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37)
237화
붉은 빛기둥은 끝없이 치솟아 올랐다. 마치 저 하늘에 달까지 닿으려는 것만 같았다.
그 기둥의 등장과 함께 패왕보 섬 위로 기묘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고오오-하고 아주 낮게 울린 소리였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낮게 울리는지 마치 듣는이의 고막을 붙잡고 쥐어짜는 듯했다. 덕분에 그 자리에 있던 마인들은 모두 귀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심지어 상태가 나빠 보이는 몇몇은 그대로 눈이 돌아가더니 왈칵 피를 토하고는 쓰러져버렸다.
굉음은 시작이었다. 소리는 금방 사그라졌으나, 그와 동시에 이미 흔들리고 있던 패왕보 섬의 진동은 본격화되었다.
조금 전 기세도 당당하게 성문 안으로 들어왔던 마인들은 혼란에 빠져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귀가! 귀가 너무 아파!”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시바알!”
다음 순간 대지가 격렬히 흔들리더니 종잇장처럼 콰르륵 찢겨나갔다. 그 단층은 놀라운 속도로 뒤틀려 위로 치솟고, 거기에 걸린 건물과 성곽은 버티고 말 것도 없이 으스러지며 우르르 무너져내렸다. 잘 다져진 흙 위에 깔끔하게 깔려있던 판석들이 메마른 논처럼 쪼개지고, 곧이어 뒤섞이는 대지의 혼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성곽과 건물들이 무너지며 그 주변에 있던 마인들은 그대로 거기 깔려버리거나 겁에 질린 쥐새끼처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예고도 없이 일어난 급작스럽게 일어난 사태에 제정신을 차린 이가 별로 없었다.
차분한 태도로 주변을 둘러보던 장건도 발밑이 으지직 갈라져 뒤틀리는 것을 느끼고는 가볍게 한쪽 암석 위로 올라갔다. 그가 올라간 쪽 땅덩이가 치솟으며 자연스럽게 장건의 시야도 함께 치솟기 시작했다. 덕분에 주변의 난장판이 잘 보였다.
“···돌겠군. 이게 뭐야?”
붉은 빛기둥이 치솟으며 패왕보가 얹혀 있던 섬 전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아니, 무너진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빛이 치솟기 전 장건이 보았던 데로 부서진 돌과 흙먼지들이 중력을 무시한 채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대지는 비틀려 부서지고, 그렇게 박살 난 바위와 땅이 하늘로 두둥실 날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더없이 튼튼해 보이던 성곽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그 너머에 있던 다리도 박살이 났다. 섬과 강을 나누는 높낮이가 무너지자 그 틈으로 콰르르 강물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강물 또한 바위들처럼 위로 치솟아 거꾸로 내리는 비가 되었다.
장건은 자신이 올라선 땅덩이가 단순히 뒤틀려 위로 치솟는 것을 넘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그 흔들리는 땅덩어리 위에서 균형을 잡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절로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붉은 빛기둥이 솟아오르기 전까지는 그저 강 한가운데 세워진 요새였을 뿐인데 지금은 성곽과 돌, 흙, 시체, 들어차는 강물까지 모든 것이 절구통 안에 들어간 것처럼 박살 나더니 저 혼자 떠올라 그 빛기둥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 빛기둥을 바라보는 장건의 눈이 가늘어졌다. 환한 빛 속에서 패왕보의 다른 부분과는 달리 기왓장 하나 무탈하게 멀쩡한 궁전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장건은 직감적으로 저곳이 의식의 중심임을 깨달았다.
“장건-! 막아야 하네!”
그때 순우현의 고함이 들렸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순우현도 장건처럼 하늘로 떠오르는 커다란 땅덩어리 하나에 올라서 자세를 낮춘 채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그는 위로 치솟는 강물에 젖어 약간 추레한 몰골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말을 이었다.
“아직 항우는 부활하지 않았네! 이건 그저 의식의 중간과정에서 일어나는 소란일 뿐이야! 자정이 되려면 아직 한참 시간이 남았어!”
그가 번뜩 손을 들어 붉은 빛기둥을 가리켰다.
“가서 의식을 저지하게! 이미 탑 두 개가 무너진 상태에서 의식의 중심마저 파괴된다면! 항우는 제대로 부활하지 못할 것이야! 아니! 운이 좋다면 의식 자체를 무너뜨릴-”
“늙은이-!”
장건에게 외치던 순우현은 본능적으로 그 늙은이가 자신을 부르는 말임을 느꼈다. 그는 순간 두 눈을 꾹 감았다.
“···왜 아까부터 다들 내 말을 끊지 못해 안달인 게야?”
짧게 중얼거리고 뒤를 돌아보자 갑옷을 차려입은 웬 중년인 하나가 부상하는 바위와 바위를 겅중겅중 건너뛰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낫 두 자루가 들려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바위에 박아넣는 방식으로 기동성을 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순우현은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순우현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자넨 누군가?”
“나는 지왕탑주 송사역이다! 네놈이 황군의 태학사라지? 그 잘난 황군 무공을 한번 보자!”
