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70)
진서하 외전 26화
진서하가 그린 혜성이 아킬레스의 방패와 부딪쳤다. 새하얀 소금 평원의 하늘에서 번쩍 섬광이 터졌다.
빛과 가장 가까이 있던 로마인들과 진서하 일행은 그 강렬한 빛에 잠시 고개를 돌려야만 했고, 멀리서 그곳을 향해 달려오던 동서 무림맹 무사들은 빛이 사그라지며 잠시지만 하늘이 어두워지는 듯한 착각까지 느꼈다.
눈이 부셔 잠시 고개를 돌렸던 이환은 얼른 다시 눈을 들어 진서하를 찾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아킬레스가 뒤로 튕겨 나가는 장면이 보였다. 그의 황금 방패는 쩍 갈라져 빛이 바래가고 있었고, 허공에는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진서하의 몸도 바닥에 내려서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검이 쥐여 있었지만 전과 달리 섬뜩한 살기나 위험한 기색은 없었다.
“진 소저!”
진서하는 이환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차분히 기혈을 안정시키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검기성강劍氣成罡을 성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몸의 모든 구성 요소들이 잘게 떨리는 듯한 느낌이 들며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긴장을 풀면 이대로 온몸이 먼지처럼 흩어져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그녀의 일행이 다가왔다.
“진 소저! 괜찮으십니까?”
“···정말, 믿을 수 없구려. 검강이라니··· 아직 이립而立이 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이환이 진서하의 몸 상태를 걱정하는 가운데 남궁빈은 반쯤 얼이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진서하가 선보인 혜성의 정체를 잘 아는 듯했다. 사실 십오 년 전 그녀의 스승을 알면 모를 수가 없긴 했다.
그가 놀라거나 말거나 이환은 다가와 조심스레 진서하를 살폈다. 호흡을 가라앉히던 그녀는 그를 돌아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난 괜찮아요.”
그렇게 괜찮다는 듯 웃어준 진서하는 다시 표정을 바꾸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하얀 소금 바닥을 붉은색으로 점점이 물들이며 나뒹구는 아킬레스와 멈춰선 로마인들이 보였다. 창백한 안색의 헥토르와 검은 전사 둘, 말안장에 얹혀 있는 누군지 모를 사람 하나, 그리고 안장에 묶여있는 알리사였다.
헥토르는 말고삐를 당기며 진서하를 마주 보았다. 사자처럼 풍성하던 그의 수염과 머리칼은 힘을 잃고 푸석푸석해져 있었지만,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뇌전의 열기를 담고 이글거렸다. 두 사람의 눈이 각자의 색으로 반짝거렸다.
그때 이환이 알리사를 바라보며 외쳤다.
“알리사! 정신 차려봐라, 알리사! 내 말 들리냐!”
알리사는 대답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이환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서자 고삐를 잡고 있던 헥토르의 손이 슬며시 올라왔다. 그 손가락 사이에서 작은 벼락들이 불똥을 튀었다.
[거기 멈춰라, 무림인. 더 다가오지 마.] [다 끝났음, 로마인. 너희 이제 도망칠 수 없다. 항복 권유함.]헥토르는 이환의 어설픈 라틴어에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에 진서하의 옆으로 나란히 선 무림인들이 보였다. 병력이 남아있을 적에도 진서하와 이환 두 사람을 이기지 못했다. 나머지 두 무림인의 실력이 그들의 절반만 되어도 정말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조금 높이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동쪽에서 이곳으로 달려오는 무림인들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서쪽을 바라보니 거기에선 말을 탄 무림인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새하얀 소금 평원이 그리는 먼 지평선이 거리 감각을 어지럽혀 그들이 얼마나 먼지, 가까운지 정확히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자리에 도달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들을 빙 둘러본 헥토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뭉글뭉글한 구름이 푸른 하늘을 떠다니고 있었다. 지평선 끝까지 새하얀 대지와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느긋하게 떠다니는 구름들. 지중해의 하늘에서 보던 것과 다를 것 없는 구름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누군가 당신이 지중해도 아니고 이런 낯선 땅에서 최후를 맞이하리라 말했다면 불길한 예언도 아니고 그냥 헛소리 정도로 치부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어떤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저 어린 소녀 하나를 유괴하다 죽는다니. 허탈함에 입안이 썼다.
