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69)
진서하 외전 25화
* * *
[저들은 켄타우루스의 후예라도 되는 건가?]한참 말을 달리던 아킬레스가 뒤를 돌아보고는 얼굴을 구겼다. 그 구겨진 얼굴에는 짜증과 불안, 두려움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와 로마인 일당은 지금 저 멀리 지평선이 그려지는 드넓은 평원을 달리고 있었다. 눈에 걸리는 거라고는 지평선에 걸친 흐릿한 산맥들 정도인 평원이었는데, 그 흙바닥은 어딘가 축축하고 제대로 된 풀이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마른 땅은 어설프게 굳어서 쩍쩍 갈라진데다가 말발굽에 밟히면 퍼석퍼석 부서지며 모래와 소금이 섞인 누런 진흙이 되었다.
아킬레스는 이 평원에 들어서며 잠시지만 벌써 이 신대륙의 서부 해안에 다다른 것인가 착각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와 로마인들은 새로운 땅의 새로운 경이를 감상할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그 평원에 들어서면서부터 등 뒤를 바짝 쫓아오는 무림인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던 탓이다.
아킬레스는 분명 그들이 이쪽을 따라잡는 것보다 무림맹이라는 자들에게 따라잡히는 게 더 빠르리라 예상했는데, 그건 평원지대에서 말이 사람보다 느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저들이 일백 마일 이상 벌어졌던 거리도 두 발로 따라잡았음을 고려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죽어라 달린 로마인의 말들은 입에서 하얀 거품을 질질 흘리며 씩씩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언제 쓰러져버릴지 모를 상태였다.
말의 상태를 살핀 아킬레스가 결국 고삐를 당겨 멈추고는 외쳤다.
[헥토르! 말들에게 주문을 써라!] [···그럼 잠깐은 더 달릴 수 있어도 결국 죽어 나자빠질 텐데?] [당장 저 무림인들을 따돌리는 게 먼저다!]창백한 안색으로 아킬레스를 바라보던 헥토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품에서 어떤 주머니를 꺼내 그 안의 가루를 허공에 휙 뿌리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자 거품을 물고 다 죽어가는 식으로 헥헥대던 말들이 두 눈을 붉게 빛내며 거친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들에게 하나하나 주문을 걸던 헥토르는 순간 멈칫했다. 현재 의식이 없는 알리사는 말안장에 묶여있었는데, 그녀가 묶여있는 검은 말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다른 말들의 눈치를 보며 힘든 척을 하는 듯한···
게다가 녀석은 헥토르가 주문을 완성하지도 않았는데 대뜸 다른 말들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며 숨을 헐떡대기까지 했다.
하지만 헥토르가 그 말에 대한 의문을 드러내기도 전에 아킬레스가 외쳤다.
[달려라!]로마인들이 탄 말이 조금 전보다 몇 배는 빨라진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엇! 빨라집니다!”
이환이 깜짝 놀라 외쳤다. 그리고 다른 이들 또한 그가 말한 점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씩 가까워지던 로마인들의 모습이 단번에 다시 작아지고 있었다.
진서하가 외쳤다.
“우리도 더 빨리!”
이미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던 그녀의 몸이 다시 한번 가속하여 앞으로 튀어 나갔다.
“엑! 진 소저! 같이 가요!”
이환이 그녀의 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렸다. 훌쩍 날려 나가는 두 사람을 보며 관량의 눈이 급격히 추욱 처졌다. 그는 지금도 최선을 다해서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관량의 어깨를 남궁빈이 툭 치고는 지나갔다.
“먼저 가겠소, 관 선배.”
남궁빈은 그를 보며 천천히 오라는 듯 씨익 웃어주고는 멀어졌다. 당연히 관량에겐 비웃음으로 보였다. 대번에 그의 얼굴에 열이 뻗쳤다.
“···으아아! 시바알! 나는 순찰대다-! 무림맹 순찰대라고오-!”
그 외침 이후 그는 입을 꾹 다물고는 온 정신을 달리는 것 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순간 멀어지는 듯하던 로마인과 그들의 거리가 다시 좁혀지기 시작했다.
* * *
한참 말을 달리던 신검단주 하연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피어났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야? 지치지도 않나?”
그녀의 눈에는 멀리 평원을 달리고 있는 점 네 개가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거리를 줄여나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다시 멀어지고 있었다.
옆에서 말을 달리던 신검단원 하나가 외쳤다.
“이대로 더 달리면 말이 쓰러져 죽을 겁니다! 속도를 줄여야 합니다, 단주!”
그 말에 옆에 있던 주술사가 버럭 소리쳤다.
“무슨 소리! 말이야 다시 얻으면 그만이지만 지금 저들을 놓치면 다신 기회가 없을 것이오! 로마인 도적들 역시 저 앞에서 달리고 있단 말이요! 게다가 이미 우린 서무림맹의 영역에 들어와 있소! 여기서 잡지 못하면 이 추적은 실패요!”
