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65)
진서하 외전 21화
* * *
아킬레스를 노려보던 진서하의 눈이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 깜짝 놀라 몸을 둥글게 마는 알리사와 그녀를 향해 먹이를 덮치는 뱀처럼 날아오는 검은 전사들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알리사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세상이 느려지며 주변의 모든 것이 속속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알리사는 등 뒤에서 쏟아지는 흙먼지와 소리, 검은 전사들의 기세에 두 눈을 꾹 감으면서도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워낙 다급한 순간이라 그녀의 표정에는 다른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갑작스러운 충격에 일그러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를 덮치는 검은 전사들의 표정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세 쌍의 검붉은 눈과 양손의 칼날, 그리고 하반신의 검은 비늘만 번쩍거렸다.
이환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진서하 쪽으로 움직이려다가, 그녀처럼 알리사의 상황을 보고는 급히 몸을 뒤틀고 있었다. 하지만 원래 움직이려던 방향을 억지로 바꾼 것이라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도 그것을 느꼈는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의 등 뒤 흙탕물 속에서 헥토르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과 수염 아래로 갈색 흙탕물이 줄줄 흐르는 동시에 눈동자 속에선 노란 뇌전이 빠지직 빛났다.
진서하의 시야는 이제 그녀 주변으로 돌아왔다. 바닥에는 조금 전까지 그녀의 아라한권법에 박살이 나던 검은 전사들이 의식을 잃은 채 나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전사들은 그 사실에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듯,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는 듯 그녀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선 맹목적인 살기만이 번뜩였다.
그렇게 주변을 모두 훑은 그녀의 시야는 이제 두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곳, 바로 시선의 정반대, 뒤통수 너머를 향했다.
그곳에 이 느려진 시간 속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검을 휘둘러오는 아킬레스가 있었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둘뿐이었다. 아킬레스의 검을 등짝에 고스란히 받아내며 알리사를 구하는 것, 아니면 일단 그 검을 되받아쳐 목숨부터 지키는 것. 어느 쪽이든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둘 다 하기로 했다.
[크-아-아-아-!]다음 순간 세상이 제 속도를 되찾으며 헥토르의 포효와 함께 꽈르르릉-하는 뇌성이 울려 퍼졌다. 노란 뇌전이 꿇어앉은 그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뻗어나갔다. 순식간에 그의 주변 흙탕물이 증발하고 뇌전에 얻어맞은 자갈들이 박살 나며 불티와 파편을 튀었다.
헥토르와 가장 가까이 있던 이환은 이미 알리사에게 달려가려 몸을 뒤틀던 중이라 그 뇌전을 피하지 못했다. 굵직한 뇌전이 그의 몸 여기저기에 꽂히자 그는 허수아비처럼 멀찍이 나가떨어졌다.
뇌전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았다. 이환 다음에는 검은 전사들이 뇌전에 휘말렸다. 이미 쓰러져 있던 자들은 그대로 그냥 구워져 버렸고, 다른 전사들 또한 별달리 반응하지 못하고 휘말려 날아갔다.
그 뇌전의 폭풍 속에서 진서하의 검이 뽑혔다. 하얗게 백열하는 검이 그녀의 어깨를 시작으로 둥글게 횡을 그렸다. 그 궤적에는 웅크린 알리사의 머리 위쪽이 포함되어 있었다.
굉음과 빛, 휘몰아치는 거센 돌풍과 진동. 알리사는 안장 위에 엎드리며 두 눈을 꾹 감고 머리를 감쌌다. 뭘 어떻게 하려던 게 아니라 그냥 본능적인 방어 동작이었다.
그녀는 잠시 후 굉음이 사라지고 파편 구르는 소리만 울리자 번뜩 고개를 들었다. 증기와 흙먼지로 시야가 뿌연 가운데 그녀의 눈이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하반신만 남은 시체 셋이 그녀 뒤쪽에 널브러져 있었다. 악신의 힘으로 이루어져 있던 뱀의 육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알리사의 시선이 이제 진서하를 찾았다.
[헛!]알리사는 고삐를 꽉 쥐었다. 증기와 흙먼지가 가라앉는 가운데 얽혀있는 두 사람, 진서하와 아킬레스가 보였다. 먹구름이 사라지며 나타난 햇살이 그들을 비췄다.
[언니!]진서하의 검은 여전히 백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글이글 불타는 검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황금빛 방패에 가로막혀 있었다.
“···놀랍군, 무림인. 신녀의 핏줄을 타고나서 어떻게 그 나이까지 살아있지?”
아킬레스는 정말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이런 것은 난생처음 봤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 눈을 마주한 진서하는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생각 자체가 없어 보였다. 그저 시퍼런 눈동자 속에서 진득한 살기를 번들거리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그녀의 하얀 이가 당장에 아킬레스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했다.
