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63)
진서하 외전 19화
진서하는 매듭으로 묶인 서신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점 주인이 전서구를 보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답신이 온 건지 의문이었다. 전서구의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지만 벌써 답신이 온 것은 너무 빨랐다.
그때 서신을 가져다준 주점 주인이 말했다.
“그, 난 이만 내려가겠소. 서신은 확실히 전달 했소이다.”
“그래요. 고마워요.”
진서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헤벌쭉 웃었다.
“뭘. 당신들이 이 마을에 해준 일이 더 고맙지.”
주점 주인이 방을 나가자 진서하는 서신에 묶인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아홉 매듭은 그저 상징적인 의미인 편이라 봉인을 푸는 게 어렵진 않았다. 잠시 그녀의 방에선 종이가 팔락이는 소리만 들렸다.
다음 순간 진서하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양굉은 서신을 급하게 작성한 것인지 평소 쓰던 개방의 암호도 쓰지 않았다.
[동무림맹 추적대 결성. 추적 대상 습격 로마인 외 진서하, 이환. 현재 원주민 주술을 앞세워 추적 중. 동무림맹 정예. 이동속도 상상上上. 현 위치 도착 예정 사흘 뒤.]그 밑에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양굉의 사족이 달려 있었다.
[이 추적대의 일차 목표는 분명 로마인들인데 지금 움직이는 방향으로 보면 곧장 네가 있다는 사석원 방향으로 움직이는 듯 보인다. 이 주술사란 놈들이 너희를 쫓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 로마인들이 너희 뒤를 바짝 쫓고 있다는 말이다. 어느 쪽이든 만나면 충돌이 예견되는 상황이니 너는 일단 서부로 이동하는 게 좋겠구나. 일단 나도 이 추적대의 뒤를 바짝 쫓아 움직이고 있다. 덕분에 서신을 일찍 받아 다행이구나. 마지막으로 그 양반은 지금 감산성 동부 산명주山明州 지방에 있다. 그쪽 지방의 지부를 찾으면 정확한 위치를 받을 수 있을 게다.]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서신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진서하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벽부터 부슬부슬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
창밖을 보던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지금 혼자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 다른 일행의 의견도 들어봐야 했다.
방문을 열고 일 층으로 내려오니 주점 한구석에 홀로 있는 알리사가 보였다. 그녀는 커다란 대접 하나를 앞에 둔 채 젓가락을 어설프게 쥐고는 국수를 후루룩거리고 있었다. 입가에 기름기가 반들거렸다.
[음? 언니!]국수를 오물거리던 알리사는 진서하를 발견하고는 번쩍 손을 들어 인사했다. 진서하가 그 모습을 보고 웃음기를 띠며 다가갈 즘엔 끅-하고 짧은 트림까지 했다.
[···헤헤.]“식사 중이었니?”
[다 먹었어요. 언니 것도 주문할까요?]진서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보다 이 소협은?”
[말들을 잠깐 살펴본다고 나갔어요. 나간 지 조금 됐으니까 이제 들어오지 않을까요?]알리사의 말이 정답이었는지 그때 이환이 주점의 주렴을 걷으며 들어왔다. 약간 젖은 웃옷을 툭툭 털던 그는 진서하를 발견하고는 방긋 웃었다.
“아, 진 소저. 마을 잡화점에 잠깐 다녀왔습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진서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의논해야 할 내용이 있어요.”
“예? 아, 예···”
이환은 의아해하면서도 알리사가 앉아있는 탁자로 다가와 앉았고, 진서하 또한 자리에 앉으면서 세 사람은 한 탁자에 둘러앉게 되었다.
이른 시간인데다가 비가 와서인지 일 층 주점에는 그들뿐이었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진서하가 곧바로 개방에게 받은 정보를 짧게 털어놓았다. 알리사는 로마인들이 쫓아오고 있으리라는 말에, 이환은 추적대가 조직되었다는 말에 심각해졌다.
“···우리가 진짜 뭘 잘못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그들을 기다렸다가 오해를 푸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면 그 고지식한 무림맹 특성상 여기서 다시 남강성까지 되돌아가야 할 가능성이 있어요. 알리사의 몸은 가능한 한 최대한 빨리 치료해야 하는데, 그렇게 시간을 끌면 좋을 게 없어요. 로마인들과의 충돌도 피할 수 없을 테고요.”
