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54)
진서하 외전 10화
양굉의 일격과 용울음 이후 마구간 안이 조용해졌다. 밖에서 쏟아지는 폭우에 쏴아아-하는 빗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그때 이환이 흥분을 억누른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게 항룡십팔장! 이걸 눈앞에서 보다니! 끝내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던 중이라 그 목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옆에 있던 진서하는 절로 한숨이 나오는 걸 느꼈다. 열차에서 만났을 때는 조금 순진한 정도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조금이 아니라 좀 많이 순수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 사이엔 애 같기로는 절대 지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푸흐흣.”
양굉은 저 앞에 있는 헥토르에게 시선을 고정하면서도 귀를 쫑긋거렸다. 입가에 비실비실 웃음이 흘러나오는 걸 보니 이환의 반응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서하는 조금 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반면 그들을 마주한 헥토르는 굳은 표정이었다. 그는 자기 발아래 쓰러진 전사를 흘낏 바라보고는 말했다.
[일으켜라.]그 말에 다른 철갑옷 둘이 다가와 쓰러진 자를 부축했다. 그와 동시에 쓰러진 자가 입고 있던 철갑옷에서 지금까진 보이지 않던 문자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커헉···! 쿨럭, 우웩···]철판 위 문자들이 신비롭게 빛나자 쓰러졌던 철갑옷은 갑자기 앞으로 몸을 숙여 왈칵 피를 쏟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비실비실 쪼개고 있던 양굉도 순간 표정을 바꿔 그의 모습을 살폈다.
[흐으···흐으···]그 철갑옷은 몸을 일으키긴 했으나 그리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얼굴은 창백했고, 몸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헥토르가 그 꼴을 보며 피식 웃었다.
[과연. 나름 이 땅의 신비라 이건가.]직후 그의 미소가 진해졌다. 동시에 그의 눈과 입에서 노란 광채가 흘러나오며 몸 주변으로 노란색 전류가 번쩍이기 시작했다. 사자 같은 수염과 머리칼 사이로 지지직거리며 뇌전이 흘렀다.
“워메··· 저건 또 뭐여.”
그를 본 양굉이 대번에 질색했다. 그는 이 무림에서 이십 년 이상을 살아온 인물이었고, 십오 년 전엔 마궁의 토벌에도 참여했던 무림의 중진이었다. 기괴한 마공을 쓰는 마인부터 신대륙 원주민들의 주술, 장가상회의 증기기관까지 온갖 신비와 괴력난신을 경험해 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에 빗대어볼 때 지금 저 헥토르라는 로마인의 모습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벼락이 쏟아져 나오는 눈알이라니? 대충 봐도 승패를 떠나 까다로운 싸움이 예견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헥토르의 뇌전은 스르륵 가라앉았다. 본인이 의도한 것이 아닌지 헥토르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멈칫거렸다. 얼핏 당황하던 그는 곧 두 눈에서 불을 켜며 양굉의 뒤를 노려보았다.
[감히! 너저분한 드루이드의 주문을!]그 말에 일행이 뒤를 돌아보니 알리사가 헥토르를 향해 두 손을 펼치고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의 왼뺨에서 철갑옷의 것과 비슷한 문자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돌아보는 세 무림인을 보고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창백한 얼굴과 줄줄 흐르는 식은땀으로 보아 애써 지은 웃음이라는 게 뻔히 보였다.
그때 헥토르가 말없이 손을 들어 일행을 가리켰다. 그 손짓이 공격 명령인지 일행을 멈췄던 철갑옷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쓰러졌다 일어선 철갑옷처럼 그들 또한 갑옷에서 신비한 문자들이 빛나고 있었다.
양굉이 말했다.
“다들 괜히 무리할 필요는 없다. 무림맹 무사들이 금방 올 거야.”
“저놈들이 도망치면요?”
“저기 저놈들이 준비하는 술법 때문에 그러는 거냐? 말하는 걸 보니 뭔가 기이한 술법인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무리하는 것보단···”
“굳이 후환은 남길 필요는 없죠.”
