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31)
231화
* * *
거대한 인왕탑주를 마주한 양굉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려 했다.
“···시발, 저런 놈이랑 싸우라고? 금은보화를 퍼주는 거면 모를까 은자 받고는 절대 못 하지···”
“어디 가?”
하지만 뒤에서 그런 양굉의 어깨를 턱 잡는 손길이 있었으니, 천천히 뒤돌아본 양굉의 눈에 어느 낯선 여자 무사의 얼굴이 보였다. 그를 아는 척하는 낯선 여인이라면 누군지 뻔했다. 그녀의 오른 팔뚝에 질끈 묶여있는 천이 눈에 띄었다.
“···삼호?”
그녀는 양굉과 눈이 마주치고는 고개를 살살 가로저었다.
“여기서 도망쳐봐야 갈 곳도 없어. 도망치지 마.”
“그, 하지만 삼호··· 저놈 겁나 세 보이는데요. 제가 저런 놈을 상대로 뭘 할 수 있다고···”
“장건에게 배운 거 저번에도 잘 써먹었잖아? 이번에도 그렇게 해.”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양굉은 암룡삼호의 태도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알던 암룡삼호는 하급자인 그를 향해서도 항상 말을 높이며 빈틈을 보이려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그딴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보였다.
“저기, 괜찮으십니까?”
암룡삼호는 철그렁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인왕탑주를 노려보다가 그 말에 양굉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네 걱정이나 해, 칠호. 아니, 양굉.”
“아, 예···”
그때 철커덩 소리를 내며 앞으로 걸어 나온 인왕탑주가 소리쳤다.
“침-입-자-드으을-! 덤벼어-라아-!”
그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무림인들의 표정은 심각해졌고, 정신없이 물러나던 마인들은 기세등등해졌다. 인왕탑으로 도망치던 마인들은 인왕탑주 주변으로 모여들어 각자의 창칼을 꺼내 들고 으르렁거렸다.
“안 오며언! 내가 간다아-!”
그렇게 외친 인왕탑주는 정말 무림인들을 향해 철커덩 철커덩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싼 철판들에서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소음을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의 뒤로 마인들도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침입자들을 죽여라!”
“다 찢어 죽여!”
그 시점부터 무림인들이 가졌던 기습의 이점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갑자기 등장한 인왕탑주의 모습에 다들 뜨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제운성이 외쳤다.
“정신 차리시오, 무림정천대! 저놈은 느려 터졌소! 저 덩치에 저런 무거운 갑옷을 입고 우릴 따라잡을 순 없소!”
“그, 그래! 싸움은 덩치로 하는 게 아니지!”
“저렇게 느려 터진 움직임에 누가 걸려!”
“가자! 마인들을 물리치자!”
주춤거리던 무림인들도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함성을 내지르며 돌격했다. 곧이어 그들은 충돌했고, 칼부림이 시작되었다.
“이 엿 같은 개자식들!”
“더러운 황제의 개들이!”
“우린 무림인이다! 멍청한 새끼야!”
“으아악!”
“죽여!”
무림인과 마인 수십 명이 뒤엉켜 서로를 찌르고, 베고, 때리고, 부수고, 부러뜨리며 흙바닥에 피와 내장을 쏟아냈다. 예리한 칼날들이 섬뜩한 빛을 번쩍거리고, 어둑해진 초저녁 하늘로 피 분수를 뿜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역시 남들보다 두 배는 커다란 강철 거인 인왕탑주였다.
무림인들은 그의 느릿한 걸음걸이를 보고 역시 그가 덩치만 큰 머저리에 무거운 갑옷을 뒤집어씌운 허수아비라 여겼다.
“죽어라아-!”
처음 그가 망치를 휘두를 듯한 자세를 취했을 때, 그를 앞에 둔 무림인 셋은 입가에 비웃음을 띄고 있었다. 저렇게 다음 자세가 훤히 보이는데 못 피하면 어디 가서 무공을 배웠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비웃음은 다음 순간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후웅-하고 공기가 으스러지는 소리에 이어서 퍼버벅하는 분쇄음이 울렸다. 공기를 찢은 것은 인왕탑주의 망치였고, 박살 난 것은 무림인 셋의 머리였다.
