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68)
진서하 외전 24화
* * *
알리사의 말은 그녀가 사석원에서 처음 구했던 그 검은 녀석이었다. 헥토르가 그녀를 붙잡아 올 때 함께 딸려온 덕분에 계속 함께하게 된 것이다. 녀석의 갈기를 쓰다듬으니 녀석이 더 만져달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알리사는 피식 웃으며 갈기를 쓸어주고 주변을 살폈다.
아킬레스와 헥토르, 검은 전사 둘과 의식이 없는 중원인, 그리고 알리사로 이루어진 여섯 인마人馬가 벌판을 나아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달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말이 쉴 수 있도록 천천히 걷는 중이었다. 그들은 지난 이틀간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최소화하며 서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벌판이라 다른 사람을 피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그렇게 이동하는 동안 아킬레스와 검은 전사들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이었고, 헥토르는 점점 더 상태가 나빠져 이젠 시체처럼 창백한 상태였다. 의식이 없는 중원인은 짐짝처럼 말안장에 엎어져 움직임이 없었다.
그 중원인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알리사의 눈이 뒤를 향했다. 아직 오전 중이라 동쪽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그들의 등에 햇볕을 비추고 있었다.
알리사는 진서하와 이환이 정말 자신을 찾아오고 있을지 걱정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진서하의 모습이 뭐였는지, 헥토르의 벼락에 휘말린 이환이 멀쩡하긴 할지, 그들이 자신을 추적해올 방법이 있긴 한지 등등도 걱정되었다.
그때 제일 선두로 앞서가던 아킬레스가 우뚝 멈췄다. 그가 멈추니 다른 말들도 모두 멈추게 되었다. 알리사가 불안한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말을 멈춘 아킬레스는 안장에서 내려 흙바닥을 살폈다. 뭘 보는 건가 싶어 알리사는 고개를 길게 빼고 그를 훔쳐보았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아킬레스의 손에는 너덜너덜한 뱀 허물이 하나 들려 있었다. 아킬레스가 눈을 좁혔다.
[뱀의 경고라··· 너, 신녀. 이리 와라.]알리사는 말에서 내리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킬레스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붙잡아 끌어내렸다. 그녀가 타고 있던 검은 말이 놀라서 거칠게 투레질했다.
[이, 이게 무슨 짓··· 이거 놔!]알리사가 그의 손을 붙잡고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아킬레스의 손아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날 봐라, 신녀.] [누가 신녀야! 이거 놓기나 해! 이 나쁜···]다음 순간 버둥거리던 알리사의 표정이 멍해졌다. 아킬레스와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그의 눈은 뱀처럼 노랗게 변해 있었다. 심지어 그가 입을 벌리자 입천장에 숨겨져 있던 독니 한 쌍이 튀어나와 하얗게 빛나기까지 했다.
아킬레스는 그 독니로 알리사의 목을 콱 물어버렸다. 알리사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잠시 후 입을 뗀 아킬레스가 옆으로 퉤, 남은 독을 뱉고는 알리사의 얼굴을 살폈다.
[허윽··· 으읏···]알리사의 하얀 목에서 시작된 검은 핏줄이 거미줄처럼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그녀의 몸이 뒤로 휙 젖혀졌다.
악신의 독이 그녀의 몸을 돌았다. 독은 순식간에 그녀의 몸에 있는 아홉 관문을 거치며 정제되고, 그보다 더 정순할 수 없는 순수한 힘이 되었다. 그 강렬한 힘을 견디지 못한 알리사의 핏줄이 울룩불룩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했다.
그때 아킬레스가 그녀의 반대쪽 목덜미를 물었다. 이번엔 독을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몸에서 휘돌던 순수한 힘을 뽑아냈다. 아킬레스의 눈에서 검붉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알리사의 목에서 입을 뗀 아킬레스는 그 불타는 눈으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연··· 놀라운 힘이야···]그의 시선은 지금 그들이 서 있는 벌판을 벗어나 수 마일 일대를 모조리 훑어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확히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는 네 무림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검은 전사들을 도륙하던 여자와 헥토르의 벼락보다 빨리 움직이던 무림인, 그리고 처음 보는 무림인도 둘이나 더 있었다.
그들을 노려보던 아킬레스는 곧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지금 몸 안에서 휘돌고 있는 이 막강한 힘이라면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도리어 그가 저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다시 알리사를 바라본 순간 사라졌다.