얼핏 들으면 임무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하연은 그 주술사가 하지 않은 말을 알았다. 정확히는 그 로마인 중 알리사라는 소녀를 놓칠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을 놓치면 안 된다는 말 또한 맞았다. 이곳은 확실히 서부 무림맹의 영역이었고, 그들 추적대가 이렇게 멋대로 활보하고 있는 모습이 들키면 최악의 경우 소규모 분쟁으로까지 번질 수 있었다.
하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상당히 무리하면서까지 속도를 높였음에도 고원성 일대에서 저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여기서 놓치면 그땐 정말 끝이다. 아무리 그녀의 숨은 임무가 주술사들의 폭주를 막는 것이라고는 해도 실패는 실패였다. 동무림맹은 본단을 습격한 자들마저도 잡지 못하는 얼치기들이 되는 것이다.
다음 순간 하연은 허리를 펴고 크게 외쳤다.
“들어라-!”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녀는 오른손을 번쩍 들며 다시 외쳤다.
“이제부터 말을 버리고 달린다! 일단 저들의 도주를 막는 걸 최우선으로! 경공술이 부족한 자는 최대한 빨리 따라붙도록!”
“뭐, 뭣? 단주! 우린 경공술을 모르는-”
말을 달리던 주술사가 급히 외쳤지만, 하연은 대답 없이 냅다 안장을 박차고 뛰었다. 멋지게 공중제비를 돈 그녀는 두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퉁-앞으로 튀어 나갔다. 주인이 사라진 그녀의 말은 천천히 속도를 줄여갔다.
뒤이어 다른 추적대원들 역시 말안장을 박차고 뛰어 두 다리로 달리기 시작했다. 추적을 종용하던 주술사들은 이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들은 무공을 익히지 않아 무작정 달려봐야 얼마 뛰지도 못했다. 결국 그들은 앞서 달려 나가는 추적대원들의 등을 보며 뒤로 쳐질 수밖에 없었다.
신검단주 하연을 비롯한 동무림맹의 정예 수십 명이 이를 악물고 진서하와 이환의 뒤를 쫓았다.
* * *
눈가에 붉은 깃털이 난 수리 한 마리가 팔뚝에 앉아 연신 발톱에 쥔 생고기를 뜯고 있었다. 팔뚝의 주인은 그런 녀석의 목덜미를 살살 긁어주었다.
“그놈 참 오래 사는군요. 이십 년 이상 산 거 아닙니까?”
그때 옆에 있던 순찰대주 산호가 그 혈리응을 바라보며 물었다. 혈리응의 주인은 피식 웃었다.
“그 친구는 나이를 먹어 지금은 내 장원에서 쉬고 있소. 이 녀석은 그놈 자식이지.”
“그렇소? 자식도 그리 똑똑하니 영물은 영물이군요.”
“뭐, 영약과 원주민의 주술을 이것저것 이용하긴 했소. 처음 알은 여섯 개였는데, 제대로 자란 건 이 녀석 하나가 전부지. 들어간 황금이 몇 근인데··· 참 아쉽지 뭐요.”
“아, 예···”
산호는 조금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금이 아깝다는 그의 말 때문이었다.
맹주 적세인을 필두로 남궁가와 젊은 맹원들이 중심이 되는 맹주파, 예전 무림맹 핵심 방파들과 원로들, 그리고 제가가 중심이 되는 원로파. 현 서무림맹은 그렇게 두 세력이 서로를 견제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세력 싸움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것은 조금 다른 세력이었는데, 그들은 일명 회색분자라 불리는 편자파蝙者派였다.
원로원의 대원로이자 맹주의 정책고문이라는 직책을 동시에 달고 있는 이 남자, 제운성. 편자파는 그를 중심으로 뭉친 계파였는데, 그들은 언제나 어떤 한쪽으로 명확히 기울어지지 않은 의견을 피력했다. 맹주파가 강해지면 원로파에게 힘을 실어주고, 반대로 원로파가 강해지면 맹주파에 힘을 실어주는 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싫어하는 자들은 저 멀리 로마의 우화를 들먹이며 그들을 박쥐나 다름없는 자들이라 욕했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들이 있어 무림맹이 어느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균형을 지키고, 덕분에 서부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물론 제운성은 어느 쪽 의견에도 동의하지 않고 그저 웃을 뿐이었다.
어쨌든 제운성은 그런 계파의 우두머리였고, 동시에 장가상회의 투자자 중 한 명이라 굉장히 재산이 많았다. 황금 몇 근은 물처럼 써버릴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게 잠시 딴생각을 하며 뺨을 긁던 산호가 문득 하얀 평원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좁혔다.
“아, 저기 보이는군요. 정말 이쪽으로 오네요.”
“내가 뭐라 했소? 우린 여기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니까.”
산호는 털털 웃었다. 처음엔 저 양반이 따라온다는 말에 기겁을 했는데, 덕분에 수고를 덜게 되어 편하긴 했다. 고원성 일대의 여러 정보망과 저 혈리응을 이용한 제운성 덕분에 그들은 동부에서 이쪽 서부로 달려오는 긴 추격전의 동선을 미리 파악할 수 있었다.
