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42)
242화
* * *
깊은 어둠. 아니, 혼돈.
장건은 흩어져갔다. 그는 마치 검은 물감 속에 풀린 다른 색깔의 물감 같았다. 그가 가진 고유의 색이 그 검은 혼돈 속에 물들고 섞이며 새카만 색으로 변해갔다. 그가 장건으로 살아가며 켜켜이 쌓아온 삶의 단층이 그 혼돈에 녹아 부스러지고 있었다.
장건의 흐린 눈은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인간의 지성으로는 불가해한 관념과 온갖 추상적 의미들이 크고 작은 소용돌이로 뒤섞여 휘몰아쳤다.
거대한 혼돈의 폭풍. 현실의 이치와 법칙들은 이 세계에서 때로는 정반대로, 때로는 전혀 상관없는 방식으로 작용되었다. 때문에 찰나는 영원永遠이었고, 무한無限은 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었다.
비현실의 세계. 장건이 마신 항우에게 떠밀려 도달한 세상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정확히는 산 자는 이해할 수 없는 혼돈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인 장건은 그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그때 검붉은 먹구름 같은 것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그 존재는 스스로의 의지로 몸을 이루고, 엉망진창인 세계의 규칙을 자신에게 알맞게 규정하고 있었다.
잠시 후 검붉은 먹구름은 어떤 거대한 얼굴이 되었다. 현실이었다면 거대한 산맥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크기의 얼굴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장건을 이 세계로 끌어당긴 항우의 얼굴이기도 했다.
그가 장건을 내려다보았다.
[지상에서의 싸움은 훌륭했다, 장건. 그리고 내가 널 만난 이유를 이젠 확실히 알겠다.]얼굴로만 이루어져 있던 그의 검붉은 몸체가 스멀스멀 장건의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래, 낡은 질서를 파괴하려는 자가 낡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 이 시대에서 가장 강한 자. 그것이 나의 새로운 몸이 될지니.]마신의 먹구름이 다가오는 와중에도 혼돈 속을 표류하는 장건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혼돈의 소용돌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반응할까 두렵다는 듯 조심스럽게 다가가던 마신의 먹구름은 이내 그의 무반응을 확신했는지 거대한 파도처럼 와르르 몰아쳤다. 검붉은 먹구름 폭풍이 장건을 중심으로 거대한 회전을 그렸다. 그리고 그 끝에서 짐승의 이빨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먹구름의 촉수 끝이 장건의 몸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살갗 속으로 이질적인 것이 파고들고 있었으나 장건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거대한 항우의 얼굴에 강한 감정이 떠올랐다.
[···네 육신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너의 무공이 느껴진다. 네가 만든 무공들, 네가 되살린 무공들, 그리고 앞으로 네가 만들 무공들까지···]항우의 얼굴이 흥분과 놀라움, 분노와 질시 등이 복잡하게 섞인 표정으로 찡그려졌다. 마치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무공을 만들고 익힐 수 있는지, 어떻게 이렇게 많은 무리武理를 홀로 일궈낼 수 있었는지 의아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의문은 곧 사라졌다. 잠시 후 항우의 얼굴에 남은 것은 새로운 삶과 육신을 향한 갈증과 열망뿐이었다. 그의 두 눈 부분이 시뻘겋게 번쩍였다.
[그래··· 그래···! 진정 살아있는 육신! 진정 지상의 것을 맛보고 느낄 수 있는 몸뚱이! 느껴진다! 산 자의 몸뚱이가-]열망으로 일그러지던 항우의 얼굴이 갑작스레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비현실의 혼돈 속에서 파괴되었어야 할 장건의 내면에 무언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떤 시선이었다.
