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4)
24화
태양이 하늘의 정점을 찍고 조금 기우뚱한 시간. 한 남자와 그가 탄 말이 마을 초입에 들어섰다.
남자는 천천히 말을 몰아가며 쓰고 있던 삿갓을 슬쩍 들어 마을 입구에 낡은 간판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청수촌이라는 글자가 빛바래 흔들거리고 있었다. 남자, 장건의 눈이 흙먼지 날리는 마을 안으로 향했다.
“물이 푸른 마을이라. 우물 하나 없어 보이는데.”
2주 전쯤 계곡 부족을 떠나 이번엔 서쪽으로 여정을 잡은 장건은 마지막 마을 이후 사흘을 헤매다 이곳을 발견하고 얼른 달려온 참이었다. 그 마을이 꽤나 황량해 보이지만 이 지방 마을들은 대부분 이런 모양이었으니 특별하달 것도 없었다.
털털 걷던 조조는 장건보다도 먼저 객잔 간판을 발견하고는 고삐도 끌지 않았는데 총총 그곳으로 다가갔다. 객잔 앞에 이르러서는 장건에게 얼른 내리라는 듯 푸르릉대며 머리를 흔들기까지 했다.
“알았다 인마. 내릴 테니까 얌전히 있어.”
그렇게 말에서 내리니 웬 꼬마 하나가 객잔 주렴을 걷고 나왔다. 녀석은 조조의 투레질 소리를 듣고 나온 것인지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장건을 발견하고 폴짝 다가와서 말했다.
“어서 오세요. 숙박이신가요? 식사는요? 술도 있어요. 말은 마구간에 넣어드릴까요? 방은 작은 방 큰 방이 있어요. 제일 좋은 특실도 있죠. 개인적으론 그냥 작은 방을 추천해 드려요. 사실 방들 차이가 별로 없거든요.”
장건은 허리띠를 잡고 서서 두다다다 쏟아내는 꼬마의 말을 가만 듣다가 아이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숙박. 작은 방. 식사도 하고. 술은 뭐 있나?”
“그냥 싸구려 백주요.”
꼬마의 뚱한 대꾸에 장건은 피식 웃었다.
“너 솔직하구나.”
“그건 제 무수한 장점 중 하나일 뿐이죠.”
하하 웃은 장건은 동전 한 닢을 튕겨주고 조조의 고삐를 내밀었다. 꼬마는 얼른 고삐를 받아들고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더니 곧바로 객잔 옆에 있던 마구간으로 조조를 끌어갔다.
장건은 그걸 잠시 바라보다가 객잔의 주렴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 넓지 않은 객잔 안에는 서너 사람이 앉아 뭔가를 먹거나 술잔을 두고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길쭉한 탁자 뒤에서 그릇을 닦던 여인이 들어서는 장건을 보고 말했다.
“어서 옵쇼! 숙박이신가요? 식사는? 술도 드시나? 방은 작은 방과 큰 방, 그리고 특실이 있는데, 특실을 추천해요. 거기가 제일 조용하거든.”
안으로 들어선 장건은 그 말을 들으며 꼬마가 말하는 걸 누구한테 배웠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까 했던 말을 다시 해야 한다는 것도.
“···숙박. 작은 방. 식사에 백주.”
장건은 삿갓을 벗고 긴 탁자 앞에 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객잔 주인으로 보이는 여인은 식사를 차리러 갈 생각은 안 하고 그 앞으로 와 싱글거렸다. 지금 뭐하는 건가 바라보는 장건의 시선에 그녀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여긴 선불이라서.”
허허 웃은 장건은 품에서 동전을 꺼내 그 손 위에 얹어주었다. 여인은 그렇게 돈을 받아들고 휙 돌아서 뭔가 덜그럭거리더니 금세 식사를 차려주었다. 속없이 쪄낸 빵과 콩을 양념에 걸쭉하게 끓인 국물이었다.
빵은 아침에 찐 듯 차가웠지만 국물은 약한 불에 계속 끓이고 있었는지 적당히 먹기 좋게 따끈했다. 숟가락을 들어 한입 먹어보니 약간 짰는데, 거기에 찐빵을 베어 물자 간이 딱 맞았다. 주문하자마자 나온 것 치고는 괜찮은 식사였다.
여인이 백주와 잔을 내려놓을 때쯤 아까 그 꼬마가 주렴을 걷고 들어왔다. 녀석은 장건에게 다가와 말했다.
“안장 걷고 건초 채워 놓았어요. 방은 잡으셨나요?”
“그래.”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시고 편히 쉬세요.”
녀석은 다시 한번 꾸벅 허리를 숙이더니 긴 탁자 한쪽에서 행주 하나를 집어 객잔 안 탁자를 닦기 시작했다. 장건은 입을 우물거리며 그걸 바라보다가 술잔을 채우며 탁자 너머 있는 객잔 여주인에게 말했다.
“똘똘한 아들이군.”
마른 수건으로 그릇을 닦던 여인은 피식 웃었다.
“내 아들 아니에요.”
“그럼?”
