쭉한 담벼락과 커다란 대문을 만났다. 그 대문 위에는 남궁세가南宮世家라고 웅장한 필체로 현판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현판 아래 대문은 박살이 나 있었고, 안쪽에는 바닥에 쓰러져 검붉은 웅덩이를 만드는 시체들이 보였다.
빠르게 주변을 훑어본 장건은 툭툭 고삐를 당겨 조조에게 방향을 일렀다. 조조는 벼락같은 속도로 그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세가 여기저기에서 비명과 고함이 울려 퍼지고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몇 번 세가 안의 좁다란 골목과 담벼락 사이를 이리저리 꺾어가며 달리던 조조는 곧 답답하다는 듯 담벼락 기와 위로 올라섰다. 녀석과 장건의 무게에 단단한 기와가 박살 나며 밑으로 쏟아졌지만, 녀석은 그 기와에 쓸려 미끄러지기 전에 더 빨리 달려 나가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했다.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장건과 조조는 좁은 골목을 벗어나 확 트인 공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 앞에 큼직한 전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요한 행사를 위해 마당을 넓게 많은 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남궁가 사람들로 보이는 이들이 전각을 등지고 서서 갑옷과 창을 든 자들에게 포위된 것이 보였다.
“···”
조조의 말발굽이 그곳 바닥에 깔린 석판을 강하게 밟으며 따각따각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런 장건과 조조의 등장에 수세에 몰리고 있던 이들이나, 몰아붙이고 있던 자들이나 모두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장건 또한 적과 아군을 확실히 구분하기 위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갑옷을 입은 쪽에서 버럭 외쳤다.
“뭣들 하나! 밀어붙여 마무리해! 저놈도 마찬가지다! 모든 남궁 씨는 오늘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그의 외침 한 번에 적아의 구분이 끝났다. 장건은 오른손으로 검결지를 쥐고는 허공에 휙-가로선을 그었다. 창을 들고 움직이려던 자들은 그 갑작스러운 동작에 저게 뭔 헛짓거리냐는 표정으로 장건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장건의 청룡이 스스로 뽑혀 나와 허공을 날았다.
남궁가의 하늘 위로 시퍼런 선이 어지러이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