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49)
진서하 외전 5화
“흐읏···”
흑의인의 잔해가 열차 아래로 멀어져가는 동안 진서하는 지붕 위에 주저앉았다. 잠깐 사이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동시에 그녀의 푸른 두 눈에서 검붉은 살기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녀의 손이 등 뒤의 검 손잡이를 부서질 듯 움켜쥐고 있었다.
“···흐읍, 후우, 후-”
그녀는 잠시 후 천천히 심호흡하며 검을 놓았다. 그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렇게 들끓는 살기를 가라앉히며 자연스럽게 그녀는 자신의 스승을 떠올렸다.
그녀의 스승은 대종사大宗師라고 불려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무인이었다. 한 사람이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무공과 무리武理를 창시하고 홀로 그것을 발전시킨 무의 화신. 어릴 적 그에게 무공을 배우며 그녀는 가끔 그가 어디 별세계에서 온 사람은 아닐까 의심한 적도 있었다. 당연히 자신이 그 무공을 다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적잖았다.
다행히 그녀가 가진 재능도 작지 않아 처음엔 그런 스승의 무공을 큰 무리 없이 배워나갈 수 있었다. 당시 주변인들은 그녀의 그런 재능을 악마적이라고 말하기도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저 남이 만든 것을 받기만 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어느 경지에 이른 순간부터 그녀는 검을 쥐는 걸 두려워하게 되었다. 날이 선 진검을 쥔 순간 세상의 살아있는 모든 것을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과 어둡게 들끓는 분노에 휩싸였기 때문이었다.
스승은 그것을 아주 간단히 진단했다. 본래 그녀가 가지고 있던 체질과 너무 빨리 성장한 무공이 문제라고. 진단만큼이나 해결책도 간단했다. 그런 살기마저 이겨낼 정도로 강해지면 된다고. 그리고 그런 강함을 얻기 위해선 세상을 보아야 한다고.
오 년 전 그녀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후우-”
호흡을 가라앉힌 진서하는 천천히 일어섰다. 달리는 열차 위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길게 흩날렸다. 그녀의 짙은 눈 안에 철로 옆 드넓게 펼쳐진 푸른 언덕들과 숲을 담겼다.
지난 몇 년의 세월이 헛되진 않았는지 이제 잠깐 정도는 검을 뽑을 수 있었다. 검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진정한 신검합일身劍合一과, 그를 통해 별을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무공의 길은 그 너머로도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그래서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그녀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스승은 그녀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런 스승을 믿었다. 조급할 이유가 없었다.
잠시 열차 위에서 풍경을 바라보던 진서하는 곧 흑의인이 상단 개방형으로 만들어 놓은 열차 안으로 내려섰다.
열차는 여전히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왜 한 번 멈췄던 열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한 것인지 의문을 느끼며 앞쪽 칸을 향해 나아갔다.
“음···”
그녀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다음 칸으로 넘어오니 죽은 승무원이 더 있었다. 그녀는 그 시신 앞에 멈춰서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그녀의 입이 짧은 염불을 외웠다.
이후 그다음 열차 칸으로 넘어와서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객차 문을 열자마자 이환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환이 말했다.
“어, 괜찮으십니까? 뒤쪽에서 뭔가 박살 나는 소리가 나서···”
“난 괜찮아요. 그리고 굳이 뒤로 가볼 필요는 없어요. 박살 난 게 맞으니까.”
“···예?”
진서하는 이환의 뒤쪽으로 시선을 넘겼다. 한쪽 좌석에 창백한 얼굴로 거친 숨을 내쉬는 승무원 하나가 보였다. 하얀 머리의 소녀는 그런 승무원의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진서하의 눈이 다시 이환에게 돌아왔다.
“어떻게 된 거죠?”
“그 로마인들에게 당했다고 합니다. 이후 승객들이 내려 도망친 걸 보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더군요. 상처가 심상치 않아서 더운 저쪽보단 나을까 싶어서 이리로 데려왔어요.”
“시동은 왜?”
“다음 역이 동무림맹이 있는 남강성이라 거기까지 달려가도록 할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보아하니 그 로마인은 열차를 다룰 줄 모르는 것 같고, 그래서 그냥 달려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답니다. 뭐랄까, 범죄자 직송 배달이랄까요.”
진서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승무원을 향해 다가갔다. 승무원의 손을 잡아주던 하얀 머리칼의 소녀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출혈이 멈추질 않아요. 이미 흘린 피도 많고요. 곧 완전히 기절할 거예요. 그리고 아마···]그녀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승무원에게 가까이 다가가 살폈다. 승무원은 푹 수그린 채 씩씩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다가 그 손길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아, 아가씨···?”
“날 아시나요?”
승무원은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진서하를 보고는 대번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저, 전 상팔이라고 합니다··· 신사천 본점에서 일했습죠···”
잠시 그 눈물 글썽이는 중년의 얼굴을 바라보던 진서하가 곧 살짝 웃었다.
