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66)
진서하 외전 22화
짙푸른 두 눈동자 안에서 섬뜩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눈동자는 마치 온 세상을 죽여버리겠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 눈을 마주한 남궁빈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어떤 거창한 자세는 아니었다. 그저 오른발을 한 발 내디뎌 몸을 사선으로 두고 자연스럽게 검을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남궁빈이 말했다.
“개인적으로 진 소저에게 이 무공들을 선보일 수 있어 정말 기쁘오. 물론 아직 개선해나가야 할 부분이 훨씬 많은 검이지만···”
그의 검이 웅웅 낮게 울기 시작했다. 검명劍鳴을 마주한 진서하도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그녀의 백열검白熱劍 또한 그 불길을 더했다.
“···창궁蒼穹과 제왕帝王의 이름에 부끄럽진 않을 것이오.”
다음 순간 진서하는 스스로의 기세에 휩쓸려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녀의 검이 허공을 미끄러지며 긴 백색 궤적을 그렸다. 검은 전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남궁빈 또한 그 하얀 물감에 덧칠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 백열검과 남궁빈의 검이 만났다.
챙-하는 소리와 함께 백열검의 궤적이 틀어졌다. 남궁빈의 옆으로 닻으로 찍은 듯한 자국이 생겼다. 그의 검이 백열검을 흘린 것이다.
진서하의 입에서 고함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검이 또다시 막혔다는 걸 참을 수 없다는 듯 마구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햇살이 비추는 계곡 아래에 쇠와 쇠가 만나 높은 소음이 울려 퍼졌다.
그녀의 백열검은 빠르고 강했다. 그 여파만으로 돌과 자갈을 부수고 바위를 쪼갰다. 이미 산산조각이 나 있던 검은 전사들의 시체가 거기 휘말려 제대로 된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빠르고 강한 검은 남궁빈에게 닿지 않았다.
남궁빈은 그 백열검의 폭풍을 모두 흘려냈다. 그의 검날이 백열검의 어느 한 부분을 툭툭 건드리거나 검 끝으로 쿡 짚어주는 것만으로 그녀의 폭풍은 엉뚱한 방향을 할퀴게 되었다. 자신의 검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느낀 진서하가 더 큰 살기를 폭발시키며 더 빠르고 강한 공세를 이어갔다.
그녀를 상대하는 남궁빈의 보법은 어딘가 툭툭 끊어지는 듯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지점을 디뎠다. 걸음걸음이 빠르지 않아 그 모습이 꽤나 느긋해 보였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진서하와는 더욱 대비되는 걸음이었다.
멀찍이 떨어져 둘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관량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사람과 사람이 마주 서서 서로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데, 어째선지 자연 풍경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모조리 할퀴고 부숴버리겠다는 듯한 소용돌이와, 그 소용돌이를 품은 드넓은 하늘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남궁빈의 동작이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촘촘한 그물을 그리는 듯한 검세였다. 미친 것처럼 백열검을 휘두르던 진서하는 자기도 모르는 세에 그 그물 안에 갇혀 조금씩 움직임이 제한되기 시작했다.
답답함을 느낀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사방팔방으로 백열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남궁빈의 그물을, 하늘의 그물을 벗어날 순 없었다.
남궁빈이 한 걸음을 디디면 진서하는 나아갈 방향을 잃고 멈췄다. 그가 검을 휘두르면 진서하의 검은 곧은 궤적을 그리지 못하고 버벅이며 힘을 잃었다.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의 하늘에선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남궁빈의 검세는 더욱더 복잡해졌다. 그 안에 진서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이지 못하고 발작적으로 버둥거릴 뿐이었다.
그 하늘을 닮은 검세 속에서 남궁빈이 말했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오, 진 소저. 심마는 마魔인 동시에 아我요. 그것은 우리의 일부분이기에 완전히 끊어내서도 안 되고, 우리의 가장 어두운 부분이기에 너무 가까이해서도 안 되오. 언제나 한걸음의 거리를 두고 끊임없이 경계하며 조금 더 나은 우리가 되기 위한 계단으로 삼아야 하외다.”
그러나 창궁검세 속의 진서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백열검과 살기를 더욱더 키워 거칠게 휘두를 뿐이었다. 마치 지금 자신을 억누르는 이 하늘마저도 죽이고 말겠다는 듯했다.
그 공격을 받아넘기던 남궁빈이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무지막지한 내력이 효과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식은땀 한 방울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영약을 얼마나 먹이신 겁니까···”
지금 진서하의 검에서 불타는 검기는 보통의 검기라 부르기엔 너무나 강렬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십오 년 전 모용마가의 건곤백룡비검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진서하가 평소 자신의 살기를 억누르기 위해 본신 내공의 절반이나 겨우 사용하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었다.
