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58)
진서하 외전 14화
인적이 드물던 바깥과는 다르게 주점 내부에는 적잖은 사람들이 보였다. 햇볕에 검붉게 탄 농부와 목동들이 약간 어둑한 주점 여기저기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거나, 연초를 태우거나, 골패를 치고 있었다. 그들은 낯선 이가 주렴을 걷고 등장하자 모두 하던 것을 멈추고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았다.
여행에 익숙한 진서하와 이환은 그 눈길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하지만 알리사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움츠러들었다. 항상 드루이드의 주문으로 얼굴을 감추고 다니던 것과는 다르게 지금 그녀는 본래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도 다른 두 사람보단 알리사에게 몰렸다. 이곳은 동부와 멀어 로마인도 아주 드문데, 거기에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과 왼뺨을 덮는 문신까지 더해진 알리사의 얼굴은 눈길을 끌 수밖에 없는 외모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서하와 이환은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알리사를 이끌고 주점 주인과 마주 볼 수 있는 긴 탁자로 다가갔다. 진서하가 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깨끗한 물 석 잔.”
탁자 너머 주점 주인은 어깨에 수건을 걸치고 서서 가만히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스윽 느릿한 손놀림으로 동전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탁자 밑에서 나무 잔 세 개와 큼직한 물병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물 석 잔에 동전 한 닢은 좀 많군. 실컷 드시오.”
진서하는 별말 없이 그 물병을 기울여 물잔을 채웠다. 어제부터 이환의 물주머니 하나를 아껴 마셔야 했던 세 사람은 곧 꿀꺽꿀꺽 시원하게 물잔을 비웠다.
그 모습을 본 주점 주인은 그제야 굳은 표정을 조금 풀고 질문했다.
“어디서들 오셨소?”
진서하가 대답했다.
“동쪽에서.”
“사석원엔 와 본 적 있소?”
“예전에 한 번.”
주점 주인이 털털 웃었다.
“꽤 예전이었나 보군. 난 그쪽 얼굴 본 기억이 없으니.”
“나도 여기 주인이 당신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전 주인이었던 석 씨는 사냥을 나갔다가 산사자한테 물려 죽었소. 그 양반 아들이 여길 팔고 고원성으로 떠난다기에 내가 얼른 인수했지. 벌써 한 일 년 됐군.”
“그가 죽었다고요?”
주점 주인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도질당해서 걸레짝이 된 그 양반 시체를 아들이 수습해왔소. 끔찍했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주점의 다른 손님들도 다시 각자 자기들끼리의 이야기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큰 소란은 없었고, 그저 각자 둘러앉은 사람들끼리 조용조용하게 대화를 나누거나 착착 골패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낮게 깔릴 뿐이었다. 한쪽 구석에선 누군가 비파의 현을 조정하는 듯 딩딩 작게 튕기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긴 탁자 앞에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땀을 뻘뻘 흘린 이환은 연신 물잔을 채워 비우고 있었고, 내심 목이 타던 알리사 또한 그 옆에서 꼴딱거리며 물을 마셨다. 주점 주인과 대화를 나누는 진서하만 조금 심각한 표정이었다.
“산사자가 아무리 맹수라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은 아닐 텐데요.”
“흐, 죽는데 쉽고 어렵고가 어디 있소? 죽으면 죽는 거지. 사람이 죽고 사는 건 하늘이나 아는 게요.”
주점 주인은 진서하의 질문을 대충 넘기고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마른 수건을 들어 긴 탁자를 슬슬 훑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탁자를 닦던 주점 주인은 곧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진서하를 발견하고는 멈칫 굳었다. 그 짙푸른 눈동자에 주점 주인의 표정도 살짝 굳었다. 그는 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거 처음부터 석 씨 그 양반을 찾아온 분이었군. 미안하지만 그 양반이 죽으면서 그 업무도 잠정중단되었소. 여긴 이제 개방지부가 아니요.”
“주점이 그대로 있으니 그 끈도 여전히 살아 있겠죠.”
그 대꾸에 주점 주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수건을 다시 어깨에 걸쳤다.
“이보쇼. 난 무림인들 투닥거리는 데 끼기 싫은 사람이요. 여기선 그냥 목이나 축이고 다른 마을 찾아보시오. 안 그래도 마을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소란 일으키지 말고.”
주점 주인의 태도에 진서하의 얼굴에는 약간 곤란한 기색이 나타났다. 그녀가 알기론 이 주변에서 개방의 끈이 닿아 지부라 불리는 장소는 이곳뿐이었다. 이곳이 아니면 고원성까지 가야 했고, 그럼 양굉에게 소식이 닿는 게 하루이틀 늦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루이틀 차이면 뭔가 사달이 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녀가 판단하기에 지금 동무림맹에선 사라진 자신들을 찾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맹과 장가상회 등등이 얽혀 반쯤은 짜고 치는 판이었더라도 그 당시 세 사람은 분명 무림맹의 수감자들이었고, 정식으로 인과가 발표되기 전에 사라졌으니 맹의 입장은 여전할 터였다. 뇌옥에서 농담으로 했던 말처럼 동부 무림 전체에 수배지가 풀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정말 죄수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열차에서 싸웠던 이유는 그저 위기에 빠진 사람 하나를 도우려 한 것뿐이었다. 이후 얌전히 맹의 구속을 받아들였던 건 굳이 오해를 사가며 그들 전체와 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괜히 큰 말썽을 일으켜 스승에게 안 좋은 소식을 보내기 싫었던 것도 있었다.
