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55)
진서하 외전 11화
“알리사!”
진서하가 알리사를 부축해서 자신의 무릎 위에 머리를 올려주었다. 그녀와 이환 사이에 끼여서 제대로 숨을 못 쉬던 알리사는 연신 헥헥거리며 말했다.
[역시··· 그 자식이 사기 친 거였어요··· 로마까지 가긴 개뿔··· 메르쿠리우스 사제들도 그렇게는 못 날아가는데···]“뭐? 머쿠리스? 무슨 소리니?”
진서하는 알리사의 안색을 살피며 반문했다. 알리사는 제정신이 아닌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중얼거렸다.
[메르쿠리우스요. 머쿠리스가 아니라··· 헤르메스라고도 하죠··· 거기 사제들은 좋은 사람이 많아요··· 이곳으로 건너오는 배를 찾아준 것도 헤르메스 사제였어요··· 사제라는 사람이 모두 헥토르 그 자식 같은 건 아니에요··· 좋은 사람도 분명···]알리사가 횡설수설하자 진서하는 곧바로 그녀의 맥을 짚고 눈을 감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환은 그녀가 진맥을 시작했다는 걸 깨닫고 곧바로 일어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곳이 고원성 주변임을 알아본 것은 뭐 대단한 이유가 아니었다. 머리 위쪽 구름이 손에 닿을 듯한 고원지대, 시야의 정면부터 후방까지 어디를 둘러보아도 구불구불 물결치는 산 구릉들, 그 구릉의 표면을 뒤덮고 있는 빽빽한 침엽수 숲과 중간중간 울퉁불퉁 솟아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바위산까지. 만약 이곳이 고원성 주변이 아니라도 최소한 서부 대산맥의 남쪽 줄기임만은 분명했다.
이환은 시야 저 멀리 지평선 대신 아득하게 그려지는 산맥의 이빨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꽤 높은데.”
사람이 살만한 곳까지 내려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벌써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는 시간이었다. 지금부터 내려간다는 건 잠시 후 어둑한 밤을 헤매다가 발을 헛디뎌 발목 부러지기 좋은 짓거리였다. 바위가 많은 지역이라 바닥에 좁은 틈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무공을 익힌 고수라도 한밤을 꼴딱 세워가며 발끝에 신경을 집중하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그때 진서하가 한숨을 쉬며 눈을 뜨고는 살펴보던 알리사의 몸 이곳저곳을 푹푹 찔렀다. 그러자 이젠 못 알아들을 소리를 중얼거리던 알리사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녀석은 좀 괜찮습니까?”
이환의 질문에 진서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지금도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알리사의 문신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말했다.
“좋지 않아요. 기의 흐름이 너무 불안정해요. 조금 전 싸움으로 무리를 한 데다가 이 주술··· 로마의 술법이 어떻게 한 것인지 끊임없이 이 아이의 기혈을 뒤흔들고 있어요.”
이환도 그녀 옆으로 다가와 알리사를 살폈다.
“음. 하지만 이 녀석 이야기로는 그 술법이 있어 그나마 지금 움직이고 말할 수 있는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맞아요. 원래 구음사혈이라면 지금쯤 침대에 누워 얼어붙고 있었을 테니까. 기의 흐름이 막히는 걸 막고자 한다면 좋은 수법이에요. 하지만 임시방편이 아니라 지난 몇 년간 계속 이런 식이었다면···”
진서하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기혈이 버티지 못할 거예요. 지금이야 한창 자라나는 나이라 상처가 나면 나는 대로 회복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더는 견디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이환도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알리사에게 손을 뻗어 녀석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스윽 치워주었다. 알리사는 진서하의 타혈이 효과를 보이는 것인지 조금 전보다는 안색이 편해 보였다.
잠시 그 얼굴을 지켜보던 이환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일단 해가 지고 있어서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변을 조금 둘러보고, 먹을 것이 있을지 찾아보겠습니다. 그동안 불을 좀 피워주시겠습니까?”
진서하는 그를 올려다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당혹스럽지 않은가요?”
“예? 뭐가 말입니까?”
“정말 여기가 고원성 주변이라면, 우린 말을 타고도 이 주는 넘게 걸릴 거리를 한순간에 건너뛴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당장 할 일부터 찾는군요.”
그녀의 말에 이환은 어설프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는 특별히 심각할 것 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야 믿기 힘든 일이라고 당황하고만 있으면 오늘 저녁을 굶어야 하니까요.”
그렇게 대답하는 이환의 표정에선 정말 혼란스러움이란 단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눈앞에 닥친 일부터 차근차근 헤쳐나갈 뿐이라는 굳은 심지. 진서하는 말없이 그런 이환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 본 이환은 헤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 이모님이 말씀하시길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수록 배를 든든히 채워야 한다더군요. 그래야 힘을 내서 그 상황을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요. 물론 그 로마인들과 알리사가 어떻게 대륙의 절반을 가로지를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어쨌든 지금 우린 여기 있지 않습니까. 해결 안 될 고민을 끌어안고 끙끙거리기보단 배부터 채우는 게 좋겠죠.”