진서하는 살짝 웃었다. 그리고 양굉이나 이환이 뭐라 말리기도 전에 철갑옷들을 향해 먼저 치고 나갔다.
가장 앞에서 훌쩍 다가오는 진서하의 모습을 본 철갑옷이 자신의 장검을 내려쳤다. 단순한 궤적이었으나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거리 감각을 통해 지금 진서하의 속도라면 반드시 맞을 수밖에 없는 일격이었다.
그러나 진서하는 화살처럼 달려오던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우뚝 멈춰 그 칼날을 피했다. 대략 세 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칼날이 허공을 베었다.
철갑옷은 당황하지 않고 양손을 비틀어 칼날을 회전시켰다. 대각선 베기를 한 칼날이 손잡이를 기준으로 한 바퀴 크게 돌아 다시 진서하를 노렸다. 큰 무기가 느릴 것이라는 생각을 간단히 부숴주는 노련한 움직임이었다.
물론 그래봐야 다시 파고드는 진서하보단 느렸다. 칼날보다 먼저 그녀의 손바닥이 룬 문자로 빛나는 철갑옷 한가운데를 때렸다.
[크흣-!]철갑옷은 주르르 뒤로 밀려났다. 그들은 투구를 쓰고 있지 않았기에 입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나오는 꼴이 훤히 드러났다.
“앗! 저도 갑니다, 진 소저!”
진서하의 선제공격을 본 이환은 그렇게 말하며 곧장 뒤따라 튀어 나갔다. 진서하의 뒷모습을 보며 허허 웃던 양굉도 그 뒤를 따랐다. 그의 양팔에 붉은 기운이 휘몰아쳤다. 그렇게 로마의 철갑옷들과 무림인들이 뒤얽혀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서하는 처음 철갑옷을 공격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장력으로 밀어냈던 철갑옷을 깊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크흐···]철갑옷도 진서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의 갑옷에서 룬 문자들이 환하게 빛나자 그는 입에서 피를 쏟은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성큼성큼 진서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피에 물들어 시뻘건 이빨을 드러내고 철갑옷을 철커덩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이 꽤나 흉악했다.
진서하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철갑옷을 후려쳤던 오른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했다. 기이한 문자들이 빛날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역시 그냥 철판 갑옷은 아닌 듯했다. 그녀의 손에 적잖은 반발력이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곧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모든 무림인이 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것, 호승심이었다.
[죽어라, 마녀!]철갑옷이 자기 말로 뭐라 외치며 검을 휘둘러왔다. 험악한 표정만큼이나 험악한 말일 것이다. 진서하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고 그 검세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한 걸음 만에 철갑옷과의 거리가 사라졌다.
철갑옷은 바짝 붙은 그녀를 칼날을 이용해 베는 것이 아니라 손잡이 부분으로 후려치는 것으로 다시 한번 노련함을 뽐냈다. 하지만 조금 전에도 그러했듯, 그 공격이 닿는 것보다 진서하의 손이 더 빨랐다. 귀신처럼 파고든 그녀의 손이 방문을 두드리듯 철갑옷의 관자놀이를 툭-때린 것이다.
그 한 수에 철갑옷은 눈이 탁 풀리며 풀썩 쓰러졌다. 철커덩 소리를 낸 갑옷이 더 환한 빛으로 빛났지만 그는 일어서지 못했다. 쓰러진 철갑옷과 우뚝 선 그녀가 대비되었다. 승자와 패자였다.
진서하는 쓰러진 철갑옷을 내려다보다가 움찔하고 왼 어깨를 잡았다.
철갑옷의 반격을 완전히 피하진 못한 것이다. 그 놀라운 반응속도와 스쳤음에도 뼈가 시릴 정도의 힘으로 보아 투구를 쓰지 않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 능력이면 투구를 벗고 눈과 귀를 열어 예리한 감각을 유지하는 게 더 유리할 듯했다.