“흐힉···”
멀찍이서 그걸 본 양굉은 헛바람을 들이켜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머리가 박살 난 시체 셋이 나뒹굴고 있었다. 으스러진 머리 파편도 너저분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인왕탑주가 소리 질렀다.
“우아-아-! 다-죽여-!”
“와아-!”
그 외침을 듣는 마인들도 함께 함성을 내질렀다. 마기가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무림인들도 나름 서부 무림에서 모이고 모인 고수들이었다. 광란에 물들기 시작한 마인들과 맞서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싸움이 격렬해져 갔다.
제운성은 세 번 검을 휘둘러 마인 하나의 목을 쳐버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왕탑주의 장대 망치에 제가의 무사들 머리가 으스러지는 광경이 보였다.
그가 외쳤다.
“섬 소저! 적 대원! 양굉! 이쪽으로! 저 덩치를 상대해야 하오!”
섬지영과 적세인은 그 부름에 당장 움직였다. 그러나 양굉은 멍청한 표정으로 제운성을 바라보았다.
“엉? 나? 나는 왜?”
“뭘 따지고 있나! 어서 와!”
“어어···”
제운성의 박력 넘치는 외침에 양굉은 어영부영 그쪽으로 다가가는 동안 다른 두 여인은 벌써 인왕탑주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섬지영과 적세인의 검이 인왕탑주의 좌우에서 번쩍 파고들었다.
“으어어-!”
하지만 그녀들의 칼날은 챙챙-하는 쇳소리만 울릴 뿐 인왕탑주의 갑옷을 베어내지 못했다. 도리어 둥그스름한 그의 갑옷 표면 때문에 반쯤 미끄러지다시피 하는 동시에 기이한 반발력까지 있었다.
두 여인 모두 손아귀에 느껴지는 반탄력에 멈칫하던 그때, 인왕탑주가 함성을 내지르며 장대 망치를 훙훙 소리가 나도록 회전시켰다.
“다 죽어어-!”
섬지영과 적세인은 재빨리 물러섰다. 이미 저 강철 거인의 속도를 깔보다가 머리가 박살 난 무림인이 한쪽 흙바닥에서 식어가고 있었다. 강력한 회전에 인왕탑주를 중심으로 주변의 공기가 빨려 들어가며 흙먼지가 일어났다.
“으악! 탑주님!”
“아, 안 돼!”
인왕탑주의 망치는 적아를 가리지 않았다. 주변에서 싸우고 있던 마인 두엇이 그 망치의 회전에 휘말려 그대로 몸뚱이 한쪽이 박살 나며 나가떨어졌다. 그걸 본 인왕탑주가 멈칫했다.
“어어, 실수우···”
그 빈틈을 본 적세인이 몸을 날렸다. 그녀는 그대로 뛰어올라 인왕탑주의 머리 위로 공중제비를 돌며 투구와 상체 갑옷 사이로 검을 찔러넣었다. 그녀의 검은 놀라운 정밀함으로 갑옷 틈을 향해 파고들었다.
“어, 딜-”
그러나 살기를 느낀 인왕탑주는 팔을 움직여 빈틈으로 파고드는 적세인의 검을 붙잡는 동시에 망치의 자루 부분으로 머리 위를 푹 찔렸다.
“큿!”
적세인은 검을 놓고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망치 자루를 피했다. 덕분에 자세가 무너지며 제대로 바닥에 착지하지 못하고 굴러야 했다.
그녀가 나뒹굴자 이번엔 인왕탑주가 그 틈을 보고 망치를 휘둘렀다. 그의 한쪽 손에 들린 망치가 커다란 곡선을 그렸다. 그대로 적세인의 몸통을 찍어버릴 듯했다.
“공격할 곳 투성이군!”
그 순간 섬지영과 제운성이 좌우로 반전된 듯 똑같은 동작으로 시작해 검을 휘둘러왔다. 다른 것은 그들의 검이 닿는 부분이었다. 섬지영은 망치를 쥔 손목을 때렸고, 제운성의 검은 흉갑과 팔 사이의 겨드랑이를 찔렀다. 작은 종을 때리는 듯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으어어-! 안, 아프다아-!”
