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52)
진서하 외전 8화
이환의 흥분된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무림에서 가장 은밀한 비밀조직 개방의 방주! 동서부 무림맹의 중재자! 무공 항룡십팔장의 달인! 일곱 걸음 동안 일곱 명의 사람으로 변신하는 변장술의 귀재이자 신출귀몰의 대명사! 그러나, 그 수많은 능력과 별명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억울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협의심이라!”
이환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창살을 붙잡고 그렇게 외치는 동안 중년인 양굉의 입가에는 스믈스믈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고, 옆방에 있는 진서하는 약간 깬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알리사는 진서하 옆에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툭툭 그녀의 옷깃을 당기며 속삭였다.
[저, 뭐라고 하는 거예요? 화가 난 것 같은데···]“화가 난 게 아니라 흥분한 거야··· 어린애가 따로 없네···”
하지만 진서하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환은 갑자기 붙잡고 있던 창살에서 뒤로 한 발짝 물러나 대뜸 포권을 하며 외쳤다.
“무명소졸 이환이 무림의 대선배를 뵙습니다!”
입가가 꿈틀거리는 정도에서 어떻게든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려던 양굉은 그 인사에 더는 참지 못했다.
“푸흣, 푸흐흐흣, 푸하하핫! 그래, 그래! 나도 이렇게 무림의 젊은 영웅을 만나니 몹시 반갑구먼! 내가 바로 항룡위개 양굉이네! 편하게 양 선배라 부르시게나!”
진서하는 그 모습을 보며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살살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환이 그랬던 것처럼 양굉도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창살 쪽으로 다가가 헤벌쭉거렸다.
“소형제께서 나를 잘 아는가 보구만?”
“물론입니다, 양 선배. 양 선배의 일대기가 걸개전乞丐傳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환의 대꾸에 양굉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거, 걸개전?”
“예!”
양굉의 눈이 금세 약간 꺼림칙한 빛을 띠었다.
“그··· 소형제께선 그 책이 결국 소설임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물론 내 과거가 줄기가 되긴 하지만 실제로는···”
“물론입니다, 양 선배. 소설은 소설일 뿐이죠. 하지만 제가 말한 별호들이 전부 사실이긴 하지 않습니까? 현 무림에서 양 선배만큼 명성이 드높은 이는 없죠. 혹 무명협이 지금이나마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게 아닌 이상 앞으로의 십 년도 양 선배의 명성을 뛰어넘을 무림인은 없을 겁니다.”
이환의 공손한 태도에 꺼림칙하던 양굉의 표정이 다시 헤벌쭉해졌다.
“으허허허헛! 이거 젊은 친구가 나를 너무 띄워 주는군! 그래! 무명협 다음이 바로 나지! 하지만 무명협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으니 사실은 내가 첫 번째랄까? 흐허허헛!”
양굉은 목젖이 보일 정도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껄껄거렸다. 아주 좋아 죽겠다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어느새 싸늘해진 진서하의 눈빛을 보고는 우뚝 멈췄다.
“···큼, 크흠. 정말 날 너무 띄워 주는군. 자네도 말과는 달리 보통 사람은 아니지 않나.”
“예? 절 아십니까?”
양굉이 헛기침으로 빠르게 표정을 바꾸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이환은 지금까지의 흥분을 잊고 당혹스러워했다. 겸양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당황스러운 듯 보였다.
“자네의 이름이 온 서부에 울리고 있는데 개방 방주인 내가 어찌 모르겠나?”
“아니, 그··· 전 그냥, 무명소졸일 뿐인데···”
양굉은 고개를 저었다.
“단강수斷鋼手 이환. 고향은 청산곡. 무림에서 활동한 지는 사 년 정도 되었고, 본격적인 명성을 얻은 건 사혈도蛇血刀 야율상의 칼을 맨손으로 분질러버린 사건부터지. 그 외에도 흑두파, 적검파, 사천사견 등등의 사파와 악인들을 해치웠지. 그러다가 이번에 우애성까지 찾아와 잠시 머물렀던 건 로마의 문자와 말을 배우기 위함이었고. 혹 바다 건너를 여행하고 싶은 겐가?”
이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전까지 껄껄 웃던 양굉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어딘가 약간 가볍고 비굴해 보이던 얼굴은 두 눈이 차갑게 반짝인 순간부터 노련한 무림의 거두가 되었다.
하지만 잠시 당혹스러운 듯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이환도 어느 순간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양굉과 시선을 마주했다.