그녀는 왼팔을 크게 한 번 휘돌려 툭 털어내는 것으로 통증을 잊고는 다른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
“으랏차-!”
이환은 철갑옷 하나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는 굳게 쥔 두 주먹으로 철갑옷을 난타하고 있었는데, 그 주먹을 고스란히 얻어맞은 철갑옷은 조금씩 빛을 잃어 우그러지고 있었다. 진서하가 상대했던 자와는 달리 그 철갑옷은 간신히 이환의 주먹이 머리를 노리는 것만 겨우겨우 막고 있었다. 금방 승부가 날 듯했다.
“조금 더 분발해보게, 젊은 친구들! 로마의 기상을 좀 보여봐!”
나머지 철갑옷 셋을 상대하고 있는 건 양굉이었다. 처음 나가떨어졌던 자와 그를 일으켰던 둘인데, 양굉은 그들 셋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나마 셋이라는 수적 우세 덕분에 양굉의 공세를 간신히 막아서는 중이었다. 그러나 손을 뻗으면 뻗을수록 점점 더 강렬해지는 항룡십팔장의 용울음을 보아하니 그쪽도 승부가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진서하의 눈이 헥토르를 향했다. 그와 알리사가 서로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알리사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끊임없이 뭔가 중얼거리는 것으로 보아 둘이 어떤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때 그 ‘포탈’이라는 주술을 벌여놓고 헥토르의 뒤에 서 있던 철갑옷 둘이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헥토르와 알리사의 싸움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알리사의 창백한 얼굴을 본 진서하는 자기도 모르게 등에 둘러멘 검으로 손을 움직이다가 움찔 멈췄다. 당장 검을 뽑아 휘두를 수도 있었지만, 그 직후엔 잠시지만 무력한 순간이 찾아온다. 아직 저 헥토르라는 자의 전력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건 위험할 수 있었다.
진서하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두 손을 중단에 두었다. 굳이 검을 뽑지 않아도 그녀는 충분히 고수였다.
* * *
알리사는 필사적으로 주문을 외우며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왜 싸우고 있는 것일까 하고.
사실 이환과 진서하, 조금 전 만난 양굉까지, 그들은 모두 그녀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다. 당장 열차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는 것 외엔 아무 접점이 없는 이환은 물론이고 양굉과는 제대로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와 같은 체질을 가진 듯 보이는 진서하 또한 사실 싸울 이유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정말 체질이 같기 때문인지 오랫동안 헤어졌던 가족을 만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묘한 친밀감이 느껴지긴 했다. 그러나 알리사가 알기로 만신전의 축복을 받은 ‘신녀’는 결코 스물을 넘겨 살 수가 없었다.
그건 로마가 제국이 되기 전부터, 먼 고대에 저 트로이에서 수많은 영웅들이 싸우고 죽던 때부터 변하지 않던 사실이었다. 신녀는 그저 사제들의 권능을 극대화해주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나마 스물이 되기 전까지 의식도 없이 침대에 누워 썩어들어가기 싫다면 그렇게 도구라도 되는 편이 나은 처지였다.
그런데 진서하는 분명 스물을 넘긴 나이였다. 거기에 병약해 보이지도 않았고, 그 무공이라는 것을 익혀 만신전 전사나 군단의 부장들보다 강한 것 같았다. 정말 그녀도 만신전의 축복, 아니 저주를 받은 게 맞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저 비슷해 보이는 체질일 뿐 완전히 다른 문제일 수도 있었다. 진서하가 말하는 스승이라는 사람도 그녀의 저주를 벗겨낼 순 없을지 몰랐다. 그럼 이렇게 싸워봐야 결국 그녀의 죽음은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 우울한 고민을 하면서도 알리사는 드루이드의 주문 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당장 저들이 그녀를 위해 싸워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환은 그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억울한 상황이라니 돕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진서하는 그녀에 대해 알자마자 그녀의 저주를 없앨 수 있다, 그렇게 해주겠다 말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얼굴이나 안 양굉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에 알리사의 입이 멈출 수 없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그녀를 구해준 대가에 대해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지금 위기가 넘어가면 그 이유부터 물어보겠노라 다짐했다.
