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5)
25화
양굉의 의미심장한 제안에도 장건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탁자에 올려놓은 손가락으로 톡톡 소리를 내며 동요 없는 차분한 눈으로 양굉을 바라보았다. 나름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던 양굉은 도리어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없는 그 시선에 점점 표정이 굳었다.
그는 결국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슬쩍 뒤로 빼며 술잔을 들어 마셨다. 그리고 후끈한 술기운을 후- 뱉어내며 말했다.
“좋다싫다 말이라도 좀 해보시오. 말 꺼낸 내가 다 무안하네.”
장건은 그의 겸연쩍은 표정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
“큼. 돈과 명분 모두 있는 일이지.”
“그게 무슨 일인지를 설명하라고 사기꾼 새꺄.”
하지만 양굉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이건 일단 설명을 들으면 쉽게 빠질 수 없는 일이오. 그래서 확답을 먼저 좀 들어야겠소.”
장건은 피식 웃었다.
“내가 빠진다면 막을 순 있고?”
양굉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은 꽤 큰 건이오. 이미 장 형 말고도 셋이 더 있지. 실력들이 괜찮은 친구들이라 장 형이라도 그 셋과 동시에 싸울 수는 없을 것이오.”
“이미 셋에 너까지 넷이군. 그런데 거기 난 왜 필요해?”
양굉은 씩 웃으며 생각했다. 그야 연원을 알 수 없는 그쪽의 무공, 무림맹 순찰대도 경계하고 암행 황군이 아닌가 의심하는 그 무공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단순히 믿을 수 있는 무인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미 말하지 않았소? 믿을 수 있는 칼잡이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내가 형씨 칼 뽑은 건 암주골에서 딱 한 번뿐이고 그 외에는 전부 주먹질하는 것만 봤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소. 장 형 솜씨를 믿을 수 없으면 어떤 무인을 믿겠소? 어중이떠중이 서넛을 더 모으는 것보다 확실한 실력자 하나를 들이는 게 낫지.”
장건은 열심히 설명하는 양굉을 가만 바라보았다. 이 도박사기꾼이 이번엔 무슨 일을 벌이는 것일까?
“일단 설명해 봐.”
“아, 하시는 것이오?”
“듣고 괜찮으면 하지.”
양굉은 쉽게 넘어오지 않는 장건의 모습에 실실 웃으며 다시 잔을 채웠다. 채운 잔을 훌쩍 들이켠 그는 다시 아까처럼 몸을 앞으로 숙이고 말했다.
“좋소. 더 재봐야 의미가 없겠군.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떠들 이야기는 아니요. 방으로 올라가서 조용히 이야기합시다.”
장건은 일단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술병을 들고 일어서는 양굉을 따라갔다. 일어난 양굉은 먼저 객잔 여주인에게 다가갔다.
“특실 비었지?”
여주인은 대꾸 없이 방 열쇠 하나를 내밀었다. 양굉은 여유로운 미소 그대로 그걸 받아 계단으로 앞장서 나갔다. 그 후 계단을 올라 3층 특실에 들어선 양굉은 삿갓과 겉 장포를 대충 벗어 침대 위에 던져놓고 방 중앙에 있는 탁자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자에 턱 앉으며 장건에게 말했다.
“자, 뭐부터 이야기해 드릴까?”
장건은 그 어떻게든 자기 기세를 지키기 위한 과장된 행동들에 피식 웃었다. 뻔히 눈에 보이는 행동을 보아하니 나름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면 보통 놈이 아니고.
장건은 그 앞에 마주 앉았다.
“전부 다.”
“전부? 모조리? 그럼 이야기가 쪼금 길어질 텐데?”
“전후 사정도 모르고 일을 하라고? 그럼 관두고.”
양굉은 히죽 웃었다.
“흐. 누가 안 하겠다 했소? 내 차분히 하나하나 다 이야기해주겠소.”
장건은 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탁자에 놓인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양굉은 그걸 보며 입술에 살살 침을 바르며 말했다.
“일단, 목표는 수송 마차요. 금과 은전이 가득할 수송 마차.”