어쨌든 대결이 이어지며 남궁빈의 검세는 더더욱 촘촘해졌고, 진서하의 살기도 시간이 갈수록 거세졌다. 그러나 창궁검세는 그저 기세만으로 끊어낼 수 있는 그물이 아니었다. 결국 둘의 움직임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더니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서로에게 검을 겨눈 채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지켜보던 관량이 그 모습에 골치 아프다는 듯 거칠게 머리를 긁었다. 정확히 둘의 상태가 어떤지 알아야 끼어들든 말든 하는데, 정통서부무공을 익힌 그에겐 신나게 싸우다가 굳어버린 둘의 상태가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관량이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빈과 진서하의 모습을 한 심마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실 남궁빈은 지금 망설이고 있었다. 현재 이 고착 상태는 그가 의도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창궁검세 자체가 이 고착 상태 이후 이어질 일격을 위한 검법이었다. 도저히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하늘의 제왕이 내리는 단 한 번의 일검. 창궁검세에 손발이 묶인 진서하는 그것을 온전히 몸으로 받아내야만 할 터였다.
하지만 그 일격을 뻗는 순간 진서하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었다. 아직 제왕검형은 미완의 검법이었고, 그래서 일단 시작하면 멈춰선 안 됐다. 머뭇거리면 도리어 남궁빈이 다칠 수도 있었다.
남궁빈에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의 가문이 그녀에게 가진 부채감은 물론이고 그녀의 스승에게 받은 은혜 또한 평범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버틸 수 있으리라 여겨 검을 뽑았다. 창궁검세는 제왕검을 꺼내지 않는 이상 상대방을 다치지 않게 제압하는데 최고의 검법이었다. 남궁의 이름 앞에 괜히 군자君子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니었다. 시간을 끌어 진서하의 내공이 다하는 대로 상황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문제는 그녀의 내공과 심마가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는 점에 있었다.
“이성을 되찾으시오, 진 소저. 당신을 죽이고 싶진 않소.”
남궁빈은 진서하의 움직임을 완전히 묶어버린 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진 않았다. 그녀는 이제 눈에 보일 정도로 유형화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건만 그녀 주변의 흙바닥에 거친 상흔이 새겨졌다.
“···안 되겠다.”
조금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던 관량은 더 참지 못하고 팔의 붕대를 풀며 칼을 뽑았다.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지는 몰라도 일단 그가 참전하면 이 대 일이 된다. 감산성의 뒷골목에선 그런 말이 있다. 등에 칼 맞으면 죽는 건 고수든 건달이든 똑같다는.
“어? 당신?”
하지만 그는 곧 멈칫했다. 계곡 한구석에서 터덜터덜 걸어오는 남자 하나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에 검댕이 잔뜩 묻어있었고, 옆구리와 가슴팍엔 시커먼 자국이 나 있었다. 마치 불로 지진 듯 검게 탄 구멍 사이로 진물이 새는 화상이 보였다. 그는 이환이었다.
관량은 그가 걸어가는 방향을 보고는 급히 외쳤다.
“이보쇼! 지금 그사이에 끼어들면 위험해!”
관량은 정작 본인도 그러려고 했으면서 이환이 두 사람 사이로 다가가자 급히 말렸다. 하지만 이환은 흘끗 그를 보고는 인사라도 하듯 살짝 고개만 까딱일 뿐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남궁빈이 흠칫했다. 이환이 창궁검세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발끝과 검을 움직여 검과 내기의 그물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가다듬으며 말했다.
“멈추시오, 이 소협. 더 다가가면 위험하오. 단순히 내 검뿐만 아니라 진 소저의 살기에 다칠 수 있소. 특히 지금 그 몸 상태면···”
“괜찮습니다.”
몸이 괜찮다는 건지, 아니면 진서하의 살기가 괜찮다는 건지는 몰라도 이환은 계속 진서하에게 다가갔다. 물론 그는 얼마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야 했다. 진서하의 몸을 묶고 있는 창궁검세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환은 다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 순간 그의 어깨에 핏 갈라지며 피가 튀었다. 고통 때문인지 그의 몸이 움찔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고, 이번엔 이미 화상을 입은 자리가 쩍 갈라지며 피와 진물을 흘렸다. 이환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때 그의 눈이 살기를 줄줄 흘리는 진서하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이 애써 찡그림을 지웠다.
그가 말했다.
“진 소저. 내 말 들립니까, 진 소저?”
* * *
무림인이 무공을 익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강한 무공에 뒤따라오는 많은 부와 높은 명성, 만인에게 받는 존경,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지위 등등. 혹은 그저 무의 끝을 보고자, 복수를 위해, 혹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익히기도 한다. 어느 누군가는 상상 속의 글줄을 현실로 재현하기 위해 무공을 익혔다.