못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지금 처음 만난 사이였던 것이다. 혁련위진의 뒤에서 몰려나오던 마인들 중에 섞여 있었던 모양인데, 뭐라 자신을 소개하기도 전에 지금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순우현은 피곤함에 절로 한숨을 내쉬며 장건을 돌아보았다.
“어서 가게, 장건. 가서 이 정신 나간 풍경을 끝내게! 난 저 친구를 좀 상대해야겠어···”
그는 물에 젖어 축축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는, 곧 발 딛고 있던 땅덩이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마찬가지로 바위를 박차고 날아오른 지왕탑주과 그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 충돌에 파팡-하고 공기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무림 최초의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과연 저 싸움이 역사서에 기록될 것인가 생각해보던 장건은 이내 빛기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주변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바윗덩어리들 사이로 붉은빛에 휩싸인 웅장한 모양의 궁전이 보였다. 아마 저 안에서 마궁이 그토록 바라던 초패마왕 항우의 부활 의식이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그를 바라보던 장건은 땅덩어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공중으로 치솟는 바위와 땅덩어리들과는 다르게 그의 몸은 여전히 중력의 영향 아래 있었다. 높게 치솟았던 그의 몸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또 다른 바위 위를 향했다. 그사이에 많은 돌과 바위들이 있었지만 장건의 몸과 만나는 것은 없었다.
다만 위로 휘몰아치고 있는 강물의 물방울들만은 너무 촘촘한지라 피할 수 없었는데, 사실 그것도 그의 몸에서 몇 치 떨어진 공간을 두고 미끄러지고 있었다. 호신기의 활용이었다.
그렇게 날아간 그의 발이 다음 바위를 아주 가볍게 밟았다. 그의 몸은 다시 깃털처럼 표홀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순간 스르릉 날붙이가 물줄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보다 먼저 기척을 느꼈던 장건은 당황하지 않고 몸을 틀었다. 그의 몸이 부드럽게 회전해 가까이 있던 작은 바위 위로 내려앉았다. 동시에 챙-하는 소리가 울렸는데, 장건을 공격한 자의 검이 다른 바위에 박히는 소리였다.
장건은 내려앉은 채 고개를 들어 그자의 정체를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그래, 하던 싸움은 마무리해야지.”
멀찍이 떨어진 바위 위에 검을 박아넣고 그 검에 기대선 혁련위진이 젖은 머리를 휙 털어내며 장건을 돌아보았다. 호신기로 물을 튕겨낸 장건과는 달리 그는 푹 젖어 있었다.
혁련위진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장건을 노려보았다.
“장건! 정말 나와 함께 무림맹의 독립을 위해 싸우지 않을 텐가-!”
장건은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왼손으로 청룡의 칼집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본 혁련위진이 웃었다.
“하하하! 그래! 나도 사실 자네가 정말 나와 손잡겠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어! 그러면 내 손으로 자넬 죽일 수 없을 테니까!”
그는 바위에 박혔던 검, 의룡검을 힘주어 뽑았다. 그 보검이 위이잉-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처음 자네를 알았을 때부터, 정말 이렇게 되리라고는 한치도 예상하지 못했네! 그저 젊은 혈기에 협객 놀이를 하는 젊은이인 줄만 알았는데!”
그때 그를 마주 보던 장건의 눈이 가늘어졌다. 혁련위진의 기세가 묘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자넨 그런 젊은이가 맞아! 그저 가진 무공이 쓸데없이 뛰어나다는 것이 다를 뿐이지! 그 무공이 조금만 모자랐다면 자넨 그동안 이 서부의 황야에서 덧없이 죽어 나간 수많은 협객들처럼 진즉에 시체가 되었을 거야!”
혁련위진의 두 눈에서 붉은 기운이 맴돌았다. 푹 젖어 있던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일어서고도 있었다.
장건은 그 모습을 보며 입안이 씁쓸해지는 걸 느꼈다.
“···당신은 너무 오래 산 모양이군.”
“오래 살았다고? 으하하하-! 그래! 맞다! 나는 협객이 아니기에 오래 살아남았다! 협이니 뭐니 따지는 놈들은 이 무림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하지만 사실 아무도 그런 건 따져보지 않아! 그저 이 의룡검을 보며 내가 협객 중의 협객이라 칭송할 뿐이지!”
이제 그의 몸에서 피어나는 기세는 확실히 마공의 그것과 같았다. 미치광이처럼 충혈된 두 눈과 두 배쯤 부풀어 오른 근육, 산발하며 휘날리는 머리칼까지.
“무림인은 결국 무공 한 자락 익혀 평범한 양민들을 등쳐먹는 무뢰배들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무림맹의 질서를 세우지 않았다면 신사천도, 천후성도, 감산성도! 이 무림 자체가 만들어질 수 없었어! 서부의 그 많은 농부와 목장들은 항상 칼 든 자들에게 착취만 당했을 것이고, 무공을 익힌 자들은 신나게 서로를 죽여대며 이 땅은 지금보다 훨씬 끔찍한 지옥도였을 것이다!”