[크흣··· 아파··· 언니···]알리사는 아킬레스에게 붙들린 채 고통을 참으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킬레스에게 물린 목덜미는 혈관이 터지며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완전히 소화 시키지 못한 뱀독은 그녀의 입술을 퍼렇게 만들고 있었다. 대충 봐도 그녀의 몸 상태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킬레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약하군. 어쩔 수 없지.]당장 이곳에서 그녀가 죽을 때까지 기운을 정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킬레스의 계획은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그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키우듯.
아킬레스는 알리사를 그녀의 말에 묶어버리고는 본인도 곧장 말에 올라탔다. 출발하려는 그를 보며 헥토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가까워졌군···] [그래. 속도를 올린다.] [계속 도망치기만 해봐야···] [이제 곧 그들은 우릴 쫓을 여유가 없을 것이다.]헥토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킬레스는 입가에 비웃음 비슷한 것을 띠며 말을 이었다.
[그 무림맹이라는 자들. 그자들이 바짝 따라붙었다. 마녀는 우리보다 그들을 먼저 상대해야 할 터. 몸을 빼기엔 충분한 시간이다.]그의 시선이 먼 동쪽을 훑었다. 강렬한 시선이 수 마일 뒤에서 달리는 진서하 일행을, 그리고 다시 거기서 수 마일 뒤에서 거칠게 말을 달리고 있는 또 다른 무림인들을 훑어갔다.
거리를 확인한 그는 말의 옆구리를 차며 말했다.
[가자.]한차례 질주 후 숨을 돌리던 말들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쪽으로 달려 나갔다. 아직 오전 중의 태양이 그들의 등에 햇볕을 비추고 있었다.
* * *
한참 달리던 관량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자기 무릎을 붙잡았다. 진서하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업히겠어요?”
숨을 헥헥거리던 관량은 고개를 들고 뭔 망측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그와 비슷하게 숨을 헐떡대던 이환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추적도, 중요하지만, 놈들을 붙잡은 후에, 우리 체력도, 어후··· 우리 체력도 남아있어야, 싸울 수 있습니다. 후우··· 조급해지면 안 돼요, 진 소저. 후···”
관량을 업고 뛰려던 진서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슬슬 호흡이 딸리기 시작하던 남궁빈도 그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사람 가운데 진서하의 경공술은 차원이 다르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빠르고 안정적이었다.
그건 단순히 그녀의 내공이 많았기 때문도 있었지만, 그녀가 익힌 경공술의 수준도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관량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내가 멈춘 건 이놈들 흔적이 이상해서요.”
다른 세 사람이 의아해하자 관량은 허리를 펴고 말했다.
“속도를 조금 줄이는 듯하다가, 다시 전력으로 달려가고 있소. 질주 후 속보를 이어가던 이동 형태가 갑자기 바뀌었다는 거지.”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관량은 목덜미의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게··· 뭔가 다른 급한 일이 생긴 것이거나, 아니면···”
“···우리 추적을 눈치챘군요.”
진서하의 대꾸에 관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어떻게? 그놈들이 무슨 천리안을 가진 것도 아니고?”
남궁빈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관 선배. 그럼 번개 타고 날아다니는 건 말이 되오?”
“···아니, 시발. 그놈들 술법은 무슨 다 만능이야? 다 돼? 날아다니고 훔쳐보고, 아주 신선이 따로 없네.”
“아뇨, 만능은 아니에요.”
진서하는 관량의 투덜거림에 그렇게 대답했다.
“만능이었다면 이렇게 우릴 피해 도망치진 않겠죠.”
“···그것도 그렇네.”
관량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더니 말을 이었다.
“어쨌든 놈들이 속도를 늘렸다고는 해도 이 방향으로 계속 달리면 오늘 중엔 놈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오. 아무리 늦어도 염호성 서쪽에 있는 소금 평원쯤에서 다 따라잡겠군.”
“아, 염호성 소금 평원. 들어보았습니다. 소금이 평원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마치 눈이 덮인 것 같다죠?”
“눈이 덮인 것과는 조금 달라요. 그보다는 뭔가 더··· 황량하죠.”
소금 평원이라는 말에 반색하는 이환에게 옆에서 진서하가 묘한 대꾸를 남겼다. 이환은 그런 진서하를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거길 잘 아십니까?”
“···어릴 때 염호성에서 살았었어요.”
그녀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먼 곳을 보는 듯했다. 이환이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봤지만 그저 드넓은 벌판과 뜨문뜨문 야트막한 동산들이 보일 뿐이었다.
