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57)
진서하 외전 13화
* * *
개방의 남강지부에서 출발한 전서구는 중간다리 서넛을 거쳐 서부 해안에 도착했다. 이틀 만이었다. 아무리 긴급으로 사용하는 전서구라지만 대산맥 동부에 사람이 얼마나 사는지도 제대로 모르던 십오 년 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한 수준의 정보전달 속도였다.
적세인은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손에 들린 조그만 쪽지를 바라보며 새삼스레 그 세월을 느꼈다.
“뭐랍니까?”
그 쪽지를 가만히 보고 있자 옆에 있던 산호가 그녀를 재촉했다. 적세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십오 년 전 촐랑거리던 청년 순찰대원은 이제 수염이 덥수룩해져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얼마 전 셋째의 돌잔치를 했던가.
“왜 그렇게 보십니까?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산호의 질문에 적세인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히 세월이니 어쩌니 하는 소리 해봐야 산호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뻔했다. 이제라도 괜찮은 친구 하나 잡아서 혼인하라는 소리나 하겠지. 본인이 혼인해보니 정말 행복하다고, 맹주님도 꼭 그 행복 느꼈으면 좋겠다고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이를 악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적세인은 뭐라 말하기가 궁색해서 그냥 쪽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산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쪽지를 받아 빠르게 읽었다. 거기엔 로마인들의 열차와 동무림맹 습격, 그리고 그 대응으로 결성된 추적대에 대해 간략히 적혀 있었다.
“···개방에서 긴급으로 보낼만한 소식이네요. 단칼 이 친구, 이번엔 좀 경솔한데요.”
“어쩔 수 없겠지. 원주민 문파와 상인들을 중심으로 동무림맹의 존립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고 있었어. 그런 와중에 본단이 공격당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보여야만 했을 거야.”
산호는 알만 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긴 하군요. 거기 반대쪽 사람들한텐 단칼 그 친구 별명이 장가상회와 서부의 개라죠? 거기도 자기들끼리 권력 싸움하는 게 참 무림맹스럽네요.”
무림맹주 적세인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관자놀이를 만지작거렸다. 골치가 아팠다.
“그 추적대가 어디까지 움직일진 모르겠지만, 만약 고원성을 넘는다면 우리도 대응해야 해.”
“···원로원이 신나서 날뛰겠군요. 섬 부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요.”
“아마 원로원과 제가에서도 지금쯤 소식을 들었을 거야. 회의를 소집하겠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이후 안으로 들어온 무사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원로원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산호는 혀를 내두르며 적세인을 돌아보았다. 원로원의 반응이 참 뻔하다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적세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적세인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산호의 등줄기를 스쳤다.
“···왜 또 그렇게 보십니까?”
“원로원이 원하는 대로 해주자고. 우리도 전투부대 하나를 파견하는 거야.”
“아, 먼저 선수를 치자는 거죠?”
“그래. 대신 가서 최대한 충돌을 피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해. 로마인 도적들이 함부로 날뛴 대가를 치르게 해주는 걸로 끝날 수 있게.”
“···그 말을 왜 절 보고 하십니까?”
적세인은 싱긋 웃었다.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와 얼굴을 이리저리 종횡하는 흉터들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띤 그녀는 여전히 미인이었다.
“요즘 자꾸 일도 없으면서 야근하며 집에 안 들어간다지? 네가 그렇게 이 일을 사랑하는 줄 몰랐다, 산호. 그러니 특별히 이번 일도 너에게 맡기지.”
그녀는 그가 있어 든든하다는 듯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집무실 문을 향했다. 졸지에 외근을 하게 된 순찰대주 산호는 뒤에서 뭐라 대꾸는 못 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때 문득 생각났다는 듯 적세인이 몸을 돌렸다.
“갑자기 생각났는데, 지금 누가 고원성 일대에 가 있지 않나?”
산호는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남궁빈 그 친구가 지금 거기 있을 겁니다.”
“···남궁의 소가주가 왜 거기 있지?”
“왜긴요. 순찰대원이니 순찰 중이죠.”
적세인은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원성 지부에 연락을 취하도록. 본단의 지원이 있기 전까진 이 사태에 개입하지 말라고.”