[야만인들의 주문을 열심히도 배웠군.]그때 헥토르의 음성이 알리사의 귀를 울렸다. 그리 큰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그녀는 머리가 띵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비틀거렸다. 그와 동시에 헥토르가 앞으로 손을 뻗자 알 수 없는 흡입력이 그녀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아앗···]뭘 어떻게 대처할 틈도 없었다. 단번에 두 발이 바닥과 떨어졌다. 그녀의 작은 몸이 둥실 떠서 헥토르에게 날아갔다.
철갑옷 하나를 이젠 그냥 쇠뭉치 정도로 만들어버리고 있던 이환이 제일 먼저 그 모습을 보았다.
“엇! 알리사!”
그는 날아가는 알리사의 모습을 보고 당장에 그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못, 간다···]그를 상대하던 철갑옷이 다 찌그러진 몰골로도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그 앞을 막았다.
그 순간 이환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동시에 그의 오른 다리가 흐릿해졌고, 철갑옷은 갑자기 시야가 빙글 도는 걸 느꼈다. 얼핏 상체가 사라진 체 우뚝 서 있는 자신의 하반신을 본 것도 같았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더 생각해보기도 전에 눈앞이 어두워졌다.
“이얍!”
철갑옷을 마무리한 이환은 냅다 뛰어서 두둥실 날아가고 있던 알리사를 껴안았다. 그렇게 받아서 바닥에 내려앉을 생각이었다.
“···엉?”
그러나 알리사를 끌어당기는 힘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힘은 알리사 뿐만 아니라 이환까지 통째로 잡아당겼다.
“으악! 진 소저! 양 선배!”
이환이 기겁하며 일행을 불렀다. 그 소리를 듣고 진서하도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그녀가 상대하던 철갑옷들이 그녀를 붙잡으려 했으나, 어디선가 날아온 붉은 기운이 그들을 후려치며 저지했다. 양굉의 장풍이었다.
“이 녀석아! 너까지 붙어봐야 뭘 어쩐다고!”
진서하는 양굉의 비명 같은 고함을 뒤로하고 두둥실 떠서 날아가던 알리사와 이환을 붙잡았다. 자신을 껴안는 그녀의 모습에 이환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 소저!”
하지만 무게가 늘었음에도 기이한 흡력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그저 세 사람이 뭉친 한 덩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진서하가 훌쩍 가까워지는 헥토르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안 느려지네.”
알리사는 이미 의식을 잃고 그 소리를 못 들었지만, 이환은 들었다. 그는 진서하도 별 대책 없이 냅다 달라붙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눈에 노란 뇌전에 휩싸여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헥토르가 보였다. 비명이 절로 나왔다.
“으악!”
[내가 필요한 건 신녀뿐이다.]헥토르의 뇌전이 번뜩였다.
“이 새끼가 어딜!”
그러나 그 뇌전이 이환과 진서하에게 쏟아져 나가는 것보다 어느새 철갑옷들을 뿌리치고 다가온 양굉의 양손이 헥토르를 후려치는 것이 더 빨랐다.
[큿!]양굉의 손은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순식간에 항룡십팔장의 현란한 전반 구장九掌이 헥토르의 몸을 덮쳤다. 헥토르는 반격도 제대로 못 하고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감히-!]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전신에서 번쩍 뇌전이 터져 나오며 양굉을 밀어냈다. 그의 몸을 으스러뜨리려던 항룡기抗龍氣도 그 기세에 흩어져버렸다. 헥토르는 그렇게 뇌전에 휩싸인 채 곧장 양굉을 향해 반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양굉을 마주한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멈칫했다. 양굉이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감싸 쥐고 그 오른 손바닥을 헥토르에게 내밀고 있었다. 하체는 오른발은 뒤로, 왼발은 앞으로 둔 채 적당히 굽힌 채였다. 그러면서 허리는 곧게 펴고 시선은 정확히 적을 향하고 있어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을 듯한 굳건함이 있었다.