그리고 그녀에게 무공은 스승님과의 연결이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의 풍경은 흐린 회백색 하늘 위로 뿌연 가마 연기가 가득한 장면이었다. 염호성의 특산품은 소금 호수의 물을 끌어와 만든 소금이었고, 그 가마를 끓이기 위해 끊임없이 나무와 석탄을 태웠다.
그 매캐한 연기처럼 그녀의 어린 시절 또한 뿌옇고 칼칼했다. 어머니를 학대하던 아버지. 찢어진 입술로 애써 웃으며 자신을 안아주는 어머니. 그녀의 따듯한 품 안에서도 언제나 차갑던 손발. 아무리 두꺼운 이불을 덮어도 매일 밤 달달 떨리던 몸. 고됨이 삶의 전부인 줄만 알았던 나날.
어느 날부터인가 몸은 떨리지 않았다. 그건 알 수 없는 추위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그녀의 몸이 더는 추위에 저항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는 의식이 있는 시간보다 없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녀가 그렇게 의식이 없는 동안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독을 먹였고, 아버지의 재산을 노린 염호성의 무림방파는 정의를 핑계로 어머니를 목매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슬픔마저 얼어버리는 듯한 추위 속에서 홀로 천천히 죽어갔다.
그녀에겐 기억이 없지만, 스승님을 처음 만난 순간이 바로 그때였다. 그는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온 승려와 함께 그녀의 병을 고치고, 이후 그녀가 이 땅을 떠날 수 있게 해줬다. 그때는 그렇게 헤어졌더랬다.
하지만 천형이 만들어준 인연일까. 그녀와 스승님은 그 이후 멀리도 돌고 돌아 결국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제자가, 그는 그녀의 스승이 되었다.
그런 과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그녀의 천성인지 사실 그녀에겐 무공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이 특별히 없었다. 그녀는 명성이나 부를 탐하지도 않았고, 무예의 끝을 보고자 하는 뜻도 없었다.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나 이기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그저 그 무공이 그녀와 스승을, 그리고 훗날 그녀에게 소중해진 수많은 사람을 이어주는 연결점이기에 익혔다. 그 외의 이유를 굳이 찾자면 호신護身 정도가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오 년 전 이르렀던 경지에 다음으로 넘어가는데 왜 그리 지지부진이었는지. 그녀에겐 그 너머로 나아갈 이유가 없었다.
과한 살기 때문에 검을 쥘 수 없다면 그냥 쥐지 않으면 되었다. 그녀가 무슨 무림 최강의 검수를 꿈꾸는 것도 아니었다. 검을 뽑지 않더라도 황야의 도적들 정도는 가볍게 쓸어버릴 수 있었다. 최근 괴상한 일에 휘말리며 조금 무리하긴 했지만, 전에는 검을 뽑을 일 자체가 별로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대로도 별문제 없지 않을까? 그녀는 지난 오 년간 무림을 떠돌아다니며 못 볼 꼴도 많이 봤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이제 조금 지치는 느낌이었다. 스승님과는 달리 그녀에게 떠돌이 생활은 그리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비록 그녀의 경지는 여기서 멈추겠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데엔 문제없을 것이다. 지금도 신사천에선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이라 해도 좋을 사람들이었다. 이제 그만 그들에게 돌아갈 때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깊은 의식 속에 잠겨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들리면 대답 좀 해보십시오, 진 소저!”
의식의 수면에 흐릿한 모습으로 한 남자가 비쳤다. 아는 사람이었다. 만난 지 고작 며칠이나 되었을 남자. 하지만 어쩐지 벌써 몇 달을 알고 지낸 사람 같았다.
그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정신 차리세요, 진 소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의 외침을 들으면서도 그녀는 굳이 위로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이 안으로 내려온 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막상 내려오니 올라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무공을 익힌 것은 그것이 스승과의 연결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황야를 떠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스승님이 그녀를 황야로 내쫓은 이후로 그녀에겐 무공을 더 익혀나갈 이유가 없었다.
그때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로마인들이 알리사를 잡아갔습니다! 지금 바로 쫓아야 해요!”
의식의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던 그녀의 눈이 수면을 바라보았다. 걸음걸음마다 새로운 상처 하나씩을 새기면서도 다가오기를 멈추지 않는 남자, 이환이 보였다.
알리사. 저 남자처럼 알게 된 지 이제 며칠 지났으나 혈육처럼 친숙하던 로마인 소녀. 그리고 그녀처럼 천형을 짊어진, 그녀를 닮은 아이. 로마를 떠나 멀고 먼 이역 땅인 이 무림까지 도망친 소녀. 오직 그녀의 핏줄을 이용하고자 하는 자들만 쫓아올 뿐. 녀석은 외톨이다. 어둡고 추운 골방 속에서 죽어가던 그녀처럼.
“그 아이를 도와야 합니다! 그 녀석한텐 지금 우리밖에 없어요!”
