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36)
236화
황군 무사 다섯의 머리가 데구르르 굴렀다. 죽은 자들의 얼굴에는 당혹, 분노, 의아함 등등이 떠올라 있었다. 그 얼굴들을 확인한 순우현은 분노를 넘어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순우현은 혁련위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 미쳤나?”
짤막한 질문이었지만 많은 의미가 담긴 질문이었다. 어떻게 무림맹주라는 이름을 달고 이럴 수 있는지부터 나중에 황군의 후환이 두렵지 않느냐는, 아니 당장 눈앞에 자신을 뭘로 보고 이딴 짓이냐까지 가는 함축적인 질문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음침한 눈빛으로 장건을 노려보던 혁련위진이 그 질문에 순우현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가 말했다.
“미쳤냐고? 아니, 나의 정신은 더없이 맑고 이성적이다.”
순우현은 혁련위진의 뻔뻔하다 못해 당당한 태도를 보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거기엔 격렬한 분노와 일그러진 얼굴만 남았다.
“혁련위진! 이 돌아버린 작자야!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게냐!”
“잘 알고 있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나.”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지금 네놈이 들고 있는 그 검을 누가 하사했는지-”
“황제는-!”
혁련위진의 외침에 그의 몸 주변으로 훅-흙먼지가 밀려났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 성채를 울리는지 윙윙거리며 메아리가 치는 것만 같았다. 그의 내공이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걸 깨달은 순우현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가 파악하고 있던 혁련위진의 내공은 이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순우현의 멍한 표정을 마주하며 혁련위진의 말이 이어졌다.
“···황제는 바다 건너 중원에 있지. 그리고 그 중원은 지금 이 신대륙 땅에 신경 쓸 여지가 없다. 서쪽에선 천축과 파사가 준동하고, 남쪽 운남 아래에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수백 년 동안 박살을 내놓은 북방은 문제가 없다지만 동쪽에 있는 신라는 기회만 있다면 언제라도 뒤를 찌르고 싶어 하는 기회주의자들이지. 지금 제국의 주변엔 오직 적뿐이다. 천년 동안 황군을 앞세워 신나게 죽여댄 대가를 치르는 중이야.”
뜬금없이 튀어나온 국제정세였다. 하지만 묵묵히 듣고 있던 장건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혁련위진은 신대륙 무림맹을 넘어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우 선생. 난 당신과 공주가 왜 뜬금없이 마인들을 토벌하겠다며 서부 해안의 병력을 그러모으고, 내 무림맹을 끌어들이는지 의아했었네. 정말 천년의 역적들을 말살시키기 위해 그러는 것인가? 하지만 그놈들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에도 근근이 목숨을 이어가던 놈들이야. 정말 그들을 말살시키고 싶었다면 중원에서 진즉에 끝냈어야지.”
혁련위진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그의 뒤에서는 새로운 마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다. 다른 탑에서 온 병력이었다. 그들 중에는 혁련위진의 측근이었던 무림인 몇몇이 굳은 표정으로 섞여 있었다.
순우현도 그 마인들과 무림인들을 보며 안색을 굳혔다.
“···마가는 양민들 속에 숨어 생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들을 쓸어버리면 양민들도 그만큼 큰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대륙에서 그들은 완전히 겉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그 기회에-”
“헛소리하지 말게, 순우 선생.”
혁련위진은 순우현의 말을 끊으며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 나왔다.
“황제와 황군들이 언제 그렇게 양민들을 신경 썼나? 그래서 그 많은 사람이 지난 백 년 동안 이 신대륙으로 이주해왔나? 아니지. 그 위대한 황제와 황군들은 그냥 신경 쓰질 않았을 뿐이야. 먼 옛날 초패마왕과 그의 군대가 몰락한 후 부스러기만 남은 마인들은 제국에 위협이 되질 않았고, 그 부스러기를 쓸어내자니 얻는 것에 비해 너무 많은 공을 들여야 했겠지.”
그는 고개를 살살 흔들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나는 한이 세워진 이후 어느 마인이 세력을 모아 반란을 획책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네. 단 한 번도. 그저 마기에 돌아버린 몇몇이 시끄러운 소동이나 일으켰을 뿐이지.”
앞으로 조금 걸어 나온 그는 비틀거리는 강동공과 여기저기 찌그러져 있는 성채의 마인들, 그리고 그들과 장건, 순우현의 싸움으로 부서지고 무너진 건물들을 둘러보았다.