“···개방의 정보력이 무림 최고라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그런 뒷조사를 직접 들어보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군요.”
양굉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그러나 이번엔 경망스러운 웃음이 아니라 젊은 무인을 보고 요놈 봐라-하는 식의 미소였다.
“자네의 행적은 우리 개방에서 꽤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네. 세가나 무림맹에 속하지 않은 무인 중 자네만큼 젊고 뛰어난 무인은 몇 없거든.”
“그만큼 선배님께서 절 좋게 봐주신 것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이환은 다시 한번 정중한 태도로 포권을 했다. 양굉은 그런 이환이 흡족한 표정이었다.
“인사는 다 나누셨어요? 그럼 이제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좀 설명해 주시겠어요?”
그때 진서하의 목소리가 둘 사이에 울렸다. 양굉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허허. 요 녀석. 왜 하필 걸려도 네가 걸렸는지.”
“걸리다뇨?”
양굉은 턱을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 너희가 구속된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단다. 말하자면 동부 무림맹과 장가상회 사이에 협의와 계획 때문이랄까. 파국의 씨앗을 미리미리 잠재우기 위해서 짠 계획이지.”
이후 양굉은 차분한 어조로 지난 십오 년간의 장가상회의 성장과 그로 인해 반쯤 종속되어 가던 동부의 상계, 그것을 깨닫고 동부 무림 전체에 은근히 깔려가던 거부감과 위기감 등등을 풀어놓았다.
“···지금은 그저 물밑에서 희미하게 흐르는 기류에 불과하지. 하지만 그런 기류가 어느 순간 커지고 거세져 수면 위로 드러나면, 그땐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수레바퀴가 돌 수도 있단다. 사람들이 지금은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동서부 무림맹의 전쟁이 그것이지.”
진서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듣고는 되물었다.
“전쟁이 나는 걸 설이 언니가 가만두고 볼 리 없어요.”
양굉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봐야 불만이 쌓인다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총독 개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황군 전체는 무림인들끼리 상잔하는 걸 반기면 반겼지, 말리려 하지 않을 거다. 결국 황군은 황제의 뜻을 받드는 칼이니까.”
“···그래서 그 싸움을 막으려고 우리가 여기 갇혀있다는 건가요?”
“장가상회가 동부 무림맹에 양보를 하려면 그럴만한 명분이 있어야 해. 이제 그 상회는 그저 회주 개인의 뜻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신대륙 전체의 경제를 움직이는 거물이 되었으니까.”
양굉과 진서하의 문답에 이환과 알리사는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무림 전체의 정세가 움직이는 문답은 이환에겐 너무 먼 이야기였고, 알리사에겐 그냥 별나라 소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때 양굉이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림맹과 상회 양측에서 그렇게 긴장하며 기다리던 사건에 하필이면 네가 얽히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냐? 아니, 애초에 첫 강도 놈들이 로마인들이리라는 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지··· 하지만 너무 걱정할 것 없다. 하루 이틀 여기서 쉬고 있으면 무림맹과 상회에서 다 알아서 할 거다. 너는 무림맹에서 챙겨주는 보상금이랑-”
“그들은 강도가 아니에요.”
“잉?”
양굉이 어벙한 표정을 짓자 진서하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들이 노린 건 열차 승객들의 금은이 아니었어요. 그들이 노린 건 구음사혈이었죠.”
“···구음사혈?”
양굉의 표정이 싸악 굳었다.
“설마 십오 년 전 도망쳤던 마궁의 잔당이 다시 널?”
“아뇨. 그들은 마궁의 잔당이 아니었고, 절 노린 것도 아니었어요.”
진서하의 대꾸에 양굉의 시선은 곧장 알리사를 향했다. 마치 폐부를 꿰뚫는 듯한 시선에 알리사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 놀라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래, 잡힌 건 로마인들이었지. 마궁 잔당의 마지막 행적은 저 먼 남쪽이었고. 둘이 접점이 없군.”
알리사를 바라보던 양굉은 갑자기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요 녀석아. 이번엔 또 무슨 일에 휘말린 게야?”
* * *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어느새 남강성의 하늘을 뿌옇게 흐리며 거세져 갔다. 거리를 오가던 행인은 비를 피해 뛰고, 상인들은 밖에 늘어놓았던 상품을 안에 집어넣는다고 부산을 떨었다. 거리를 복작복작 채우던 사람들은 굵은 빗줄기에 쓸려나가기라도 한 듯 줄어들었다.
