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56)
진서하 외전 12화
모닥불의 불그스레한 불빛이 흔들거렸다.
해가 진 지 한참이라 주변이 몹시 어두웠다. 그 작은 모닥불 하나만으로 거기 모여앉은 세 사람을 환히 비추기엔 많이 모자랐다. 물론 그래도 그 불빛이나마 있어서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곳에서 빛나고 있는 건 모닥불만이 아니었다. 적어도 진서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알리사는 이제 훌쩍거리고 있었다. 지금 이 감정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만 벙긋거리면서 뚝뚝 굵은 눈물을 흘렸다. 진서하는 그런 알리사를 가만히 끌어안아 주었다. 잠시 그곳에는 아이가 훌쩍거리는 소리와 모닥불의 장작이 타닥이는 소리만 맴돌았다.
반대편에서 미소를 띤 채 두 사람을 바라보던 이환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아차 하는 소리를 내며 급히 모닥불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에는 조금 전 걸어놓은 산양 고기가 있었다.
“오, 잘 익었군.”
이환은 돌칼로 잘 익은 부분을 슥슥 자르며 로마의 언어로 말했다.
[고기 익었다. 지금 안 먹으면 내가 다 먹을 것.]진서하의 품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던 알리사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이환이 내민 산양 고기가 보였다.
[이거 먹어봄? 대산맥 뿔산양 고기 끝내줌.]눈물 방울방울 맺힌 눈으로 멍하니 고기를 바라보던 알리사는 그 어딘가 어설픈 로마 말에 픽 웃고 말았다. 그 웃음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환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흠. 이쪽 말에 울다 웃으면 어디에 털이 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털이 나요? 어디에요?] [그야···]자연스레 대꾸하려던 이환은 또 다른 시선을 느끼고 말을 멈췄다. 알리사 곁에 있는 진서하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약간 냉기가 느껴지는, 마치 여자애한테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거냐는 듯한 눈이었다.
[···아, 아니다. 알리사는 굳이 알 필요 없는 말. 신경 쓰지 말고 고기 먹어라.]이환은 얼른 말을 돌리며 모닥불에 걸린 고기를 열심히 썰었다. 알리사는 그런 이환과 진서하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하지만 진서하도 굳이 그 눈빛에 대꾸해주지 않고, 말을 돌렸다.
“내일 찾아갈 마을에 개방 지부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아, 그렇군요. 지금 남강성에선 양 선배가 걱정하고 있겠군요.”
진서하는 고개를 살살 가로저으며 웃었다.
“글쎄요. 양 삼촌은 제 걱정보다는 본인 걱정 때문에 난리일걸요. 아마 지금쯤 스승님에게 보낼 변명을 쓰느라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지 않을까요?”
“예? 아니, 그래도 그분이 무림에서 항룡위개라 불리는 명사이신데···”
“내 말 믿어요. 양 삼촌은 항룡위개가 아니라 항룡황제라 불려도 크게 변하지 않을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이 소협도 불리는 이름이 있지 않았나요?”
진서하의 질문에 이환은 앗 하는 소리를 내며 쑥스러워했다.
“아니 그, 뭐··· 대단치 않습니다···”
“쇠를 끊어내는 손이라. 사혈도라는 자와 싸우고 얻은 별호라고 했죠? 그자는 어디서 만났나요?”
“아 그게 말입니다. 제가 감산 부근의 목장을 지나가던 때였죠···”
그렇게 이환이 단강수라는 별명을 얻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되었다. 진서하가 거기에 가볍게 맞장구를 쳐주자 이야기는 길게 이어져갔다.
두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동안 그 사이에 있는 알리사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두 사람을 둘러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뭔가 알겠다는 듯 혼자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그렇게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이 뭐가 뭔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시선을 내려 자기 손에 들린 산양 고기를 바라보았다.
특별한 양념은커녕 소금조차 치지 않은 야생의 고기였다. 예전에 로마의 귀족으로 살 적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음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알리사는 그 고기를 들어 맛있게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어쩐지 아무 걱정 없던 시절의 맛이 나는 것 같았다.
* * *
“으으··· 시발··· 난 죽었다··· 이번엔 진짜 목이 매달릴 거야··· 그 양반은 진짜 매달 거라고···!”
개방 남강지부 지부장 무향랑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삐딱하게 서서 한심스러운 눈으로 자기 상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상관은 자기 머리를 감싸 쥔 채 탁자 위에 엎드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웬 개판이 벌어졌고, 거기 이 한심한 상관이 엮였다는 말에 남강지부는 물론 주변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인력은 모조리 끌어모아 찾아왔더니 저 꼴이었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만지작거리다가 그 상관의 의자를 툭 차면서 말했다.