[뭣···? 이게, 무슨··· 누구···]장건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시선이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진실한 눈으로 항우를 바라보았다.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혼돈과 불가해의 관념들은 그 눈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했다. 항우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지도 않은 육신이 알몸으로 벌거벗겨진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그 눈이 항우를 바라보는 순간, 멍하니 혼돈을 바라보던 장건의 눈도 스르륵 초점을 되찾았다. 그것은 마치 물에 풀어져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었을 물감이 시간을 되돌려 본래의 색을 되찾는 듯한 모습이었다. 녹아 부스러졌던 장건의 삶이 그의 몸을 책등으로 삼아 다시 한 장 한 장 되돌아오고 있었다.
장건의 살갗 안으로 파고들었던 항우의 먹구름은 그의 피부 표면에서 반짝이는 가루가 되어 흩어져 나왔다. 때문에 어둡고 기괴하기만 한 이 세계에서 장건은 홀로 빛나고 있었다.
[너···! 그건, 그 눈은 뭐지? 어떻게 산 자의 정신이 이곳에서··· 설마 죽은 것인가? 남은 생을 포기하고 자결했다고?]항우의 얼굴이 당황한 듯 물어오고 있었지만 정작 장건은 그 소리에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정신이 되돌아온 순간부터 그의 마음엔 다시 검이 벼려졌고, 그런 의지 앞에 이 세상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굴종하고 있었다. 멍하니 자기 질문만 하는 마신의 얼굴은 그의 안중에 없었다.
장건은 그저 그의 의지에 굴복하는 세계가 신기하다는 듯 주먹을 주억거리다가, 곧 자신이 이쪽 세상으로 훌쩍 사라졌음에 무림정천대 사람들이 당황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오.”
그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이 세계는 그의 망원경이 되었다. 장건의 시선이 이곳 혼돈의 세계를 떠나 지상으로, 완전히 난도질 되어 돌과 물줄기만 남은 난장판 패왕보를 향했다.
양굉과 제운성, 적세인, 섬지영, 그리고 비랑과 적풍을 포함한 제가의 무사들, 남궁상과 남궁세가의 무사들, 그리고 순우현. 각 탑을 무너뜨리기 위해 흩어졌던 무림정천대가 한곳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패왕보 섬이 무너지며 제일 높게 쌓인 돌무더기 위로 올라오고 있었는데, 그곳은 장건과 항우가 싸우며 하늘로 올라가기 전까지 디디고 있던 땅이었다.
가만 지켜보니 그들은 바위와 돌 틈으로 강물이 들어차는 와중에 장건을 찾으려 헤매고 있었다. 아마 장건이 다쳐서 어딘가 바위틈이나 돌무더기 위에 떨어져 있다고 여기는 것일지 몰랐다.
장건의 시야에 함께 선 채 그의 이름을 부르며 두리번거리는 두 여인이 보였다. 비랑과 소향이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바위 사이를 건너며 손을 건네는 모습이 둘은 벌써 꽤 친해 보였다.
귀찮은 표정으로 설렁설렁 찾는 시늉만 하는 양굉도 보였다. 그는 때 되면 알아서 나타날 장건을 굳이 이렇게 찾아다니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적어도 그의 얼굴에는 그런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제운성이나 섬지영, 제가의 무사들은 약간 질린 표정이었다. 그들도 항우가 휘두른 검에 쪼개지는 대지를 보았고, 또 그와 격전을 벌이며 하늘로 치솟던 장건도 보았다. 그게 인간이 가능한 무공이 맞기는 한 건지 의문이라 그들 모두 반쯤 멍한 상태였다.
장건 말고 다른 사람을 찾는 이도 있었다. 적세인이 그러했는데, 그녀는 꼭 장건이 아니더라도 바위와 돌 사이에 깔린 시체를 확인했다. 그러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시체에서는 꼭 품을 뒤져 뭔가를 찾으려 했다. 장건은 그녀가 혁련위진과 그의 증표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마 무림맹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그 증표가 필요한 것일 터였다.