하지만 그는 곧 있는 힘껏 배와 목에 힘을 주었다. 벼락은 순간이지만 무엇보다 강렬하다. 헥토르는 인간의 삶도 그와 같다 믿었다.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피테르여-! 나에게 임하소서-!]하얀 소금 평원에 그의 목소리가 높이 울렸다. 그 목소리에 진서하 일행이 멍한 표정을 짓던 순간, 헥토르가 있는 자리를 향해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쳤다. 강렬한 진동에 소금 섞인 하얀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먼지 속에서 뇌전에 휩싸인 헥토르가 천천히 떠올랐다. 그의 발밑으로 뇌전이 흘러내리며 재가 된 말의 사체를 바스러뜨렸다.
“···저건 또 뭐여?”
겨우겨우 다른 일행의 뒤를 따라와 이제 좀 숨을 돌리던 관량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헥토르의 모습은 말 그대로 뇌신雷神이 따로 없었다.
그때 헥토르의 손이 이쪽을 가리켰다. 그를 본 이환이 외쳤다.
“피합시다!”
남궁빈과 관량이 냅다 옆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진서하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직 검강을 사용한 여파에 몸이 굳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몸을 피하려던 이환은 그 모습을 보고 급히 그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꽈르르릉-하는 뇌성이 소금 평원에 울려 퍼졌다.
* * *
제일 선두에서 달리던 하연은 저 멀리 울려 퍼지는 뇌성과 반짝이는 빛을 보고 외쳤다.
“그 로마인이다! 더 빨리!”
그녀의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다른 무사들은 죽어라 이를 악물고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그때 한 무사가 갑자기 다른 무사들을 제치고 쭉 앞으로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다들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그는 멀리 뇌성이 울리는 장소에 눈을 고정하고는 말없이 속도를 높일 뿐이었다.
그는 금세 선두에 있던 하연마저 지나쳐갔다.
“뭐, 뭣?”
깜짝 놀란 하연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 무사는 신검단원 중 하나였지만 그리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무사는 그녀의 놀라움을 뒤로하고 오직 더 빨리 달려가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기만 했다.
그가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하연은 얼핏 어떤 중얼거림을 들은 것 같았다.
“제발 무사해라, 서하야··· 그 양반이 이번엔 진짜 내 목을 매달아버릴 거라고···”
* * *
“저게 뭔 난리인지 아시겠소?”
적당한 속도로 달려가던 산호가 옆에 있던 제운성에게 물었다. 제운성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소. 아마 동무림맹 본단을 습격했다는 그 로마인들이겠지.”
“벼락을 다루는 로마인이라. 위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운성이 하하 웃었다.
“이 멀리서도 소리와 빛이 보이는 게 놀랍기는 하구려.”
“···별로 놀라신 기색은 아닌 듯하오만.”
산호의 질문에 제운성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누가 좀 생각나서 그렇소. 소리와 빛만 번쩍거린다고 다 진짜 벼락은 아닌 법이지.”
“···아.”
산호는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와 비교하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제대로 줄 세우기를 하면 이 땅에서 제일 앞에 설 남자인데요. 물론 진짜 줄 세우기를 해봐야 구경도 안 오겠지만.”
“아마 구경은 올 거요. 구경은.”
뒤에서 따라가던 순찰대원들은 두 사람이 뭔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자, 그럼 속도를 좀 높여봅시다! 동쪽 친구들보다 늦어선 안 되잖소!”
“그거 맞는 말이군. 순찰대! 속도를 높인다!”
그 외침 이후 순찰대도 속도를 높여 드넓은 소금 평원 한가운데 벼락이 치는 곳을 향했다.
* * *
진서하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괜찮아요?”
“그건 제가 물어야 할 말 아닐까요?”
이환은 품에 안긴 진서하와 눈을 마주치며 그렇게 물었다. 잠시 눈을 깜빡거리던 둘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일어나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쪽에서 뇌전을 빠지직거리는 헥토르가 보였다. 조금 전 진서하와 이환이 서 있던 자리는 시커먼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가 다시 함성을 내지르며 두 손을 뻗었다. 뇌전이 거미줄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번엔 진서하도 재빨리 몸을 피했다.