“자꾸 죽는다는 소리는 그만하고, 설명 좀 해주시죠?”
“뭐, 뭐? 뭔 설명?”
“···지금 상황 설명이요. 뭐가 어떻게 된 건데요?”
상관, 양굉은 그제야 고개를 번뜩 들었다.
“내가 아무 설명 안 했냐?”
“안 했는데요. 어떻게, 데려온 애들은 돌려보낼까요?”
“···그래. 돌려보내. 무림맹이랑 싸울 것도 아니니까.”
무향랑은 양굉이 공황에서 빠져나오는 듯 보이자 방 한쪽에서 대기하던 부하에게 휙휙 손짓했다. 대충 밖에 대기하는 인력을 돌려보내라는 신호였다.
그 부하가 밖으로 나간 뒤, 무향랑은 양굉의 반대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신나게 내리는 비 덕분에 축축해진 치마 끝을 툭툭 털었다.
“이제 차분히 설명 좀 해 봐요. 그 양반이면, 그분 말하는 거죠?”
“그분은 개뿔···”
“그분 덕분에 고수도 됐으면서 왜 그러세요?”
양굉은 샐쭉한 눈으로 무향랑을 노려보았다.
“그 양반이 나한테 실험한 영약이 얼마나 되는지 알면 그런 소리 못 할 거다.”
“덕분에 장풍도 펑펑 쏘면서 무슨.”
그녀가 피식 웃으면서 한 말에 양굉의 눈매가 꿈틀했다.
“···너 오늘 말이 좀 꼽다.”
무향랑은 탁자 위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괴며 대꾸했다.
“그럼 안 꼽게 생겼어요? 방주님 큰일 난 줄 알고 지부를 탈탈 털어 왔더니 여기서 혼자 궁상이나 떨고 있는데.”
“야, 인마··· 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듣고 있어요.”
양굉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감싸 쥐었다.
“···서하가 사라졌다. 이상한 로마 놈들 술법에 휘말려서. 자칫 잘못하면 저기 건너 로마까지 찾아가야 할지도 몰라.”
“그리고 그걸 그분에게 어찌 설명할지 참 궁색하다 이거군요.”
“···그래.”
한숨 비슷한 양굉의 대답에 무향랑은 뚱한 어투로 물었다.
“너무 쓸데없는 걱정 아닌가요? 그 진서하라는 친구도 어른이잖아요. 제가 듣던 대로라면 그녀도 어디 가서 낭패 볼 실력은 절대 아닌데요.”
“그야 그렇지만··· 아니, 사실 나도 걔는 그렇게 걱정되진 않는데··· 그래도 그 양반이 알게 되면···”
무향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그냥 있는 그대로만 보내세요. 그분이 알아서 하시겠죠.”
“그, 그렇겠지?”
양굉은 어떻게든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싶은 듯했다. 그런 방주의 모습을 보며 무향랑은 고개를 살살 가로저었다. 평소 개방의 업무를 처리할 땐 굉장히 냉철한 사람인데, 이상하게 ‘그 양반’이라는 사람과 얽히면 참 옹졸해지고 비굴해졌다. 개방에 입문해 처음 이런 모습을 보았을 땐 이중인격이라도 되는 줄 알았을 정도였다.
양굉이 두 손을 쪼물딱거리며 중얼거렸다.
“괘, 괜찮겠지? 그래, 이제 서하가 애도 아니고··· 이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
“누가 뭘 이해해 준다는 말이오?”
그때 누군가 양굉과 무향랑이 있는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양굉은 괜히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무림맹주 단칼은 그런 양굉을 이상하단 눈으로 바라보며 안으로 들어왔다.
“···맹주.”
“그 누군가는 이해해 줄지 몰라도, 우리 무림맹은 쉬이 이해해 줄 수가 없구려.”
단칼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의 뒤에는 신검단주 하연이 초췌한 얼굴로 시립하고 있었다. 둘의 모습을 본 양굉도 지금까지의 경박함을 지우고 안색을 굳혔다.
단칼이 말을 이었다.
“본단이 습격당해 많은 맹도가 죽거나 다쳤고, 전각이 파손되었으며, 수감자들은 탈출했소. 이게 이해해 줄 수 있는 일이오?”
“맹주, 일단 진정하고 대화를 합시다. 그 아이들이 일부러 탈출하고 싶어서 탈출한 게 아니지 않소. 그리고 그 로마인들의 습격은 전혀 계획된 부분이 아니었소.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
단칼이 검지를 들어 양굉의 말을 막았다.