순우현은 허리를 굽힌 채 골골거리며 적풍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그는 연신 힘들어 죽겠다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장건이 보기엔 꾀병으로만 보였다. 여전히 그의 단전과 기혈에는 내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수색에 임하는 남궁상과 남궁세가의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꼭 장건 말고도 뭔가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건은 그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뭔가 아득한 곳을 바라보는 듯하면서도, 그곳에 닿는 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강인한 눈이었다.
그곳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남궁천은 조금 떨어져서 강변에 잘 모셔진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진 것을 보니 마지막에 후회 없는 선택을 한 모양이었다.
자신을 찾는 사람들을 확인한 장건은 이제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눈을 떼려 했다. 하지만 그때 문득 지금 이 눈에는 거리의 한계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장건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서쪽을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그의 눈이 닿은 곳은 며칠 전 큰 소란이 났던 남궁세가였다. 남궁상과 대부분의 인원은 패왕보에 있었지만, 저택을 정리하기 위해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업무 중에는 무림인들이 남기고 간 말들을 보살피는 것도 있었다.
장건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남궁세가의 마구간을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루한 표정으로 우물우물 여물을 씹고 있는 조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른 말들은 모두 녀석과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데, 녀석들의 둥그런 눈망울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아마 조조에게 호되게 혼이 나서는 빌빌거리는 것일 가능성이 컸다.
그때 여물을 씹던 조조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번뜩이는 눈빛으로 마구간 안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말들은 조조의 그런 이상행동에 더 겁을 먹고 구석으로 밀려났다.
이러다간 다른 말들이 신경쇠약에 걸리겠다 싶어 장건의 시선은 곧 그곳을 떠났다. 조조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장건의 천리안은 남궁세가에서 조금 남서쪽을 향했다. 드넓은 평원과 숲을 지나 그의 눈이 닿은 곳은 어느 장원이었다.
그곳에서는 어느 건장한 원주민들이 무언가의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동부의 무림인 단칼과 대전사 미쳐 날뛰는 말, 그리고 원주민 전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땅에 묻어 정리하고 있는 시체들은 원주민를 노예로 부리던 마인 관리관들로 보였다. 노예로 부려지는 동족을 구하겠다던 계획이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때 삽으로 땅을 파던 대전사 미쳐 날뛰는 말이 고개를 들었다. 곧 그의 눈이 옅은 붉은색으로 반짝였고, 그는 오른손을 이마 앞에 대었다가 하늘로 높이 치켜들었다. 마치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장건에게 인사를 하는 듯했다. 다른 전사들은 그의 그런 갑작스러운 행동에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대전사와 정령의 인사를 받으며 장건의 시선은 다시 서쪽을 향했다. 그렇게 신장강이라 이름 붙은 강을 넘어 광활한 벌판을 지나다 보니 어느 순간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족히 수천은 되어 보이는 숫자였다.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 마궁의 마인들이 원주민 노예들을 인간 방패로 세워 황군과 맞서려 한다던 작전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 많은 원주민 청년들이 다 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본 그곳의 상황은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았다.
마인들이야 마공 때문에 항복이고 뭐고 없이 모조리 죽어 나간 것은 당연했다. 그들의 시체는 평원에 잔뜩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노예병으로 정면에 내세워졌을 원주민 수천 명은 평원 한쪽에 모여서 따닥따닥 붙어 앉아 있을지언정 황군의 창칼에 학살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전장을 둘러보던 장건의 눈이 말을 타고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는 유설을 찾았다. 그녀의 부관 진하가 바짝 붙어 따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본 장건은 대강의 사정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진하의 어깨에 혈리응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제운성의 어깨에서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던 이유가 이것인 모양이었다. 유설과 황군에게 마궁 군대의 구성을 알리는 것. 첩보를 받은 유설은 전투가 시작되자 황군을 우회시켜 원주민 노예병들과 마궁을 분리시키고 그대로 밀고 들어가 마인들을 싹 쓸어버린 것이다.
