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67)
진서하 외전 23화
* * *
알리사는 흠칫하며 눈을 떴다.
그녀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며 지금 상황을 이해하려 해봤다. 계곡에서 헥토르와 아킬레스가 습격을 해왔다. 하지만 헥토르와 티폰의 아이들은 두 무림인에게 상대가 되질 않았다. 그대로 시간을 끌었으면 그곳에서 만신전의 추적이 끝장날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때 티폰의 전사들이 알리사의 뒤를 기습했고, 헥토르가 벼락 폭풍을 내뿜는 동시에 진서하가 검을 뽑았다. 그 후에 보인 것은 이성이 사라진 듯한 진서하와 황금 방패로 그녀와 맞서는 아킬레스였다. 그리고 헥토르가···
그녀는 깜짝 놀라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깨어났군.] [···헥토르!]타닥이는 모닥불과 그 너머에 앉은 헥토르가 보였다. 사자처럼 기품있던 머리칼과 수염은 지저분해져 있었고, 안색은 창백했다. 신념으로 이글거리던 두 눈에선 기묘한 빛이 맴돌 뿐이었다.
알리사는 지금 상황에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헥토르 외에도 만신전의 전사로 보이는 자가 두엇 보였고, 그들은 잠자리를 준비하거나 모닥불 앞에서 무쇠 냄비를 끓이고 있었다. 저쪽 편엔 안장을 풀어낸 말이 서너 마리 보였다. 더 돌아보니 가늘게 흐르는 하천을 끼고 캠프가 마련된 듯 보였다.
그들의 면모를 살피던 알리사는 곧 움찔 놀라야 했다. 그녀 옆에도 한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손을 뒤로 하여 나무에 묶인 채 널브러져 있었다. 가까웠던 탓에 알리사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중원인이었고, 중년 정도로 보였다. 그는 두 눈이 멍하니 풀린 채 살짝 벌어진 입으로 질질 침을 흘리고 있었다. 알리사는 대번에 지금 그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또 무슨 짓을···] [날 봐라, 알리사.]당혹스러운 눈으로 그 중원인을 바라보던 알리사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헥토르가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알리사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그를 겨눴다.
그리고 다시 놀랐는데, 지금 그녀의 몸을 구속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과 그녀가 가지고 있던 주문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헥토르가 멍한 표정의 알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너절한 주문은 봉인했다. 나보다 강력한 마술사가 아니라면 풀어낼 수 없겠지.]잠시 당황하던 알리사는 곧 굳은 표정으로 그를 마주했다.
[···난 로마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신녀가 되지 않을 거라고요!] [신녀가 되지 않는다면 네게 남는 것은 그저 짧은 추위와 죽음뿐이다. 그나마 살아있는 동안이라도 편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가?] [난 죽지 않아요! 언니가 내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했어요!]헥토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라. 그 마녀를 말하는 건가?] [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알리사의 외침에 헥토르는 피식 웃었다.
[글쎄. 내가 본 것은 옛 영웅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괴물이었다. 병을 치료할 방법이 그런 괴물이 되는 것이라면-] [그럼 적어도 당신들에게 복수할 순 있겠군요. 그거면 충분하죠.]맹랑하게 자신의 말을 뚝 끊어내는 알리사의 모습을 보며 헥토르의 미소도 진해졌다.
[···복수라. 네 아비의 복수?] [그래요! 그리고 내 인생을 망친 것에 대한 복수도!] [그럼 넌 로마의 만신전마저도 불태워야 할 텐데?]알리사는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당신이 만신전의 급진파에 불과하다는 거 다 알아요. 모든 만신전 사제들이 전부 당신 같진 않다는 거 안다고요!] [그래. 하지만 동시에 그 대부분은 내가 하는 짓을 그저 묵시하고 있지. 그렇다면 그들도 암묵적으로 널 신녀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 아닌가?] [그 대부분은 날 알지도 못하잖아요! 당신들이 정보를 감추고 왜곡해서! 내가 직접 만난 사제 중에선 위험함을 무릅쓰고 날 도와준 사람도 많았어요!]헥토르는 낮게 웃었다.
[아, 그 메르쿠리우스 하급 사제를 말하는 건가?]알리사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 사제한테 무슨 짓을···?] [배교자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알리사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감추려 두 눈을 꾹 감았다. 지금 헥토르가 말하는 메르쿠리우스 하급 사제는 그녀가 로마를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불행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서하와 이환이 괜찮은 것인지 걱정되었다.
헥토르는 그런 알리사의 얼굴을 탁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쿨럭거리며 거친 기침을 시작했다. 몸을 둥글게 말 정도로 격하게 기침을 하던 그의 입에서 붉은 것이 튀었다. 흙바닥을 적시는 그것은 선명한 피였다.