그녀가 무공을 익힌 이유는 그것이 스승님과의 연결점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무공은 연결이고, 인연이었다.
“진 소저! 정신 차려요! 지금 움직여야 해요!”
뺨에 길쭉한 상처가 생겼지만 이환은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연결을, 인연을 두려워하는 그녀의 심마가 끊임없이 그를 밀어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수면 속에 손을 집어넣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진서하는 그 손을 보며 깨달았다. 그녀에겐 다른 사람과의 연결과 인연이 무공 그 자체였다. 그래서 그녀의 스승도 그 뜻을 하나의 무공으로 승화시켜 그녀에게 가르쳤다. 십 년의 연공으로 심마가 피어난 것은 그녀의 세상이 그 신사천의 장원을 벗어나길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녀의 두려움이었다.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인연들. 그들이 그녀에게 줄 상처와 그녀가 그들에게 줄 상처들. 그녀는 그것이 두려웠고, 그 두려움은 가까이 다가오는 모든 것을 베어내고자 하는 살기로 변했다.
그녀의 스승이 그녀를 세상으로 내보낸 이유가 그것이었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다치고, 다시 회복하여 그녀가 작은 껍질을 벗어내길 바라며.
그리고 지금, 지난 오 년의 시간과 새로운 인연이 더해져 처음으로 그녀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할 이유가 생겼다. 예전 그녀를 구해준 스승님처럼 그녀 또한 자신을 닮은 소녀를 구하기 위해서.
진서하는 이환의 손을 잡았다.
* * *
남궁빈은 천천히 검을 거뒀다. 공간을 장악하던 그의 내공과 기세가 갈무리되었다. 다행히 제왕검을 꺼낼 필요는 없을 듯했다. 참 다행이었고, 동시에 아주 약간 아쉽기도 했다. 잘하면 남궁의 담벼락을 넘어 최초로 시연되는 제왕검이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 무슨 생각을.”
그는 그 생각을 털어내려 탈탈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제왕검이 사용되었다면 비극만 남았을 것이다. 비기의 시작부터 그런 업보를 쌓는다면 훗날이 좋을 것 같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한 그의 시선이 두 남녀를 향했다. 진서하와 이환이 한쪽 손을 마주 잡은 채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서하의 모습에서 조금 전까지의 살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놀랍게도 심마를 완전히 이겨낸 듯 보였다.
그녀가 이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다쳤네요.”
이환은 검댕이 잔뜩 묻은 얼굴로 씨익 웃었다.
“제가 아직 수련이 부족해서요. 그래도 몸뚱이 하난 튼튼해서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심각하진 않습니다.”
진서하는 오른손을 뻗어 이환의 뺨에 남은 상처를 매만지려다가, 움찔 놀랐다. 아직 그 손에 검이 쥐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능숙한 동작으로 등 뒤 검집으로 검을 회수하고는 다시 이환의 뺨에 손을 뻗었다. 그 손길에 이환이 살짝 움찔했다.
“···아파요?”
“헤헤. 괜찮습니다.”
이환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헤실거렸다. 아무래도 진서하가 걱정해주는 게 기분 좋은 듯했다.
그런 두 사람에게 관량과 남궁빈이 다가왔다.
“보아하니 이제 제정신인 것 같소만··· 그럼 이게 무슨 일인지 좀 설명해 주쇼. 당신들이 워낙 급하게 떠났다는 말에 뭔가 험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닌가 했는데··· 정작 험악해진 사람은 당신이었고···”
관량이 이게 뭔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듯 아리송한 표정으로 난장판이 된 계곡 여기저기와 진서하 등을 가리키며 그리 물었다. 그러자 헤헤거리던 이환이 지금 이럴 상황이 아니라는 듯 표정을 바꿨다. 그가 진서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로 움직여야 합니다, 진 소저. 로마놈들이 알리사를 잡아갔어요.”
진서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되물었다.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봤나요?”
“서쪽. 서쪽으로 갔습니다.”
“서쪽이요? 하지만 로마는···”
“아, 그렇네요. 로마는 동쪽으로 가야··· 엥, 그럼 어째서?”
“···아니, 설명 좀··· 이게 그렇게 큰 부탁인가?”
관량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으로 보며 자신의 말이 무시당한 게 서글프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남궁빈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관 선배. 권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구려.”
“너 때문이잖아, 새꺄···”
진서하가 그들을 바라보며 짧게 설명했다.
“알리사가 납치되었어요. 우린 그들을 쫓을 겁니다.”
그 말에 관량과 남궁빈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남궁빈이 다시 진서하와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잘 됐구려. 여기 순찰대 최고의 인간 추적자가 있소이다. 비록 사석원에선 헛물만 들이켠 사람이지만.”
“뭐 시발. 그건 사람이 아니었잖아. 예외로 둬야 된다고.”
관량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이번엔 진서하와 이환이 서로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