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30)
230화
* * *
강 한가운데 작은 섬, 그 외곽을 둘러싼 패왕보의 성벽은 높고 튼튼한 모양으로 실제로 공성전이 가능한 성벽이었다.
하지만 그 성벽을 넘어서서는 병사들의 거처와 창고, 무기고, 마구간 등의 잡다한 건물들이 이어지며 섬 정중앙에는 전투보다는 왕이나 황제가 머무는 궁전宮殿이라 할 법한 것이 세워져 있었다.
그 궁전은 깔끔한 판석이 깔린 넓은 공간 중앙에 높다란 단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장중한 기둥과 기와지붕을 올린, 이런 신대륙의 동부 숲속보다는 저 멀리 중원 장안에나 어울릴 듯한 웅장한 궁전이었다.
그러나 그 궁전의 내부는 간소하다 못해 휑했다. 왕좌라도 차려져 있을 것 같은 외부와는 달리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 중앙에 있는 기이한 문양을 가진 거대한 원형 금속판 외에는 그저 기둥과 천장이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원형 금속판에는 둥근 곡선을 따라 조그만 구멍들이 촘촘히 뚫려 있었는데, 그 구멍에서 마치 귀신이 우는 듯 히이이-하는 희미한 괴성이 울려 나오고 있었다. 그건 그 원형 금속판 아래가 비어 있어서 그 아래 지하에서 올라오는 바람과 구멍이 만나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고 있음을 말하는 동시에, 그 금속판이 일종의 거대한 덮개임을 시사하는 소리였다.
그 덮개 중앙에 시커먼 천을 뒤집어쓴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겉으로 노출된 피부는 얼굴뿐이었다. 그 외의 부분은 모두 먹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검은 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얼굴 정중앙을 기점으로 반은 소녀의 얼굴을, 반은 노파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왔군.”
바닥의 금속 덮개를 바라보던 그녀, 사공은 고개를 들었다. 궁전 밖에서 희미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궁전 안을 훑었다. 별다른 구조물 없이 텅 빈 궁전 안에는 사람만이 가득 차 있었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그녀와 그녀가 밟고 있는 덮개를 중심으로 둥글게 사슬에 묶인 채 꿇어앉은 원주민 노예 백여 명과 큰 칼을 들고 있는 무사 이십여 명이 있었다. 궁전의 벽을 빙 둘러싸고 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중얼중얼하는 자들도 십여 명 있었는데, 그들의 복장은 사공 그녀와 비슷했다.
그 큰 칼을 든 무사들은 밖에서 들리는 소란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궁전 안을 쭉 둘러본 사공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길에 무사들의 큰 칼도 스르륵 머리 위로 올라가며 섬뜩한 빛을 발했다.
그때 사공의 눈에 문득 꿇어앉아 있던 원주민 노예 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제 막 성년이 되었을까 싶은 소녀였다. 그녀도 쇠사슬에 묶인 손발을 꼼지락거리던 와중에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소녀의 검은 눈과 양쪽의 색이 다른 사공의 눈이 마주쳤다.
잠시 그 눈을 마주 보던 사공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들었던 손을 휙 아래로 내렸다. 무사들의 큰 칼도 그 손처럼 위에서 아래로 깔끔한 궤적을 그렸다. 그 궤적이 소녀의 목을 스쳤다.
“허억!”
“으으···”
스무 개의 칼날이 번뜩였고, 스무 명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는 붉은 피를 콸콸 쏟아냈다.
묶여있던 다른 원주민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자기들 말로 욕설을 내뱉으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들을 속박하고 있는 사슬을 벗어날 순 없었다. 그리고 무사들의 칼이 다시 움직였다.
원주민 백 명이 죽는 데에는 무사 스무 명의 칼질 다섯 번이면 충분했다. 궁전 안에는 머리가 잘린 시체들이 즐비했고, 그들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핏물로 바닥은 흥건하다 못해 철벅거렸다. 아찔한 피비린내가 궁전 안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죽은 자의 몸에서 쏟아져나온 핏물은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였다. 궁전 바닥에 특별히 경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사공이 서 있는 중앙을 향한 것이다. 이후 핏물들은 귀곡성을 내던 금속판의 구멍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제 그 덮개 아래에선 귀곡성이 아니라 쪼르르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생명이 추락하는 소리였다.
그때 닫혀있던 궁전의 문이 벌컥 열렸다.
“사공! 적! 적이 쳐들어왔습니다! 지금 성채의 병력이, 윽!”
문을 열고 들어선 자는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그 안에 한가득한 시체들을 보고 멈칫거렸다. 하지만 곧 코를 킁킁 풀어내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현재 성채의 병력이 서문으로 이동 중이고, 각 탑에서도 종소리를 듣고 곧 움직일 겁니다.”
“적이 몇이나 되지?”