장건의 눈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수송 마차? 상행 조합의 수송 마차?”
“에헤이. 잠깐 화내기 전에 내 이야기 좀 더 들어보시오. 마차 터는 게 사파들이나 하는 짓거리라는 거 잘 알고 있소. 근데 이건 감산성의 상행 조합으로 가는 건 맞는데, 상행 조합의 수송 마차는 아니요. 정확히는 조합의 손광에게 가는 손광 개인 물건이지. 손광 아시오?”
장건의 찌푸린 눈은 펴지지 않았다. 그는 눈으로 설명을 재촉했다.
“큼. 손광은 감산 상행 조합의 다섯 조합장 중 하나요. 강남 손씨 가문의 방계라는데 이건 굳이 설명할 게 없고. 어쨌든, 손광은 조합장답게 가진 재산이 어마어마한 양반이오. 그리고 그 재산의 대부분이 이쪽에 있지. 내가 아까 말한 것 기억하시오? 이 일대에는 마을은 별로 없고 대부분 목장에 광산만 하나 있다고.”
그는 그렇게 되묻다가 가라앉은 장건의 눈에 찔끔 놀라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목장 거의 전부가 그 양반 것이고, 적게나마 황금이 나오는 광산 또한 그 양반 것이지. 손광 본인은 감산성에 있으면서 이 지방을 돈으로 주무르고 있다는 말이오. 아마 자기가 마지막으로 여길 들렀던 게 십 년을 넘겼을걸?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이쪽 지방을 착취하는 본인이 정작 이 땅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게. 아, 그건 제국도 마찬가진가?”
양굉은 장건이 내려놓은 술병을 들어 목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실질적으로 그 목장과 광산을 관리하는 건 손광이 임명한 서위량이라는 놈이오. 그리고 그놈은 최근 이 일대에 모든 초지와 강물을 독점하기 위해 모든 목장을 인수하고 있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이오. 그놈과 그놈 일당에게 목장과 집을 잃은 양민이 열댓 명에 심지어 불타는 집에서 타죽은 사람들까지 있소.”
“무림맹은?”
장건의 물음에 양굉은 파-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무림맹 지부장? 서위량에게 제일 먼저 넘어간 것이 그놈이오. 그리고 이미 말하지 않았소? 감산 조합장 손광이 그놈 뒷배라고. 무림맹에서도 어지간히 높은 자리가 아니라면 함부로 건들 수가 없지. 아마 순찰대원 정도는 도리어 묻혀버릴걸?”
“그런 놈을 건들자?”
양굉은 장건의 말에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달려 있던 여유로운 미소는 천천히 변했다. 여유로움이 아니라 위험함으로. 흥분과 분노 섞인 혈기로.
“알게 뭐요? 어차피 두건으로 얼굴을 가려서 못 알아볼 텐데. 그리고··· 서위량이 보내는 수송 마차는 분기마다 한 번씩 목장의 수입과 금광에서 나온 금을 비밀리에 감산성의 손광에게 보내는 것이오. 그 금은은 손광이 감산에서 벌이는 정치싸움의 자금이 되지. 그 자금이 막히면 어떻게 될 것 같소?”
그는 두 주먹을 꽉 쥐어 들어 보이며 말했다.
“상인의 싸움은 자금이 마르면 그걸로 끝이오. 신대륙 상인의 정점인 조합장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아마 다른 조합장의 공격에 혼이 빠진 손광은 우릴 찾을 생각도 못 할 것이오. 어쩌면 그대로 실각할지도 모르지. 우린 수송 마차가 지나갈 골목에 숨어서 대기하다가 덮쳐서 돈만 챙겨 튀면 되는 거요.”
꽉 쥐여 있던 두 주먹이 스르륵 펴지며 뭔가 보이지 않는 것을 들고 있는 것처럼 되었다.
