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271)
진서하 외전 마지막화
* * *
검붉은 먹구름 거인은 정말 거대했다. 하늘로 활짝 펼쳐진 양 날개에 햇빛이 가려 평원이 어둑해졌을 정도였다.
그래서 지상에서는 그런 거인의 움직임이 크게 눈에 띄었다. 온 세상을 향해 뭔가를 선언하던 거인이 말을 멈추고 어딘가를 바라보니, 지상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도 그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저 멀리 하얀 소금 평원의 지평선 위에 검은 점 하나가 걸쳐져 있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때 거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상을 굽어보던 그의 몸이 바로 섰다. 그와 동시에 뭔가를 던지려는 것처럼 오른손을 어깨 너머로 당겼다. 그러자 그의 머리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벼락이 그 손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거인의 손에 붉은 벼락과 검은 돌풍의 창이 생겼다. 그 창에서 휘몰아치는 섬뜩한 바람 소리에 소금 평원의 사람들은 다시 귀를 막아야 했다.
* * *
거인의 창에서 나는 굉음은 멀리 소금 평원 끝자락에까지 이르렀다. 그 소리에 귀가 아픈지 조조가 푸르릉 투레질을 했다.
장건은 녀석의 목덜미를 슬슬 쓸어주며 말했다.
“통성명도 없이 시비군. 어떡할까?”
조조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앞발로 발을 굴렀다. 마치 당장 달려가서 혼쭐을 내주자는 듯했다. 장건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럼 오랜만에 좀 달려볼까.”
그 말에 조조는 당장 앞발을 번쩍 들며 길게 울었다. 섬뜩한 바람 소리가 윙윙 울리던 소금 평원에 말 울음소리가 길게 퍼졌다. 그 울음소리가 마치 거인의 굉음을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다음 순간 조조의 발이 다시 땅을 디디고,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질주가 오직 하얀 소금뿐인 드넓은 평원 위를 가로질렀다. 난폭한 말발굽에 소금 섞인 모래가 하얗게 일어나며 뒤로 흩뿌려졌다.
조조의 근육은 자신이 오직 달리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포효하듯 역동적으로 꿈틀거렸다. 녀석의 갈기와 꼬리가 길게 흩날리고, 입에선 연신 거친 호흡이 이어졌다. 그 순간 평원에서 녀석보다 빠른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달리기 시작하자 저 멀리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거인의 몸이 꿈틀거렸다. 거인이 어깨 뒤로 당겼던 오른손에서 검붉은 벼락과 먹구름이 연신 꽈르릉-하는 굉음을 터뜨렸다. 직후, 거인은 그 오른손을 휙 앞으로 내던졌다. 붉은 벼락과 돌풍이 소금 평원의 하늘을 찢어버리며 장건에게 내려꽂혔다.
그 순간 장건이 허리춤의 칼을 잡았다.
번쩍 하얀빛이 터지며 장건과 조조를 찢어버리려던 붉은 벼락과 검은 돌풍의 창은 엉뚱한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한순간 늦게 챙-하는 쇳소리도 울려 퍼졌다. 악신의 창은 그대로 소금 평원 한 귀퉁이로 날아가 바닥에 내리꽂혔다. 쩍하고 땅이 갈라지며 소금과 모래가 터져나갔다.
장건과 조조의 속도는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그저 장건의 오른손에 푸른빛을 띠는 칼 한 자루가 들려 안장 옆으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는 점 하나만 달라졌다.
제대로 된 이목구비가 없음에도 그 순간 거인의 얼굴에는 잠시 당혹스러움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거인은 곧 다시 오른손을 뒤로 당겼다. 조금 전과 같은 벼락과 돌풍의 창이 그 손에 들렸다. 다시 한번 거인의 창이 푸른 하늘을 찢었다.
그를 본 장건은 오른손에 들린 칼을 휙 한 번 휘둘렀다. 악신의 투창이 청룡도의 칼날과 만났다. 악신의 창과 비교하면 청룡은 이쑤시개만도 못한 크기였다. 하지만 하얀 빛이 번쩍 터지고, 악신의 창은 그대로 튕겨나 애꿎은 평원 한 귀퉁이만 쩍 갈라놓았다.
