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44)
244화 후일담
[···그렇게 무명협은 모든 영광과 보상을 뒤로하고 석양 속으로 멀어져갔다.-무명협無名俠 완결完決-]
저량은 붓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곧 그 턱을 갸웃거리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저기, 정말 이대로 내시렵니까?”
의자에 앉아 탁자에 턱을 괴고 있던 유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왜요?”
“그··· 너무 행적이 겹치지 않습니까? 그분이 유명해진 무림맹 사건이나 제가의 항제룡, 그 외에도 알려진 사건들이 앞 글자 단어만 조금 바뀐 수준인데요.”
“뭐가 문제인데요?”
저량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의 나쁜 버릇이었다.
“이러면 세상 사람들 모두 그분이 무명협인 걸 알게 되지 않습니까?”
“알면 좋죠. 왜 알려지면 안 되는데요?”
“···그분이 그런 명성을 좋아하시진 않을 듯한데요.”
유설은 웃으며 턱을 괴지 않은 반대편 손을 휘적거렸다.
“괜찮아요. 아마 대부분은 그냥 그의 행적을 참고로 무명협을 썼다고만 생각할 거예요. 이전의 무명협과 그가 같은 사람이라고까진 생각하지 않겠죠.”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일부는 진실을 알게 된다는 말인데요.”
“그 정도는 그냥 그렇게 두자고요. 그런 통찰을 가진 사람들에겐 뭘 어떻게 더 바꿔도 결국 거릴 테니까요.”
저량은 이번엔 책의 내용 자체로 뭐라 더 말해볼까 하다가, 곧 무슨 상관인가 싶어서 어깨만 한 번 으쓱거리고 관뒀다. 어차피 돈 주는 건 유설이었고, 저량 그도 은근히 무명협의 정체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누굴 핍박하는 등의 사악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알려지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무명협 완결편이 출간되었다.
* * *
오대호를 중심으로 하던 마가들은 모조리 박살 났다. 완전히 전향하고 마공을 포기했던 남궁세가를 제외하고 모용, 당, 공손, 제갈 등의 가문들은 추춧돌도 남지 않고 무너져내렸다.
그러나 그 모든 마인이 완전히 뿌리뽑히진 않았다. 일부는 살아서 더 먼 북쪽으로 도망쳤고, 또 일부는 동쪽과 서쪽의 사람들 틈에 숨어들었다.
그들 중에도 앞장서 이끄는 자가 있었다. 그녀는 소녀의 얼굴과 노파의 얼굴을 반반씩 가지고 있는 술법사였다.
그러나 한번 융성했던 세력이 싹 휩쓸린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다시 마궁처럼 어떤 단체가 만들어지는 것인 당장에는 요원한 일이 되었다.
마인들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쥐새끼처럼 숨죽인 채 명맥을 이어나갔다.
* * *
동진 토벌 당시 황군에게 전향하여 적극적으로 협조한 남궁세가는 신사천 쪽에 새로운 장원을 열었다. 그들이 이전에 마인이었음을 알기에 신사천 사람들의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만약 황군에서 그들을 보증하지 않았다면 진즉에 신사천 무림인들의 손에 사달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곱지 못한 시선은 오래가지 않았는데, 그것은 남궁세가에서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무사 중에 협객 아닌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억울한 자를 도왔고, 불의를 보고 참지 않았으며, 한번 맺은 약속은 목숨을 걸고 지켰다. 그리고 그 모든 행동을 뽐내거나 자랑하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 그들의 무공은 통상의 서부 무공처럼 일격에 상대를 쳐 죽이는 것보다는 뛰어난 검술로 제압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에 피를 보는 일이 적어, 무림인이 아닌 양민들 사이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래서 남궁세가의 검은 군자검君子劍이라는 별명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정작 그 소문을 들은 가주 남궁상은 웃으며 말했다.
“군자라. 그래, 처음부터 제왕일 수는 없겠지.”
* * *
남궁세가가 신사천에 새로운 둥지를 틀자, 당혹한 것은 본래 그곳을 앞마당으로 여기던 제가였다.