그러나 두 검은 인왕탑주에게 별 타격을 주지 못했다. 섬지영의 검은 일단 적세인을 살리는 데 성공했지만 갑옷을 부수진 못했고, 제운성의 검은 겨드랑이를 파고들고도 인왕탑주의 살과 만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처음에 적세인이 찔렀던 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철판 갑옷 안에 또 무언가를 받쳐입은 듯했다.
“으하하하!”
그렇게 모든 공격을 튕겨낸 인왕탑주는 두 팔을 번쩍 들어 보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 큰 빈틈이었지만 세 사람 모두 공격하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공격이 갑옷을 뚫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반격이 이어질 때 인왕탑주의 공격이 생각보다 재빠르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다른 빈틈을 노려야 했다.
그러나 고수와 싸워본 경험이 적어 거기까지 생각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하수들의 싸움에선 빈틈이 보이면 곧장 찔러넣어야 했다. 일부러 빈틈을 보이고 반격하고 그것을 다시 반격하는 등의 과정을 해낼 수 있다면, 그건 하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빈틈이라 할만한 것이 보인다면 곧장 파고들어야 했다.
적어도 지금까지 양굉이 겪어온 싸움이란 그랬다.
“엇! 잠깐!”
제운성은 인왕탑주를 향해 쑥 파고드는 양굉을 붙잡고자 손을 뻗었으나 그는 이미 강철 거인의 품 안으로 파고든 상태였다. 제운성과 섬지영의 머리에 망치를 얻어맞고 박살 나는 양굉의 모습이 그려졌다.
다음 순간 양굉의 손바닥과 인왕탑주의 흉갑 철판이 만나며 텅-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끄윽!”
인왕탑주는 반격하지 못했다. 그는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의 흉갑 한가운데에 불을 쬐기라도 한 것처럼 거뭇한 색의 손바닥 문양이 남아있었다.
자신의 가슴팍과 손을 뻗은 그대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양굉을 번갈아 본 그는, 곧 괴성을 질렀다.
“나 아프다아-! 너도, 아프게, 해준다아-!”
“어어, 그, 뭐냐··· 난 아픈 건 싫은데···”
양굉이 멍하니 그런 대답이나 하고 있자 제운성이 버럭 소리 질렀다.
“멍청아! 물러나!”
양굉은 그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뒤로 굴렀다. 인왕탑주의 망치가 양굉이 있던 공간을 찢었다.
“피하지, 마아-!”
인왕탑주는 그렇게 외치며 뒤로 구르는 양굉을 꽝꽝 찍어갔다. 양굉은 살기 위해 온몸을 뒤틀어가며 뒤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화가 나서 망치를 내려찍던 인왕탑주는 그 모습을 보고는 돌연 으하하 웃었다.
“너어! 당나귀가 굴러가는 거, 같다아. 으하하!”
멀찍이 물러나서 몸을 일으킨 양굉도 그런 인왕탑주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수치심이 들 법도 한데, 그는 도리어 피식 웃었다.
“당나귀든 지랄이든 피하기만 하면 됐지. 병신이 지는 여태 신나게 얻어맞기만 했으면서.”
“···너어! 당나귀이!”
욕을 먹은 인왕탑주는 양굉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달려오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섬지영과 제운성, 그리고 굴러다니던 칼을 새로 하나 주워든 적세인이 그에게 파고드는 것이 더 빨랐다. 인왕탑주의 강철 갑옷 위로 그들의 무기가 부딪쳐 챙챙챙-소리를 냈다. 인왕탑주는 괴성을 지르며 뒤로 밀려났다.
양굉이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제운성이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나귀! 뭘 보고만 있냐! 와서 아까 그 장법으로 다시 한 방 먹여!”
“엉? 어어, 알겠소.”
다그침에 얼른 일어났던 양굉은 제운성이 그에게 한 말을 다시 생각하고는 멈칫했다.
“···아니 시발. 내가 왜 당나귀야?”
“빨리!”
제운성은 가까스로 인왕탑주의 망치를 피하며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를 본 양굉은 앞으로의 자기 명성에 뭔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얼른 그 싸움 사이로 뛰어들었다.
“쓰읍··· 당나귀는 좀 아닌데···”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그의 양손에서 화룡이 으르렁거렸다.
* * *
“설치 끝났습니다. 이제 심지에 불을 붙이고 물러나면 됩니다.”
“음.”