“돈과 명분 모두가 있다는 내 말 이해하겠소? 마차를 호송할 놈들은 다들 씹새끼요. 멀쩡히 살아가는 목장주들을 협박하고, 패고, 불 질러 본래 가치의 반의반도 주지 않고 쫓아내는 개새끼들. 봐줄 것도 없이 그냥 죽이거나 사지 근맥을 끊어버리면 그만인 놈들이지. 그 안에 들어있을 금은은 또 어떻고? 내가 알기로 이번 가을에만 이 일대에서 거래된 소가 수백 마리요. 아마 다섯이서도 은전을 다 못 들고 얼마는 버려야 할걸?”
장건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때리며 양굉을 바라보았다. 양굉은 설명이 끝났다는 듯 입을 다물고 여전히 위험한 미소 그대로 팔짱을 껴선 그 시선을 마주 보고 있었다.
“명분 같은 걸 따지는 놈인 줄은 몰랐는데.”
“장 형. 진짜 큰일을 벌이고 돈을 벌려면 어느 정도 선을 지켜야 하는 법이오. 적어도 이번 일처럼 악독한 상인의 재산을 털었다는 명분은 있어야 명성이 생기는 것이지. 그냥 아무나 털면 그게 사파고 도적단이지 뭐겠소.”
장건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가 양굉을 처음 만났던 것은 암주골이라는 마을에서 한동안 머물던 때였다. 그곳도 여기처럼 목장이 많았던 곳인데, 다들 고만고만한 덩치를 가진 목장들이라 목동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일이 잦았다.
그 싸움이 점점 심해져 다치는 목동이 많아지자 목장주들은 아예 맨주먹 싸움꾼을 고용해 문제가 생기면 한바탕 싸우는 것으로 해결을 보았다. 돈 벌 일 뭐 없을까 하며 지나가던 장건은 옳다구나 싸움꾼으로 일했고, 열세 번의 싸움을 모두 이겼다.
끝에 가서 이놈 양굉과 몇몇 목동에게 노름으로 돈이 털리고 상대 목장에서 고용한 칼잡이를 죽이는 일까지 생겨 떠나게 되기 전까지는 괜찮게 지냈던 마을이었다.
그리고 양굉은 그곳에서 만날 골패나 만지고 술이나 마시는 한량처럼 보였는데 어디선가 계속 돈이 나오는 신기한 놈이었다. 장건은 그걸 자기한테 한 것처럼 어디서 골패사기를 친 돈인 줄 알았다. 무림맹 현상금도 냈다는 놈이니까. 하지만 지금 보니 사기꾼보다 위험한 놈이었던 모양이었다.
생각을 마친 장건은 양굉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그런 정보를 어디서 구했냐?”
“허허. 장 형, 지금 내 정보원을 캐겠다는 것이오? 그건 내 목숨줄이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할 수 없지.”
진짜 칼 한번 들이밀어 볼까 생각하던 장건은 그냥 피식 웃었다.
“돈도 벌고 악덕 상인에게 한 방 먹일 수도 있는 일거리군. 그럴듯한 일이야. 하지만 문제가 좀 있는데.”
“문제? 그게 뭐요?”
장건은 톡톡 탁자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추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널 믿을 수 있겠느냐는 거야.”
양굉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앉은 그대로 입가의 미소를 지우고, 눈빛마저 가라앉히고 나서야 말했다.
“믿지 마시오.”
그는 슬쩍 올라가는 장건의 눈썹을 보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런 일에 믿고 말고 하는 게 어디 있겠소? 나도 장 형이나 이미 모아두었던 세 사람이나 완전히 믿지 않을 것이오. 무슨 의적처럼 명분이니 뭐니 따졌지만 결국 내가 원하는 건 돈이오. 금광과 소 거래로 나온 그 많은 돈. 손광의 감산 상행 조합장 자리를 유지 시켜주는 그 돈. 장 형은 돈 필요 없소?”
“돈 많으면 좋지.”
장건의 대답에 양굉은 다시 씩 웃었다.
“그 돈으로 뭘 하든지 다 장 형 마음대로요. 어디 신사천이나 천후성에 가서 몇 달 주지육림을 벌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진짜 의적처럼 집 잃은 양민들을 도울 수도 있겠지. 그것도 아니면 노름하는 데 쓰시던가. 그 돈 다 노름에 쓰면 그래도 도박판 돌아가는 흐름은 깨달을 수 있으시겠지.”