“혹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 황제가 신대륙의 토지 소유권을 누구에게나 인정해준 이유는 훗날 그 황무지가 비옥한 농지가 되는 날 황군을 앞세워 모두 되찾아오기 위함이라고. 그런데, 그 농지를 가진 주인들이 한데 뭉쳐 힘을 키우고 버티려 들면 어쩌지? 게다가 그 땅이 무작정 밀어버리러 가기엔 너무 먼 땅이라면? 이놈들이 뭉치고 뭉쳐서 아예 나라를 세우려 든다면?”
그의 시선이 순우현에게서 멈췄다.
“나라면 그들이 그럴 수 없도록, 혹여나 뭉치더라도 제국에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독을 심겠네. 이왕이면 제국 안에서도 끈질기게 버티던 독이 좋겠지. 신대륙에 넘어가서도 잘 버티고, 도리어 숙주를 인사불성으로 만들어줄 수 있도록 말이야.”
순우현을 바라보던 혁련위진이 이번엔 장건에게 시선을 옮겼다.
“중원과 신대륙을 잇는 인력수송선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이 누군지 아나? 바로 황실이네. 초창기 대양을 건널 수 있는 배는 황실 소유가 대부분이라 당연한 수순이었지. 그런데, 그 과정에서 중원의 범죄자나 마인들이 어떻게 걸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배를 지키는 건 당연히 그 위대한 황군이었는데?”
“그들이 그렇게 의도했다?”
장건이 짧게 맞장구를 쳐주자 혁련위진은 두 팔을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이 신대륙에서 마인들의 세력이 준동한 것은 중원의 황제가 의도한 바야. 한 제국은 신발 밑창에 묻은 개똥을 이 신대륙에 비벼서 떼어낸 셈이고, 거기에 시간이 흐르며 이주민들의 후손이 강력한 세력으로 자라나는 것까지 막아낼 묘수인 게지. 한마디로 지금 이 땅이 이 모양 이 꼬락서니인 이유가 한 제국 때문이라는 것이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순우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노인은 으르렁거리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의 그 편집증적인 소리는 잘 들었다. 그래서 나와 진동장군께서 친히 황군을 이끌고 토벌에 나선 것은 어찌 설명하겠느냐?”
혁련위진은 순우현을 바라보며 허헛 웃었다.
“그야 이젠 이 땅이 그냥 조그만 섬 정도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 가만 놔두면 무림인들이 이기든, 마궁이 이기든 중원 이상의 거대한 세력으로 자라날 수 있을 토양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세력이 작금의 혼란스러운 외부와 연합한다면 중원에는 강력한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야.”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두 눈에선 묘한 한기가 넘실거렸다.
“그래서 당신과 공주가 왔지. 마궁이 감당 못 할 세력이 되기 전에 쓸어버리고, 무림맹 또한 그 과정에서 쉽게 재기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기 위해서. 적어도 제국이 주변국의 모든 혼란을 잠재우고 여력을 되찾을 때까지 꼼짝도 할 수 없도록 말이야.”
그 눈을 마주 본 순우현은 뭐라 대꾸를 하지 못했다.
거시적인 눈으로 보면 혁련위진의 말이 모두 맞았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한 제국이 신대륙으로 무법자들을 실어나른 것이나 지금 주변국들에서 동시다발적인 위협을 받는 것, 이번 토벌에서 굳이 황명과 새로운 땅을 미끼로 무림맹을 끌어들인 것과 그 이유 모두 모두 정답이었다.
침묵하는 순우현을 노려보던 혁련위진이 휙 장건을 돌아보았다.
“내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알겠나?”
“글쎄. 대충 알 것도 같소.”
“그래? 정말인가?”
장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신대륙에서 무법자와 살인자, 마인들이 넘쳐나는 이유가 결국 한 제국 때문이었으니 더 이상 그들의 협잡질에 놀아나지 말자는 이야기지 않소. 거기에 넓게 보자면 마궁이나 무림맹이나 황군에게 이용당한 것은 마찬가지니 진짜 우리의 적은 황군과 바다 건너 황제라는 말이겠지.”
순우현은 깜짝 놀라서 장건을 돌아보았고, 혁련위진은 놀랍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래, 결론을 내자면 그런 말이지. 더 짧게 말하면, 우리와 마궁은 더 싸울 필요가 없네.”
“잠깐, 장건! 저건 황군의 행사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본 결과네! 물론 이번 토벌에 무림맹을 끌어들인 것은 그들의 세력을 소모하기 위함이었으나, 사실 그건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아무리 바다 건너라지만 어느 군주가 자기 땅에서 그딴 무력 세력의 성장을 그냥 지켜본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폐하를 적으로···
“으하하하-!”
그때 뜬금없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모였다.
그는 여태 비틀거리던 강동공이었다.
“훌륭하구나! 유가의 자손들이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한 짓거리들이 결국 대왕의 부활을 이끌었도다! 천년 전 대왕께서 패배한 것은 하늘이 그분을 망하게 하려 했기 때문이었는데, 이젠 그 하늘이 대왕의 부활과 유 씨 제국의 멸망을 원하는 게야!”