[무리하지 마시게, 형제여. 자네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그때 저편 수풀에서 누군가 걸어오며 그렇게 말했다. 모닥불 불빛 안으로 걸어오는 자는 아킬레스였다.
헥토르가 컥컥거리면서도 대꾸했다.
[난···쿨럭, 네 형제가, 아니다···] [오, 이거 참 안타깝군. 우린 함께 훈련을 받고, 함께 만신전의 전사가 되지 않았나? 옛 영웅의 이름을 받은 것도 비슷한 시기였지.] [넌, 쿨럭. 아킬레우스의··· 쿨럭, 케헥··· 이름을 더럽히는···]아킬레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하하 웃었다.
[옛 영웅들의 이름은 진즉에 더러워졌네. 우리 같은 살인마들에게 그 이름이 주어졌을 때부터. 아니, 그 옛 영웅들부터 미친 살인광들이었으니 오히려 이게 딱 맞을지도 모르겠군.]헥토르는 기침이 심해져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러자 아킬레스의 눈은 알리사를 향했다.
[너, 신녀.] [난 신녀가 아니에요.]아킬레스가 씨익 웃었다. 그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넌 신녀다. 나에게 티폰의 힘을 쥐여줄 신녀.]그 눈을 마주한 알리사의 몸이 굳었다. 마치 포식자를 눈앞에 둔 사냥감이 된 것 같았다. 알리사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생각이죠?] [생각? 넌 생각할 필요 없다. 그저 우리가 가는 길을 얌전히 따라오기나 하도록.] [개소리하지 마요. 내가 얌전히 안 있으면 어쩔 건데요? 당신들은 만신전으로 돌아갈 때까지 나한테 손댈 수도 없잖아요?]그 맹랑한 목소리에 아킬레스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겁이 나서 일단 지르고 봤던 알리사는 주춤주춤 뒤로 기었다. 하지만 그녀가 물러나는 것보다 아킬레스의 손이 그녀의 목을 붙들어 올리는 것이 더 빨랐다.
아킬레스는 버둥거리는 알리사의 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린 만신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의식에 필요한 건 네 몸뚱이지 정신이 아니야. 네가 네 발로 움직이는 것보다 말안장에 업혀 가는 게 더 낫다고 판단되면, 너도 저 무림인처럼 백치로 만들어주마.]그는 알리사를 거칠게 내던졌다. 콜록거리며 바닥을 나뒹굴던 알리사는 고개를 들어 나무에 묶여 있는 중원인을 바라보았다.
[···설마 코퀴토스 주문을··· 그래서 이 땅의 말을 할 수 있었어, 기억을 빨아먹고··· 그런 끔찍한 짓을···]아킬레스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제규상이라던가? 덕분에 말과 이 땅의 상황을 빨리 배울 수 있었지. 이 무림인이라는 자들은 동과 서로 나뉘어 다투고 있다더군. 우린 동쪽 무림인들을 피해 서부 해안에서 배를 탄다.] [···서쪽으로 간다고요? 세상을 한바퀴 돌기라도 할 셈이에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그저 조용히 힘을 기를 장소를 찾기만 하면 그만이다.]아킬레스를 올려다보던 알리사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파르르 떨고 말았다. 저 티폰의 대전사는 자신을 만신전으로 데려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급히 헥토르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바닥에 반쯤 엎어져서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뿐이었다.
[손발이 묶여 있지 않으니 도망치려면 어디 도망쳐 봐라. 네 몸에 있던 드루이드의 주문은 봉인되었으니, 우리와 멀어지면 넌 반의 반나절도 지나기 전에 온몸이 얼어붙어 의식을 잃을 거다. 이 무더운 황야 어딘가에서 홀로 얼어 죽고 싶다면 그렇게 해봐.]알리사에게 겁을 준 아킬레스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몸을 돌려 모닥불로 다가가 앉았다. 스튜를 끓이던 전사가 그에게 접시를 넘겼다.
알리사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대꾸했다. 알리사는 뭐라 말하려 입을 열다가, 꾹 다물었다. 그녀는 진서하와 이환이 말처럼 달리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바위와 자갈 가득한 곳에서도 같은 속도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속도는 상상 이상일 터였다.
그렇다면 굳이 그 사실을 알려줄 필요가 없었다. 티폰의 대전사는 잘못된 판단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알리사는 고개를 돌려 정신이 나가버린 무림인을 바라보았다. 코퀴토스 주문은 대상의 영혼을 파괴하고 그 기억을 훔쳐오는 사악한 주문이다.
아킬레스가 계속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선 아직 완전히 기억을 빨아들이진 못한 듯 보였으나, 어쨌든 그의 의식은 지금 남아있지 않을 터였다. 알리사의 눈에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깃들었다. 알리사가 신대륙으로 넘어오지 않았다면 아킬레스도 넘어오지 않았을 것이고, 그럼 저 남자도 이런 험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바라보던 알리사가 중원 말로 속삭였다.
