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64)
진서하 외전 20화
알리사가 그 검은 전사들을 보고 소리쳤다.
[티폰의 아이들이에요!]“뒤로 물러나렴.”
진서하는 알리사를 뒤로 물러나게 하고는 말에서 내려 그들과 마주했다. 강물과 비에 푹 젖은 검은 전사들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전날 열차에서 마주했던 자들과 같은 소속이라고는 믿기 힘든 기세였다. 그들의 손등에 비죽 솟은 칼날들이 섬찟하게 빛났다.
“이런, 혼자 온 게 아니었네···”
헥토르와 마주 보고 있던 이환도 강물에서 걸어 나온 전사들의 기척을 느끼곤 뒤를 흘끗거렸다. 헥토르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빈틈이 분명해 보이는 모습에도 헥토르는 쉬이 공격하지 못했다. 아직 그의 가슴팍엔 전날 무림맹에서 찍힌 손바닥 자국이 남아있었다. 이 무림인이라는 자들은 절대 쉽게 볼 수 있는 족속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환의 눈은 뒤를 흘끗거리는 듯했지만 그의 손과 어깨, 발끝 등등은 칼날처럼 예리하게 헥토르를 향하고 있었다. 만약 헥토르가 움직인다면 당장이라도 반격해올 태세였다.
“물러나라 무림인. 이건 너희의 싸움이 아니다.”
그때 검은 전사들이 우르르 비켜서며 누군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다른 전사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검은 옷에 짤막하고 두툼한 검 한 자루를 든 남자였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다른 전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흉포함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진서하나 이환, 알리사 모두 살짝 놀랐다. 그가 능숙한 중원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진서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소녀가 만신전의 신녀가 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운명.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났고, 죽어가길 그렇게 죽어야만 한다. 신들조차 피하지 못하는 운명의 강줄기를 한낱 인간이 어찌 피하겠는가.”
잠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진서하는 그 이야기에 표정을 굳혔다. 그녀의 손이 피풍의의 끈을 풀었다. 비에 젖어 축축해진 천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구음사혈은 한낱 병마일 뿐, 운명 따위가 아니야. 그나마도 치료할 수 있는 병이고.”
“···구음사혈? 이곳에선 축복을 그렇게 부르나? 차가운 죽음의 아홉 구멍이라. 축복을 연구해보긴 한 모양이군.”
피식 웃은 그는 비에 젖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기며 말을 이었다.
“며칠 전 내 부하들을 반병신으로 만들어준 게 네놈들이지?”
“열차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래.”
“···애초에 대화로 넘어갈 상대는 아니었군. 이름이 뭐냐, 무림인.”
“예의를 안다면 본인 이름부터 소개해.”
그의 입가가 씨익 갈라졌다. 재밌다는 듯한 미소였다.
“난 아킬레스다. 티폰의 전사지.”
[키프로스의 학살자!]뒤에서 지켜보던 알리사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아킬레스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날 아나?] [···티폰의 아이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 옛 영웅 아킬레스의 이름을 부여받은 잔혹한 전사. 키프로스에서 사람들을 건물에 몰아넣고 불태워 죽인 학살자···]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그 일. 그 일로 군단의 금을 좀 받았었지. 그자들은 반란군이었거든.] [그들은 싸울 수 없는 노약자들이었어요. 대부분이 부상자나 노인, 아이들이었는데···]아킬레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금화를 받고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신녀.] [···난 신녀가 아니에요.]아킬레스는 콧웃음 한 번 치는 것으로 알리사의 말을 무시하고는, 진서하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래서 이름이 뭐지, 무림인?”
“진서하.”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을 들어 그녀를 겨눴다.
“좋다, 진서하. 지금이라도 신녀를 내놓고 비켜서라. 신녀의 일은 이 땅의 문제가 아니다. 로마의 문제다.”
그의 검날 위로 빗물이 떨어져 티디딩하는 소리를 냈다. 강철과 부딪친 빗방울이 잘게 부서져 내렸다. 아킬레스와 그의 뒤에 선 검은 전사들의 살기가 그 칼날 끝으로 모여 그녀를 겨누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진서하는 그 검의 차가움을 마주하고도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저 두 손을 중단으로 들어 올리며 차분히 자세를 잡을 뿐이었다.
[그래. 그렇게 죽고 싶다면 그렇게 해주지.]그 모습을 본 아킬레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검을 내리며 왼손을 휘적였다. 그의 뒤에 서 있던 검은 전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흙바닥이 철벅거리는 소리를 냈다.