장건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꼭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꼭 혁련위진이 아니어도 무림맹은 지금과 비슷한 역할이 되었을 것이다. 언제나 세상에는 자신의 자리에서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순찰대원으로서 범죄자와 악인을 잡아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경비대원으로서 무림맹의 담장을 지키던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는 맹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접객원으로서 의무를 다했다.
그들도 이곳 신대륙 무림 속에 살아가는 무림인들이었다.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면서 때때로 자신이 믿는 신념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이 신대륙의 무림은 그저 서로를 도축하는 살육장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장건은 문득 무림맹주라는 자리가 저 혁련위진보다는 그런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들 중 누가 되어도 지금 저자처럼 추해지진 않을 것 같았다.
천천히 일어선 장건은 혁련위진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평소에는 본래 익힌 내공으로 마기를 감싸 숨겼군. 상반되는 무공을 동시에 운용하는 건 놀라운데.”
“크흐흐··· 놀랍나? 이게 바로 양의공兩意功이라는 것이다. 수백 년 전부터 일인 전승으로 전수되어온, 저 중원의 황제도 가지지 못한 비술이지. 이 세상에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무공이다.”
그 대답에 장건은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혁련위진이 말하는 투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 꼴을 보니 그동안 무림맹주라는 직함을 달고 어떻게 참았을까 싶었다.
그때 붉은 빛기둥이 다시 한번 하늘 위로 파동을 쏘아 올렸다.
이미 패왕보 성채는 모두 으스러져 그 잔해들만 빛기둥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으나, 그 빛의 파동이 위로 쏘아진 순간 다시 한번 바닥에서 거대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섬이 완전히 무너져내리며 섬 크기의 시커먼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주변의 강물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커다란 폭포를 그렸다.
그 검은 구덩이 위에 오직 붉은 빛기둥을 쏘아 올리는 패왕보 궁전만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 주변으로 집채만 한 바위와 땅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녔다.
“초패마왕의 부활이 머지않았다! 그가 부활하면 제일 먼저 신사천의 늙은이들과 제씨 성을 달고 있는 자는 모조리 죽여버릴 것이다. 그 가문이 불타는 모습이 그려지는구나.”
혁련위진의 말이었다. 마치 항우가 부활하면 무조건 그 뜻을 따르리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더 따져보기도 번거로워진 장건은 말없이 청룡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 모습을 본 혁련위진도 재빨리 자세를 낮추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오른손의 검을 가로로 세워 뒤로 당기고 잔뜩 낮아진 자세가 마치 보이지 않은 활대에 화살 대신 검을 걸어 쏘아내는 듯 보였다.
혁련위진의 눈이 시뻘겋게 빛나며 장건의 칼을 노려보았다.
그도 장건의 칼이 홀로 날아다니는, 옛날이야기에서나 찾아볼 법한 모습으로 움직이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에 그렇게 날아다니는 칼이 그렇게 위협적인지는 의문이었다.
물론 보이지 않는 사각으로 파고들 수 있는 것이나 기존의 검술 궤적을 벗어난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실 그건 검의 움직임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대항할 수 있었다.
도리어 그 칼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동안 본체의 주의력은 약해질 테니 가까이 붙을 수만 있다면 이쪽에게 유리해질 터였다. 적어도 혁련위진이 본 장건의 이기어검은 그랬다.
그때 장건이 오른손으로 청룡을 뽑으며 바위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가 이기어검을 쓸 것이라 예상했던 혁련위진은 찰나의 순간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당기고 있던 보이지 않는 활시위를 놓았다. 다음 순간 그의 검과 몸이 태양을 꿰뚫는 화살이 되어 하늘을 날았다.
보검 의룡을 앞으로 쭉 뻗은 혁련위진은 장건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곧게 한 점을 노리고 뻗어가는 본인의 검과는 달리 장건의 칼이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그의 의룡검이 먼저 장건에게 닿을 듯했다. 더 길고, 더 빨랐다. 검 끝으로 뻗어나가는 검기가 장건의 칼보다는 훨씬 먼저 상대를 꿰뚫을 수 있을 듯했다.
그 순간 장건의 칼이 하얗게 빛났다. 똑바로 보기 힘들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하지만 혁련위진은 눈가가 찢어져라 크게 뜨며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런 찰나의 실수가 승패를 가리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의룡검과 장건의 칼이 만나는 모습을 아주 느린 세상 속에서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장건의 칼과 만난 의룡검은 먼지처럼 흩어져갔다.
혁련위진은 순식간에 검신의 절반 이상이 사라진 의룡검을 보며 곧바로 깨달았다. 그것이 다음 순간 자신의 모습임을.
장건의 몸이 조금 전 혁련위진이 서 있던 바위 위에 내려앉았다. 그의 청룡은 본래 빛을 되찾아 푸르스름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후 그 청룡을 가볍게 털어낸 장건은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몸을 날렸다. 그렇게 그의 몸이 붉은 빛기둥을 향해 날아올랐을 때, 뒤편에선 상체가 사라진 하반신과 손잡이만 남은 검의 파편이 시커먼 무저갱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