“저런 아들이 있기엔 내가 좀 젊지 않나요? 저 녀석은 알던 언니 아들이죠. 그 언니랑 남편 부부가 둘 다 죽어 키울 사람이 없어서 내가 잠깐 맡았을 뿐이에요.”
“부모가 다? 어쩌다가?”
그녀는 접시 닦던 손을 멈추고 내려놓더니 주변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건 외지인한테 말할 게 못 되는 것 같군요.”
장건은 그녀가 꺼리는 기색이자 그냥 어깨 한번 으쓱이고 더 묻지 않았다. 말하기 싫어하는데 굳이 캐낼 생각은 없었다.
입안에 씹던 것을 꿀꺽 삼킨 그는 채워 놓은 잔을 들어 훌쩍 삼켰다. 후끈한 열기가 목덜미를 훑고 지나더니 남은 백주의 향이 코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아이가 싸구려라 한 것치고는 괜찮은 술이었다.
장건은 그렇게 조용한 객잔 안에서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 느긋하게 낮잠을 잤다. 식사와 술처럼 작은 객잔치고 깨끗하고 냄새도 나지 않는 방 덕분에 흐뭇한 마음으로 단잠을 잘 수 있었다.
* * *
저녁쯤 눈을 뜬 장건은 식사할 생각에 1층으로 내려갔다. 아까 낮보다는 많은 사람이 객잔 안을 채우고 있었다. 장건의 눈에 바쁘게 뛰어다니는 꼬마와 객잔 여주인이 보였다. 다른 점원은 없는 것 같았다.
그때 계단을 내려와 낮에 앉았던 자리로 걸어가던 장건의 눈에 사람 넷이 둘러앉은 구석 탁자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쥔 골패와 탁자에 굴러다니는 동전도.
장건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가만 서서 그들이 하는 걸 바라보다가 무슨 볼일이냐는 듯 올려다보는 시선에 흠칫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다신 골패를 쥐지 않겠다 결심하기도 했던 그였지만, 그 결심은 이미 지난번 마을에서 은전과 함께 깨진 지 오래였다.
그는 자리에 앉아 식사를 주문하며 생각했다. 그래도 지난번엔 몽땅 털리도록 노름을 하진 않았다. 적당한 선에서 멈췄고, 그래서 수중에 아직 은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아예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장건은 자신의 엄격한 절제력에 혼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잠시 후 식사를 마친 그는 그 구석 탁자에 한 사람이 빠지는 것을 보고 곧장 끼어들었다. 굳이 엄격히 살 필요가 뭐 있나 하는 생각을 하며.
원래 패를 돌리던 사람들은 외지인에 키도 크고 칼도 찬 장건의 분위기에 약간 경계하고 긴장하는 듯하다가, 잠깐 노름을 해보니 그가 순 맹탕이라는 걸 깨닫고 곧 편안히 풀어졌다.
잠시 후에는 자기들끼리 뭐라뭐라 떠들 정도였다.
“거, 뭐냐. 이번에 원 씨 할아범이 결국 땅을 팔았다지?”
“그럴 줄 알았어. 끝내는 못 견디고 그렇게 팔 거면서 왜 버틴 거야? 그냥 처음에 돈 많이 준다고 할 때 넘길 것이지.”
“그게 쉽냐. 그 목장은 원 할아범이 이십 년 동안 운영한 곳인데.”
“그럼 이제 누구 남았지? 손 씨?”
입술 밑에 흉터가 있는 남자가 탁자 위에 골패를 툭 내려놓으며 말했다.
“손 씨도 얼마 안 남았어. 원 할아범 집이 불타는 걸 보고 겁을 먹은 모양이야.”
“허이구. 호 씨 부부가 죽을 땐 겁도 없이 살인이니 뭐니 난리를 치더니만.”
그때 탁자 밑에서 툭툭거리는 소리가 났다. 입술 밑 흉터남이 장건을 흘낏 보며 살인이란 말을 꺼낸 남자의 다리를 찬 것이다. 장건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탁자를 둘러앉은 남자들이 금세 조용해졌다.
입술 밑 흉터남은 돌리던 패를 멈추고 손을 들어 코를 킁킁 훑더니 품에서 조그만 종이와 주머니를 꺼내 담배를 말았다. 주머니의 새겨진 문양을 보아하니 상행 조합에서 파는 물건으로 보였다.
그는 탁자 위에 있던 호롱불로 담뱃불을 붙이고는 후-하고 연기를 뿜었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장건에게 물었다.
“그래, 형씨는 어디서 오셨소?”
장건은 자신이 쥔 골패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동쪽.”
흉터남은 그 짤막한 대답에 잠시 멍하다가 툴툴 웃었다.
“동쪽. 동쪽이라. 여기서 동쪽이면··· 며칠 헤매셨겠네?”
“사흘.”
“어디로 가시는데?”
“서쪽.”
계속 이어진 짤막한 대답에 흉터남은 잠시 말없이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담배에서 나온 부스러기를 옆에 투, 뱉고는 다시 담배를 물었다.
“그럼 우리 마을에선 문제 일으킬 생각 없으시겠지?”