한 차례 공중제비를 돌아 바닥에 내려선 진서하의 눈이 주변을 훑었다. 뇌전에 휩싸인 헥토르를 중심으로 그녀의 일행이 반원을 그려 포위하고 있었다.
[흐아아아!]헥토르는 거의 이성을 잃은 듯 함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가며 마구잡이로 벼락을 내뿜었다. 소금 평원의 바닥이 헤집어지며 정신없이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뇌전의 강렬한 힘과 열기에도 불구하고 진서하 일행은 어렵지 않게 공격을 피했다. 벼락을 뿜은 헥토르의 동작이 너무 크고 속임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행들은 그 뒤에도 몇 차례 요리조리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피하기만 할 수 없었다.
“반격해야 하오! 저 로마인, 우리 움직임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소! 게다가 저놈! 저놈이 뭔가 일을 벌이고 있소!”
아슬아슬하게 뇌전을 피하고 소금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가던 남궁빈이 몸을 일으키며 그렇게 외쳤다. 그의 말대로 뇌전을 쏟아내는 헥토르 뒤에서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 아킬레스가 뭔가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옆에서 머리카락 한쪽이 그슬린 관량이 버럭 소리쳤다.
“진 소저! 아까 그거! 그거 한 번 더 해보쇼! 이러다 내 머리카락 다 타버리겠어!”
진서하가 마주 외쳤다.
“그게 그렇게 쉬운 건 줄 알아요!”
“강한 한 방이 필요해! 저 뇌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잖아!”
그때 이환이 외쳤다.
“잠깐 틈을 만들어 주십시오! 제가 해보겠습니다!”
관량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피하기도 바쁜데 틈을 어떻게···”
하지만 진서하와 남궁빈은 곧장 앞으로 튀어 나갔다. 헥토르는 가까워지는 둘을 보며 양손을 뻗었다. 지금까지처럼 뇌전이 쏟아져나왔다.
진서하는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르며, 남궁빈은 몸을 뒤로 젖혀 무릎으로 바닥을 미끄러지며 뇌전을 피했다. 하지만 그물처럼 얼기설기 튀어 오른 뇌전의 잔가지마저 피하진 못했다. 두 사람 모두 순간 움찔 몸이 굳으며 바닥을 굴렀다.
[크하앗!]헥토르가 그 틈을 노려 다시 뇌전을 뻗으려 들었다. 그 모습을 본 관량은 냅다 자신의 칼을 던져버렸다. 그의 도가 휘리릭 원반이 되어 헥토르의 얼굴을 향했다.
[···크흐흣.]그러나 관량의 도는 허공에서 붙잡혔다. 헥토르의 몸을 휘감고 있던 뇌전이 그 칼의 움직임을 막은 것이다. 헥토르는 노랗게 이글거리는 눈으로 멍한 표정의 관량을 향해 씨익 웃었다. 그를 본 관량도 표정을 바꿔 허허 웃고는 중얼거렸다.
“어딜 봐?”
헥토르는 그 웃음을 보고 멈칫하다가, 문득 고개를 내렸다. 어느새 다가온 이환이 무릎을 굽히고 몸을 웅크린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단단히 바닥을 디딘 그의 뒷발 주변에서 소금 섞인 모래들이 휘돌고 있었다.
다음 순간 모랫바닥을 가르고 치솟은 발끝이 헥토르의 몸 정중앙을 스쳐 지났다.
* * *
[크윽··· 끄으으···]아킬레스는 피범벅이 되어 하얀 소금 바닥 위에서 꿈틀거렸다.
진서하의 검강에 그의 황금 방패는 폐품이 되어버렸다. 이천 년 전 영웅의 유물이 망가진 것이다. 그 외에도 아킬레스의 왼 팔뚝이 함께 잘려 나갔고, 상반신에도 깊은 고랑이 패였다. 평범한 이였다면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였다.
하지만 아킬레스는 비틀거리면서도 끝내 몸을 일으켰다. 죽음이 다가온 순간, 그를 움직이는 것은 힘을 향한 갈망과 두려움이었다.