하지만 그들은 당장 남궁세가에게 어떤 견제나 암투를 걸지는 못했다. 가문의 중심인 가주가 짧은 사이에 연이어 사망해 문중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원로들은 직계 중에 새로 가주를 선출하려 했으나 그것은 가모 섬지영의 손에 저지되었다. 명분은 간단했다. 그녀의 뱃속에 죽은 제상천의 아이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가문과 거의 척지듯 했던 제운성이 돌아와 그녀를 도우면서 문중의 성향은 둘로 나뉘게 되었다. 원로와 직계를 중심으로 뭉친 쪽과 섬지영과 방계가 뭉친 쪽이었다.
새 가주 선출이 간단히 저지되었던 것처럼 그 대립도 간단히 마무리되었다. 섬지영이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섬지영은 침상에서 아들을 껴안은 채 그 얼굴에서 제상천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갓 태어난 아이의 쭈글쭈글하고 동글동글한 얼굴에서 사랑하던 남자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아기의 이마에 입 맞추며 중얼거렸다.
“내 목숨을 걸고 널 지켜줄게, 아가야.”
제운성은 팔짱을 끼고 문가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아기가 가주가 되려면 최소한 십오 년에서 이십 년은 지나야 한다.
그의 입가에도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이십 년이면 강산이 두 번은 변할 시간이었다. 미래가 어찌 될지는 몰라도, 그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 * *
무림맹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무림맹주였던 혁련위진이 토벌대에 참가해서 사망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
그리고 변화의 중심에는 전前 순찰대원 적세인이 있었다. 그녀는 의룡패를 높이 들어 정의와 질서의 관철을 목표로 지금까지 그저 묵묵히 명령에만 따르던 무림맹원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았다.
무림맹의 수뇌부를 구성하는 각 방파의 원로들은 처음엔 그냥 무림맹을 탈퇴해버리겠다는 협박으로 그 목소리를 흩어버리려 했다. 그러나 그 의룡패와 적세인의 뒤에 황군의 은근한 지지가 있다는 걸 깨닫고부터는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적세인은 이제 순찰대원이 아니었다. 그녀는 최연소 무림맹주로서 무림의 분쟁을 조정하고 악랄한 악인들을 추적하는 데 앞장섰다.
누군가는 그런 변화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적어도 그 변화의 바탕에 이 신대륙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 한다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했다.
그녀는 당장은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젊었고, 앞으로 계속 더 바꿔나가면 그만이었다.
* * *
동부가 개척되기 시작했다.
고원성 너머로 드넓은 목초지와 기름진 땅이 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땅을 위해 몰려갔다. 그리고 원래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한 때 마궁의 노예로 부림 당하던, 그러나 그들은 남부에서 올라온 동족의 도움으로 이전의 비참한 삶을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중원인, 노예 출신 원주민, 동남부 원주민이 뒤섞여 오만가지 잡음이 쏟아져 나왔다. 자연스레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들이 나타났고, 반대로 그들을 막기 위해 싸우는 자들도 나타났다.
황군은 현재 신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지만 당장 주둔하고 있는 병력으로는 모든 곳을 다스릴 수 없었다. 황군이 무림맹을 지원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고, 그래서 동부에서도 비슷한 지원이 이어졌다.
동부 무림맹의 탄생이었다.
* * *
유설은 신대륙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동안 하와이 태수를 최고 지휘관으로 두었었는데, 이번 마궁의 사태를 기점으로 더는 그렇게 방치할 수만은 없다는 걸 황실이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신대륙의 식자가 불리는 이들은 모두 그 사태를 심각하게 보았다. 본격적인 한 제국의 신대륙 통치가 이어지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서부 무림맹과 동부 무림맹을 앞세워 신대륙의 법과 질서를 세우는 정도만 신경 쓰고, 대부분의 경우 신사천에서 빈둥거리기 바빴다.
훗날 역사가들은 신대륙 무림이 자생할 수 있었던 시작에는 그런 유설 총독의 방치가 있었던 덕분이라 평했다. 그녀가 들었다면 자신의 손으로 신 무림을 만들었다며 오히려 좋아했을 소리였다.
진하는 그런 유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한숨만 늘었다.
* * *
부족 연합은 많은 사람이 고원성에 남긴 했지만, 결국 연합을 해체하고 다시 동부로 흩어졌다. 옛 삶을 그리워하던 자들은 다시 초원에서 그 삶을 그렸고, 새로운 삶을 반기던 자들은 고원성과 남강성 등 동부의 도시들을 향했다.