“아··· 그건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원래 규모에 따른 신호가 있는데, 지금 종소리는 그냥 무작정 울리고만 있군요.”
그는 면목 없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며 그렇게 말했다. 성문 쪽 병사의 실수가 부끄럽다는 듯했다.
“그렇군. 그럼 가서 그들을 막아라.”
“···의식을 계속 진행하실 생각이십니까?”
“할 생각이 아니라 해야만 한다. 이 근위병들도 데리고 가라.”
사공은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휙휙 손을 털었다. 그러자 조금 전 원주민들의 목을 잘랐던 큰 칼 무사 스물이 자연스럽게 보고하던 자의 뒤로 움직였다.
“···알겠습니다. 침입자를 격퇴하고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며 궁전의 문을 닫았다. 무사들이 떠나며 이제 궁전 안에는 주문을 외우는 술법사들과 그 중앙에 사공만 남았다.
사공의 시선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원주민들의 머리 중 조금 전 눈을 마주쳤던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이 잘린 그 소녀의 눈은 이미 생명이 빠져나가 탁했다.
잠시 그 눈을 바라보며 지하로 피와 생명이 흘러가는 소리와 술법사들의 주문을 듣던 그녀는 곧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다가가는 궁전 구석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녀는 아주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계단을 횃불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내려갔다. 그 계단은 한쪽으로 완만하게 굽어 빙글빙글 돌아 지하로 내려가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그 계단이 끝나고, 사공의 앞에 거대한 공동이 나타났다.
그 공동 안에는 커다란 화로가 여럿 불타고 있어서 계단과는 달리 꽤 환했고, 덕분에 아주 끔찍한 풍경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공동 천장의 중앙에서 마치 비가 오듯 붉은 핏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위에 있는 궁전에서 핏물이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핏물이 그냥 그렇게 떨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일부는 공동의 벽을 타고 흘러내리며 그 벽에 새겨져 있던 복잡한 음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환한 화롯불에 비친 피범벅 벽이 요사스러운 붉은 빛으로 반짝였다.
그렇게 천장에서 떨어진 붉은 비와 벽을 타고 흘러내린 핏물은 공동 중앙에 있는 웅덩이로 고였다. 핏물의 불투명함 때문에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공은 그 웅덩이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해가 졌습니다. 시작할 시간입니다.”
그녀가 피 웅덩이를 향해 말하자 그 웅덩이 중앙에서 뭔가 출렁였다. 그 출렁거림은 사공을 향해 다가왔고, 곧 그 피 웅덩이 속에서 누군가 스르륵 솟아 나왔다. 전신이 나무껍질처럼 거칠고 우둘투둘한 피부로 뒤덮인 자, 강동공이었다. 벌거벗은 그의 피부 위로 핏물이 흘러내렸다.
“소란이 들리는군.”
“황제의 개들이에요.”
강동공의 얼굴 피부가 일그러졌다. 미소였다.
“시간을 잘 맞춰 왔군.”
그는 웅덩이 가장자리로 빠져나오며 공동 내부를 쭉 둘러보았다. 환한 화롯불에 벽에 새겨진 음각과 그 속을 채운 핏물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화롯불을 반사한 것이 아니라 그 음각 자체가 음산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둥근 공동을 한 바퀴 빙글 돌아본 강동공의 시선이 그 앞에 꿇어앉은 사공을 향했다. 젊고 늙은 얼굴의 괴물과 고목 피부의 괴물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렇게 시선이 마주친 가운데 강동공의 손이 천천히 움직여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거렸다. 잠시 후 그 손은 와락 피부 속으로 파고들었고, 고목의 껍질 같은 피부가 바자작 부서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자해의 순간에도 두 마인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직 강동공의 손만 움직여 자신의 가슴팍에서 뭔가를 뽑아냈을 뿐이다. 강동공의 가슴속에서 나온 것은 누군가의 손이었다.
마치 조금 전까지 살아있었을 듯한 생생한 손, 말 그대로 손가락 다섯 개와 손바닥, 손목 약간을 가진 왼쪽 손.
“···지난 천년 간 내 품 안에 계시던 대왕께서 이렇게 떠나시는구나.”
가슴 속에서 그 손을 뽑아낸 강동공은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것을 사공에게 내밀었다. 그녀 또한 그처럼 조심스럽고 경건한 태도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것이 강동공이 천년의 시간 동안 관 속에 시체처럼 잠들어 있어야 했던 이유였다. 대왕의 왼손을 미래로 보내는 것.
“그럼 의식을 시작하라. 나는 그동안 황제의 개들과 놀아주어야겠다···”
강동공은 그렇게 말하고는 완전히 피 웅덩이를 빠져나와 사공이 내려온 계단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옷도 걸치지 않은 채였다.