그때 검은 전사 둘이 그를 부축했다. 그 부축을 받으며 상황을 살피던 순간이 헥토르의 함성과 천둥이 터져 나올 때였다.
그 모습을 본 아킬레스가 중얼거렸다.
[···마지막 불꽃인가?]아킬레스의 눈에도 멀리서 다가오는 다른 무림인들이 보였다. 만신전의 신녀 확보는 실패였다. 오히려 이 땅의 무림인들에게 로마에 대한 경각심만 심어준 셈이 되었다.
헥토르의 뇌전과 하얀 평원의 상황을 보며 아킬레스는 실실 웃음을 흘렸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보자고.]그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의식이 없는 알리사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피칠갑을 하고 다가오는 아킬레스의 모습에 알리사를 태우고 있던 검은 말은 푸르륵 투레질을 하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하지만 녀석이 물러나는 것보다 검은 전사들이 녀석을 붙잡는 것이 더 빨랐다. 그들은 알리사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아킬레스는 자신의 피로 하얀 바닥에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거친 손놀림에 뭔가 불길한 그림이 그려졌고, 알리사는 그 위에 바로 눕혀졌다.
의식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아킬레스는 두 손을 활짝 펼치고는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검은 전사들은 그의 뒤에 시립하고 섰다. 저쪽에서 헥토르의 벼락이 굉음과 흙먼지를 피우는 가운데 아킬레스가 피로 그린 주문진이 불길한 빛을 쏟아냈다. 그 음울한 빛은 알리사의 주변을 맴돌다가, 곧 그녀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지금까지 다른 말들을 계속 따라오기만 하던 말 하나가 풀썩 주저앉아 쓰러졌다. 헥토르의 주문이 다 해 숨이 끊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주저앉은 말에 얹혀 있던 남자가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검은 전사들과 아킬레스는 주문과 알리사의 모습에 집중하느라 그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혼자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검은 말은 그와 딱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녀석과 눈이 마주친 남자는 조용히 검지를 들어 입가에 댔다. 검은 말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순간 자기가 먼저 몸짓을 보였다는 것은 잊고 어이가 없어서 멈칫했다.
검은 말은 거기서 더 나가 슬금슬금 검은 전사 하나의 뒤로 움직였다. 거기서 몸을 뒤로 돌리고 꿈지럭대는 모양새가 마치 뭔가 각을 재고 있는 듯했다.
검은 말은 멍하니 있는 남자를 보고 얼른 이리 오지 않고 뭐하냐는 듯 턱짓했다. 잠시 굳어 있던 남자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검은 전사의 뒤를 향했다.
이후 검은 말과 남자의 시선이 교환되고, 두 인마人馬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남자는 검은 전사의 목을 휘감아 꺾었다. 검은 전사는 끅-하는 신음 후에 우드득 하는 낮은 소리를 울리며 축 늘어졌다.
검은 말은 조금 더 호쾌했다. 각을 보던 그대로 검은 전사의 뒤통수에 발길질을 갈겨버린 것이다. 뻑-하는 소리가 울리고 검은 전사는 앞으로 나자빠졌다.
그 소란에 아킬레스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그와 눈이 마주친 초췌한 남자, 제규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엿 같은 가문에서 빠져나오고 세운 좌우명이 뭔 줄 아냐? 꼭 받은 만큼 돌려주기야. 그게 은혜든, 고통이든.”
[네놈-]아킬레스의 외침은 마무리되지 못했다. 제규상의 돌려차기가 그의 머리를 후려친 탓이었다. 아킬레스의 몸은 발의 반대 방향으로 멀리 날아가 나뒹굴었다. 그때 마침 저쪽의 싸움도 마무리되던 순간이었다.
반으로 쩍 갈라지는 헥토르를 본 제규상은 옷매무새를 툭툭 털어내고는 옆을 돌아보았다. 검은 말이 사람이 웃는 것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히히힝거리고 있었다.
“···넌 뭐냐? 사람이냐?”
검은 말은 뭐가 뭐면 어떻냐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고, 제규상은 자신의 상식이 파괴되는 느낌에 고개를 살살 가로저으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집이 그립다.”