대전사 미쳐 날뛰는 말과 주술사 흐르는 뼈는 옛 삶으로 되돌아간 쪽이었다. 그들은 드넓은 초원에서 들소와 함께 여생을 살아갔다.
* * *
비랑과 적풍은 계곡으로 되돌아왔다. 비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외눈 구름에게 부족의 주술사 자리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주술사임에도 자주 멀리 있는 신사천까지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건 외눈 구름이 남긴 유언 때문이었다.
“전통이고 나발이고, 고작 그런 낡은 규칙 때문에 사랑을 포기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난 네가 언제쯤 그딴 규칙 갈아버리자고 말할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끝끝내 네가 하질 않으니 결국 내가 해야겠지. 자, 네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뿐이다. 네 뿌리가 이곳임을 잊지 않는 것. 나머지는 훌훌 털어버리거라.”
그녀는 그 유언을 잘 따랐다. 그건 뿌리를 잊지 않고 부족의 주술사로서 살아가면서, 가끔 신사천에서 제자를 키우고 있는 누군가를 찾아가 만나는 것이었다. 때때로 그 누군가가 이쪽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 * *
암룡삼호 소향은 암룡대주가 되었다. 암룡대주는 하와이에서 신입 암룡대원을 육성하는 자리였다.
그녀는 가끔 동쪽 바다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 * *
양굉은 암룡대를 관뒀다. 애초에 소향의 재량으로 고용되었던 객원이라 아는 것이 적어 관두는 게 어렵진 않았다.
대신 그는 이전부터 대륙 객잔 여기저기에 깔아두었던 소식통을 기반으로 정보를 취급하는 방파를 만들었다. 간단하게는 어느 도시에서 벌어진 소동부터, 깊게는 누군가의 비밀까지. 암룡대로 활동한 경험과 항룡십팔장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그 장법을 가르쳐준 사람에게 방파의 이름을 부탁했다.
“에라이 시발··· 개방이 뭐야, 개방이. 거지 방파라고? 차라리 욕을 할 것이지···”
하지만 딱히 다른 이름이 있던 것도 아니라, 양굉은 그냥 방파의 이름을 개방이라 하기로 했다. 이름이 천하면 오래간다는 말도 그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그렇게 초대 개방 방주 양굉이 되었다.
* * *
큼직한 범선이 바람을 타고 바다를 나아가고 있었다.
그 배의 갑판에는 건장한 선원들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배를 운용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 여유로워 보였고, 대충대충 하는 것처럼 보이는 동작도 모두 고도로 숙달된 숙련자의 손놀림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건장한 덩치에 검은 피부를 가진 한 남자는 바빠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갑판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뭔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허리에는 굉장히 화려한 칼집과 곡도가 매여 있었다.
배를 둘러보던 선장 쿠르텐은 갑판장이라는 놈이 그렇게 구석에서 농땡이를 피우는 것을 보고는 대뜸 아논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아논은 악 소리를 내며 보고 있던 책을 떨어뜨리고 정수리를 부여잡았다.
“으악! 너무 아프다, 선장! 머리 깨진 거 같다!”
“그렇게 세게 때리진 않았어.”
짧게 핀잔을 준 쿠르텐은 아논이 떨어뜨린 책을 주워 들었다. 그 표지에는 중원어로 ‘무명협無名俠’이라 적혀 있었다.
“그··· 지난번에 감산성에서 챙겨온 거다. 무지 재밌다···”
“갑판장이라는 놈이 대낮에 일은 안 하고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 발에 포탄 묶여서 바다에 잠수하고 싶나, 아논?”
깜짝 놀란 아논은 얼른 부하들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자, 잘못했다, 선장! 일하겠다!”
그런 아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고개를 가로저었던 쿠르텐의 시선은 곧 손에 들린 책으로 향했다.
그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름 없는 협객이 이름이라. 재밌군.”
그녀는 그 책을 툭툭 털어내고는 품에 집어넣었다. 멀리서 이쪽을 훔쳐보던 아논이 탄식을 흘리는 게 보였다. 쿠르텐은 그에 신경 쓰지 않고 키를 잡았다.
그녀의 손길에 범선이 급격히 방향을 바꿨다. 갑판에서 움직이던 선원들이 그런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자신들의 선장을 바라보았다.