장건은 약간 피로해 보이긴 해도 환해 보이는 유설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시 시선을 들어 서쪽으로 향했다.
드넓은 초원이 다시 한번 그를 반겼다. 하지만 볼 것이 없었던 그 땅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이어서 고원성에 도착했다. 그리고 서부는 그곳에서 시작이었다.
고원성 어느 골방, 손강이라는 이름을 가진 암룡대 대원 하나가 서류에 파묻혀서 쿨쿨 자고 있었다. 그가 그 서류들을 통해 예견했던 동부 무림은 사실이었다.
골방에서 나와 고원성 한쪽에 세워진 원주민 거리를 향했다. 장건은 어렵지 않게 흐르는 뼈의 천막을 찾았고, 안으로 들어가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모닥불 앞에 앉아 있던 노인은 미쳐 날뛰는 말이 그랬던 것처럼 장건의 시선을 마주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그 인사를 뒤로하고 서쪽으로 쭉 더 나아가자 염호성이 나왔다. 장건의 눈은 그곳에서 검룡문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장원을 향했다. 안으로 시선을 당기자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며 술잔을 홀짝이는 검룡문주와 가용산이 보였다. 그들의 모습에 이전처럼 악독하게 사람들을 착취하던 검룡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평범한 스승과 제자처럼 보일 뿐이었다.
검룡문을 빠져나와 시선을 조금 돌리자 염호성의 묘지가 보였다. 그곳에는 생전 연을 이루지 못한 두 묘비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하얀 소금으로 이루어진 사막이 나타난다.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염호성에서 머물던 시선이 쭉 하늘로 멀어져 북서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비랑, 적풍과 처음 만났던 계곡 부족이 있었다.
확 시선을 당겨 둘러보자니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보다 훨씬 중원 양식의 건물이 많았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들은 여전히 그들만의 법도와 규율을 지키며 살아가는 듯했다. 외눈 구름과도 인사할 수 있을까 하여 그의 천막 안을 들여다보니, 그는 앉은 채 드르렁 잠들어 있었다. 괜히 깨우진 않기로 했다.
장건의 시선은 조금 더 북서쪽으로 향했다. 양굉과 마차를 털었던 지방이 나왔다. 암룡삼호 소향을 처음 만난 것도 여기였었다.
쭉 나아가던 그의 시선은 감산에 이르러 잠시 멈췄다. 감산 무림맹의 새로운 지부장도 보였고, 잠시 머물렀던 태평루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의 칼 청룡을 얻었더랬다.
이제 장건의 시선은 남쪽으로 향했다. 그가 길고 짧게 머물렀던 많은 마을과 장소들이 스쳐 지났다. 그중에는 도적 떼에서 구해주었던 한 부자가 머무는 곳도 있었다. 이윤이라는 이름의 아버지는 건강해 보였고, 이환이라는 이름의 아들도 힘이 넘치는 듯 보였다. 녀석은 한밤중에도 이모에게 뭔가 수련을 받고 있었다. 훗날 청년고수로 이름을 날릴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장건의 시선은 그 드넓은 신대륙 땅을 지나고 지나 신사천에 이르렀다.
늦은 시간이기에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장건은 익숙한 듯 어딘가 낯선 거리를 쭉 따라 이동해 천천히 장가 상회에 이르렀다. 마치 그 문을 열고 들어가듯 천천히 나아가자 이젠 정말 익숙한 풍경이 이어졌다.
매일 아침 조카들을 포함한 많은 식구들이 왁자지껄 식사하고 하루를 시작하던 마당. 서하와 동생 장연, 그리고 다른 조카 녀석들에게 태극권을 가르치던 수련장. 그의 형 장운이 운영하는 상회. 단상운의 증기기관 공방. 그리고 형수 염 부인이 깨끗이 청소해 주었던 장건 그의 방.
