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46)
진서하 외전 2화
* * *
덜컹거리는 열차의 소음이 승객 칸을 울렸다.
그러나 승객 칸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한참을 울린 그 소음에 어느새 익숙해진 것인지 흐린 차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자기들끼리 작은 잡담을 나눌 뿐이었다. 때때로 가까이 앉은 낯선 이와 인사를 나누고 즐겁게 웃는 모습도 보였다. 단순하게 여행 중인 사람부터 사업을 위해 먼 곳으로 떠나는 사람,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척이나 친인을 만나기 위해 탄 사람 등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환은 그들은 조금 부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열차 안이 소음과 잡담으로 가득한 가운데 그와 진서하, 노파가 앉은 자리는 끔찍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처음 열차를 탈 적에 인사를 나눈 것 말고는 그 세 사람 사이에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물론 그것을 정말 불편하게 여기는 것은 아무래도 이환뿐인 듯했다.
검 한 자루를 껴안고 삿갓으로 얼굴을 덮은 진서하는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간혹 덜컹거리는 열차의 움직임에 흔들거릴 뿐 별다른 기색이 없었고, 두건을 뒤집어쓴 노파 또한 좌석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 다른 이들과 특별히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진 않는 듯했다.
“에휴···”
그런 두 사람, 정확히는 진서하를 보며 이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꿰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자기가 생각해도 상대 얼굴 좀 예쁘다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남자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이환은 혼자 그렇게 우울을 삼키다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는 품을 뒤적거렸다. 그 품에서 작은 서책이 나왔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그리 두껍지 않은 서책. 겉장에는 ‘무명협 삼편’ 이라는 글자가 어울리지 않게 멋들어진 글자로 적혀 있었다. 그 후 이환은 이미 여러 번 읽어 꼬질꼬질한 책자를 다시 펼쳤다.
조금 전까지 우울감을 느끼던 것도 잠시. 이환은 곧 그 조그만 서책에 빠져들었다. 그가 서책에 집중하면서 마침내 그 자리에 앉은 사람 중 침묵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앉은 자리가 고요해진 와중에 열차는 두 차례 작은 간이역에서 잠시 멈췄다. 그 간이역이 목적지였던 승객이 내렸고, 새로운 승객이 타기도 했다. 중간중간 승무원이 돌아다니며 몇몇 사람의 표를 확인할 때도 있었다.
이환은 소설책에 집중한 와중에도 열차가 멈출 때마다 고개를 길게 빼 주변을 둘러보았다. 열차를 탄 것이 처음이라던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열차가 멈추고 달릴 때마다 신기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간이역에서 출발하고 한참이 지났을 때였다.
“으흑···”
갑자기 진서하와 이환 앞자리에 앉아있던 노파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소설책을 보던 이환이 그 소리에 깜짝 놀라서 노파의 어깨를 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괜찮으세요?”
“끄흐으···”
노파는 부들부들 떨면서 몸을 더 둥글게 웅크렸다.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게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거기에 이환의 손길이 닿자 노파는 더 크게 버둥거리기까지 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가 아프신···”
그 순간 이환은 뭔가를 보고 놀라서 움찔 굳었다. 버둥거리는 와중에 노파의 얼굴이 얼핏 보였는데, 마치 헛것이라도 보이듯 그녀의 얼굴 위로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이 휙휙 스쳐 지나간 탓이었다.
“아니···”
이환이 이상한 것을 보고 당혹스러워 중얼거리는 그때, 그의 옆에서 불쑥 누군가의 손이 파고들어 노파의 반대쪽 어깨를 잡았다. 그 손을 본 이환이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지금까지 삿갓을 풀 눌러쓰고 있던 진서하가 그 삿갓을 목 뒤로 젖혀놓고는 노파의 몸을 잡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제대로 잡으세요.”
“에, 예?”
이환의 맹한 대답에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상태를 살펴야 하니 몸이 움직이지 않도록 제대로 잡으라고요.”
“아, 예.”
다행히 그는 대답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 곧바로 노파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고, 그의 팔뚝이 옷 위로 뚜렷이 드러날 정도로 크게 부풀며 노파의 버둥거림이 멈췄다.
그걸 보며 진서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단순히 이 남자 팔이 참 굵구나,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렇게 힘을 주고 나서야 움직임이 멈춘 노파 때문이었다.
이환이 무공을 익혔다는 것은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진서하는 스승에게서 많은 수련을 받았고, 그중에는 안법眼法에 대한 깊은 수련도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 걷고, 서고, 앉아있는 모습에서 어느 정도 그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안법의 고수였다.