이환이 그녀를 불렀다.
“···진 소저?”
하지만 뭐가 이상한지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녀는 곧바로 바닥에 엎드려 귀를 땅에 대고 눈을 감았다. 이환이 그걸 보며 다시 그녀를 부르려다가, 옆에 있던 관량이 그를 툭 건드리며 검지를 입술에 대는 걸 보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잠시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기마 수십이 달려오고 있군요. 정확히 우리 방향으로요. 멀지 않아요.”
그녀는 이환과 시선을 마주쳤다. 이환은 기마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벌써 여기까지 쫓아온 겁니까? 양 선배의 경고가 있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지난 며칠간 우리가 이동한 거리가 있으니 양 삼촌의 서신보다 조금 더 빠르다고 봐야 해요. 그만큼 무리해서 달려오고 있다는 말이겠죠.”
“끄응··· 그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는데···”
둘이서만 아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관량과 남궁빈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관량이 얼른 끼어들었다.
“또 뭔 소리요? 누구한테 쫓기고 있었소?”
진서하는 그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동무림맹의 추적대에요. 우리를 쫓고 있죠.”
“···범죄자였소?”
관량이 입을 쩍 벌리며 하는 말에 이환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뭔가 오해가 좀 있습니다. 사실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면 다 해결될 문제인데, 일단 알리사의 병부터 해결하려다 보니 조금 꼬였습니다.”
“···그 애가 어디 아팠소? 그럼 저 로마놈들이 아픈 애를 납치한 거요?”
이환은 생각해보니 저 둘에게 자세한 사정을 털어놓을 시간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관량과 남궁빈은 그렇게 자세한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도 그저 아이가 잡혀갔다는 말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순찰대답다면 순찰대다운 모습이었다.
진서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당장 그 이야기를 다 털어놓기엔 시간이 부족해요. 여기서 머뭇거리면 동무림맹 추적대에게 따라잡힐 거예요.”
한마디로 당장 알리사의 추적을 이어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에 관량이 살짝 머뭇거리는 동안 남궁빈은 털털 웃으며 말했다.
“난 진 소저와 이 소협을 믿소. 그리고 당장 위험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알리사 그 아이지. 자세한 사정은 일이 마무리된 후 듣겠소. 관 선배?”
“어? 어어. 뭐 그건 맞지. 그 녀석이 어디 아픈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그럼 계속 갑시다. 저쪽 추적대가 말을 달리고 있다 했지? 그럼 우리도 죽어라 달려야 할 거요.”
진서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간단한 경공술 하나를 가르쳐드릴게요. 모두들 달리면서 배울 수 있을 거예요.”
“···예? 경공술이 그렇게 쉬운 무공은 아니라고 아는데요···”
이환이 기겁을 했지만, 진서하는 신발 끈을 정리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처럼 무작정 내공으로 뛰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고 오래 달릴 수 있겠죠.”
“그럼 설마 그분의?”
남궁빈이 반색하며 하는 말에 진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초에 불과하지만요.”
남궁빈은 당장에 포권을 하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본가의 경공술도 그리 뛰어날 것 없는 편이오. 그러니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거절하지 않겠소, 소저. 잘 배우겠소.”
“좋아요. 가죠.”
이환과 관량은 남궁빈의 태도에 어리둥절했지만, 곧 달리기 시작하는 진서하의 뒤를 쫓으며 금세 의아함을 지워야 했다. 그녀가 달리면서 하체 쪽 경혈 어디로 내공을 보내야 하는지, 어느 정도의 세기를 유지해야 하는지, 한편 내보낸 내력은 어디로 어떻게 회수해야 하는지 등등을 늘어놓기 시작한 탓이었다.
네 사람은 그 자리에 도착했을 때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그런 네 사람의 모습을 높은 하늘에서 큼직한 수리 한 마리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매에 붉은 깃이 멋들어지게 난 녀석이었다.
잠시 서쪽으로 달려가는 그들을 바라보던 녀석은 고개를 돌려 동쪽에서 우르르 달려오는 무리를 확인했다. 기마 수십이 숨을 헐떡거리는 게 꽤 무리해서 이동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확실한 건 그 속도로는 먼저 앞서가는 자들을 당장 따라잡기 힘들어 보였다.
주변의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한 녀석은 날개를 펄럭여 서쪽을 향했다. 지상의 무리들과 다른 점이라면 녀석은 되돌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