그 눈을 본 아킬레스가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옆구리에 틀어박힌 글라디우스가 뒤틀리며 왈칵 피가 쏟아졌다. 진서하의 으르렁거림이 심해졌다.
검이 더 뒤틀리진 못했다. 진서하의 왼손이 아킬레스의 오른손을 붙들어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흣. 네놈들의 그 ‘무공’이라는 것이 놀랍구나. 네 목숨을 늘려준 것도 그 재주인 모양이지? 하지만 이쪽에도 비슷한 게 있는데 말이야···”
검을 쥔 아킬레스의 오른 팔뚝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알리사의 왼뺨에 있는 것과 비슷한 문신이었다. 동시에 그의 황금 방패도 강하게 빛났다. 아킬레스는 다시 글라디우스에 힘을 주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열 사람의 힘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옛 괴물들과 싸우던 반신영웅들의 힘이다, 무림인. 네 재주가 신비하긴 하지만···”
아킬레스의 말이 멈췄다. 그의 검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부들부들 떨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를 악물고 힘을 줘봐도 더 밀고 들어갈 수 없었다.
어느 순간, 그의 손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너···!”
경악한 아킬레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눈동자 안에 살기로 번뜩이는 진서하의 얼굴이 담겼다. 분명 인간의 얼굴이건만 그것을 마주한 아킬레스는 그녀를 마치 옛 신화 속 괴수처럼 느꼈다.
진서하는 아킬레스의 손을 밀어내며 점점 더 강한 살기를 내뿜었다. 그녀의 손에 붙잡힌 아킬레스의 손에서 우드득하는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아킬레스는 그 상황을 더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지르며 왼손에 들고 있던 방패를 휘둘렀다. 진서하의 검이 밀려나며 황금 방패가 그녀를 후려쳤다. 텅-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튕겨 난 것보다 배는 빠르게 되돌아온 진서하의 검이 그 황금 방패를 후려쳤다. 방패를 쥔 아킬레스의 발이 바닥에 파고들었고, 방패를 비켜나간 검의 여력이 자갈을 부수며 먼지와 흙탕물을 튀었다.
이후 이어진 공방은 일방적인 진서하의 공격과 아킬레스의 수비였다. 그러나 무지막지한 내공으로 이루어진 진서하의 검기는 그 여파만으로 땅을 가르고 공기를 태웠지만, 아킬레스의 방패를 부수지는 못했다.
그리고 아킬레스 또한 황금 방패로 굳건히 진서하의 공세를 막고는 있었으나 반격하진 못했다. 지금 그의 눈에는 진서하의 움직임이 흐릿해 보였다. 도저히 그 빈틈을 찌른다거나 반격할 여력이 없었다. 그저 한 번씩 방패를 밀어 진서하의 몸을 튕겨내는 수뿐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계곡 하류에서는 검과 방패가 부딪치며 텅-텅-하는 쇳소리가 크게 이어지게 되었다.
[···언니? 저게 무슨···]조금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알리사는 살기에 휩싸여 맹목적인 야수처럼 움직이는 진서하를 보며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멀리 떨어져서 보고 있음에도 그녀의 몸에서 피어나는 살기는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그때 그녀가 타고 있던 흑마가 푸르륵거리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알리사는 얼른 고삐를 잡으며 말했다.
[안 돼. 언니는 일단 저렇게 둔다 쳐도, 지금 오빠가 안 보이잖아. 아까 그 벼락에 휩쓸린 게 분명해. 오빠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라. 오빠를 찾아야 해.]하지만 녀석은 고개를 휙휙 휘저으며 계속 뒤로 물러났다. 알리사는 녀석을 달래려고 고삐를 당기고 워워 소리를 냈다. 하지만 녀석의 뒷걸음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그가 말했다.
[똑똑한 녀석이군.]번뜩 고개를 든 알리사의 눈에 어느새 다가온 헥토르의 얼굴이 보였다. 입가에 피를 흘리는 창백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 속엔 여전히 뇌전이 빛나고 있었다.
알리사는 급히 오른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이 주문을 읊는 것보다 헥토르의 두 눈에서 노란 안광이 번쩍인 것이 더 빨랐다. 알리사는 멍한 얼굴로 스르륵 말안장 위에 엎어졌다.
알리사를 제압한 헥토르의 눈이 진서하와 아킬레스의 싸움을 향했다. 아니, 그건 싸움이라 하기엔 조금 어폐가 있었다. 아킬레스는 그저 황금 방패로 몸을 가린 채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진서하에게 의식이 남아있었다면 그는 진즉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진서하는 자신의 앞을 막는 그 방패를 반드시 부숴버리겠다는 듯 손에 든 백열검으로 열심히 후려치고 있을 뿐이었다.