그리고 그 보는 법에 의하면 지금 이 노파는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팔척장신에 우락부락한 몸집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니 지금 건장한 이환이 이를 악물고 힘을 주어야 하는 상황이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진서하는 곧바로 노파의 두건, 로브, 뭐라고 부르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휙 벗겼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아흐윽···”
눈을 뒤로 까뒤집은 채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리고 있는 사람은 그녀가 열차에 탔을 적 보았던 노파가 아니었다. 머리칼이 눈처럼 새하얗기는 했다. 하지만 그 아래 드러난 얼굴은 이제 기껏해야 열다섯이나 되었을까 싶은 소녀였다.
“이게 무슨···”
그 얼굴을 본 이환도 당혹스러운 소리를 냈다. 조금 전 헛것처럼 보이던 것도 그렇고, 지금 보이는 소녀의 얼굴도 참 평범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하얀 머리칼의 소녀 왼쪽 얼굴에는 기묘한 모양의 문신을 빼곡히 새겨져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진서하는 곧 평정을 되찾았다. 기이한 일이긴 했으나 어쨌든 당장 눈앞에 고통에 겨워 정신 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소녀의 왼팔을 붙잡고 반대쪽 손으로는 목의 혈맥을 짚었다. 곧 그녀의 손에 소녀의 기맥이 잡혔다.
“끄흐으으···”
그 와중에도 소녀는 입에서 하얀 거품을 흘리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다른 승객들도 그들의 소란에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당연히 칸을 오가던 승무원이 그 소란을 보는 건 당연했다.
“거기, 무슨 일 있소?”
승무원 하나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를 본 이환은 자기도 모르게 진서하를 돌아보았다가, 그녀가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얼른 외쳤다.
“환자입니다! 지금 이분이 맥을 살피고 있습니다!”
“뭐요? 환자?”
놀란 승무원이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왔다. 다른 승객들도 무슨 일인가-하는 표정으로 좌석 너머로 이쪽을 훔쳐보았다.
다가온 승무원은 눈이 뒤로 돌아간 소녀와 그녀를 붙잡고 눈을 감은 진서하를 보고는 곤란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이런. 다음 역까지는 한참 걸리는데···”
그때 진서하가 소녀의 몸에서 손을 떼며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이를 악물고 고통에 겨워하던 소녀도 한결 나아진 모습으로 추욱 처졌다.
이환이 그걸 보고 반색했다.
“괜찮아진 겁니까?”
“···일단은요.”
진서하의 표정은 묘했다. 하지만 이환은 한결 나아진 소녀의 모습에 기뻐하느라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베게 삼아 소녀를 좌석에 눕혔다.
승무원이 그런 모습을 보며 어리둥절하다는 듯 진서하에게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이오?”
“···기혈에 쌓인 탁기가 발작하기에 내공으로 진정시켰어요.”
승무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공으로? 이거 대단한 분이셨군요.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남이 다치지 않도록 내력을 투사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닌데···”
진서하는 승무원의 감탄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때 누워있던 소녀가 눈을 떴다. 깊은 심해처럼 파란 눈이었다.
소녀는 멍한 표정으로 숨을 고르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 모습을 이환과 진서하, 승무원과 어느새 다가온 승객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환이 말했다.
“괜찮니?”
소녀는 이환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리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엇!”
“아야!”
덕분에 소녀와 이환이 부딪쳤다. 그는 코를 부여잡으며 몸을 뒤로 젖혔고 소녀도 양손으로 이마를 붙잡고 끙끙거렸다. 승무원과 승객들이 난데없는 그 모습을 보고 허허 웃었다.
하지만 소녀는 웃지 않았다. 이마를 마구 비비던 그녀는 더없이 다급한 표정으로 번뜩 고개를 들었다.
[안 돼! 벌써 여기까지 쫓아오다니!]이 열차는 동부의 우애성에서 출발했기에 승무원은 물론이고 승객 중에도 그 로마 말을 알아들을 사람이 몇몇 있었다.
자연스레 승무원의 표정이 굳었다. 그의 일은 표 없이 열차에 타는 사람을 막고 승객들의 안전과 편안함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런 입장에선 뭐가 쫓아오니 어쩌니 하는 말이 그 승객 입에서 나온다는 건 당연히 뭔가 수상한 일이었다.
또한 소리를 친 소녀는 대뜸 좌석 위로 일어나 서며 경계 어린 눈빛으로 사방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기까지 했다. 마치 새끼 야수가 구석에 몰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당황한 가운데 굳은 표정의 승무원이 입을 열었다.