그러니 개방을 통해 동무림맹에게 소식을 전달하려는 것은 그녀 나름대로 맹을 존중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무림맹이 그녀의 입장을 확인한 후에도 자존심 등을 내세워 세 사람을 구속하려 한다면, 그땐 그녀도 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녀 등에 매인 검은 장식이 아니었다.
어쨌든 서로가 선을 넘어 검을 겨누기 전까진 대화를 해봐야 했다. 그리고 진서하 생각엔 이 정도만 해도 양굉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무림의 분쟁을 완만하게 해결하는 건 개방의 전문이었으니까.
“마을 분위기가 왜 좋지 않습니까?”
진서하가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벌컥벌컥 물을 마시고 숨을 고르던 이환이 대뜸 질문했다. 주점 주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말문을 열었다.
“방금 석 씨가 산사자에게 물려 죽었다고 했지? 그놈 때문이요.”
“예? 그 석 씨란 분이 죽은 게 일 년도 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주점 주인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긁적거렸다.
“그렇소. 그 이후에도 그 귀신같은 놈이 잡히질 않았거든. 마을 분위기가 엉망인 것도 그놈 때문이요. 석 씨를 빼고도 그동안 물려 죽은 사람이 다섯은 되거든.”
“혹 사냥꾼은 고용해 보셨습니까? 동부엔 실력 좋은 사냥꾼이 꽤 많은데요.”
“당연히 고용해 봤지. 지금까지 세 명이나 고용했었소. 처음엔 고원성의 사냥꾼을, 다음은 그쪽 말대로 동부 출신 사냥꾼, 마지막엔 어디더라, 무슨 느므느 부족 사냥꾼이었지.”
“그 셋이 왔음에도 산사자가 그대로 있다는 건···?”
“앞에 둘은 죽었고, 세 번째 사냥꾼은 도망쳤소.”
이환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이상하군요. 산사자가 맹수는 맞지만··· 그래도 무슨 불곰처럼 무지막지한 놈은 아닌데요.”
주점 주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도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수다. 게다가 마지막에 도망치던 사냥꾼 자식은 여기 무슨 악마가 떠돌고 있으니 모두 떠나야 한다느니 어쩌느니 지랄을 해서 더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지···”
그때 갑자기 와장창 병 깨지는 소리가 터졌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는 한 남자가 불그스름한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 새끼야! 넌 뭔데 그리 신나서 비파를 튕기고 있어!”
“흠.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하오. 난 그냥-”
“미안? 미안하면 다냐, 이 새꺄!”
주점 주인은 그 남자가 비파인의 멱살을 잡는 걸 보고는 얼른 탁자를 넘어 달려가 그사이에 끼어들었다.
“아이고, 이 녀석이 또 난리네. 그만 좀 해라, 이놈아!”
“아저씨는 좀 비켜요! 저 떠돌이 새끼는 뭐가 신나서···”
남자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자 곧 주점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몇몇 일어나 그를 말렸다. 그 와중에 잔과 병이 굴러떨어져 깨지고 난리였다.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던 알리사가 중얼거렸다.
[분위기 끝내주네요.] [···그러게.]소란은 난동을 피우던 남자가 씩씩대며 주점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주점 주인은 그 후에도 깨진 병을 쓸고 치우느라 분주히 움직이느라 한참이 지난 후에야 다시 탁자 쪽으로 돌아왔다.
“아, 미안하외다. 뭐 더 필요한 거 있으시오?”
이번엔 이환이 동전을 꺼냈다.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주실 수 있습니까? 오전 내내 움직였더니 배가 고프군요.”
“흐, 그럼 아무 곳이나 자리 잡고 앉아 계시오. 먹을 걸 차려오지.”
세 사람은 한쪽 구석 탁자에 둘러앉았다. 그래도 주점 주인이 부지런한 사람인지 탁자는 깔끔했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이환이 말문을 열었다.
“마을 바깥쪽에 마구간 하나가 있는 것 같더군요. 거기서 말을 구해 오후 내내 달리면 밤중엔 고원성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는 말끝을 늘이며 진서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듣고 있어요.”
“···물론 진 소저도 해가 진 후 말을 달리는 게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걸 아시겠죠. 말이 삐끗하면 발목이 부러질 수도 있고, 고원성에 도착할 때쯤엔 너무 지쳐 죽을 수도 있고요.”
