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48)
진서하 외전 4화
* * *
열차에서 우르르 도망쳐 나온 승객들이 적당히 멀어진 것을 본 제규상은 슬그머니 쓰고 있던 복면을 내렸다. 그리고는 품에서 은으로 된 갑을 꺼냈다. 그건 미리 말아둔 연초를 담는 보관 용품이었다.
“흐음.”
그는 연초 하나를 입에 물고 화섭통으로 불을 붙였다. 희뿌연 연기가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래, 기어코 도적질까지 하게 되는군··· 빌어먹을.”
연기를 뱉던 제규상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도 나름 과거를 가진 남자였다. 오직 가문의 영광을 위해 삶을 바치던 나날. 그러나 그 헌신은 인정받지 못했다.
분명 어둠 속에서 누구보다 가문을 위했다고 믿었는데 정작 그 헌신의 대상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엿 같군.”
최근 심해진 감상에 제규상은 혼자 중얼거리며 낄낄 웃었다. 고삐를 잡혀 그의 주변에 모여있는 말들이 그 웃음소리에 푸르륵 거리며 투레질을 했다.
“가만히 있어라.”
간이역을 장악하고 몰래 열차에 숨어든다는 계획은 그가 세웠다. 이후 열차를 세우고 목표를 확보해 중간지점에서 대기하던 말을 타고 도망치는 것까지 모두 제규상의 머리에서 나왔다. 사실 이런 계획은 장가상회의 열차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의 머릿속에 있었다. 물론 그때의 목표는 그저 승객들의 재물을 강탈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열차를 털어먹는다는 계획 자체는 예전부터 있었다.
아마 그처럼 열차 강도를 계획하는 자들이 한둘은 아닐 것이다. 단순한 도적놈들부터 장가상회의 적들, 혹은 어둠 속에서 그저 사건을 이용하고 싶은 자들까지. 하지만 정작 제일 먼저 그 계획을 실행한 것이 한낱 우애성의 낭인이라는 게 우스웠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낄낄 웃던 제규상은 문득 표정을 바꿔 눈살을 찌푸리곤 그렇게 중얼거렸다.
열차가 멈추고 승객들은 도망쳤다. 승무원들이 무공을 익히긴 했으나 저 티폰의 아이들이라는 자들도 보통 수준의 무사들이 아니었다. 거기에 제일 위협적인 것은 그들이 쓰는 기이한 술법이었다. 제규상 본인도 처음 그 술법과 마주했을 때 잠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당연히 지금쯤 열차 장악이 끝났어야 했다.
물론 그도 조금 전 짐칸 쪽으로 날아간 대머리는 보았다. 그쪽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는 것도 잘 들렸다. 하지만 열차에 숨어든 인원은 그 대머리 하나가 아니었다. 제규상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모두 저기에 숨어든 것이다.
그때 저쪽 객차에서 우르르 몰려오는 흑의인들이 보였다.
“···승무원들 반항이 좀 거셌던 모양이군.”
제규상은 옆으로 퉤-침을 뱉으며 다시 연초를 물었다.
어쨌든 완수금으로 받기로 했던 황금이 눈앞으로 다가온 기분이었다. 그동안 모은 돈과 이번 의뢰금을 합치면, 어쩌면 우애성 한쪽에 작은 상회 하나를 낼 수 있을지 몰랐다. 우애성은 한창 성장하고 있는 도시이니 그의 노후까지 잘 벌어먹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아예 서부의 천후성으로 떠날 수도 있었다. 새 출발을 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묘한 쌉싸름함을 느꼈다. 그건 연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때 와장창하는 소음과 함께 객차 안으로 들어갔던 흑의인이 창문을 박살 내며 밖으로 내팽개쳐졌다. 제규상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청히 그 꼴을 보았다.
그 흑의인이 시작이었다. 제규상의 눈에 객차 안에서 폭풍을 만난 연처럼 나뒹구는 흑의인들이 보였다. 박살 난 창문틀 너머로 그들을 날려버리는 여인도 보였다. 그녀의 움직임을 본 제규상의 머릿속에 경종이 땡땡땡 울렸다.
“저거···”
그녀의 움직임은 그에게 어떤 오래된 기억이 떠오르게 했다. 홀로 고대 세가와 맞서던 한 남자. 세 번의 비무, 세 번의 결판. 박살 난 고대 세가의 위명.
“···시발.”