오른편에선 진서하와 티폰의 아이들이, 왼편에선 이환과 헥토르가 마주하고 있었다. 티폰의 아이들에게선 거뭇한 기운이 흘렀고, 헥토르의 눈에선 뇌전이 빠지직거렸다. 잠시 그들을 번갈아 보던 알리사는 곧 오른손을 하늘로 뻗고는 입술을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환을 마주하던 헥토르가 갑자기 휙 알리사를 노려보았다.
다음 순간 이환은 땅을 박찼다. 헥토르의 의도적인 빈틈일 수도 있었으나, 지금 그에겐 그런 걸 따져볼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셋인데 티폰의 아이들은 이십여 명에 가까웠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숫자를 줄여야 했다.
일부러 보인 빈틈이 맞았는지, 알리사를 향했던 헥토르의 눈이 곧바로 이환에게 돌아왔다. 동시에 그의 눈과 입에서 노란 섬광이 빛났다. 주변에서 작은 벼락들이 빠지직거렸다. 순간 이환의 눈에 떨어지는 빗물이 느려짐과 동시에 헥토르의 입과 눈에서 벼락이 쏟아져나오는 장면이 잡혔다.
직후 꽈르릉-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강력한 힘에 돌과 흙이 흩뿌려졌다.
[크헉!]그러나 다음 순간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나뒹군 것은 헥토르였다. 그의 멋들어진 머리칼과 수염에 흙탕물이 튀었다. 그는 가슴팍이 빠개지는 듯한 고통에 흙탕물을 뒹굴면서도 애써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곧게 주먹을 뻗은 채 호흡을 가다듬으며 하얀 김을 피워올리고 있는 이환이 보였다. 헥토르가 왈칵 피를 토하며 중얼거렸다.
[···벼락보다, 빠르다고?]이환은 고개를 저었다.
[네 벼락, 진짜 벼락 아님. 느려 터졌음.]그는 굳이 서부의 무공 풍조가 단 일격에 전력을 다하는 초고속 대결에 치중되어있음을, 그래서 그 또한 찰나의 승부에 강하다는 것을, 그럼에도 조금 전 헥토르의 벼락이 굉장히 위협적이었음 등등을 굳이 늘어놓지 않았다. 아직 저기에 적이 많았다. 지금은 허세를 부려야 할 때였다.
어쨌든 그 허세가 통했는지 움직이던 티폰의 아이들은 멈칫 굳었고, 헥토르는 다시 한번 왈칵 피를 쏟으며 흙탕물에 얼굴을 처박았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몰라도 잠시 무력화된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번엔 진서하가 그것을 기회로 보았다.
아주 잠시지만 검은 전사들의 시선 대부분이 이환과 헥토르 쪽을 향해 있었다. 그건 진서하의 입장에선 그냥 때려달라고 뺨을 내민 것과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 뺨을 때려주기로 했다.
제일 선두에 있던 검은 전사는 벼락이 터진 저쪽을 바라보다가, 문득 머리가 아니라 얼굴에 후두둑 튀는 빗방울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분명 멀찍이 떨어져 있던 무림인 여자가 어느새 훌쩍 커져 그의 정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뭘 어떻게 반응해보기도 전에 그녀의 주먹이 전사의 턱을 후려쳤다. 그리 크지 않은, 조그만 주먹이었으나 턱을 맞은 전사의 몸은 휘리릭 회전하며 붕 떴다.
진서하는 일격으로 멈추지 않았다. 붕 떠오른 자가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검은 전사들의 틈으로 파고들었다. 단단히 말아쥔 그녀의 주먹이 전사들의 몸에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검은 전사들은 모두 굉장히 커다란 덩치의 근육질이었다. 몸집만 놓고 보자면 진서하는 그들의 가슴팍에나 겨우 이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주먹은 그런 근육이 무슨 바람 넣은 돼지 오줌보라도 된다는 듯 푹푹 파고들었다. 물론 근육은 진짜였기에 그때마다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찢어지며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의 주먹이 세 번째 전사를 쓰러뜨릴 때쯤 제일 처음에 턱을 맞은 전사가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그리고 다른 티폰의 아이들도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반격했다. 그들의 손등에서 솟은 칼날이 번뜩이며 숨통을 노렸다.
진서하는 그 공격을 가볍게 받아 당기며 힘을 주었다. 전사들의 팔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한 번도 꺾여 본 적 없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들이 고통에 겨워 입을 쩍 벌리자 진서하의 주먹이 그 얼굴을 후려쳤다. 박살 난 이빨이 흩날렸다.