“옙. 이쪽도 긴급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진짜 제가 갑니까? 아니 별건 아니고··· 제가 요즘 무릎이 좀 아프고 그래서··· 셋째가 돌잔치 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고···”
“말 타고 가는데 무릎이 무슨 상관이야. 가라면 가.”
“맹주님, 아니, 적 선배··· 제발···”
산호는 적세인과 함께 회의장으로 이동하며 계속 징징거렸다. 물론 그래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 * *
남강성에서 날개를 편 전서구는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개방에서 날려 보낸 것 말고도 많아서 무림맹 원로원이나 제씨 세가, 신사천 상행조합은 물론 심지어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이는 감산성이나 천후성에도 소식이 전달되었다. 그만큼 현 동무림맹의 움직임은 예민한 사항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한 전서구는 분명히 개방에서 보낸 전서구였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내용은 한 무림의 중요한 정세보다는 어느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그 서신 말미에는 양굉의 추신도 붙어 있었다. 자신이 그딴 로마의 술법을 어찌 알았겠나,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아예 로마로 날아가진 않은 것 같다, 서부 어딘가로 떨어진 듯한데 동무림맹 주술사들이 추적하는 걸로 봐선 죽진 않은 모양이다 등등 약간 두서없이 길게 주절거리는 느낌의 추신이었다. 본 내용보다 그 추신이 길 정도였다.
가만히 그걸 읽던 이는 곧 서신을 내려놓고 품에서 작은 종이와 연초 주머니를 꺼내 말았다. 느긋하기만 능숙한 손놀림에 금방 연초 한 대가 만들어져 그의 입술에 물렸다. 이후 그는 입에 문 연초 끝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곧 희뿌연 연초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그렇게 잠시 서신을 바라보며 연초를 태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한 햇빛이 창가로 들어와 방안을 밝혔다. 침대와 탁자 등이 놓인 아늑한 방이었다. 선명한 햇살에 방안에서 흐르던 연초 연기와 희미한 먼지가 반짝거렸다.
연초를 문 채 그 풍경을 바라보던 그는 곧 몸을 일으키며 의자에 걸쳐 두었던 외투를 챙겼다.
그때 침대 위 이불 뭉치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시려고요?”
“제자 녀석이 이상한 일에 휘말린 모양이오.”
이불이 꿈틀거렸다. 연기와 먼지 따위를 비추던 햇살이 이제 어떤 아름다운 곡선을 선명하게 비췄다.
“···가지 말라고 하면 안 되겠죠? 그러니 언젠가 또 만나자고 할게요.”
그는 외투를 걸치고 문을 나서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잘 지내시오.”
방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자 침대 위에선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창밖에서 히히히힝-하며 긴 말 울음과 두두두 묵직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흐린 유리창 너머로 옅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말과 사람 한 쌍이 비쳤다.
창 안으로 스며드는 햇살은 여전히 따사로웠다.
* * *
어딘지 모를 고원지대에서 하룻밤을 보낸 진서하와 이환, 알리사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별다른 침구류도 없이 서로 끌어안고 밤을 보내니 뼈마디가 시렸다. 그나마 알리사는 두 사람 사이에서 잔 덕분에 상태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이후 반쯤 꺼진 모닥불을 다시 피워 전날 먹고 남은 산양 고기를 데워먹은 일행은 곧바로 사람의 흔적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리사는 뒤로 축축 처지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기도 한 게, 진서하와 이환은 모두 경지에 이른 무공 고수였기에 알리사와는 기본 체력부터 걸음을 디디는 방식까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번갈아가며 알리사를 업은 채 뛰기로 했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알리사가 진서하의 등에 업힌 채 달려가다가 문득 그리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옆에서 달리던 이환이 대뜸 소리쳤다.
[죄송 아니다! 어제 내가 뭐라고?]그 목소리에 알리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곧 무슨 생각에서인지 진서하의 옷깃을 꽉 쥔 채 이환이 한 것처럼 큰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다고요! 그러니까, 그, 뭐더라···]“고맙습니다.”
그녀를 업고 있던 진서하가 작게 중원 말을 속삭여주자 알리사는 알았다는 듯 다시 크게 외쳤다.
“고맙슴미다!”
옆에서 달리는 이환이 그 어설픈 중원 말이 재밌다는 듯 으하하 웃었다.
“목청 좋네! [더 크게!]”
“고맙슴미다-!”