장건은 마지막으로 서하의 방을 찾았다. 녀석은 이불 속에서 잠든 채 고로롱 옅게 코를 골고 있었다. 못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또 키가 큰 것 같았다. 장건은 자기도 모르게 흐트러진 녀석의 이마를 쓸어주려 했다.
하지만 그 손이 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마신의 함성이 쩌렁쩌렁 울리며 그의 시선을 신사천의 장가 상회에서 이곳 혼돈의 세계로 끄집어 당겼다. 그 와중에 장건은 자신이 꽤 오랫동안 지상을 살펴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마주한 얼굴을 보니 그게 맞는 생각이었던 듯했다.
[네 이놈-! 감히 날 무시해-!]장건의 눈앞에 거대한 항우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은 정말 커서, 한쪽 지평선에서 반대쪽 지평선까지 모두 덮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담이 큰 사람이라도 마주 본 순간 겁에 질려버릴 광경이었다.
하지만 장건은 이미 지상에서도 그를 이겼다. 겁에 질릴 이유가 없었다. 반면에 항우는 화가 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검붉은 먹구름으로 성난 폭풍을 그리고 그 안에서 붉은 벼락을 쏟아내고 있으면서도, 정작 먼저 장건을 공격해오진 못했다.
그런 마신의 모습에 장건은 피식 웃으며 오른 주먹을 쥐어 들었다. 그 주먹을 본 마신이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지상에서는 그가 주먹으로 장건의 가슴팍을 내려 앉혔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재밌는 반응이었다.
그런 마신의 반응을 보며 장건은 굳게 쥔 주먹 안으로 자신의 무공을 담았다. 그건 가장 최근에 깨달은 심검에서부터 어린 시절 무턱대고 만들기 시작했던 태극권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무武를 쌓아 공功을 이루어온 그의 삶이 담기고 있음을 말했다. 비현실의 세계이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잠시 후 그의 오른 주먹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자 온 세상을 뒤덮을 듯 폭풍과 벼락을 쏟아내던 마신은 주춤거렸다. 이 세계에서 장건이 보이는 힘을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장건의 주먹은 금세 사람의 주먹이라기보다 환한 빛 덩어리처럼 변했다. 동시에 그 안에 담긴 장건의 무공은 이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혼돈과 불가해를 가을날 낙엽 쓸어버리듯 가볍게 밀어내고 있었다.
[—–!]결국 마신은 그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거센 함성을 토해내며 먼저 공격해왔다. 쩍 벌어진 그의 입이 천하를 집어삼킬 듯했다.
그 입 안을 삐뚜름한 눈으로 바라보던 장건은 그대로 주먹을 뻗으려다가, 문득 꽉 움켜쥔 주먹 모양이 부자연스러운 듯하여 천천히 손을 폈다. 그 손은 여전히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음 순간 장건은 옅게 웃으며 그 손바닥을 정면으로, 마신을 향해 쭉 뻗었다.
——-!
마신의 얼굴은 그 손에서 뻗어 나온 빛이 닿자 함성이 아닌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검붉은 먹구름으로 이루어져 있던 그 얼굴은 아주 잠깐 사이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군데군데 갈라지고 쪼개져 더 이상 빛나지 못하는 별이었다.
장건은 내민 손에 힘을 주었다.
그 가벼운 압박에 적혈성이 바스러졌다. 동시에 그 무너지는 별의 중심에서는 항우가 그랬던 것처럼 공간이 깨져나갔다. 장건은 더 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곧장 그 깨진 틈으로 몸을 날렸다.
한순간의 암전, 그 이후 펼쳐진 것은 드넓은 창공이었다.