[어리석은···]그를 본 헥토르가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잠시 그렇게 공방을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외쳤다.
[그만 일어나라, 티폰의 개들아! 가서 너희의 대전사를 구하라! 필요하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그의 외침에 번뜩 진서하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의식을 잃은 알리사가 들어왔다. 들끓던 살기가 순간 흐려졌다.
아킬레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황금 방패가 강하게 그녀를 후려쳤다. 진서하는 읏-하는 신음을 흘리며 뒤로 멀리 날아가 강물에 빠졌다.
그녀가 날아간 그때, 헥토르의 뇌전 폭풍에 휘말렸던 검은 전사들이 계곡 여기저기서 몸을 일으켰다. 개중에는 진서하의 손에 의식을 잃었던 자들도 있었다.
일어선 그들의 몸을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휘감고 있었다. 안개는 점점 짙어져 그들의 하반신을 감쌌고, 그것은 곧 뱀의 육체가 되었다.
[이리 와라!]진서하를 날려버린 아킬레스가 그 검은 전사 중 그나마 멀쩡한 자를 콕 집었다. 그러자 그 전사는 뱀의 하반신으로 미끄러져 그에게 다가왔다.
[티폰께서 네 희생을 치하하시리라!]그렇게 외친 아킬레스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던져버리고 검은 전사의 가슴팍에 손을 박아넣어 심장을 뽑았다. 그 심장은 곧장 그의 입으로 향했다. 심장이 뽑힌 검은 전사가 풀썩 쓰러지는 동안 아킬레스는 우걱우걱 그것을 씹었다.
순식간에 심장 하나를 꿀꺽 삼킨 아킬레스는 곧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그 연기가 사그라졌을 때 그곳엔 사람도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뱀 한 마리만 남았다.
그 뱀의 시선이 헥토르를 향했다. 헥토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리사의 말고삐를 쥐었다. 다음 순간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하늘을 향해 거꾸로 벼락이 쳤다. 하늘로 치솟은 벼락은 뜨문뜨문 남아있는 먹구름을 타고 서쪽으로 멀어져갔다. 벼락이 치솟은 자리에는 검게 탄 흔적만 남아있었다.
이어서 뱀으로 변한 아킬레스로 곧바로 벼락이 날아간 방향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놀라워서 잠깐 사이에 뱀은 골짜기의 바위와 나무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모두 사라진 직후 도도히 흐르던 강물에서 펑-하고 물기둥이 솟았다. 남아있던 검은 전사들의 눈이 그쪽을 향했을 때, 진서하가 툭 그들 사이로 떨어졌다.
새하얀 죽음의 칼날이 전사들을 덮쳤다.
악신의 힘을 빌려 이루어낸 육체는 강력했다. 본래보다 몇 배는 강력해진 근력과 감각에 하반신이 뱀처럼 변하며 상식을 벗어난 듯한 움직임까지. 지금 이곳에 있는 검은 전사 열이면 작은 도시 하나는 난장판으로 만들어줄 수 있었다. 그 도시의 군단이 출동하는 걸 고려하더라도 그랬다.
그러나 지금 이 계곡에선 지중해의 공포라는 이름이 아무 의미가 없는 듯했다. 진서하의 백열검이 한번 선을 그으면, 그 궤적에 닿은 전사의 몸뚱이는 마치 흰색 물감을 덧칠한 듯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잠시 후 말을 탄 관량과 남궁빈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살아있는 검은 전사는 없었다. 아니, 사지가 멀쩡한 자부터가 전혀 없었다. 남은 것은 파편화된 고기 조각들 뿐이었다.
“···이게 뭔 상황이냐?”
관량이 그 난장판 한가운데 서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진서하를 보고는 중얼거렸다. 대답은 옆에 있던 남궁빈이 했다.
“심히 걱정스러운 상황이오, 관 선배.”
그는 침중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자신의 말안장 한쪽을 걷어냈다. 그러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검 손잡이가 비죽 드러났다. 남궁빈은 그 검을 뽑는 동시에 안장을 박차고 뛰었다.
검을 쥔 채 멍하니 거친 숨을 몰아쉬던 진서하의 눈이 번뜩 뒤를 향했다. 그곳에 남궁빈이 내려서고 있었다.
남궁빈은 검을 늘어뜨린 채 그녀의 흐린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의식을 되찾으시오, 진 소저. 심마心魔에 몸을 내주어서는 아니 되오.”
그녀의 눈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의 빛이 아니라, 새로운 먹잇감을 포착한 살인귀의 눈이었다.
그를 본 남궁빈의 눈도 깊게 가라앉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희미하게 울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구려. 그럼 한 번 겨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