제규상이 그 과거를 떠올리는 동안 짐칸 쪽에서 싸우던 대머리도 안쪽 객차로 나뒹구는 것이 보였다. 티폰의 아이들이니 뭐니 거만하게 지껄이던 로마 놈들이 고작 저 둘에게 탈탈 털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객차의 천장을 부수고 튀어나오는 자신의 고용주와 여인을 본 순간, 제규상은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이랴!”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그의 뒤로 주인 없이 묶인 말들이 우르르 뒤따랐다.
* * *
진서하는 열차 위로 날아간 습격자를 따라 올라왔다가 우르르 도망치는 말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통일된 복장이나 하는 행동으로 보아 실력은 차치하고도 규율은 잘 잡힌 자들로 보았는데, 냅다 도망치는 꼴을 보아하니 마냥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큭큭··· 바다 건너 기이한 전사들에 대해선 많이 들었지. 하지만 설마 그 순간에 반응할 줄은 몰랐군···]그때 기분 나쁘게 울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진서하는 곧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돌아서며 자세를 잡았다. 두 손은 중단에 두고, 오른발은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디며 뒷발에 무게 중심을 둔 자세. 좁은 열차 위에 올라 서 있음에도 묘하게 굳건한 자세였다.
그것을 마주한 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자는 다른 흑의인들처럼 시커먼 천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다른 것은 그 그림자처럼 검은 옷깃 사이에서 시퍼렇게 빛나는 두 눈이었다.
그 눈이 진서하의 눈과 마주쳤다.
[···아니?]흑의인은 진서하의 짙푸른 눈을 보고는 순간 당혹스럽다는 듯 멈칫거렸다. 물론 진서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상대의 그런 사소한 행동에 흔들릴 정도로 가벼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그 눈의 힘은 설마··· 이곳에도 무녀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애초에 저 나이까지 살 수 있을 리가···]잠시 당혹스러워하던 흑의인은 곧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이빨을 드러냈다.
[···직접 확인해보면 될 일이지. 일단 방해가 되는 그 팔다리부터 잘라주마.]흑의인의 몸을 가리고 있던 옷깃 사이에서 그의 두 팔이 나왔다. 그 양팔에서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솟은 것은 물론이었다. 진서하는 흔들림 없는 자세와 고요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열차 전체가 덜컹-하는 소리를 내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앞에 기관실에서 삐이-하는 기적소리까지 울렸다.
그러나 객차 지붕 위에 올라선 진서하와 흑의인은 서로를 노려보며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진 소저! 열차가 움직이고 있소!”
흑의인과 진서하가 나온 객차의 천장 구멍은 지금 그녀의 등 뒤에 있었다. 거기서 빼꼼 이환의 얼굴이 올라와 그렇게 외쳤다.
“앞으로 이동하라고 했잖아요. 가서 상황을 살펴봐요.”
진서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잠시 눈을 끔뻑거리던 이환의 얼굴은 곧 ‘아, 그랬지-’하며 다시 안으로 쑥 사라졌다. 곧 그와 소녀가 앞쪽 객차로 움직이는 기척이 있었다.
열차는 금세 빨라져 갔다. 척척척-하는 소리를 내며 쇠바퀴가 돌아갔다. 곧 열차 위에 선 진서하와 흑의인에게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치렁치렁한 흑의인의 로브와 진서하의 옷깃이 그 바람에 흩날려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흑의인의 로브가 와락 진서하를 향해 날아왔다. 검은 포대기가 활짝 펼쳐져 그녀의 전면을 가렸다.
단번에 차단된 시야에 당황할 법도 한데 진서하는 그 로브가 자신을 덮치는 동안에도 침착하게 뒤로 한 발짝 물러설 뿐이었다. 직후 흑의인은 곧장 따라붙어 그 넓게 펼쳐진 로브 위로 칼날을 찔러넣었다. 그 예리한 칼날에 검은 모직이 사-악 갈라졌다.
흑의인의 눈이 커졌다. 칼날 끝에 닿는 느낌이 없었다. 동시에 그의 양손이 쑥 파고들었던 로브가 저 혼자 살아있는 것처럼 팔을 휘감아오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마술-]검은 로브가 휘리릭 그의 양팔을 휘감으며 가려졌던 진서하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의 왼손은 로브에 휘감긴 흑의인의 양팔을 붙잡고 있었고, 오른손은 허리춤에 있었다. 흑의인은 어째선지 그게 마치 석궁에 걸린 화살 같다고 느꼈다.