진서하는 계속 듣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흰 양 선배에게 얼른 소식을 전달해야 하죠. 양 선배가 갑자기 사라진 저희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겠습니까. 무림맹에서도 황당해하고 있을 테고요. 어쩌면 바다 건너 로마까지 저희를 찾는다고 난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해봐요. 화내지 않을 테니까.”
이환은 그녀의 말에 히죽 웃음 지었다.
“그 식인 산사자, 저희가 잡아줍시다. 대신 이곳 주인에겐 개방의 업무를 다시 시작해 달라고 부탁하고요.”
진서하는 조용히 질문했다.
“산사자 사냥이 고원성에 가는 것보다 빠르리라는 건 어떻게 나온 결론인가요? 사냥에 며칠이 걸릴 줄 알고요?”
“그야 제가 주인장을 설득해 당장 소식 먼저 전달해 달라고 할 거니까요. 그럼 굳이 고원성에 가지 않아도 되겠죠? 오히려 진 소저 스승님에 대한 소식까지 산사자 사냥을 하는 동안 기다리면 되니까 일거양득이라고 할 수 있죠.”
“주인장을 설득할 수 있겠어요?”
이환은 말없이 웃으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당장에 주방 쪽에서 덜그럭거리고 있는 주점 주인에게 다가가 뭐라 작게 말을 걸었다. 주점 주인은 처음엔 이 무슨 미친놈인가-하는 눈으로 이환을 바라보다가, 곧 뭔가에 혹했는지 쑥덕쑥덕 속삭이듯 대화를 나눴다.
잠시 후 이환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해주기로 했습니다. 이전 주인의 전서구들 남아있으니 서신을 작성해주면 바로 보내주겠다더군요.”
[해주기로 한 모양이네요? 어떻게요?]그가 주인장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진서하에게 사정을 들은 알리사가 그리 물었다. 이환은 엄지를 척 들며 말했다.
[반값에 해주기로 함.] [···반값?]알리사는 앞뒤 다 잘라먹은 그 소리에 자신의 이해력이 부족한 탓인지, 아니면 이환의 라틴어 실력이 엉망인 탓인지 생각해보았다.
“이전 사냥꾼들이 받았던 돈의 절반만 받겠다는 말이야.”
진서하의 대답이었다. 그 말에 알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이환은 하하 웃었다.
“맞습니다. 처음엔 좀 꺼리다가도 품삯이 절반이라는 말에 잘 넘어··· 어?”
웃고 있던 이환이 그제야 뭔가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처음부터 제 말대로 할 생각이었죠? 진 소저도 저와 같은 생각이었군요.”
진서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무림에서 알리사의 구음사혈을 고칠 수 있는 건 스승님뿐이에요. 더 정확히 따져보면 중원에도 방법이 있긴 하지만, 거긴 너무 머니까 넘어갈 수밖에 없죠. 어쨌든 지금 우리한텐 무림맹에 소식을 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스승님의 위치를 알아내는 거예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등에 메고 있던 검을 풀어 탁자 옆에 기대 세웠다.
“그렇다고 무작정 서쪽으로만 가봐야 오히려 길이 어긋날 수도 있어요. 스승님은 워낙 방랑벽이 심한 분이라 지금 어디를 떠돌고 계실지 몰라서요. 그러니 가능하다면 한 곳에서 잠시 기다리는 것도 좋죠. 그 남는 시간 동안 사람들을 돕는 건 더 좋고요.”
이환은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와 자신의 생각이 같았다는 것이 기분 좋은 듯 보였다. 그리고 진서하는 시선을 돌려 조금 불안한 표정의 알리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알리사의 걱정이 뭔지 안다는 듯 말했다.
“걱정하지 말렴. 그들이 쫓아오면 또 물리치면 돼. 다음번엔 정말 더 쫓아오지 못하게 혼쭐을 내줄 수 있어. 양 삼촌 손에 그 헥토르라는 자가 나가떨어지던 거 기억하니?”
[···네.]진서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난 열아홉 이후 양 삼촌과의 대련에서 져 본 적 없단다.”
그 말에 알리사는 물론 이환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리사는 맨손으로 무슨 화포를 쏘는 듯하던 양굉을 그녀가 이길 수준이라는 말에, 이환은 무림의 전설과 맞대결해봤다는 점에서였다.
잠시 후 주점 주인은 밀떡과 국물 요리를 차려왔다. 그는 약간 미심쩍은 듯한 눈빛을 보내면서도 식사 후엔 다른 사냥꾼들이 조사해 둔 사항들을 알려주겠다 말했다.
아침을 양고기로 때웠던 세 사람은 부드러운 밀떡과 뜨끈한 국물에 곧 열중하게 되었다. 알리사도 은근 배가 고팠는지 오물오물 열심히 먹어댔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주점 안에 있던 누군가가 일행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시오, 아름다운 소저. 혹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소저의 이름을 알 수 있겠소?”
식사에 열중하던 세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조금 전 취한 남자에게 시비가 붙었던 악사였다. 그는 찰랑거리며 길게 늘어진 앞머리를 휙 넘기며 디디딩-비파를 튕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