남강성은 오래전 서쪽 대산맥을 넘어온 중원인들의 후예와 북쪽 마궁에게 밀려난 도망자들, 본래 이곳에 뿌리를 둔 원주민들이 뒤섞여 세워진 도시였다. 그 기초는 옛 원주민의 도시였으나 기둥과 지붕은 중원의 양식이 뒤섞여 세워진 독특한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그곳에 동쪽 우애성의 영향을 받아 어설프게나마 로마의 양식을 따라 한 건물들까지도 지어지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양식이군.]한 남자가 로브를 뒤집어쓴 채 비를 맞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중원과 로마의 양식이 뒤섞여 올라가고 있는 건물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워.]시야가 뿌옇게 변하고 잠깐이면 푹 젖어버릴 정도로 거센 빗줄기건만 그곳에 선 남자의 자세는 꼿꼿하기만 했다.
그가 빗줄기를 맞고 서 있기를 잠시. 그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그처럼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절그럭거리는 쇳소리가 났다.
[정확한 위치를 찾았습니다.]부하의 보고에도 헥토르는 대답 없이 가만 서서 덜 지어진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하 또한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침묵하던 헥토르가 지나가듯 말했다.
[제규상은 그곳이 뭐라고 하던가?] [일종의 관청이라더군요. 별달리 위험한 자는 없으리라고 합니다.]헥토르는 피식 웃었다.
[사실인가?]부하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곳에 머무는 이들의 대부분은 그 ‘무림인’이라는 전사들입니다. 그 전력을 얼핏 추산해봐도 로마의 군단과도 맞설 수준이니 시간을 오래 끌면 굉장히 위험할 것입니다.]헥토르는 허리를 뒤로 젖혀가며 크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울려 퍼지지 않았다. 그 순간 천공에서 콰르릉-울린 천둥소리 때문이었다.
[···만신전이란 좁은 울타리에 갇힌 늙은이들에게 이 땅을 보여주고 싶군. 이 얼마나 신비하고 풍요로운 땅인가.]천둥이 그친 후 그리 중얼거린 헥토르는 곧 휙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의 부하는 곧바로 그 뒤에 따라붙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 뒤를 따라 걷는 이는 십수 명으로 늘어났다. 모두 로브를 뒤집어쓰고, 커다란 덩치를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의 몸에선 모두 철커덩거리는 쇳소리가 났다.
그가 남강성의 거리를 가로질러 향하는 곳은 도시의 중심, 이들이 무림맹이라 칭하는 거대한 장원이었다.
그 커다란 정문에는 무림맹武林盟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었다. 또한 그 앞을 지키고 선 무사 또한 존재했다.
정문의 큼지막한 처마 아래에서 우수수 쏟아지는 빗줄기와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경비무사는 그 빗줄기를 뚫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들을 발견했다.
그는 거침없이 다가오는 그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빗줄기에 저렇게 당당하게 걸어오는 사람이 누굴까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경비무사의 머리에 불안감이 스친 건 어느새 그들의 옷차림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였다.
목소리가 닿을 거리가 되어 그가 외쳤다.
“멈추시오-!”
그들은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순순히 멈췄다. 그걸 본 경비무사는 본인의 불안감이 괜한 걱정이었으리라 생각하며 다시 외쳤다.
“이곳은 무림맹이오! 당신들의 정체를 밝히시오!”
사실 이렇게 비가 오는 와중에 손님을 정문 밖에 새워놓고 정체를 캐묻는 것은 무림맹이란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는 무례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정문의 책임자는 경비무사였고, 그는 그런 자신의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느끼지 못했다.
당장 시커먼 피풍의를 뒤집어쓴 자들 십수 명이 빗속을 뚫고 우르르 몰려오는데 수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 덩치 중 하나가 앞으로 몇 발짝 걸어 나왔다.
“그만! 거기 멈춰서 정체를 밝히시오!”
덩치는 자신의 로브를 뒤로 넘겼다. 사자처럼 수북한 머리칼과 수염이 드러났다. 그의 생김새를 본 경비 무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로마인?”
다음 순간, 그 로마인의 두 눈과 입에서 똑바로 마주보기 힘든 광채가 터져 나왔다.
* * *
갑자기 꽈르르릉-하는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벼락이 친 것인지 이환과 양굉, 진서하 모두 움찔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의 움찔거림은 알리사와 비교하면 얌전한 정도였다. 알리사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천둥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