그 짐작이 맞았다는 듯 쭉 당겨져 있던 그녀의 오른손이 번뜩 흑의인의 가슴팍에 꽂혔다. 그는 퉁-하는 소리와 함께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진서하는 뒤로 뺐던 오른발을 다시 앞으로 내밀며 처음과 같은 자세로 돌아갔다. 열차가 속도를 올리며 점점 거세지는 바람에 그녀의 머리칼은 흩날렸지만, 그 발과 손은 굳건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봐줄 것 없이 내력을 담아 후려쳤는데 손끝에 느낌이 이상했다.
그녀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뒤로 쭉 밀려났던 흑의인이 스윽 고개를 들었다.
[···신기한 손이군. 평범한 자라면 내장이 파괴되었겠어.]그의 퍼렇던 두 눈이 붉게 변해 있었다. 그 눈에서 음산한 기운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를 본 진서하의 눈이 조금 더 찌푸려지는 가운데, 곧 흑의인의 온몸에서 시커먼 안개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몸이 천천히 위로 떠올랐다. 마치 그 검은 안개가 그의 몸을 지탱해 올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런 낯선 땅에서, 로마의 군단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닌데 티폰의 힘을 쓸 줄은 몰랐군.]그의 몸을 띄워 올리던 검은 안개가 진하게 뭉쳤다. 그건 언 듯 뱀처럼 보였고, 덕분에 흑의인은 마치 뱀의 하체를 가진 반인반수처럼 보였다. 놀라운 광경에 침착하던 진서하의 입마저 살짝 벌어졌다.
[네년이 가진 그 힘의 비밀도 함께 알아봐야겠구나.]그렇게 말한 흑의인의 몸이 쭉 진서하를 향해 쭉 쏘아졌다. 진서하는 그걸 받아치기보단 옆으로 몸을 피했다. 흑의인의 몸이 열차 천장을 부수고 들어가며 와장창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
옆으로 몸을 날린 진서하는 그대로 떨어질 듯했다. 그러나 그녀가 완전히 열차에서 멀어지기 직전 그녀의 발이 열차 지붕 위를 콕 찍었고, 그녀는 그 발끝을 중심으로 둥글게 돌아 다시 열차 지붕으로 돌아왔다.
무림인이 거기 있었다면 그 놀라운 경신법에 감탄을 터트렸겠지만 유일한 목격자인 흑의인에겐 그런 눈이 없었다.
[이리 와라!]흑의인은 감탄은커녕 곧바로 진서하를 향해 덤벼들었다. 그의 몸에 걸린 열차의 벽이 수숫대처럼 박살 났다.
그를 마주한 진서하는 조금 전 굳건하던 모습과는 반대로 이번엔 낙엽이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가볍게 툭툭 뛰어 열차의 지붕 위로 달렸다.
뱀의 하체를 가진 흑의인은 그 몸뚱이로 열차를 부수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건 마치 저 혼자 살아 움직이는 검은 실과 바늘이 제멋대로 열차를 꿰어가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흑의인이 부수는 것이 대부분 객차의 윗부분이라 열차가 멈추지도 않았다.
진서하는 눈썹이 휘날리는 속도의 열차 위에서 꽁무니에 기괴한 움직임으로 움직이는 흑의인을 두고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객차가 네 칸쯤 부서진 순간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는 걸 느꼈다. 이렇게 계속 앞으로 가면 결국 기관실에 도달할 것이고, 그 와중에 하얀 머리 소녀도 다칠 수 있었다.
그녀는 훌쩍 앞으로 뛰어 공중제비를 돌아 흑의인을 마주 보며 내려앉았다. 그녀를 본 흑의인이 웃었다.
[하하하! 어쩌겠다고? 그 손으로 또 날 칠 건가? 그 전에 내가 네년을 이 괴상한 마차 바닥에 내려 꽂아주마!]진서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로마의 말을 잘 몰랐고, 그래서 여태 저 흑의인이 떠들어대던 말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사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날아오는 흑의인을 노려보며 심호흡하다가, 등 뒤의 검 손잡이를 잡았다.
다음 순간 섬뜩한 살기가 열차 위 공간을 집어삼켰다.
[컥-!]진서하를 향해 날아가던 흑의인이 본 것은 그저 뭔가 번뜩이는 것뿐이었다. 무엇인가 그의 몸을 사선으로 스쳐 지나갔고, 그게 뭔지 생각해볼 즈음엔 이미 그의 숨이 끊어진 후였다.
둘로 나뉜 흑의인의 시체가 후두둑 열차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