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32)
232화
* * *
빗장이 박살 난 패왕보 성문 안으로 장건과 순우현이 터벅터벅 느긋하게 걸어 들어갔다.
위쪽 성벽에서는 정신없이 땡땡땡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 종소리에 성채 여기저기에선 소란이 일었다. 부하들을 다그치는 상급자의 고함과 문을 박차는 발길질 소리, 정신없이 달리는 마인들의 뜀박질 소리 덕에 성채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어슬렁어슬렁 안으로 들어서는 장건과 순우현 앞으로 무장한 마인들이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오호. 마공을 익힌 미치광이들이라 빠릿빠릿하진 못하리라 여겼는데, 생각보단 재빠르구먼.”
순우현이 그 마인들을 보고 놀랍다며 허허 웃었다. 그는 조금 전 성문의 빗장을 부수며 우락부락한 거한으로 변신했던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등이 굽은 왜소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하긴, 진짜 미치광이들만 모였으면 단체를 이루지도 못했겠지. 남궁가도 그렇고 이렇게 보면 마공을 익힌다고 꼭 돌아버리는 건 아닌 듯하이.”
“마공도 결국 무공의 한 갈래일 뿐이오.”
허허 웃으며 지나가듯 말하는 순우현의 말에 그 옆에서 걷던 장건이 역시 마찬가지로 지나가듯 대꾸했다. 하지만 그 소릴 들은 순우현은 눈썹을 까딱이며 장건을 돌아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짓거리가 무공일 수 있다고?”
장건도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람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게 해준다는 면에선 그렇소. 그저 그렇게 뛰어넘어 도달하는 곳이 비인非人의 길일 뿐이지.”
그 대답을 들은 순우현은 장건을 잠시 가만 바라보다가, 씨익 웃었다.
“···자네는 무공이라는 것의 범위를 아주 넓게 보는 듯하군. 꽤 특이한 시선이야. 아니지, 어쩌면 황군에서도 그런 시각을 가져야 했을까? 음··· 그랬으면 검강이나 이기어검을 그저 전설이라 여기지 않았을는지도 모르겠군···”
순우현은 갑자기 혼자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두 사람이 그렇게 대화하는 동안에도 안쪽 성채에서는 갑옷과 무기를 챙겨 든 마인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그 숫자가 수십을 넘어갈 때쯤, 그들 중 조금 화려한 갑옷을 입은 자가 앞으로 나서서 외쳤다.
“네놈들! 뭐 하는 놈들이냐! 네놈들이 침입자냐?”
그 외침에 느긋하게 걷던 장건과 순우현의 걸음이 멈췄다. 둘의 시선이 그 마인을 향했다.
순우현이 뚱하게 말했다.
“보면 모르나?”
“···뭐, 뭐? 뭘 보면 몰라?”
순우현은 자기 두 팔을 벌려 보였다.
“내가 자네들처럼 신나게 사람 잡아먹어 가며 마공을 익힌 것처럼 보이나? 내가 이래 봬도 수십 년간 황군 무공을 익히며 그 재주로 폐하께 벼슬까지 받은 사람이네. 딱 보면 뭔가 쉬이 범접할 수 없는 노고수의 기세가 느껴지지 않나?”
마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마치 이게 웬 미친놈인가-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주변의 부하들을 돌아보고 자신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는, 애써 다시 순우현과 시선을 마주쳤다.
“···이런 시발. 어이, 늙은이. 어디서 나타난 건진 모르겠는데, 여긴 당신 같은 노망난 노인네가 올 곳이 아니야. 그리고 성문 경비는 왜 이딴 일에 종을 울리고 있는 거야?”
그 말대로 성벽의 경계병은 아직도 땡땡거리며 시끄럽게 종을 울리고 있었다. 마치 이 성채 안에 있는 마인들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늠 마인들을 모조리 불러들이려는 것 같았다.
그때 순우현이 슬그머니 그 마인을 향해 다가갔다. 그 걸음이 아주 자연스러워서, 마인은 다가오는 노인을 보고도 그를 막기보다는 그저 뭘 하려나 하며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마인에게 다가선 순우현은 키가 크고 건장한 그를 올려다보며 헤-하고 웃었다.
마인은 그걸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거렸다.
“이봐, 늙은이. 도대체 어디서-”
그 순간 순우현의 주먹이 벼락처럼 마인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쿵-하며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마인은 뒤에서 줄로 잡아당긴 듯 나가떨어졌다. 그 과정에서 다른 마인들도 서넛 휘말렸는데, 그렇게 순우현은 주먹질 한 방으로 건장한 남자 네댓 명을 쓰러뜨렸다.