“저 로마인들도 참 답이 없군요. 도망치려면 얼른 동쪽으로 갈 것이지, 여긴 왜 온답니까?”
“양 무림맹의 충돌을 유도하고 그 틈에 빠져나가려는 심산 아니겠소.”
산호의 표정이 굳었다. 제운성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저 로마인들의 뒤에 동무림맹의 추적대가 있다지 않은가.
“아, 이거 참···”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들과는 대화로 잘 풀어나갈 수 있을 테니까. 내 걱정은 오히려 저 로마인들이오.”
“로마인들이요?”
제운성은 팔뚝에 앉아있던 혈리응을 하늘로 날려 보내며 로마인들로 추정되는 점들을 바라보았다.
“저치들이 동부 무림맹을 습격한 이유 때문이오. 어쩌면 오늘 이곳에서 고약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소.”
산호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제운성은 곧 그 깊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출발을 명령하시오, 순찰대주. 일단 저들을 막아야 하지 않겠소.”
“아, 그래요. 알겠소.”
산호는 오른손을 번쩍 들며 뒤를 돌아보았다.
“순찰대!”
그의 외침에 뒤에서 말을 타고 대기하던 무림맹 순찰대원들이 말없이 눈을 빛냈다. 무림맹의 최전선에서 법과 정의를 집행하는 이들답게 형형한 눈빛이었다.
흡족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산호가 짧게 말했다.
“가자.”
다음 순간 순찰대주 산호와 대원로 제운성을 선두로 한 서부 무림맹 순찰대 오십 인이 하얀 소금 평원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저놈들은?]폭주하는 말을 달려가던 아킬레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와 로마인들은 어느 순간부터 저 멀리 지평선까지 새하얀 소금 평원을 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정면의 평원 일부분에서 검은 점들이 다가오는 모습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순간 시력을 증대시켜 그들의 통일된 복식을 확인한 아킬레스는 그들이 일명 서부 무림맹임을 직감했다. 그의 눈이 뒤로 돌아갔다. 한층 더 가까워진 무림인들과 그 뒤에서 그들처럼 두 발로 달려오고 있는 동부 무림맹 전사들이 보였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동서부 무림맹의 분쟁을 이용하려 한 것은 맞았지만, 그게 이런 만남을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바란 것은 그들의 뒤를 쫓아오던 동무림맹과 영역을 침범당한 서무림맹의 충돌이었지 그 난장판 사이에 끼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저들 서부 무림맹이라는 자들도 일단 그들을 붙잡고 상황을 따져보려 할지 몰랐다. 어쨌든 그들은 먼 로마에서 온 낯선 외지인이었고, 더 따져보면 소녀 하나를 유괴하기 위해 몰려온 유괴범들이었다.
아킬레스의 시선이 헥토르를 향했다.
[헥토르! 지금 포탈 주문을 쓸 수 있나!]헥토르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내 몸 상태로 그런 복잡한 주문은 쓸 수 없다. 포탈 주문을 쓸 줄 알던 다른 자들은 지난번 습격에서 탈출하지 못했고. 아마 죽었겠지.]아킬레스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어디 산이나 계곡처럼 복잡한 지형이었다면 다른 기회를 노려볼 수도 있었을 텐데, 이 땅은 어떻게 된 것이 평탄한 지형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잠시 말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평야로 들어섰던 선택이 그의 목줄을 죄고 있었다.
그때 그의 감각에 뭔가 큰 경종이 울렸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거의 지상을 미끄러지듯 달려오는 무림인 마녀가 보였다. 그녀는 다른 무림인들을 뒤로하고 홀로 속도를 높여 따라붙고 있었다,
아킬레스의 눈이 커졌다. 무림인 마녀는 무슨 화살이 날 듯 소금 평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녀는 불과 몇 호흡이 지나기 전에 로마인들의 후미를 따라잡았다. 그녀가 툭-바닥을 차고 뛰어올랐다. 그녀의 손이 어깨 뒤 검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본 아킬레스가 이를 악문 채 안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조금 전 알리사에게서 빨아들인 티폰의 힘이 아직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순간 옛 거신의 힘이 그의 몸 안에서 꿈틀거렸다.
이어서 그의 왼 팔뚝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 방패가 나타났다. 지난번 그녀의 검은 이 방패를 뚫지 못했다. 아킬레스는 그녀의 검을 튕겨내고 반격해 심장을 뽑아버릴 생각이었다. 그의 몸에서 피어난 검붉은 기운과 황금 방패의 빛이 뒤섞여 혼란스럽게 휘몰아쳤다.
그러나 진서하의 어깨 뒤에서 검이 검집을 벗어난 순간, 아킬레스의 세상은 검게 물들었다.
동시에 그 검은 세상을 가로지르는 한줄기 혜성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