[발음 엉망! 더 크게!]그 순간 진서하가 큰 바위 하나를 밟고 높이 뛰어올랐다. 알리사는 몸이 부웅 뜨는 기분을 느끼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고맙-슴-미-다-!”
“으하하하!”
이환은 그런 알리사를 보며 웃겨 죽겠다는 듯 박장대소했고, 진서하는 알리사가 떨어지지 않도록 움직임을 조절하며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녀도 자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건 어쩌지 못했다.
그런 소란과 함께 세 사람은 바위와 나무 사이를 나는 듯 달렸다. 그렇게 달리기를 한참. 어느 순간 그들의 앞에는 산지가 사라지고 넓은 평지가 펼쳐졌다.
그 앞에서 진서하가 걸음을 멈췄다. 조금 늦게 따라붙은 이환이 헥헥거렸다.
“뭐, 뭡니까··· 허억··· 무, 무슨 뜀박질이··· 헉, 허억···”
“경공술을 배우지 않았군요.”
“예? 경, 허억··· 경공술이요? 아··· 하악··· 예, 뭐··· 허억···”
이환이 숨을 헐떡거리거나 말거나 진서하는 등 뒤의 산지와 평지, 태양의 방향 등등을 살피기 시작했다.
대신 그녀의 등에 업힌 알리사가 이환을 보며 말했다.
[언니가 오빠보다 훨씬 센 모양이죠?]“뭐? 인마··· 헉, [꼭, 그런 거···] 허억··· 아이 씨··· [꼭 그런 건, 아니라고···!]”
[하지만 언니는 숨결이 평온한걸요.]무릎을 잡고 헥헥대던 이환은 곧 허리를 쭉 펴며 호흡을 가라앉혔다.
[꼭 그런 건, 아니다. 길고 짧은 것. 대봐야 아는 것.]알리사는 애써 호흡을 잡느라 붉어진 이환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물론 오빠도 신기한 건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그렇게 날아다녀요? 난 두 사람이 내가 모르는 주문이라도 쓰는 줄 알았어요. 무공이라는 걸 배우면 다 그렇게 되나요?] [잘 배우면. 너도 할 수 있다.]그 대답에 알리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마치 고수가 되어 훌쩍 날아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듯했다.
그때 주변을 살피던 진서하가 말문을 열었다.
“이제 나도 여기가 어딘지 대충 알 것 같아요. 대산맥 동쪽이군요. 북쪽으로 올라가면 고원성이 나올 거예요.”
“···꽤 한참 올라가야 할, 겁니다.”
진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발로 뛰어가려면 하룻밤 야영을 해야겠죠.”
이환의 안색이 초췌해졌다.
“···뛰어가려고요?”
그런 이환의 모습에 진서하는 싱긋 웃었다.
“가까운 곳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을 거예요. 거기서 말을 구하도록 하죠.”
“하, 하하. 제가 뭐, 꼭 힘들어서 말을 타겠다는 건 아니고···”
“아마 거기에 개방의 지부도 하나 있을 거예요. 양 삼촌에게 우리가 무사하다는 소식도 전해 줘야죠. 무림맹에 우리가 일부러 도망친 게 아니라는 것도 설명하고요.”
이환의 표정이 편안해지는 걸 본 진서하는 뒷말을 덧붙였다.
“일단 거기까진 달려가도록 하죠.”
“···아.”
잠시 후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이환은 그렇게 다시 출발할 땐 아까처럼 추해지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표정이었으나 한참이 지나서 사석원沙石原이라는 마을 간판이 보일 즈음엔 땀을 뻘뻘 흘리며 헥헥거렸다. 진서하는 중간에 속도를 늦출 수도 있었지만, 그의 자존심을 생각해 처음부터 끝까지 다름없는 속도로 달렸다.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마을 간판 앞에 선 이환은 뭔가 해냈다는 듯 뿌듯한 표정이었다. 진서하의 등에서 내린 알리사만 땀범벅이 된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세 사람은 약간 건조한 바람을 맞으며 마을 안에 들어섰다. 그런데 그 마을의 크기를 고려하더라도 인적이 너무 드물어 보였다. 마을을 둘러보는 진서하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일단 물이라도 마실 생각으로 셋은 마을 주점을 찾았다. 주점 간판이 밖에서 흔들거리고 있었기에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낡은 주렴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서는 세 사람에게 주점 안의 시선이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