강동공은 입에선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두 눈에선 시퍼런 광망이 번뜩였다. 그는 마치 미쳐버린 광신도 같았다.
“역천逆天의 힘과 순천順天의 힘이 모두 그분을 부르니, 진정한 때가 왔도다! 이 지상에 전쟁과 멸망의 적성赤星이 강림할 것이니-! 유 씨의 성과 궁전은 모조리 불탈 것이며, 세상 모든 서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거시익-”
그는 갑자기 뒤로 휙 날아가 이미 반쯤 무너진 성벽 잔해에 처박혔다. 꽈르릉-울리는 힘에 그 나머지 성벽도 버티지 못하고 우르르 무너져내려 허연 돌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장내에 모든 사람들은 그 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스윽 고개를 돌려 그 원인이 되었을 사람을 바라보았다. 장건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툭툭 손을 털고 있었다.
장풍으로 강동공의 입을 다물게 만든 장건이 혁련위진을 향해 슬쩍 턱짓했다.
“그쪽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대충 알겠는데, 그 전에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소.”
“···뭔가?”
장건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삐딱하게 섰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배신 때리는 게 말이 되나?”
존칭도 없이 저잣거리 무뢰배 대하듯 하는 태도에 혁련위진은 잠시 말을 잊었다.
“이래저래 본인이 무슨 신대륙 독립투사인 것처럼 구는데, 어차피 토벌 끝나면 뒤에서 칼 찔려 죽을 것 같으니까 급하게 뒤통수쳤다는 건 누구나 다 알아. 단지 문제는 하필 그게 왜 지금이냐는 거지. 항우가 깨어나면 다 뒈진다는 데 무슨 생각이냐?”
“···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네, 장건. 항우는 단순히 개인이 가지고 있던 그 무력 외에도 전설적인 야전지휘관이었지. 그가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다면 당연히 군세를 꾸리고자 할 것이고···”
장건이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건의 행동에 혁련위진도 말을 멈추고 쭈뼛쭈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두 눈을 끔뻑거렸다.
“정말 부활한 항우와 말이 통하리라 생각하나? 그가 천년 전의 전설적인 야전지휘관처럼 굴 것이라고? 아니, 사람처럼 행동하리라고?”
달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하얗게 빛나던 보름달은 그 외곽부터 천천히 붉은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찌나 섬뜩하게 붉은지, 마치 지상으로 뚝뚝 핏물을 흘릴 것만 같은 색이었다.
동시에 어디선가 휘이이-하는 예리한 바람 소리도 울렸다. 여인이 높은 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듯 거북하게 찢어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성채의 성곽 밖에서 울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에 혁련위진은 물론이고 마인들 또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주춤거렸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 중 지금의 변화를 이해하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그렇게 하늘을 두리번거리던 혁련위진이 고개를 내린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멀리 떨어져 있던 장건이 훌쩍 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네놈···!”
굳어버린 혁련위진과 달리 장건은 자연스럽게 그의 품으로 손을 뻗었다. 혁련위진은 깜짝 놀라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러나 장건의 손은 원하던 것을 이미 낚아챈 이후였다.
은백색에 붉은 수실이 달리고, 용이 양각된 달린 팔각형 패. 장건은 의룡패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이건 당신 품에 있을 물건이 아닌 것 같군.”
“···네 이놈! 장건-!”
쉽게 거리를 허용한 당혹감과 놀림 당했다는 분노에 혁련위진은 소리를 지르며 장건에게 달려들려 했다. 장건도 의룡패를 자연스럽게 품으로 집어넣고 몸을 사선으로 틀어 그를 마주했다.
하지만 그 둘이 부딪치려는 순간, 갑자기 땅이 울렸다.
“어엇!”
“뭐, 뭐야!”
“땅이 울린다! 지진이다!”
마인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일어난 땅의 진동이 성채를 뒤흔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영원히 굳건할 것만 같던 대지가 흔들리자 모두 균형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비틀거리고 바닥을 굴렀다.
장건은 무릎을 살짝 굽혀 자세를 낮추고 그 흔들림을 최소화하고 균형을 유지했다. 두 생을 통틀어 경험해보지 못한 재난이었으나 그는 침착했다. 이 정도에 혼란스러워하기에는 이미 겪은 일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장건도 곧 눈을 끔뻑거리게 되었는데, 그건 우르르 대지가 흔들리는 와중에 작은 돌과 모래들이 마치 중력이 뒤집힌 것처럼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다음 순간, 장건은 강렬한 기척에 성채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직후 그곳에서 붉은 섬광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