“···”
거기 모여있던 마인들 모두 멍한 눈으로 순우현과 나가떨어진 마인들을 번갈아 보았다. 쓰러진 자들의 상태가 심각했다. 그들 모두 입에서 왈칵 피를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순우현은 웃는 낯 그대로 장건을 돌아보았다.
“자, 이제 놀아봄세.”
이후 그는 몸을 돌려 멍청한 표정의 마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굽어있던 등과 어깨가 활짝 펴졌다. 그건 마치 범 한 마리가 웅크렸던 몸을 펴고 사냥감을 향해 덤벼드는 모습 같았다. 아마 진짜 범이 이 자리에 있어도 지금 순우현보다 힘이 넘치진 못했을 것이다.
“고, 공격! 침입자다! 막아라!”
“막아라!”
그렇게 달려든 순우현의 주먹에 마인들 머리 서넛이 박살 났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마인들이 격한 고함과 함성을 내질렀고, 순우현은 그 마인들의 군세 사이로 거침없이 몸을 던졌다.
뒤에 있던 장건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을 지휘할 필요가 없어지며 순우현의 고삐가 풀린 모양이었다. 어쩌면 목숨이 위험한 싸움터임에도 저리 즐거워하는 걸 보니, 순우현도 천생 무인은 무인이었다.
“이 새끼! 너도 침입자냐!”
그때 마인 하나가 장건을 향해 칼을 휘둘러왔다. 저쪽에서 날뛰기 시작한 순우현보다는 젊은 장건 쪽이 더 쉬우리라 여긴 듯했다.
물론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엇···?”
다음 순간 그 마인이 본 것은 시퍼런 빛 한줄기가 번뜩이는 것이었다. 그 이후는 암전. 어둠뿐이었다.
장건은 머리를 잃고 풀썩 쓰러지는 시체를 지나서 터벅터벅 마인들을 향해 걸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푸른 칼날의 청룡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마인들은 그런 장건을 보며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감히 이 패왕보에서 난동을 피우다니! 살아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공격!”
처음에 죽은 마인처럼 화려한 갑옷을 입은 자가 자신의 칼을 번쩍 들며 그렇게 외쳤다. 다른 마인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을 마주한 장건은 청룡을 두 손으로 잡고 허리로 끌어당기며 자세를 낮췄다. 동시에 그의 단전에서는 기운이 음양으로 나뉘어 끓는 듯 격렬히 양극단으로 치닫다가, 순간 고요해졌다.
마인들을 바라보는 장건의 눈에서 하얀 뇌광이 반짝였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사라지며 마인들 사이로 무수한 갈 지之자를 그리는 한 줄기 섬광이 파고들었다. 그 섬광이 그려지는 순간이 너무나 빨라 잠시지만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 시간이 다시 흐른 것은 섬광의 뒤를 이은 천둥이 꽈릉-울려 퍼졌을 때였다. 그 소리와 함께 몸통 째 잘려 나간 마인들의 시체가 후두둑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잠시 사라졌던 장건은 그 피바람을 등지고 서서 휙 청룡을 털고 있었다.
“오···”
맨주먹으로 마인 하나의 머리통을 깨부수던 순우현은 그 모습을 보고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그리고는 곧 질 수 없다는 듯 옆에서 굴러다니던 검을 주웠다.
그가 검을 줍는 순간을 빈틈으로 본 마인들이 우르르 그에게 달려들었다. 훌쩍 몸을 띄워 허공에서 도끼를 내려찍는 놈도 있었다. 순우현은 순식간에 포위된 것이다.
“흠!”
하지만 그는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주워든 검을 가볍게 손안에서 고쳐잡았다. 그리고 그 검은 곧 폭풍이 되었다.
“크아악!”
“허억!”
순우현은 검을 쭉 뻗은 채 오른발을 중심으로 제자리에서 회전했다. 거의 한순간에 두 바퀴를 돌았는데, 그 검에 걸린 마인들은 팔다리 가릴 것 없이 모조리 갈려 나갔다. 동시에 그 회전이 끝난 순간 그의 몸 주변에서 공기가 강하게 밀려 나가며 죽고 다친 마인들을 폭죽 터트리듯 사방으로 흩어버렸다.
회전을 멈춘 순우현은 옆으로 검을 뻗은 자세 그대로 슬쩍 장건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기까지 했다. 그걸 본 장건은 눈썹을 까딱였다.
그렇게 장건과 순우현은 멀찍이 떨어져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런 미친···”
성문 위에서 종을 울리던 원구룡은 이제 되었을까 싶어 망루를 빠져나왔다가 그 꼴을 보았다. 등 뒤로 길게 시쳇더미를 만든 젊은 놈과 무슨 꽃봉오리 터트리듯 피바람을 일으킨 늙은 놈의 모습에 원구룡은 목덜미가 찌르르 저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건 아래쪽에 있는 마인들도 마찬가지인지 모두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때 원구룡은 성채 바깥쪽, 그러니까 다리 건너편 숲이 소란스럽다는 걸 깨닫고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가 시끄럽게 울린 종소리에 각 탑의 병력이 도착한 것이리라. 그럼 이미 성채에 있는 병력과 합쳐 수백이 넘어가니, 아무리 저 두 놈이 강하다 하더라도 죽일 수 있을 터였다.