“기억나요. 백부님이 괜히 괴롭히던 분이군요.”
“허허··· 괴롭히기는요. 그분 나름대로 애정을 보이신 게죠···”
상팔이라는 중년인은 허허 웃으면서 흐린 눈으로 진서하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군요··· 자, 잘 지내신 겁니까?”
“아저씨가 동부 사업을 위해 본점을 떠난 것이 십 년 전이니, 딱 그만큼 되었죠.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아저씨.”
진서하는 상팔에게 그리 대꾸해주며 조심스레 상처를 살폈다. 상팔은 그런 진서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지막 가는 길에··· 행수님을 뵙지 못하는 게 아쉬웠는데··· 이렇게 아가씨라도 만나니···”
상처를 살피던 진서하는 그 말에 상팔과 눈을 마주치고는 싱긋 웃었다. 그녀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모아 상팔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백부님은 직접 뵙는 게 좋겠군요.”
“예?”
다음 순간 그녀의 손이 푹푹푹 상팔의 상처 주변을 찔렀다. 옆으로 조금 물러나서 지켜보던 하얀 머리 소녀는 그걸 보고 기겁을 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그러면 상처가 터질···]“[걱정하지 마. 치료하는 거다.] 봉맥술, 혹은 점혈이라고도 하는 거지. 진 소저의 실력이 생각 이상인데.”
하얀 머리 소녀는 어느새 다가온 이환의 말을 듣고 맹하니 두 눈을 깜빡거렸다. 이환이 어설프게나마 라틴어를 하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보다 저렇게 손가락을 쑤셔넣는 행동을 치료라고 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진서하의 손가락은 빠르게 점혈을 마쳤다. 이후 그녀는 곧바로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 거기서 둥근 환약 하나를 덜어냈다. 그 환약은 곧장 상팔의 입으로 다가왔다.
“출혈은 잡았어도 이미 흘린 피는 당장 어쩔 수 없어요. 그나마 이 약이 내상에 좋으니 무리하지 않는다면 괜찮을 거예요.”
“오, 이건··· 설마 장 대인의···”
진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상팔은 냉큼 그 환약을 입으로 받아먹었다. 그는 환약의 쓴맛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웃었다.
“장 대인의 약은 알 사람은 다 아는 명약이지요···”
“실패한 물건도 많았어요. 양 삼촌이 그거 때문에 배탈이 자주 나셨죠.”
“감사합니다, 아가씨···”
진서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뭘요. 이제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녀의 손가락이 다시 한번 상팔의 몸 몇 군데를 찔렀다. 그러자 상팔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하얀 머리 소녀는 그걸 보고 움찔했다가, 그의 숨이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아리송한 표정이 되었다.
[대체··· 마술? 신대륙의 마술?]“[아니다, 로마 속임수. 다르다] 이건 무공이라는 거야.”
소녀는 옆에서 이환이 해준 말을 떠듬거리며 따라 했다.
“무, 무꽁?”
“무공.”
“···무공.”
이환이 씨익 웃었다.
“이거 중원 말 금방 배우겠는걸? 하지만 그 전에···”
다음 순간 웃음은 사라지고 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소녀는 어떤 예리한 칼날이 자신을 겨누고 있다고 느꼈다. 이환의 몸 어디에도 날붙이 하나 찾아볼 수 없었음에도.
이환은 그 칼날 같은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죄 없는 열차 승무원들이 죽어야 했는지, 그걸 좀 설명해 줘야겠는데.”
소녀는 이쪽 말을 몰랐지만, 그가 어떤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걸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때 어떤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소녀는 다시 움찔 놀라 옆을 올려다보았다. 진서하의 얼굴이 보였다.
“음, 진 소저.”
“너무 나무라지 말아요.”
이환은 눈에 힘을 풀며 말했다.
“···둘이 정말 아는 사이입니까?”
“아뇨. 열차에서 처음 만난 사이에요. 당신처럼.”
“그럼 진 소저도 그 아이 정체를 모른다는 말이시군요.”
“그래요. 아직 이름도 제대로 모르죠.”
진서하의 대꾸에 이환은 두 눈을 감았다.
“···진 소저. 그저 어리고 약해 보인다고 꼭 피해자이거나, 선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그런 약자들도 악해질 수 있고, 때때로는 그런 겉모습으로 남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물론 조금 전 검은 옷의 로마인들을 옹호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들은 막무가내 무뢰한에다 살인자들이었죠. 하지만 그들이 왜 그 소녀를 노렸는지는···”
“짐작 가는 게 있어요.”
진지하게 말하던 이환의 표정이 어설프게 변했다.
“···그, 그래요?”
“네.”