진서하의 대꾸에 잠시 턱을 긁적이던 이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음. 그렇군요. 그러면 뭐, 양 선배님 의견대로 하죠? 그냥 바로 산명주 지방으로 움직여 진 소저의 스승님을 만나면 되지 않습니까? 알리사는 원래 뇌옥에 들어올 사람도 아니었느니 혹 추적대가 거기까지 쫓아와 우리 두 사람을 구속하더라도 진 소저 스승님께서 알리사를 맡아주실 수 있겠죠.”
그는 말을 하면서 괜찮은 결론이라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로마인들이 우릴 공격할 여력이 남았겠습니까? 제 마지막 기억대로라면 갑주를 입은 전사들은 대부분 무력화되었고, 그 헥토르라는 자도 양 선배의 공격에 나가떨어졌는데요.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그걸 맞고 살았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자 정도가 아니면 그리 위협적이지도 않고요.”
이환은 양굉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던 내력의 폭풍을 떠올리고는 부르르 떨었다. 뒤이어 문득 진서하가 그 양굉에게 진 적 없다던 말이 생각나 자기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진서하는 그 장법에 어떻게 맞섰을까?
“광룡추락타는 정말 상대를 죽일 생각으로 쓰는 초식이에요. 보통 대련하면서 그런 살벌한 무공을 쓰진 않죠.”
진서하가 그런 이환의 생각이 훤히 보인다는 듯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이환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기 머리를 매만졌다. 혹시 자기 머릿속이 훤히 비치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이 소협의 말이 맞는 것 같군요. 한 가지, 우리가 잡혀가는 걸 스승님이 그냥 가만두고 볼 것 같진 않지만요.”
당황하는 이환을 두고 진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이 행동할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동무림맹이라 하더라도 짓지도 않은 죄를 그들에게 뒤집어씌울 순 없었다. 이미 남강성에서 뇌옥에 들어갔던 것만으로 그들은 동무림맹에게 충분히 양보한 것이다.
“좋아요. 그럼 오늘 중에라도 비가 내리는 정도를 보고 바로 출발하기로 하죠. 관 무사와 남궁 무사에겐 미안하지만-”
[그는 살아있어요.]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알리사의 발언에 두 사람의 눈이 모였다. 알리사는 짙푸른 눈으로 그들을 마주 보며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한 거 아니었나요? 헥토르 그가 죽었거나, 혹은 무력화되었다는 이야기.] [어, 음. 맞다. 그런 말 함. 넌 그때 못 봤겠지만···]알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는 죽지 않았어요. 헥토르는 유피테르의 아이들 중 가장 강한 전사예요. 그래서 옛 영웅의 이름을 받았죠. 급진파가 아니었다면 만신전의 얼굴 중 하나가 되었을 남자라는 이야기에요.]그렇게 말한 알리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앞에 있던 국수 그릇을 한쪽으로 밀어두고, 탁자 가운데 있던 찻잔과 주전자를 들었다. 그녀는 잔 안에 찻물을 한가득 채우며 중얼거렸다.
[아직 이런 주문을 쓸만한 몸 상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황 정도는 파악해야 하니까.]찻물을 찻잔 위로 볼록해 보일 정도로 가득 채운 알리사는 곧 그 위에 검지를 대며 눈을 감았다. 직후 그녀의 입술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소리를 아주 빠르게 읊조렸고, 왼뺨을 덮은 문신에선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잔에 담긴 찻물에서도 빛이 빛났다. 마치 깊은 호수의 바닥에서 신비한 빛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진서하와 이환 모두 뭐라 쉬이 말할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었다. 주점 주방에서 나오던 주인장도 입을 떡 벌리고는 멍청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쨍-하는 소리와 알리사가 뒤로 주저앉았다. 동시에 찻잔이 깔끔하게 반으로 쪼개지며 와르르 찻물이 쏟아졌다.
“알리사!”
진서하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알리사는 멍한 눈으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도 날 봤어요. 그럴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어요.]“뭐?”
그리고 꽈르르릉-하는 천둥소리가 먼 곳에서 울려 퍼졌다. 이환과 진서하 두 사람이 굳은 눈으로 주점 밖을 노려보았다. 이미 한 번 들어보았던 천둥이었다.
[헥토르뿐만이 아니에요··· 한 사람 더··· 누군가 한 사람 더 있어요··· 영웅명을 받은 게 분명한 전사가 하나 더···]알리사의 얼굴을 바라보던 진서하와 이환의 눈이 마주쳤다. 이환이 말했다.
“무림맹 때를 생각해보면 이 조그만 마을은 풍비박산이 날 겁니다.”
“···굳이 그들의 공격을 기다릴 필요는 없겠죠. 유리한 상황을 만들 때까지 이동해요.”