“···어?”
하지만 원구룡은 곧 당황해야 했다. 각 탑의 병력으로 보이는 자들이 숲에서 빠져나와 다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성채를 돕기 위해 달려오는 원군이라기보단, 어디선가 큰 낭패를 보고 성채로 도망쳐오는 패잔병들 같았다.
원구룡은 성벽 밖으로 머리를 쭉 빼서 다리 건너편 숲을 노려보았다. 해가 지고 어두웠으나 패잔병들이 들고 있는 횃불과 보름달이 환하게 빛나면서 그곳의 상황이 대충 보였다.
“두, 두 놈이 전부가 아니었어?”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어둑한 숲속에서 횃불도 들지 않고 궁의 병사들을 공격하는 그림자들이었다. 대략 대여섯 정도인 듯했는데, 멀리서 넓게 보고 상황을 파악한 원구룡과는 달리 숲속에서 달리는 병사들은 나무와 나무 사이 그림자에서 귀신처럼 움직이는 그들 때문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있었다.
“저런, 저런 멍청이들··· 그동안 처먹은 제물이 아깝다···”
숲에서 실제로 죽거나 다치는 숫자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칼날에 당황한 병사들은 맞서 싸울 생각보다는 정신없이 성채로 달려오고만 있었다. 저런 상태로 이리 와봤자 젊은 놈과 늙은 놈을 상대로 얼마나 싸울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원구룡의 귀에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헉···”
순간 깜짝 놀라 굳었던 원구룡은 이내 이를 악물고 단전의 마기를 폭발시키며 몸을 회전시켰다. 그의 넓적한 칼이 하얀 반원을 그렸다. 돌아서는 원구룡의 눈에 성벽 위에 올라선 젊은 놈의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시퍼렇게 빛나는 칼날도.
“음.”
장건은 풀썩 쓰러지는 경비병을 두고 멀리 다리 건너 숲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대형이나 질서 없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마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숲 쪽에 남아있던 황군 무사들이 잘 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후 몸을 돌려 성채 안쪽을 바라보니 무아지경으로 날뛰는 순우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맨손은 물론 마인들의 온갖 무기들을 뺏어 들고는 그 무기 각각에 어울리는 무공을 펼쳐 보였다.
길쭉한 장창부터 짤막한 단창, 넓적한 대도나 가는 유엽도, 묵직한 패검이나 낭창거리는 세검 등등. 제식이라고는 하나도 맞지 않는 마인들의 무기를 그 하나하나 집어 들 때마다 순우현은 거기에 어울리는 무공을 선보였다.
비록 그 무공들 대부분 단순하게 무기의 이점을 잘 활용하기 위한 동작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마저도 수십에 이르자 놀라울 정도로 화려하고 복잡해져 장건의 눈에는 아름다울 정도였다. 결국 마공이 무공인 것처럼 살인술에 치중한 황군 무공도 분명 무공의 한 갈래였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장건은 새삼 순우현이 황군 무공의 달인임을 느꼈다. 게다가 그 단전에 얼마나 많은 내공이 들어있는 것인지, 조금 전 장건의 혼원벽력도에 견주어 보였던 폭풍이 벌써 일곱 번째 펼쳐지고 있었다.
“혹시나 싸우면 지구전은 꼭 피해야겠군.”
장건은 괜히 그렇게 중얼거리며 성벽 위로 올라섰다. 다리 건너 숲 쪽의 황군 무사들이 잘 하고 있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 그도 순우현 옆에서 미친 듯 칼질을 할 시간이었다.
“···”
그 순간 장건의 얼굴이 굳었다. 번뜩 고개를 든 장건은 패왕보의 밤하늘 위에서 보름달을 등지고 떨어지는 괴인을 발견했다. 마치 오래된 나무껍질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있는 듯한 괴인이었다. 그를 본 장건의 손이 본능적으로 청룡을 다잡았다.
하지만 그 괴인의 목표는 장건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괴인의 목표는 성채 안쪽에 있는 순우현이었다. 그때쯤 순우현도 그 기척을 느끼고 괴인을 올려다보았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그 괴인의 두 손바닥과 순우현의 두 손바닥이 마주 손뼉이라도 치듯 부딪쳤다.
다음 순간 그 두 사람을 중심으로 꽈르르릉-하는 굉음과 함께 그 주변에 있던 마인들과 시체들이 폭풍에 휘말리듯 뒤로 나가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