선장 쿠르텐은 말없이 손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그 손길을 따라 움직인 선원들의 시선에 먼 바다에서 몰려오는 먹구름과 폭풍이 보였다. 다시 선원들의 눈이 선장을 향했다.
그녀는 짧게 말했다.
“가자, 저 너머로.”
다음 순간 선원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돛이 올라가며 밧줄 당기는 소리가 갑판을 울리고, 뭔가 넘어지고 쏟아지며 우당탕탕하는 소란도 일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들 모두의 마음은 이미 저 너머를 그리고 있었다.
그들의 범선은 그렇게 폭풍 너머의 새로운 바다를 기대하며, 두려움 없이 나아갔다.
* * *
상기된 모든 일이 일어나기 얼마 전. 신사천의 장가 상회에서는 한 소녀가 자기 방을 나서고 있었다.
그녀는 옷을 단단히 여며 입고 나와서는 거실을 향했다. 이 집의 안주인인 염 부인과 장연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 서하야. 오늘도 나가보려고?”
그녀가 조심스레 거실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자 낮잠 자는 아이들을 보며 차를 마시던 염 부인이 싱긋 웃으며 그리 말했다. 그녀 옆에 장연도 흐뭇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 서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얼굴을 보며 미소 짓던 염 부인은 한쪽 의자 위에 걸쳐놓았던 작은 괴나리봇짐을 내밀었다.
“간식이란다. 가서 출출하면 먹으렴.”
“감사합니다.”
서하는 봇짐을 끌어안고 감사 인사를 했고, 그 모습이 귀여웠던 장연은 괜히 그런 서하의 뺨을 한번 꼬집어주었다. 녀석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염 부인은 서하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얼른 그녀를 문 쪽으로 가볍게 밀어주었다. 서하는 자연스럽게 거실을 나오며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뒤에서 서하 볼살을 더 꼬집어주고 싶다는 장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실을 나온 서하는 봇짐을 등에 메고는 마당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단상운과 진견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둘이 그렇게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장운의 설명대로라면 둘 다 실력이 고만고만한지라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실제로 장운은 둘 모두를 상대로 압도적인 바둑 실력을 보이는지라 두 사람은 고만고만하다는 말에 아무런 반박을 못 했다.
먼저 돌을 둔 단상운이 먼저 서하를 발견했다.
“오늘도 나가니?”
“네.”
“그래, 잘 다녀오렴. 혹여나 모르는 사람이 따라오라거나 하면 절대 따라가지 말고.”
“네.”
돌을 두느라 조금 늦은 진견이 손안에서 염주를 굴리며 말했다.
“아미타불, 오늘도 나가느냐? 그럼 혹여나 모르는 사람이 따라오라거나···”
“그건 제가 한 말이잖습니까, 스님.”
“아, 그렇, 크흠, 큼큼. 이거 바둑에 집중하다 보니···”
단상운은 하하 웃었고, 진견은 무안한 표정으로 연신 염주를 굴렸다. 진견이 장가 상회에 머물면서 두 사람은 꽤나 친해졌다. 서하는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미타불,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고.”
서하는 꾸벅 인사하고는 상회를 나섰다.
신사천의 복잡한 거리가 소녀 앞에 펼쳐졌다. 거리라는 한 공간에 가득 찬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며 복잡다양한 궤적을 그렸다. 서하는 잠시 가만 서서 그 혼란스러운 선과 선의 선형들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불쑥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소녀는 그 속에서 자신만의 곡선과 원을 그리며 흐름에 몸을 맡겼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렸을 땐 벌써 거리를 통과한 후였다. 두 눈을 깜빡거리던 서하는 곧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그 걸음은 신사천의 거리를 지나고 외곽을 빠져나가는 동안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도시를 빠져나온 서하는 곧 신사천과 그 해안가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에 올라섰다.
하지만 서하의 눈은 그 도시와 바다를 향하지 않았다. 녀석의 눈은 정반대, 그러니까 동쪽 내륙을 향하고 있었다. 잠시 등 뒤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내륙을 바라보던 녀석은 곧 그 자리에 풀썩 앉아서 염 부인이 챙겨준 간식을 꺼내 들었다. 만두였다.