“···미야내요.”
다음 순간, 알리사의 눈이 커지며 입이 떡 벌어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 백치처럼 질질 침을 흘리던 그 중원인이, 아주 찰나지만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는 한쪽 눈을 찡긋한 것이다.
하지만 깜짝 놀란 알리사가 급히 고개를 돌려 아킬레스의 동태를 살피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을 땐 그 깜빡임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여전히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알리사는 혼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아킬레스의 등을 보며 대뜸 외쳤다.
[나도 배고파! 내가 굶어 죽는 걸 바라는 건 아니겠지!]스튜를 퍼먹던 아킬레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알리사는 뻔뻔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 나쁜 놈아. 같잖으면 내 영혼을 부수고 네가 내 똥오줌을 치우시던가.]아킬레스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영혼을 파괴하면 그녀의 몸뚱이가 뭘 먹고 싸는 걸 모두 다른 사람이 보살펴야 했다. 제규상이야 크게 중요한 자가 아니니 뭘 먹일 것도 없이 그냥 물이나 뿌려 정리하면 된다지만, 알리사는 신녀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 적당히 건강한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훗날 의식을 치를 때라면 모를까 당장은 그녀가 스스로 자신을 보살피는 게 더 나았다.
결국 아킬레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스튜를 끓이던 검은 전사가 그릇을 채워 나무 스푼과 함께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알리사는 두말없이 그 스튜를 우걱우걱 퍼먹기 시작했다.
잘 먹고 체력을 유지해야 했다. 어느 순간이든 기회를 잡기 위해선 체력이 있어야 했다. 그녀는 그 기회를 위해 부지런히 조잡한 나무 숟가락을 움직였다.
* * *
“여기서 다시 사람이 되었군. 뭐야 대체? 로마 사람들은 다 이런가?”
흔적을 살피던 관량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리 말했다. 그는 조금 전까지 관량이 보았다던 거대 뱀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알리사도 로마인이지만 멀쩡하잖습니까. 그리고 표범 비슷한 걸로 변신하는 사람도 있는데 뭘 그러세요?”
옆에 있던 이환이 그렇게 대꾸했다. 그는 이리저리 붕대를 감고 관량에게 빌린 새 무복을 입고 있었다. 몸이 튼튼하다던 말이 정말인지 그는 움직이는 데 별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의 상처를 살핀 관량은 그가 굉장한 고통을 참고 있음을 알았다.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진서하와 이환, 그리고 관량과 남궁빈은 사석원의 계곡에서 곧장 추적을 시작했다. 산과 바위 지형을 지나기 위해 말도 버리고 최소한의 짐만 챙긴 채 달린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해가 질 때쯤 로마인들의 확실한 흔적을 잡을 수 있었다.
관량이 자신이 찾은 흔적을 설명해 주었다.
“···그것도 그렇군. 어쨌든 여기서 기다리던 자가 있던 모양이오. 멀쩡한 이가 둘, 그리고 묶인 것으로 보이는 자가 하나. 저기 거뭇한 자국이 보이쇼? 아마 그 벼락을 타고 움직인다던 자가 아닐까 싶은데. 여기서부터 말을 타고 달렸군.”
그냥 너저분한 공터일 뿐이었는데 관량 그가 하나하나 짚어주며 하는 말을 들어보니 정말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 흔적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이환이 문득 말했다.
“굉장하십니다. 그런데 사석원에선 왜 범인을 쫓지 못하신 겁니까?”
“···그야 범인이 다른 동물로 변신하는 걸 고려하지 못했으니까. 아니, 사실 누가 그런 걸 고려하겠냐고? 사람이 짐승으로 변신하는 게 말이 돼? 벼락을 타고 움직이는 건 또 뭐고? 지가 무슨 신선이야?”
혼자 떨떠름해 하던 관량은 고개를 살살 가로젓더니 다시 흔적을 살폈다.
“어쨌든 이 방향이면··· 대충 염호성 쪽으로 움직이고 있군. 이 자들이 우리의 추적을 감지해 속도를 높이지 않는다면 모레 중엔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오.”
“염호성이요?”
가만히 있던 진서하의 반문에 관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로마인들이 길은 알고 움직이는 건지 모르겠는데, 알고 있는 거라면 아마 염호성 서쪽 벌판으로 움직여 흔적을 최소화하려는 것으로 보이오. 뭐 그래봐야 내 눈을 피할 순 없겠지만.”
관량은 농담처럼 그렇게 말했지만, 진서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들어 서쪽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자기애 넘치는 사람이 된 관량은 다시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진서하의 얼굴을 본 이환이 물었다.
“뭔가 잘못되었습니까?”
“···아뇨. 잘못된 건 없어요.”
진서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서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새하얀 소금 평원이 그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