물론 그 집은 우애성에 있는 그의 단칸방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검은 말이 기겁하며 제규상의 어깨를 깨물었다. 제규상은 안 그래도 온몸이 아파죽겠는데 녀석이 그러자 펄쩍 뛰었다. 하지만 녀석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주진 못했는데, 그도 녀석처럼 당황해서 몸이 굳었기 때문이었다.
* * *
“후우···”
이환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신의 스승이었던 이모의 말을 떠올렸다. 이 거칠고 음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항상 무공의 일부를 숨겨야 한다던 말이었다. 더군다나 황군의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지금 시대엔 더더욱. 그건 이미 지난 천년의 세월 동안 탄압당하던 선조들이 피로 새긴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장소가 바뀌고, 시대 또한 바뀌고 있었다. 이환은 진서하와 남궁빈의 무공을 보며 더는 무공을 숨기기만 하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다면 그도 이제 더 숨기기만 할 필요가 없을지 몰랐다.
“굉장한 발차기에요. 이름이 있나요?”
뇌기의 마비에서 벗어난 진서하가 다가와 그리 물었다. 이환은 그녀를 보며 옅게 웃었다.
“쇄금퇴碎金腿라고 합니다. 조금 단순한 이름이죠?”
쇠를 부숴내는 발차기. 그리 멋있는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서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울리는 이름이에요. 말 그대로 무쇠도 박살 낼 듯하네요.”
“아, 그건 쇠가 아니라 황금을 부숴버린다는···”
그때 두 사람의 시선이 휙 돌았다. 그들의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기세 때문이었다. 그들의 눈에 하얗게 일어난 모래와 검붉은 연기가 뒤섞여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장면이 보였다.
그 중심에는 의식이 없는 알리사가 둥둥 떠 있었다. 그녀를 본 진서하가 외쳤다.
“알리사!”
진서하와 이환, 뒤에서 천천히 다가오던 남궁빈과 관량 모두 깜짝 놀라서 급히 달렸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센 바람과 모래 때문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관량이 소리쳤다.
“이건 또 뭐야 시발! 쟤 왜 저래!”
“그 로마인이 무슨 짓을 벌인 모양이오!”
“알리사!”
휘몰아치는 검고 하얀 소용돌이에 모두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거대한 목소리가 소금 평원에 울려 퍼졌다.
아킬레스의 목소리였다.
[흐하하하-! 폭풍이여! 티폰이여! 이미 시작된 주문은 누구도 멈출 수 없다-!]그 목소리가 울리며 알리사의 몸이 둥실 하늘 높이 떠올라 휘몰아치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청명하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소용돌이를 중심으로 한 먹구름이 일어났다.
이어서 소용돌이 안에서 검붉은 번개가 치며 살아있는 모든 것에게 두려움을 일으키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소용돌이 가까이 있던 진서하 일행과 제규상 등은 귀를 틀어막고 무릎을 꿇을 정도였고, 거의 다 도착했던 동서 무림맹 무사들 또한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모두 당황했다.
귀를 터뜨릴 듯하던 굉음이 울려 퍼지길 여러 차례, 소금 평원의 하늘을 가득 메우던 먹구름이 그 중심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다음 순간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굉음이 소금 평원을 진동시켰다.
그리고 소용돌이를 깨고 먹구름과 검붉은 연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마치 뱀의 하반신에 인간의 상체를 가지고, 하늘을 가리는 거대한 날개를 가진 거인처럼 보였다. 그의 머리에서 검붉은 벼락이 불길하게 번쩍거렸다. 그 모습에 그 평원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크거나 작거나 두려움을 느꼈다.
그 존재가 외쳤다.
[나는 폭풍의 주인이며, 대지의 마지막 자손이로다. 대지 어머니의 명에 따라 이 세상에 마지막을···]그런데 소금 평원과 세상을 향해 선언하던 거인의 말이 멈췄다. 이어서 거인의 머리가 움직였다. 정확한 이목구비가 없었기 때문에 불분명했지만, 마치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은 소금 평원의 끝자락이었다.
그곳에는 터덜터덜 걸어오는 한 마리 말이 있었는데, 말의 주인은 삿갓을 쓰고는 안장 위에 반쯤 늘어져 있었다. 그가 손을 들어 삿갓을 살짝 걷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