서하는 자기 얼굴의 반만 한 만두를 오물거리며 동쪽을 바라보았다. 한 번쯤 시원한 서쪽 풍경을 볼 법도 한데, 녀석은 그쪽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잠시 후 간식을 다 먹은 녀석은 손을 탈탈 털어내고 이내 가만히 멍을 때렸다. 그렇게 동쪽 땅과 하늘을 바라보길 한참. 문득 정신을 차린 서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가볍게 팔다리를 풀었다. 그리고는 더없이 진지한 태도와 움직임으로 태극권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서하의 태극권은 아주 느릿하면서도 면면부절 이어져 끊어짐 한번 없었다. 또한 어느 순간부터는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자연스럽게 그 팔과 다리를 따라 부드럽게 회전해 흘러갔다. 서하가 태극권을 배우기 시작한 기한을 생각하면 굉장한 성취였다.
수련이 이어지길 한참. 서하는 이마에서 땀방울 하나를 흘리며 수련을 마쳤다. 고개를 들어보니 벌써 태양이 수평선 가까이 붙어서 바다가 그 붉은 빛을 길게 늘여 반사하고 있었다.
태양을 보고 시간을 확인한 서하는 조금 늦었다는 생각에 얼른 봇짐을 챙겨 들었다. 만약 그녀가 늦는다면 당장에 장가 상회의 모든 어른이 신사천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할 터였다. 신사천 최대의 상회와 벼락을 부르는 젊은 은거 고수, 소림의 아라한 등등으로 이루어진 수색대는 신사천을 발칵 뒤집어놓을 수 있었다. 서하는 그런 관심이 조금 부담스러우면서도, 내심 기뻤다.
어쨌든 그렇게 얼른 언덕 아래로 달려가려던 서하를 문득 하늘의 구름 하나가 사로잡았다. 딱히 뭘 닮았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모양이었는데, 이상하게 서하의 눈을 사로잡았다. 서하는 자기도 모르게 가만 서서 그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해안에서 온 구름은 천천히 동쪽 하늘로 흘러갔다. 서하의 고개도 그 구름을 따라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였다. 서하는 언덕을 내려가던 걸 되짚어 다시 꼭대기로 올라섰다.
그리고 그렇게 언덕 위에 올라서자 저 멀리 동쪽 초원에서 느긋하게 걸어오는 사람과 말 한 쌍이 눈에 띄었다.
그들을 발견한 서하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초원에서 조조의 느긋한 움직임에 흔들거리던 장건도 곧 언덕 위에 선 서하를 발견했는지 안장 위에 늘어져 있던 몸을 바로 펴는 게 보였다.
곧 서하는 환하게 웃었다. 저 멀리 보이는 장건이, 메롱-하고 우스꽝스레 혀를 내민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자기 꼴이 우스웠던 장건도 크게 웃었다.
젊은 스승과 어린 제자는 그렇게 멀리서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완결입니다. 부족함 많았던 무림서부 장건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지난번 발리안의 이야기를 쓸 때도 그랬지만 찐 완결은 아닙니다. 써보고 싶은 외전이 조금 있어서요. 아마 본편과 조금 동떨어진 외전 한편과 본편 이후 약간 시간이 지난 후의 이야기를 쓰게 될 듯합니다. 너무 기대하진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길게 쓰진 않을 거라서요.
문득 제가 처음 무림서부를 보여드렸을 때 당시 피디님의 반응이 떠오르네요. 1화의 세계관 때려박기를 꼭 수정하길 바라셨는데. 하지만 제 나름대로는 최대한 빠르게 무림서부의 세상을 설명할 방법이라 여겨서 부득불 고집을 피웠었죠.
그 이후 참 예상치 못했던 많은 관심을 받은 것 같습니다. 사실 발리안의 이야기 이후 괜히 혼자 조급증에 걸려서 조금 급하게 시작한 글이었는데, 관심 가져주신 독자님들 덕분에 많은 힘을 얻고 글을 써나갈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후기에 써야지 했던 이야기가 많습니다. 하지만 타자를 치다보니 자꾸 이상한 소리만 쓰고 지우고 반복하고 있군요. 그러니 여기까지 해야겠습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독자님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제 글을 읽으시는 동안 잠시나마 행복하셨기를, 장건처럼 생긴 구름을 찾으려 한 번쯤 고개를 들어볼 작은 마음의 여유가 피어났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