“그···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진서하는 감싸 안고 있던 소녀를 그대로 한쪽 좌석에 앉히고, 자신이 그 반대쪽에 앉았다. 그리고 소녀의 손을 붙잡은 채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말했다.
“진서하.”
“···진, 서하?”
소녀가 느릿하게 따라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었던 소녀의 표정이 조금 편해졌다. 소녀도 말했다.
“···알리사.”
“알리사, 알리사··· 그게 네 이름이구나.”
알리사는 그녀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짙푸른 눈 두 쌍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진서하가 말했다. 눈은 알리사를 보고 있었지만 이번엔 이환을 향한 말이었다.
“이 아이는 구음사혈九陰邪穴이에요.”
“예? 구음사혈이요?”
“아시나요?”
“···아뇨. 그게 뭡니까?”
그녀는 알리사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며 대답했다.
“그건 타고나는 어떤 체질이에요. 어릴 적 별다른 조치가 없다면 기혈에 탁한 음기가 쌓여 스물이 되기 전 죽는. 특이사항으로는 두 눈이 푸른빛을 띤다는 것과 사특한 술법이나 마공과 얽히면 굉장히 위험하다는 정도가 있죠.”
이환은 그녀가 저 알리사라는 소녀의 맥을 짚었음을 떠올리며 되물었다.
“사특한 술법이나 마공이요?”
“십오 년 전 마궁이 계획대로 구음사혈을 손에 넣었다면 오늘날 무림은 존재할 수 없었을 거예요. 황군이 토벌군을 결성하기도 전에 다 불타 없어졌겠죠. 그리고 그 불길은 중원과 그 너머 세계를 향했을 거고요.”
갑자기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에 이환은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 그런 건 어떻게 아십니까?”
진서하의 푸른 눈이 그를 향했다.
“나도 그 구음사혈이었으니까요.”
* * *
그의 눈에 저 멀리 철로를 따라 달려가는 열차가 보였다. 거센 연기를 내뿜으며 멀어지는 그 열차의 모습에는 육중한 열기와 묘한 멋이 있었다. 가능하다면 바다 건너 제국으로도 가져가고 싶은 물건이었다.
그때 그의 수하 하나가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다가왔다.
[도망치던 놈을 하나 잡았습니다. 티폰 족속들의 길잡이를 하던 놈인 듯합니다.]그는 멀리 열차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 ‘무림인’이라는 족속인가?] [정확히는 돈을 받고 일하는 용병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수하는 자기 상관이 그 용병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뒤쪽을 향해 까딱 손짓을 했다. 그처럼 갑옷을 입은 이들이 한 남자를 질질 끌고 와 꿇려 앉혔다.
힘없이 꿇어앉은 그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시발. 니들은 또 뭐냐?”
[라틴어를 할 줄 모르나?]남자, 제규상은 피식 웃었다.
“할 줄 알지. 근데 너흰 이쪽 말 모르잖아? 내가 왜-”
갑옷을 입은 자가 그 얼굴을 후려쳤다. 그는 쇠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제규상의 얼굴과 입은 대번에 찢어졌다. 그는 피 섞인 침을 뚝뚝 흘리며 중얼거렸다.
“···퉤. 시발. 이딴 일 처음부터 맡는 게 아니었는데.”
[라틴어를 알면 라틴어로 대답하도록. 이름이 뭐냐?]제규상은 그 갑옷을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제규상.”
[제규상? 흠. 네가 티폰의 아이들을 안내한 게 맞나?] [···그렇소.]갑옷은 제규상의 대답을 듣고 자신의 상관을 돌아보았다. 상관은 여전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규상도 그걸 보고 자연스럽게 그 상관이 바라보는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냥 구불구불한 지평선과 동산, 그리고 숲이 보일 뿐이었다.
“시발, 뭘 보고 있는 거야?”
그 중얼거림을 듣고 갑옷이 다시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번엔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연이은 주먹질이었다. 그의 갑주에 피가 튀었다.
[그만.]갑옷은 곧바로 물러났다. 그의 상관은 천천히 몸을 돌려 제규상을 내려다보았다. 눈앞에 불이 번쩍번쩍하던 제규상은 그 시선에 정수리가 찌릿찌릿한 느낌을 받았다. 상대는 고수, 아니 강자였다.
제규상은 애써 고개를 들었다. 강자고 나발이고, 일단 살려면 상대를 알아야 했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의 눈에 거구의 로마인 하나가 보였다. 사자 같은 머리칼과 수염을 가진 중년인.
“···시발.”
[입이 험하군, 무림인.] [···내 입이 험한데 그쪽이 뭐 보태줬소?]그 중년인의 입가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이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손에서 후두둑 황금 덩어리들이 떨어졌다.
[난 헥토르, 여기 이 유피테르의 아이들을 이끌고 있지. 네 업무의 연장을 의뢰하고 싶은데.]제규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황금색 격류가 휘몰아쳤다. 마치 노란 뇌전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