장건은 가만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자기도 슬쩍 웃으며 말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않으니 도리어 배신도 없을 것이다?”
“흐흐. 뭐 그런 거지. 그래서, 할 거요?”
장건의 미소가 짙어졌다.
“홍길동 놀이라. 재밌겠군.”
장건은 탁자를 두드리던 손을 들어 양굉에게 내밀었다. 양굉은 그 뜻을 알아듣고 손을 마주 잡았다. 나름의 꿍꿍이를 품은 두 사람은 그렇게 손을 마주 잡았다.
* * *
두 사람은 다음날이 되어 마을을 떠났다. 양굉은 앞장서 말을 달렸다. 수송 마차가 출발하는 것은 내일로 다른 세 사람은 마차가 올 경로에 미리 가서 대기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 하루를 달려 습격 장소에 도착해 하룻밤 자고 내일 낮에 수송 마차가 지나가는 순간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양굉의 설명이었다. 한참 말을 달리다가 말이 쉬도록 속도를 좀 늦췄을 때 장건이 말했다.
“다른 세 사람에 대해 좀 설명해 봐.”
“걔들? 어, 공 씨 형제와 검중찬이라는 친구들이오.”
양굉은 천천히 말을 달려가며 말을 이었다.
“공 씨 형제는 공평, 공랑이라는 친구들인데, 칼 좀 쓰는 형제요. 공평이 형, 공랑이 동생이지. 그리고 검중찬은 활을 쓸 줄 알아서 끌어들인 친구고.”
“활?”
“그렇소. 그 친구는 신대륙 들소 뿔로 만든 각궁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멀리서 그걸 쏴 재끼면 보통 무서운 게 아니요.”
“각궁이면 보통 비싼 게 아닐 텐데.”
그 말에 양굉이 피식 웃었다.
“그렇지. 거기에 그거 관리한다고 별 지랄을 다 한다더니만. 그 친구 재산은 그 활이 전부일 거요. 그러니 괜히 만져보거나 쏴보겠다고 하지 마시오.”
두 사람은 중간에 몇 번 멈춰 쉴 때 빼고는 꾸준히 남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렸다. 그래서 해가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큰 굴곡 없는 평야에 큼지막하고 붉은 바위산들이 불쑥불쑥 솟아있는 지형이었다. 양굉은 그 바위산 중 하나에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위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양굉? 옆에는 누구야!”
“누구긴! 우리 마지막 칼잡이지!”
양굉의 대답에 바위 위에서 불쑥불쑥 머리 셋이 돋아났다. 엎드려 있던 사람 셋이 일어난 것이다. 험상궂은 덩치 둘과 꽤 멀끔하게 생긴 남자 하나였다. 덩치 둘은 서로 닮아있었고, 멀끔한 자는 별 표정이 없어 보였다.
덩치 중 하나가 외쳤다.
“제기랄, 양굉! 우리끼리 충분하다니까!”
“지랄 마라, 공평! 계획은 내가 짰다! 불만이면 너부터 꺼져!”
“뭐야? 양굉! 시발 해보자는 거야!”
“해보고 말고 이건 내가 시작한 일이야! 불만이면 네가 가야지!”
양굉의 대답을 들은 덩치는 혼자 뭐라 뭐라 더 욕을 하더니 바위 위에서 쑥 사라졌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바위산 반대쪽에서였다. 그는 벌게진 얼굴로 씩씩대며 장건과 양굉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 시발! 이 뙤약볕에 바위 위에서 엎드리고 있는 것도 엿 같은데 시발! 뭐? 꺼지라고? 양굉! 일단 너부터 뒈졌어!”
바위 아래에선 거침없이 소리 지르던 양굉은 막상 쿵쿵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덩치를 보곤 안색이 굳었다. 그리고 얼른 장건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 좀 도와주시겠소? 저놈 진짜 나 한 대 칠 기센데?”
하지만 장건은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레 대답했다.
“내가 왜?”
대답을 들은 양굉의 표정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