남궁천은 암룡대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탑 안을 둘러보았다. 암룡대원이 탑의 일층에 빙 둘러 설치한 폭약들이 보였다. 그 폭약은 두꺼운 갈색 기름종이가 둘러싸고 있어서 겉으로 보기엔 무슨 종이로 싼 벽돌 같았다.
암룡대원은 그 덩어리 폭약에 특수한 심지를 꽂고 연결해 모든 폭약이 연결되는 길쭉한 심지를 늘어뜨려 놓았다. 이제 이 심지에 불을 붙이고 열심히 탑 밖으로 도망치면 끝이었다.
문득 남궁천의 눈에 한쪽으로 치워둔 마인들의 시체들이 보였다.
천왕탑으로 온 남궁가의 무사들은 운이 좋았다. 성채에서 종소리가 나자 우르르 병력이 빠졌던 인왕탑처럼 천왕탑에서도 병력이 빠진 것이다.
이쪽 상황은 인왕탑보다 더 좋았는데, 천왕탑의 경우엔 탑주를 포함해 거의 대부분의 병력이 빠져나갔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궁가는 일고여덟 명 있는 마인들을 손쉽게 해치우고 재빠르게 폭약을 설치할 수 있었다.
“자. 모두 나가세.”
생각을 정리한 남궁천이 남궁가 무사들에게 말했다. 그중에는 소가주 남궁상과 남궁가 청년들도 함께 있었다. 남궁천은 그들이 의식을 막았다는 공을 통해 마공을 폐해도 목숨은 부지하기를 바랐다. 다들 마공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마공을 폐한 후에도 상처를 회복하고 다시 무공을 익힐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이 남궁가의 미래였던 것이다.
그렇게 남궁가의 미래를 생각하며 밖으로 나온 남궁천은, 이후 탑 밖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는 절로 나오는 한숨이 막지 못했다.
그는 저 앞에 보이는 인물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네.”
남궁천의 인사에 천왕탑주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하얗고 풍성한 수염이 흔들거렸다. 둘은 옛날부터 친분이 있었다.
“오랜만이군, 남궁천. 서쪽 무뢰배들에게 전향했더니. 지금 꼴이 말이 아니구만?”
탑 밖에는 성채로 떠났던 마인들이 모두 돌아와 남궁가의 무사들을 빙 둘러싸 포위하고 있었다. 그 숫자가 백이 넘었다.
거기에 제일 큰 문제는 천왕탑주 관서후였다. 그는 마가의 마인들을 제외한 마인들 중 가장 강한 인물이라 평가받은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마가의 마공, 그러니까 무작정 사람 심장이나 씹어먹는 저열한 마공이 아니라 제대로 된 것을 익혔다면 지금보다 훨씬 뛰어난 고수가 되었으리라는 게 마궁 내 중론이었다.
“···지금 심지에 불을 붙일 수 있나?”
“···안 됩니다. 그럼 우리도 다 죽어요.”
옆에 있던 암룡대원에게 속삭였던 남궁천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리에 있는 남궁가 사람이 다 죽으면 남궁가는 끝이었다. 그럴 순 없었다.
관서후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뭘 속삭이고 있나?”
남궁천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 지나가면서 보자니 남궁가의 젊은이들이 적들을 보며 긴장한 게 보였다.
“···우리가 오는 걸 알았나?”
“갑자기 성채에서 긴급 신호가 오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오늘이 바로 그 중요한 대왕의 부활 의식이 있는 날 아닌가.”
“그래서 병력을 거의 다 뺀 거군. 우릴 유인하려고.”
관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을 막으려면 세 개의 탑을 모두 무너뜨려야 하지. 술법과 진법에 지식이 있다면 그 정도는 계산할 수 있었을 게야. 내가 의식을 막는다면 주공은 성채로 보내더라도 별동대를 이용해 탑을 무너뜨리겠네. 그래도 자네를 만날 줄은 몰랐군.”
“···나도 여기서 자네를 만날 줄은 몰랐지. 패왕보 소속이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네만, 성채의 수비대장쯤 될 줄 알았거든.”
“아, 난 술법사들이라는 작자들과 여러모로 성향이 맞질 않았네. 그래서 그냥 이쪽에서 시간이나 죽이는 편이 났겠다 싶었어.”