두 사람은 곧바로 움직였다.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는 주점 주인에게 숙박비와 깨 먹은 찻잔 비용을 지불했다. 진서하는 주점 주인에게 말을 남겼다.
“관 무사와 남궁 무사에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떠난다 전해주세요.”
전날 과음한 두 사람은 여태 방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원래부터 굳이 그들을 휘말리게 할 생각이 없었던 일행은 곧바로 주점을 나서 마구간으로 향했다.
“마구간에 여행 물품을 준비해 뒀습니다. 조금 전에 잡화점을 다녀오길 잘했군요.”
말에 안장을 얹으며 이환이 웃었다. 이 마을에 도착할 땐 맨몸뚱이나 다름없었는데 떠날 땐 말과 모포까지 챙겨가게 되었다.
진서하는 알리사에게 우비 겸 피풍의를 씌워주며 꼼꼼히 끈을 묶어주었다. 그러다가 불안해 보이는 그녀의 눈을 보고는 싱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나와 이 소협을 믿으렴.”
옆에서 안장을 올리던 이환이 그 말에 알리사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알리사의 입가에도 작은 웃음이 떠올랐다.
“[걱정 안 해요.] 고마워요.”
이환이 그 소리에 으하하 웃었다.
“이젠 잘하네! 나머지 말도 금방 배우겠는걸.”
그의 우스갯소리에 이어 빠르게 준비를 마친 세 사람은 바로 출발했다. 흐리게 내리던 안개비는 점점 더 굵어져 이젠 투두두둑하는 묵직한 소리를 냈다. 일행의 말들은 그 뿌연 빗속을 뚫고 속보로 걸었다. 금방 사석원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달려야 해! 가자! 이랴!”
[이랴! 달려라!]일행은 천둥소리의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일단 마을에서 멀어진 후에 적을 상대하기 좋은 장소를 찾을 계획이었다.
우의 겸 외투를 걸치고 있었음에도 잔뜩 쏟아지는 빗물에 금세 옷이 젖어 철벅거렸다. 빗속을 뚫고 달리는 말의 몸에선 하얀 김이 피어올랐고, 거친 말발굽에 튀어 오른 흙탕물이 바지를 더럽혔다.
그때 다시 콰르릉-하는 천둥이 울렸다. 조금 전보다 가까워진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이환이 외쳤다.
“마을에선 충분히 벗어난 것 같습니다! 이제 저들을 맞이할 장소를 골라야 해요!”
“어제 갔던 계곡 쪽으로 가요! 길이 좁아서 다수를 상대하기 좋을 거예요!”
[야-호오-!]생뚱맞게 소리 지르는 알리사의 모습에 이환과 진서하 모두 피식 웃었다. 비를 맞으며 정신없이 말을 달리니 뭐라 말하기 없는 해방감이 있었다. 열차에서나 무림맹에서처럼 겁에 질린 모습은 아니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불어나 거칠게 휘몰아치는 강물과 만났다. 계곡의 하류였다. 좁은 장소를 찾자면 상류로 조금 더 올라가야 했다.
그때 벼락이 쳤다.
“워워! 진정해!”
순간이지만 온 세상이 새하얗게 번쩍거리자 말들이 놀라서 버둥거렸다. 세 사람은 애써 말을 진정시키면서도 한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조금 전 벼락이 내려친 자리였다.
그곳에 큰 키에 사자같은 머리칼과 수염을 가진 로마인이 있었다. 헥토르였다.
[여기까지다, 무림인들. 그리고 신녀.]그는 노란빛으로 번쩍거리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갑주 또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을 마주한 알리사는 대뜸 소리쳤다.
[꺼져, 나쁜 놈아!]뭐라 말을 이어가려던 헥토르는 다짜고짜 튀어나온 알리사의 외침에 순간 굳었다. 굳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이환은 으하하 웃었다. 그리고는 안장을 박차고 뛰어올라 헥토르의 앞에 내려앉았다.
“계획과는 다르지만, 이왕 이렇게 혼자 나타났으니 빠르게 해치워볼까!”
그가 두 주먹을 툭 털자 빗물이 튕겨 나가며 확 퍼졌다. 헥토르의 눈이 그를 향했다.
[···감히.]그 둘의 시선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굳은 표정과는 조금 별개로 이환은 속으로 지금 자기가 조금 멋지지 않을까, 진서하는 잘 봐주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진서하는 그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거칠게 흐르는 강물을 향해 있었다.
그 물길에서 검은 전사들이 걸어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