그런 자세에서 양굉은 엄숙히 말했다.
“항룡십팔장, 광룡추락타狂龍墜落打.”
[···뭐?]그렇게 말한 후 양굉의 오른팔에서 우우우-하는 긴 용울음이 울리다가, 갑자기 소리가 사라졌다. 직후 헥토르가 본 것은 앞으로 내민 양굉의 오른 손바닥에서 뭔가 붉게 번쩍인 것뿐이었다.
헥토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가슴에 화끈함을 느끼며 뒤로 훌쩍 날아갔다.
뒤이은 굉음이 쫘자작-하는 공기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우수수 쏟아지던 빗물을 밀어냈다. 아주 잠시지만 아래로 떨어지던 그 일대 빗물은 양굉의 손이 뻗어진 방향으로 방사형을 그리며 흩뿌려졌다. 흙바닥에 고이던 빗물 또한 거센 바람에 밀려나 잠시 마구간 마당은 깔끔해졌다.
“후-우···”
양굉은 불타는 듯한 기혈을 진정시키며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이 초식을 배울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원래 이런 초식은 없었지만··· 뭐 어때, 새로 만든 샘 치지. 적당히 잘 써라. 삐끗하면 네 팔부터 터져나갈 거니까.’
“···흐, 이 정도면 적당하지 않소?”
괜히 옛날 생각을 하며 낄낄 웃던 양굉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이 훌륭한 장법을 보고 이환은 물론 진서하도 우러러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엥?”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변을 휙휙 둘러보던 그의 눈에 거의 희미해진 공간이 울림이 보였다. 조금 전 이 로마인들이 만들었던 ‘포탈’이니 뭐니 하던 것이었다.
“서, 설마···”
그의 머릿속에 불안한 가정이 떠올랐다. 헥토르와 알리사가 잠깐 떠들던 것을 생각하면 저건 일종의 관문이었다. 정말 말도 안되지만, 저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면? 허공을 날아가던 녀석들이 저 안으로 들어갔다면?
“서, 서하야!”
양굉은 그 울림이 사라지기 전 얼른 뛰어갔다. 하지만 이미 희미해지던 울림은 그가 다가오기도 전에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가 멍하니 빈 공간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갑작스레 콰르릉-하는 천둥소리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니 저 멀리 박살난 담벼락 사이에서 뇌전에 휩싸인 헥토르가 일어서고 있었다.
양굉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너, 너 이 새끼! 이리 와! 우리 서하 어디-”
다음 순간 다시 벼락이 쳤다. 이번엔 하늘에서 헥토르를 향해 떨어진 진짜 벼락이었다. 그리고 그 번쩍이는 빛이 사라진 후엔, 어디에서도 헥토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양굉의 감각 어디에도 그가 잡히지 않았다.
“여기다! 여기 침입자들이다!”
“잡아라!”
뒤늦게 무림맹의 무사들이 여기저기서 우르르 몰려나왔다. 헥토르가 사라졌지만 아직 여기 남아있던 철갑옷 전사들이 검을 들고 그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금세 바닥에 고여있던 빗물과 피가 섞여 더러워져 갔다.
그 난장판 속에서 양굉만이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반쯤 게게 풀린 눈으로 중얼거렸다.
“···엿 됐다.”
* * *
“···여기가 어디지?”
“어, 여긴 고원성 부근인데요? 우리가 왜 여기 있습니까?”
바닥에 쓰러진 채 주변을 둘러본 진서하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그녀를 껴안고 있던 이환이 그렇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멍청히 서로를 마주 보았다.
[···숨 막혀요···]그들은 자신들 사이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얼른 서로를 밀어냈다. 거기엔 알리사가 피곤한 표정으로 헥헥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