관서후는 정말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회포를 푼다는 듯 허허 웃기까지 했다. 하지만 남궁천은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그의 몸 주변으로 퍼지는 혈향을 맞을 수 있었다. 수십 년 동안 피와 심장을 씹어먹으며 자연스럽게 몸에 밴 역한 향기였다.
남궁천은 그 향기가 코를 찌르는 걸 느끼며 말했다.
“···자네, 정말 이 의식으로 대왕이 부활하리라 생각하나?”
“음? 그렇겠지? 자네도 그리 생각하니까 의식을 막으려는 것 아닌가.”
“···그럼 정말 대왕이 돌아오면 저 중원의 유씨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펼칠 수 있으리라 믿나?”
그 말에 관서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으하하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남궁천 이 친구야! 갑자기 그런 이야기는 왜 하는 게야?”
“그야 정말 대왕이 돌아오더라도 남는 건 피와 전쟁, 죽음뿐이니까···”
“이 친구야! 그게 왜 문제가 되나?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건데!”
관서후를 설득해보려던 남궁천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에 눈웃음 짓는 관서후의 눈동자가 검붉게 불타는 것이 보였다.
“자네, 신공을 폐하면서 정신머리가 많이 무뎌진 모양이군. 그럴 수 있네.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지는 법이니.”
“···확실히 몸이 약해지긴 했지. 그래도 그래야만 했네. 신공, 마공,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만, 그건 더 익힐 수 없었어. 진짜 무공을 봤거든.”
관서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어찌 신공의 공능을 그리 내리까는 게야? 그리고 설마 저 서쪽의 머저리들 무공이 진짜 무공이라는 건 아니겠지? 늙어빠진 노인네가 되니 노망이 왔나?”
남궁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관서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자신 뒤에 있는 남궁가의 무사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쪽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적의 숫자에 긴장한 청년들이 보였다. 이미 목숨에 미련을 떨쳤는지 굳건한 모습으로 적을 마주한 무사들도 보였다. 그들의 눈에서 슬그머니 일어서는 마공의 힘도 함께 보였다. 그들이 평생 나고 자라며 익힌 것이 마공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그 이상을 바라봐야 할 때였다.
남궁천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남궁상을 향했다.
“소가주.”
“예? 아, 예. 말씀하십시오, 당숙. 듣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보여줄 무공을 잘 보시오. 이것이 앞으로 남궁가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니.”
“네? 그게 무슨···”
남궁천은 그의 대꾸를 듣지 않고 다시 정면의 관서후를 바라보며 손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손가락이 그대로 본인의 상체 여러 곳을 푹푹 찌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의 혈도 스물여덟 곳이 움푹 들어갔다.
“···당숙?”
남궁천의 단전이 파괴되었다고 알고 있었던 남궁상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등을 보이고 있는 남궁천에게서 갑자기 웅혼한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남궁천이 하나 남은 손을 옆으로 뻗었다.
“검을 다오.”
남궁상처럼 당황하고 있던 남궁가의 무사 하나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검을 그 손에 쥐여주었다. 그렇게 검을 쥔 남궁천의 기세는 이젠 숨 막힐 정도가 되었다.
“···진원폭혈법眞原爆血法. 남은 생을 태우겠다는 건가? 하긴, 무공을 잃은 늙은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것이 고작이겠지.”
그런 남궁천을 바라보던 관서후가 눈가를 좁히며 중얼거렸다. 남궁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늘어뜨리고 앞으로 한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으윽!”
“어엇···!”
그리고 그 걸음이 시작된 순간, 그저 숨 막힐 듯하기만 하던 남궁천의 기세가 새롭게 변했다. 그의 등 뒤에 있는 남궁가 사람들에겐 마치 세상 모든 풍랑을 막아줄 듯한 성벽같이, 그의 전면에 선 천왕탑의 마인들에겐 그 성벽이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듯한 압도적인 기세였다. 마인들은 숨이 막히는 것은 물론 두 다리의 힘이 풀리는 느낌도 받았다.
남궁상은 남궁천의 멍하게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이게, 뭡니까?”
남궁천은 고개만 돌려 남궁상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가 살짝 웃고 있었다.
“제왕검형帝王劍形.”
남궁천과 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그 일대를 뒤덮었다.
진정 검왕劍王의 기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