“혹 저 소녀와 일행이시오?”
이환은 그 말이 자신과 진서하를 향한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자연스레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깜짝 놀랐는데, 지금까지 삿갓과 상황에 가려 제대로 보지 못했던 그녀의 두 눈이 지금 저 하얀 머리 소녀처럼 짙은 푸른색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예. 내 조카예요.”
“이 아이는 로마 쪽 아이인 듯한데 무슨···”
진서하의 대꾸에 얼토당토않은 소리 말라 하려던 승무원도 그녀와 소녀의 눈이 같은 색인 것을 보고는 묘한 표정이 되었다.
“···표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진서하는 자신의 표를 꺼내 내밀었다. 승무원은 그를 확인하고 말했다.
“이건 일인용이군요. 저 소녀의 것은?”
그 말에 진서하가 곤란하다는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구석으로 파고들어 정신없이 눈알을 굴리던 소녀는 그 시선을 느끼고 진서하의 푸른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는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멍한 표정이 되었다.
“표, 가지고 있니?”
소녀의 눈을 마주한 진서하가 힘주어 말했다. 그러자 소녀는 불안한 눈으로 사람들을 돌아보다가 천천히 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 손에서 열차표가 나왔다.
“흐음··· 뭐, 좋습니다. 일단 두 분 다 표는 있으시군요. 그럼 굳이 더 캐묻진 않겠습니다.”
표를 확인한 승무원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킁-하고 콧김을 불더니 뒤로 조금 물러서며 말을 이었다.
“이제 더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얌전히들 계십시오. 더 시끄러워지면 다음 역에서 무림맹 사람들을 호출할 수밖에 없-”
그 순간 열차의 앞쪽에서 삐-삐-하는 기적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을 하던 승무원은 그 소리를 듣고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어서 잠깐의 사이를 두고 다시 한번 기적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승무원인 잔뜩 굳은 표정으로 몸을 돌리며 사람들에게 외쳤다.
“다들 자리에 앉으시오!”
“뭐, 뭐요? 무슨 일 있수?”
“얌전히 자리에 앉으시오!”
승객 중 누군가 물었지만 승무원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를 자리에 앉히고는 성큼성큼 앞쪽 객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승무원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던 이환은 문득 흐린 창밖에 뭔가 움직이고 있는 걸 보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창가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확인했다.
들판 위에서 검은 말들이 기수도 없이 달리고 있었다.
“저건 또 무슨···”
정확히는 제일 앞에서 달리는 말에만 기수가 있었다. 그들을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이환은 곧 열차의 속도가 굉장히 줄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때문에 말들이 열차와 비슷한 속도로 달리고 있는 듯했다.
“다들 자리에 앉아 계시오!”
마찬가지로 열차의 속도가 줄었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승객 칸을 가로지르던 승무원이 엄중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때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승무원이 다가가던 문이 벌컥 열렸다. 거기 서 있는 이를 본 승무원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네놈들은 뭐 하는 놈들이-”
승무원은 말은 맺어지지 못했다. 그는 무슨 줄에 묶여 뒤로 끌려가듯 승객 칸을 쭉 가로질러 진서하와 이환의 좌석까지 날아와 우당탕 소리를 냈다. 이환이 깜짝 놀라 나가떨어진 승무원을 바라보았다.
이미 숨이 끊어진 그의 가슴팍에 기이한 쇳덩이가 박혀 있었다. 세 갈래 칼날이 세 방향으로 돋아있는 쇳덩이. 그 쇳덩이 끝에는 굵은 사슬에 엮여 있었다. 이환의 눈이 자연스레 사슬을 따라갔다.
“킁.”
콧김을 뿜는 거구의 대머리 남자가 보였다. 그는 몸에 검은 피풍의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언 듯 검은 갑주가 번뜩이는 게 보였다.
사슬의 몸은 그의 오른쪽 팔로 이어져 있었다. 그가 오른 어깨를 까딱거리자 승무원의 시체에 박혀 있던 쇳덩이가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에게 끌려갔다. 칼날이 박혀 있던 시체는 조금 끌려가다가 칼날이 빠지며 널브러졌다.
그 흉악한 모습에 소란스럽던 승객 칸은 정적에 빠졌다. 그리고 쇳덩이를 회수한 대머리 남자의 입이 열렸다.
[더 도망칠 생각 마라, 알리사! 그렇게 운명을 피해 달아나 봐야 네 탓에 사람들만 다칠 뿐이다!]그의 눈은 정확히 하얀 머리 소녀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