장건은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옷깃을 퍼드드득 흩날리는 와중에 두 눈을 끔뻑거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지금 그는 지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가볍게 양팔을 벌려 균형을 잡고 주변을 확인해보니 그가 떨어지는 고도는 지평선이 둥글게 보일 정도로 높았다. 동쪽에서 환하게 솟아오르는 태양이 보였다. 동시에 서쪽은 아직 어두운 밤의 시간이었다.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한 장건은 곧 그가 떨어지는 바닥을 확인했다. 폐허가 된 패왕보 섬이 보였다. 아마 저기에 그를 기다리는 무림인들도 있을 것이다. 장건은 살짝살짝 몸을 틀어 위치를 조정했다. 자칫 실수하면 아주 멀리 엉뚱한 장소에 떨어지게 생겼다.
그렇게 장건의 추락인지, 비행인지 모를 낙하가 이어지길 한참. 천천히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보며 하품을 하고 눈을 비비적거리던 양굉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켜다가 하늘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뭐여?”
양굉은 아주 조금씩 커지는 그 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그 점의 정체를 깨달았다.
“어어! 어어어! 저, 저저저···”
그는 일단 가까이 있던 제운성을 붙잡고 하늘을 가리키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러자 역시 피곤한 상태였던 제운성이 이 당나귀가 미쳤나-하는 식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금방 비슷한 표정이 되었다.
그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외쳤다.
“장 형!”
“장건!”
그 외침에 주변에 있던 무림인들의 시선이 확 모였다. 이후 그들이 올려다보는 하늘로 시선이 이어진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금세 모두 어쩔 줄 몰라 하게 되었다. 떨어지는 장건을 받아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옷이라도 엮으려 해도 그게 완성되기 전에 장건이 떨어질 듯했다.
“아니 시발! 왜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데! 여태 어딨다가!”
양굉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그렇게 소리쳤다. 지금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는 외침이었다. 그렇게 다들 떨어지는 장건을 절망적인 눈으로 바라보던 그 순간, 갑자기 장건의 속도가 스르륵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
그냥 쭉 자유 낙하하던 장건의 몸은 그 얼굴을 대강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이가 되자 자연스럽게 속도가 줄어들었다. 양굉은 그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이상하다고 느끼며 멍하니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장건은 어느 정도 속도가 줄어들자 곧 똑바로 서서 허공에 계단이 있기라도 하다는 듯 발을 디뎠다. 그러자 그의 몸이 정말 허공을 밟고 살짝 떠올랐다.
그는 그 이후 보이지 않는 계단 대여섯 개를 툭툭 더 밟으며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멍청한 표정으로 그런 장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에 내려선 장건은 가벼운 미소를 지은 채 그런 사람들을 쭉 돌아보다가, 갑자기 풀썩 쓰러졌다.
“···장건!”
“장 무사!”
“장 형!”
그가 쓰러지는 순간까지 멍하니 바라만 보던 사람들은 얼른 우르르 그에게 달려갔다. 쓰러진 장건이 둘러싸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모두 의식이 없는 장건을 보고 어찌 대처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무림인들의 응급처치란 대부분 살이 갈라진 부위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 것인데, 당장 장건의 모습은 어디 베이고 찔린 상처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크흠.”
그런 무림인들 앞에 황군 태학사 순우현이 다가와 헛기침을 했다. 사람들은 당장에 우르르 물러섰고, 순우현은 얼른 장건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살폈다. 맥을 짚거나 팔다리를 만지작거리는 것이 뭔가 전문적으로 보였다.
“흐음. 가슴에 외상이 좀 있긴 한데··· 이건 거의 다 나은 모양새인걸? 다른 부분에도 그리 특별한 부상은 없고··· 어엉?”
그렇게 장건을 살피던 순우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얼굴을 본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다들 입도 뻥긋하지 못했는데, 순우현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은 물론 손까지 덜덜 떨리는 모습이 너무나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멍하니 장건의 맥을 짚은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자, 결국 참지 못한 제운성이 말문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그 질문에 순우현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이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곧 그 복잡함은 착잡함으로 변했다.
그가 힘겹게 입을 뗐다.
“아무래도··· 그의 단전이··· 파괴된 듯 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