그렇게 강동공이 지하 공동을 떠난 후 사공은 자신의 검은 옷 사이에서 작은 은 쟁반 하나를 꺼내 그 위에 대왕의 왼손을 올려놓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후 그녀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수인手印을 맺으며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주문이 시작되자 지금까지 거세게 타오르던 화롯불들이 한순간에 훅-꺼져버렸다. 공동 전체가 어두워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낮고 음울한 사공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함께 공동 중앙의 피 웅덩이와 벽이 은은한 핏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항우 부활의 시작이었다.
* * *
“이게 무슨 소리지?”
어두운 숲속, 풀숲 아래에 몸을 낮추고 움직이던 양굉이 갑자기 고개를 들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주변에 있던 무림인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하지만 양굉은 그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다시 중얼거렸다.
“이거 종소리인가?”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곧 멀리서 땡땡땡-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비랑이 그 방향을 짐작해보곤 말했다.
“···섬 쪽이에요. 설마 장건에게 무슨 일이···”
“일단 몸을 낮추시오!”
숨죽여 외친 것은 제운성이었다. 그 말에 풀숲에서 몸을 일으키던 양굉이 슬쩍 다시 앉았다. 제운성의 말을 이어졌다.
“장건과 순우 선생이오. 고수 중의 고수들이지. 그런 쪽에서 소란이 났다면 그건 그들이 일부러 일으킨 소란일 수밖에 없소.”
“일부러 소란을 일으켰다고요?”
비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제운성을 노려보았다. 장건이 굳이 그럴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했다.
“몇 가지 가능성이 떠오르는데, 그 두 사람이 걸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패왕보의 경계가 삼엄했거나, 아니면···”
제운성의 목소리가 멎었다. 저 앞에서 소란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움직여라! 긴급 신호다! 어서어서 움직여!”
“성채로 이동한다!”
그 외침을 들은 제운성이 뒤쪽으로 쯧쯧-하며 소리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그를 포함한 별동대 전원이 납작 바닥에 엎드려 숨을 죽였다.
그렇게 엎드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가려던 방향에서 횃불들이 나타났다. 그 횃불의 주인들은 척척 발까지 맞춰가며 어둑한 숲길을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었다. 그 숫자가 수십여 명이었다.
잠시 후 횃불이 멀어지고, 엎드려 있던 사람들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성채 쪽으로 멀어지는 횃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비랑이 말했다.
“···경계가 삼엄했거나, 아니면요?”
조금 전 제운성이 말하던 것을 되물은 것이다. 제운성은 바닥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아니면, 각 탑의 시선을 대신 끌어주기 위한 행동이지. 어쨌든 우리 쪽 숫자가 모자라니 탑의 빈틈을 만들어주고자.”
비랑의 표정이 스르륵 굳었다. 제운성의 말대로라면 현재 이 일대의 마궁 병력이 모조리 그에게 달려가고 있다는 말이었다. 전날 배에서 마인을 심문하고 나온 그 숫자는 대략 칠백여 명. 각 탑에 최소 인원이 남았다고 치더라도, 조금 전 달려가던 숫자로 보아 최소 오백을 넘는 마인들을 장건이 상대하리라는 말이었다.
그녀는 당장 패왕보 성채 쪽으로 몸을 돌리고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그만. 장 무사가 걱정되는 건 알지만, 그도 나름의 생각이 있으니 그렇게 움직였을 거예요. 당장 우리의 임무는 인왕탑을 무너뜨리는 거고요.”
비랑의 앞을 가로막고 차분하게 말을 꺼낸 것은 제가의 섬지영이었다. 하지만 비랑은 굳은 표정 그대로였다.
“혹 그가 실수한 거라면요? 뭔가 잘못된 거라면?”
“그래도 우리는 탑을 무너뜨려야 해요.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항우의 부활 의식을 막기 위해서고, 그러기 위해선 탑이 무너져야 하니까. 장건을 돕는 건 그 후에 할 일이에요.”
그렇게 섬지영이 비켜설 것 같지 않자, 딱딱하게 굳어있던 비랑의 입가가 슬며시 벌어지며 이빨을 드러냈다. 마치 늑대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그만. 저 말이 맞다. 우린 우리 할 일을 해야 해.”
그때 적풍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며 원주민 말로 그리 말했다. 비랑은 입술을 꾹 다물고 적풍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엄하다기보단 부드러운 숙부의 눈길을 마주하고는 뛰어나가려던 몸에서 힘을 풀었다.
그녀가 단독 행동을 멈춘 듯 보이자 제운성의 말이 이어졌다.
“어쨌든 좋은 기회가 생겼으니 움직입시다. 방금 말대로 일단 탑부터 무너뜨려야 장건을 돕든가 말든가 할 테니까. 게다가 조금 전 지나간 숫자로 보아 탑은 반쯤 무방비가 되었을 것이오.”