지금 그녀의 움직임은 아주 힘 있고 강건했다. 그녀가 발을 디디면 도저히 움직일 수 없고, 주먹을 뻗으면 설사 금강金剛이라도 부숴버릴 듯했다. 검은 전사들은 비교할 수 없는 체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마치 막을 수 없는 전차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검은 전사들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듯 칼날을 휘둘렀다. 그녀의 귀신같은 움직임에 도저히 수 싸움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자 틈을 만들기 위해 무작정 몸뚱이를 들이미는 자도 있었다. 한 전사가 훌쩍 허공으로 몸을 띄워 진서하를 덮쳤다.
그를 본 진서하는 순간 두 다리로 굳건히 바닥을 지탱하고는 오른 주먹을 허리춤으로 당겼다가, 훅-정권을 질렀다. 그러자 그 주먹에서 작은 종을 치듯 때앵-하는 소리가 나더니 분명 주먹이 닿을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검은 전사의 명치가 움푹 파였다. 그리고는 신음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멀리 나가떨어졌다.
[물러서라!]아킬레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자 지금까지 두려움이 거세된 듯 공격하던 검은 전사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섰다. 전사들이 물러서자 상황이 훤히 보였다. 사지 중 한둘이 박살 난 채 의식을 잃은 전사들이 흙탕물 위에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고, 진서하는 조금 전 정권을 뻗은 자세 그대로 물러서는 전사들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강하군, 무림인. 너 정도면 이 땅에서 어느 정도의 전사인가?”
그런 진서하를 보며 아킬레스가 그리 물었다. 그녀는 굳게 말아쥐던 주먹을 천천히 펴 손바닥이 위로 오도록 했다. 동시에 땅을 단단히 지지하고 살짝 굽혔던 다리도 부드럽게 힘을 풀었다.
그녀는 그 손으로 아킬레스를 겨누며 말했다.
“난 한낱 떠돌이야.”
내 스승님이 그랬던 것처럼. 뒷말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아킬레스는 잠시 자신이 제대로 알아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곧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떠돌이라··· 군단장이나 만신전의 대전사를 해도 충분할 자가 스스로를 한낱 떠돌이라 자처한다··· 네놈들의 말을 배우긴 했으나 너희 무림인들에 대해선 쉬이 이해할 수가 없군.”
“이해해달라 한 적 없어.”
그때 장대처럼 쏟아지던 비가 순식간에 그쳐갔다. 하늘을 우중충하게 만들던 먹구름이 거짓말처럼 흩어져가며 환한 햇살이 지상을 비췄다. 그 빛줄기 중 하나가 그들 위로 쏟아졌다.
진서하는 그 빛줄기 속에서 손끝을 까딱거렸다.
“덤비기나 해.”
* * *
비가 그친 것은 알리사가 주문을 외운 덕분이었다. 먹구름은 티폰의 아이들이 태양 빛을 피함과 동시에 헥토르가 벼락을 조금 더 쉬이 부리고자 불러들인 마술이었다. 그래서 지난날 무림맹에서도 비가 내린 것이다.
그렇게 먹구름을 치운 알리사가 손을 내리며 숨을 헐떡였다. 무리를 한 덕분에 온몸이 아팠다. 말안장에서 미끄러질 뻔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때 그녀가 탄 말이 혼자 제자리걸음을 하며 그녀의 균형을 잡아주었다. 알리사는 고삐를 잡고 눈을 깜빡거렸다. 똑똑한 녀석이었다.
아직 이름도 없는 검은 말은 작은 소리로 푸르륵거렸다. 마치 뭐 이정도 가지고-하고 겸양을 떠는 듯한 모습이었다. 알리사는 피식 웃으면서 나중에 멋진 이름을 붙여줘야겠다 생각했다.
다시 안장에 잘 자리 잡은 알리사는 고개를 돌려 상황을 살폈다. 헥토르는 이환의 주먹에 쓰러져 흙탕물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고, 티폰의 아이들 또한 진서하의 살벌한 주먹에 절반 이상 쓰러져 있었다.
알리사는 그 쓰러진 전사들 사이에서 자세를 잡고 있는 진서하를 보고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그녀는 저번처럼 흐르는 물 같던 분위기가 아니라 마치 강인한 기둥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저것도 그 ‘무공’이라는 것의 한 종류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알리사가 진서하를 바라보며 두 눈을 빛내던 그때, 그녀 뒤쪽의 땅이 들썩거렸다. 그녀가 타고 있던 검은 말은 알 수 없는 본능의 경고에 펄쩍 뛰었다.
[어엇! 갑자기 왜 그래!]알리사가 비명처럼 외친 순간, 들썩이던 땅이 폭발하듯 흙과 자갈을 흩뿌렸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하반신이 검은 뱀처럼 변한 검은 전사 셋이 치솟아 알리사를 덮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