“그만. 무림맹은 그 로마인들과 수감자를 체포하기 위해 추적대를 편성할 것이오. 로마인들은 맹을 농락한 대가를 치를 것이고, 도망친 수감자들 또한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겠지.”
양굉은 눈썹을 찌푸렸다.
“로마인들이야 생포한 자들이 있으니 그 잔당을 쫓는다 쳐도, 아이들은 어디 간 줄 알고 쫓겠단 말이오?”
“우리에겐 우리의 방법이 있소. 그리고 그 방법에 따르면 당신이 그렇게 아끼는 수감자들은 서쪽으로 도망쳤다는군.”
그 대답에 멍한 표정을 짓던 양굉이 자기 이마를 쳤다.
“그렇군, 주술사들이 있었군. 제길.”
“개방과 장가상회는 더 개입하지 마시오. 이제 이 일은 동무림맹의 위신이 걸린 사건이 되었으니까.”
단칼은 그렇게 자기 할 말만 하고 휙 몸을 돌렸다. 자기 이마를 쓰다듬던 양굉이 급히 외쳤다.
“추적대 같은 동무림맹 병력이 서부로 이동하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소!”
뒤돌아 떠나던 단칼은 그 말에 우뚝 멈췄다. 그리고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우린 더 이상 양보만 하지 않을 것이오.”
맹주와 신검단주는 그 짤막한 말만 남겨두고 전각을 떠났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양굉은 그가 떠나자 다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런 시발! 진짜 전쟁을 하겠다는 거야 뭐야!”
“···그분을 언급했으면 되지 않았나요?”
조용히 있던 무향랑이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양굉이 신경질을 냈다.
“그 양반이 무슨 신대륙의 황제냐? 그 양반 이름만 꺼내면 다 되게? 애초에 이딴 정쟁과 흐름이 싫어서 떠돌아다니는 양반이야. 괜히 그 이름을 방패로 쓰다가 나중에 걸리면? 나만 뒈지는 거지.”
그 대꾸에 무향랑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뭐, 그래도 진서하가 로마에 있지 않다는 건 알았네요. 그나마 수확이라면 수확인 셈이군요.”
그 말에 양굉이 다시 이마를 쳤다.
“아! 그래! 그럼 서신 안 보내도 되겠지?”
“그래도 한 통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동안에도 정기적으로 소식을 전달해 드렸잖아요?”
“···그것도 그렇군. 제길. 보낼 서신이 한 통이 아니잖아.”
양굉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성큼성큼 문을 나섰다. 그러다가 휙 뒤돌아 무향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하냐? 가서 일해야지.”
“···넵, 방주님. 갑니다.”
그날 개방의 남강지부에서 서쪽을 향해 전서구가 날았다. 그 전서구는 몇몇 중간 다리를 건너 서부 해안을 향할 터였다.
하지만 그날 남강성에서 날개를 편 전서구는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 * *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쏟아지고 있었다.
[쿨륵, 쿨럭···]헥토르는 문득 가슴이 답답한 느낌에 왈칵 피를 토했다. 시커멓게 죽은 피가 흙바닥에 쏟아졌다. 그 비에 섞여 흐려지는 핏물과 가슴팍 한가운데 선명한 손바닥 자국을 보는 그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피식피식 웃던 그는 비틀거리던 몸을 바로 세웠다. 남강성 도시 밖에 마련해둔 은신처에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비록 무림맹을 습격한 부하들은 모두 잃었더라도 아직 그곳에 남은 부하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바로 알리사는 그들이 세워둔 포탈을 자기 마음대로 조작해 저 먼 서쪽으로 도주한 상태였다. 지금부터 다시 부지런히 추적해 나간다면 다시 그 꽁무니를 붙잡는 게 그리 어렵진 않을 터였다.
[···]헥토르의 걸음이 멈췄다. 그와 부하들, 유피테르의 아이들이 마련한 은신처는 풀숲에 뒤덮인 작은 동굴이었다. 그런데 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어야 할 부하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멈췄던 그의 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중간에 밟힌 물웅덩이가 철벅거렸다.
동굴 앞에 선 헥토르의 눈에 안쪽 풍경이 들어왔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모닥불을 두엇 피워놓고 스튜 따위를 끓여 먹고 있다가, 그를 발견하고 움직임을 멈춘 채였다.
헥토르의 눈이 그들 중 하나를 향했다.
[···아킬레스.] [오, 형제여. 드디어 오셨군!]다른 이들처럼 검은 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그를 반겼다.
[자네가 너무 늦어서 기다릴 수가 없더군. 신녀의 위치는 찾았겠지?]그 남자의 눈에서 검붉은 빛이 사악하게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