잠시 그와 눈을 마주치고 깜빡거리던 진서하는, 곧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 피워놓을게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이환은 몸을 돌렸다. 그가 등을 돌리자 진서하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 안에 무슨 생각이 담겼는지는 뚜렷하지 않았다. 잠시 후 이환이 곧게 자란 침엽수 사이로 멀어지자 그녀도 알리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불을 피우려면 장작이 있어야 했다.
* * *
이환은 산등성이 너머가 검푸르게 변할 때쯤 돌아왔다. 그는 어깨에 작은 산양 한 마리를 지고 있었다.
그는 진서하가 피운 모닥불로 다가오며 말했다.
“고원성 주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익숙한 지형이에요. 내일은 산에서 내려가 마을이나 도시를 찾아보도록 하죠.”
그가 가져온 산양은 가져올 때부터 피와 내장을 제거한 채였는데, 진서하가 어떻게 했느냐 물어보니 그는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돌칼을 꺼내 보였다. 맨주먹으로 돌을 깨 다듬어 썼다는 것이다.
“···손재주가 좋네요.”
“예전에 산에서 혼자 지낸 적이 있습니다. 수련의 일환이었죠. 그땐 단검 하나가 있긴 했는데, 그리 질 좋은 물건이 아니라 금방 못 쓰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돌을 다듬어 쓰는 법을 익혀야 했습니다.”
이환은 그 돌칼로 고기를 자르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서걱서걱 고기가 찢어지다시피 썰리는 걸 바라보던 진서하가 손을 내밀었다. 이환이 문득 그 손을 보고 자연스레 돌칼을 넘겨주자, 그 돌칼은 그녀의 손안에서 예리한 신검이라도 된 듯 휘리릭 회전하고는 쏵쏵 살과 가죽을 분리해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능숙하게 고기를 해체한 진서하가 돌칼을 돌려주며 말했다.
“내 스승님도 수련의 일환이라며 날 어느 깊은 산속에 떨어뜨린 적 있었어요. 즐거운 수련이었죠. 나만의 움집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었거든요.”
“···재미있었다고요?”
약간 떨떠름한 이환의 반문에 진서하는 멀뚱멀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소협은 재미없었나요?”
“···아, 예. 재밌었죠. 그, 뭐냐. 일부러 시간을 내 야영하는 사람들도 있다지 않습니까? 특별한 취미인 셈이죠. 듣자 하니 장가상회에서 그런 물품을 팔기도 한다더군요. 일인용 천막 같은···”
이환은 애써 떨떠름한 기색을 지우고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그런 이환을 보며 진서하는 살며시 작은 미소를 띠었다.
[···야영이 재밌는 사람도 있어요?]그때 알리사의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진서하는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 상체를 일으켜주며 상태를 살폈다. 알리사는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물 좀 줘요.]“물? 여기 있다.”
이환이 물주머니를 내밀었다. 무림맹 뇌옥을 나올 때 용케 챙긴 모양이었다. 그 물주머니를 입에 기울여주자 알리사는 꼴딱꼴딱 달게 물을 마셨다.
물을 다 마신 그녀는 옷소매로 입가를 훔치는 걸 본 이환이 물었다.
[여기 고원성. 원래 우리 있던 곳에서 엄청 먼 곳. 이거 어떻게 했냐?] [···포탈이라는 강력한 주문이에요. 어지간한 마술사는 꿈도 못 꾸고, 만신전 사제들도 쉽게 사용하지 못하는 주문이죠. 하지만 헥토르 그 자식이 단숨에 로마로 가네 어쩌네 한 것과는 달리 역시 그 정도 주문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제가 주문의 방향을 바꾼 덕분에 이곳으로 날아온 거죠.]이환은 가만히 그 말을 듣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쪽에 뭐가 있는 줄 알고 여기로 방향을 잡았나?] [뭐가 있든 로마에선 멀어지잖아요? 전 그거면 충분했어요···]더 질문하려던 이환은 그녀의 호흡이 조금 가빠진 것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말을 많이 할 상태가 아닌 듯했다.
그러나 알리사는 쉬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제 제가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이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알리사는 곁에 있는 진서하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요.]알리사의 팔을 주물러주던 진서하는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이환과 눈을 마주쳤다. 이환은 뭔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고, 그녀는 다시 알리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 궁금한 게 있니?”
알리사는 금세 안색이 창백해지는 와중에도 꼭 대답을 듣겠다는 듯 진서하와 이환을 바라보았다.