장건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괜히 자신을 경계하는 건달이 아니라 손에 쥐고 탁자 위를 도는 패뿐이었다.
흉터남과 도박꾼들은 그런 장건의 선선한 모습에 서로 눈짓을 하다가 그가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 생각했는지 다시 웃으며 신나게 패를 돌리기 시작했다.
장건도 다시 집중했다. 혹시나 속임수를 쓰기라도 하면 판을 엎어버리리라 생각하면서. 그는 진짜 딸 작정이었다. 덕분에 탁자 위에 노름의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잃는 것은 대부분 장건 뿐이었지만.
그와 마을 건달들이 그렇게 한참 골패를 돌리고 있던 그때, 큼직한 삿갓을 쓴 누군가가 객잔 주렴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입구에 서서 객잔 안에 들어찬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다가 삿갓을 벗었다.
삿갓 아래 드러난 얼굴은 어딘가 약간 간사하고 비굴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입가에 띤 자연스러운 미소 때문에 몸에 여유가 배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옷깃을 툭툭 정리하며 긴 탁자로 다가가 여주인에게 뭐라 말을 걸었다.
둘은 이미 서로 얼굴을 아는지 여주인이 웃으며 그를 상대했다. 둘은 잠시 그렇게 떠들었는데, 갑자기 여주인이 손을 들어 장건이 앉은 탁자를 가리켰다. 남자는 탁자를 확인하고 여주인에게 동전을 쥐여주더니 성큼성큼 그 탁자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한쪽에 서서 팔짱을 끼고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패를 돌리던 흉터남이 후- 연기를 뿜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요.”
“아,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시게. 잠깐 구경이나 하려고.”
패에 집중하던 장건은 그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걸 느꼈다. 무시하고 계속 집중하고 싶었지만 그 후에도 느껴지는 시선에 결국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아야 했다.
장건과 눈이 마주친 남자, 양굉은 씩 웃었다.
“오랜만이오, 장 형. 잘 지내셨소?”
그렇게 웃던 양굉은 곧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시게. 난 잠깐 구경만 하려니까.”
장건과 그를 번갈아 보던 건달들은 장건이 별말 없이 다시 탁자 위에 집중하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다시 패를 돌렸다. 그리고 양굉은 정말 객잔 벽에 기대서서 그들이 패를 돌리는 걸 구경만 했다.
그는 잠시 후 은전이 모두 털린 장건이 이마를 부여잡는 꼴을 보고서야 말을 걸었다.
“장 형은 진짜 노름 좀 그만해야 해. 지난번에 봤을 때랑 달라진 게 없네.”
장건은 눈을 살짝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양굉은 그 눈빛을 보고 찔끔 놀라 눈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거, 갑시다. 내가 술이라도 한잔 살 테니까.”
장건은 술을 산다는 말에 그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양굉은 자리에 앉아서 지나가던 점소이 꼬마를 붙잡았다.
“여기 이 객잔에서 제일 비싼 술로.”
“우린 싸구려 백주밖에 없는데요.”
“···그럼 그거 가져와.”
솔직한 꼬마 점소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금방 술과 술잔을 가져왔다. 양굉은 그 잔을 장건 앞에 놓고 술을 채웠다. 그리고 자기 것도 채우더니 잔을 들며 말했다.
“자, 다음번엔 장 형의 패가 잘 붙길 기원하며!”
장건은 그런 양굉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말없이 훌쩍 술을 들이켰다. 양굉은 그의 대답이 없었음에도 실실 쪼개며 자기 잔을 비우고, 다시 장건 것부터 잔을 채웠다.
그렇게 잔이 차는 걸 바라보던 장건이 불쑥 말했다.
“날 찾아온 건가?”
잔을 채우던 양굉은 흘끔 장건의 기색을 살피더니 말을 꺼냈다.
“이 주변에는 이렇게 마을이라고 할 만한 곳은 몇 곳 없소. 대부분 목장이고 광산이 하나 있을 뿐이지. 지난번에 장 형은 동쪽으로 가지 않았소? 그리 가면 결국 산맥에 막히고, 곧 겨울이 오는데 그걸 넘어 떠날 것이 아니면 다시 서쪽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했소. 거기에 나와 헤어진 곳이 조금 남쪽이었으니 약간 위쪽으로 올라오리라 생각해 이 주변을 계속 돌았지. 그리고 이렇게···”
그는 말을 하다가 결국 히죽 웃었다.
“사실 반쯤 기우제 지내는 마음으로 돌아다녔소. 내일이나 모레쯤까지 못 만나면 그만둘 생각이기도 했고. 어쨌든 이렇게 다시 만나서 반갑소, 장 형.”
장건은 그 웃음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훌쩍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탁 소리가 나도록 탁자에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나한테 현상금이라도 걸렸나? 날 왜 찾아?”
“그런 게 아니라 솜씨가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니까 그런 거지. 내가 지난번에 헤어질 적 했던 말 기억하시오?”
양굉은 장건의 빈 잔을 채워주며 무슨 작당이라도 하듯 슬그머니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능글능글 웃으며 작게 말했다.
“나하고 일 하나 합시다, 장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