그렇게 말한 제운성은 본인이 먼저 앞서서 나아갔다. 그 뒤를 섬지영과 제가의 무사들이 뒤따랐다. 양굉과 적세인, 그 외에 무사들도 움직였다. 비랑과 적풍은 제일 뒤에서 그들을 따랐다.
“···”
앞서나가던 무사들 중 오른쪽 천을 묶은 여자 무사가 그런 비랑을 흘끗 돌아보았다. 굳은 표정으로 움직이던 비랑은 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후 별동대는 얼마 나아가지 않아 인왕탑과 그 주변에 새워진 낮은 목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덧 어두컴컴해진 하늘 탓인지 인왕탑도 그 어두워진 밤하늘을 떠받치는 검은 기둥으로 보였다. 위압적이었다.
“···이런 곳에서 저런 탑을 짓다니. 물자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았을 테니, 사람이 얼마나 죽었을지 모르겠군.”
낮에 이어 그 탑을 마주한 제운성이 끔찍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옆으로 따라오던 양굉이 피식 웃었다.
“뭐 중원의 성탑은 다른가? 거기도 반역자니 죄인이니 신명 나게 죽어나도록 쏟아부으며 돌을 쌓는데.”
“거기 희생되었을 원주민들은 아무런 죄가 없는 자들이야. 비교할 대상이 아닌 듯하군.”
제운성의 대꾸에 양굉은 대충 인정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 빗장이 풀려 있는 듯하오. 목책을 부수거나 뛰어넘을 게 아니라면 당장 가서 문을 밀어야 할 듯한데.”
그때 목책의 대문을 노려보던 적세인의 목소리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말에 사람들의 눈이 목책 대문을 향했다. 확실히 덜 닫혀있는 게 보이는 상황이었다.
“뭐 더 재고 말고 할 것 없이 그냥 돌격합시다. 조금 전 몰려나간 숫자를 보니 저 안에는 이제 정말 몇 없겠고만.”
단순무식한 양굉의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제운성도 그 말에 동의하는 듯했다.
“저 말이 맞소. 지금 성채 쪽에서 싸우고 있을 장건을 도우려면 빠르게 탑을 무너뜨려야 하오. 조금 전 병력이 빠져서 약해졌으리라는 것도 확실하고. 괜히 목책이 닫혀서 더 불리해지기 전에 움직입시다.”
그렇게 의견이 정해지자 가장 먼저 섬지영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쑥 뽑아내고는 목책을 겨눴다.
“가자! 제가의 무사들이여! 마인들을 죽이고 사악한 의식을 파괴하자!”
“공격!”
그녀와 제가의 무사들이 가장 먼저 달려 나갔고, 다른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휙휙휙 재빠른 움직임으로 달려 나간 제가의 무사들은 어깨로 목책을 밀어내고 그 안으로 우르르 파고들었다.
“와아-!”
“뭐, 뭐야 시발! 이 새끼들 뭐야!”
“으악!”
와락 목책 대문이 열리고 무림인들이 쏟아지자 그 안에서 정리 중이던 마인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몇몇은 별다른 반항도 못 하고 등에 칼을 맞고 쓰러져 죽었다.
널찍한 목책 안은 특별한 게 없었다. 마인들의 거처로 보이는 건물 몇몇뿐이었다. 제대로 지어진 건물은 그 중앙에 큼직한 탑이었다.
“바로 저 탑까지 몰아붙인다!”
섬지영은 제가의 무사들을 빠르게 몰아치는 방법을 택했다. 그들은 인왕탑을 향해 곧게 나아가면서도 폭풍처럼 마인들을 몰아쳤다.
“적! 적이다!”
“인왕탑에 적이 나타났다!”
마인들은 그렇게 외치며 탑으로 물러났다. 목책이 의미 없어졌으니 그곳을 수비 거점으로 삼으려는 듯했다. 재빠른 마인들은 벌써 탑의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 그때, 안으로 들어갔던 마인들 두엇이 튕기듯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크억!”
“허흑···”
“으아악!”
무림인들의 나뒹구는 마인들을 보며 움직임이 멈췄다.
“···뭐야?”
탑 안쪽에서 철그덩, 철그덩하며 묵직한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무림인들 모두 멍하니 탑의 입구를 바라보자니, 거대한 강철 거구가 몸을 낮춰 탑을 빠져나왔다. 그가 허리를 펼 때 무림인들의 고개가 스윽 그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적이 나타났으며언, 싸울 생각을 해야지이··· 도망치는 거언, 용서하지 않는다아···”
전신을 감싼 갑옷과 커다란 쇠망치.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 놀라운,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될 듯한 거대한 덩치. 그의 느릿한 말이 이어졌다.
“나느은, 인왕탑주. 너희 침입자들, 다 죽인다아···”
참 어눌한 말투였지만, 그를 마주한 무림인들 중 누구도 그것을 비웃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