[이미 제 이야기를 들어서 알겠지만, 전 가진 게 없어요. 가진 능력도 이 몸뚱이 하나 보살피기 힘들고요. 그나마 로마에 있는 아버지의 유산도 이미 갈기갈기 찢어져 다른 원로와 장군들이 집어삼켰겠죠···]의아해하던 진서하와 이환은 금방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깨달았다.
[···전 두 분께 드릴 게 없어요. 그리고 이제 티폰의 아이들은 물론이고 헥토르의 힘도 보셨으니 아시겠죠. 제 일이 그냥 집 잃은 고아를 돕는 것과는 다르다는 걸요··· 그, 이제 그만 하셔도 이해해요.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도와주신 것만도 감사하죠. 하지만 제겐 두 분께 드릴 아무 보상이 없고, 두 분도 이젠 선의만으로 절 돕기엔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을 테니···]말이 이어질수록 알리사의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본래 두 사람이 왜 자신을 도와주는지를 물어보려던 그녀는, 스스로 말을 하면 할수록 그럴만한 이유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 두 사람이 자신을 버리고 떠나더라도 붙잡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이미 열차와 무림맹에서 두 번 그녀의 목숨을 구했다. 로마에서였다면 그녀 스스로 노예를 자처해 목숨값을 치르려 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남은 세월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오륙 년 정도. 그나마도 마지막 이삼 년은 거의 누워만 있을 터였다. 그러니 노예가 된다 해서 값을 다 치를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서질 않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녀는 두 사람에게 대가를 치를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목소리도 기어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어째선지 모닥불을 향한 시야가 뭉글뭉글 어지러워졌다.
[···그러니까, 저기··· 두 분께는 정말 감사하고··· 또··· 괜히 저 때문에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죄송하고··· 만약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시켜주시면···] [그만.]입술을 우물거리며 겨우겨우 말을 이어가던 알리사가 고개를 들었다.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는 이환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모닥불 불빛이 닿아 불그스름했다.
그가 말했다.
“내가 어릴 때 도적들에게 습격당한 적이 있었어.”
이환은 모닥불 불길 속에서 과거를 보는 듯 말을 이어갔다.
“도적들이 습격하기 힘들도록 상인과 여행객들이 뭉쳐가던 일행이었는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공격당한 거였지. 난장판이 벌어진 가운데 아버지는 날 마차 안에 숨기셨어. 본인이 숨을 수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나만이라도 살리고 싶으셔서 그러셨지.”
진서하는 부드럽게 알리사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귀에 이환의 이야기를 작게 속삭여 주었다. 그녀가 중원 말을 못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 좁은 공간 속에서 들리는 거라곤 죽어가는 사람들 비명뿐이었는데··· 어느 순간 비명이 끝났어. 그 도적들이 갑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멈춘 건 아니고, 지나가던 어느 검객이 그들을 소탕한 거였지.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었지만 그 검객 덕분에 나와 아버지는 살아남을 수 있었어.”
이환은 자기 턱을 쓰다듬었다. 그 턱에 수염이 까슬까슬한 것이, 그때 그 검객과 지금의 자신이 비슷한 나이가 아닐까 싶었다.
“···그 검객은 돈을 받고 나와 아버지가 이모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지켜주기로 했어. 물론 돈이라고 해봐야 그렇게 많지도 않았지. 우리가 왕후장상도 아니고 돈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었겠어? 하지만 그는 그걸로 충분했던 것 같아. 중간에 동료를 잃은 도적단 수십이 쫓아왔는데, 도망치기는커녕 우릴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후 홀로 그들과 맞섰지.”
불길을 바라보던 이환은 피식 웃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내가 자라면서 하나 깨달은 점은, 다른 사람이라면 그때 그냥 우릴 버리고 도망치는 걸 선택할 사람이 훨씬 많다는 거였어. 아무리 무공을 익혀 고수가 되더라도 칼이 박히지 않는 건 아니야. 한순간 실수로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 게 이곳 서부의 무림이지. 하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고 도적들을 향해 달려갔어.”
이환은 불길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알리사와 눈을 마주쳤다.
“이후에 그는 무사히 그 도적들을 모두 물리치고 돌아왔어. 그리고 그것에 관해 돈이나 뭔가를 더 요구하지 않았지. 아마 그에게 중요한 건 돈이 아니었기 때문일 거야. 어떤 사람들에겐 당장 손에 쥐어지는 금은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으니까··· 나중에 일이 마무리되고 그가 떠나며 나한테 해준 말이 있어. 뭔 줄 알아?”
[···뭔데요?]“착하게 살라고 하더군.”
이환은 씨익 웃었다. 보기 좋은 미소였다.
“난 그렇게 살기로 했어. 그리고 얼마 전, 죄 없는 아이가 쫓기는 걸 보게 되었지. 그러니 네가 해줄 말은 한마디면 돼.”
[···한마디요?]“고맙다는 말이면 충분할 것 같군.”
[···그건 이미 했는데요?]그는 조금 더 크게 웃었다.
“그래. 그러니 이미 충분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