[—-!]그 모습을 본 거인에게서 분통 섞인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의 온몸과 날개를 거쳐나온 굉음에 소금 평원 전체가 우르르 떨렸다.
그러나 장건과 조조의 질주는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그들은 하얀 평원을 가로질러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함을 내지르던 거인이 다시 오른손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투창. 이번엔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왼손으로, 다시 오른손으로. 거인의 손에서 연신 벼락과 돌풍이 쏘아졌다.
그 악신의 창이 장건에게 내려꽂힐 때마다 청룡도가 푸른빛을 번쩍였다. 튕겨 나간 악신의 창은 계속해서 엉뚱한 소금 바닥만 터뜨리고 하얀 모래 먼지를 일으켰다.
장건과 조조가 멀리 소금 평원 끝자락에서 그 한가운데까지 달리는 동안 거인은 계속해서 돌풍과 벼락을 던졌다. 그러나 그들의 속도는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도리어 달리면 달릴수록 점점 더 빨라져 조조는 이제 반쯤 날듯이 달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진서하가 장건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 순간, 그가 조조의 안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다른 무림인들이 급히 뛰어오르는 동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장건은 마치 화살을 쏘아 올린 것처럼 훌쩍 하늘로 치솟았다.
[—-!]뛰어오른 장건을 본 거인의 손에서 붉은 벼락과 검은 돌풍으로 이루어진 검이 솟아났다. 거인은 양손으로 그 폭풍검을 쥐고 머리 뒤로 넘겼다. 그 폭풍검 안에서 대지를 무너뜨릴 마력이 꿈틀거렸다.
훌쩍 날아오른 장건도 양손으로 청룡을 잡았다. 그의 몸은 높이 치솟아 어느새 구름이 가득한 높이, 거인의 머리 위에 이르렀다.
먹구름과 안개로 이루어진 거인의 머리에선 붉은 번개들이 연신 불똥을 튀고 있었다. 거인이 내뿜는 마력과 소금 평원의 대기가 뒤섞이고 밀어내며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 거세게 휘돌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장건의 눈이 빛나자 격렬히 휘몰아치던 천공의 모든 기운이 찰나 동안 멈췄다.
그리고 한줄기 진정한 벼락이 천지를 관통했다.
* * *
진서하는 너무 환한 빛에 순간 눈을 감았다. 이후 얼른 다시 눈을 떠봤지만 시야 전체가 하얗게 변해 잠시 아무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연신 두 눈을 깜빡거렸다. 살짝 고이던 눈물이 그 깜빡임에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래도 열심히 눈을 깜빡거린 덕분인지 그녀의 시야는 곧 돌아왔다. 푸르른 하늘이 보였다.
소금 평원의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먹구름은 거짓말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흐린 새털구름 몇 점이 간간히 보일 뿐이었다.
“이게··· 대체···”
그녀 옆에 있던 이환은 손으로 두 눈을 비비적거리며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킬레스와 헥토르를 물리친 것이 조금 전이었는데, 이후 갑자기 먹구름 거인이 일어나더니 저 먼 곳을 향해 혼자 벼락을 던지다가 백색 섬광과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다.
“진 소저, 괜찮으십···”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진서하를 돌아보았다가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그 하늘에서 알리사를 껴안은 장건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새처럼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장건은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느려지더니 이내 소금 평원 위로 가볍게 내려섰다. 그런 장건의 모습을 진서하와 이환, 남궁빈, 관량, 그리고 제규상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품에 안은 알리사를 가만 바라보던 장건은 그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진서하를 비롯한 사람들의 면면을 확인한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반가운 얼굴이 여럿인데.”
“···스승님.”
그의 얼굴을 확인한 진서하가 다가왔다. 장건의 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서하야. 잘 지냈니?”
진서하는 두말없이 다가가 냅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졸지에 진서하와 알리사 두 사람을 껴안게 된 장건이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당신은···”
그때 장건의 얼굴을 확인한 이환의 두 눈이 커졌다. 수염이 덥수룩해지고 눈덩이가 조금 깊어지긴 했지만, 그 얼굴은 십수 년 전 기억 속 검객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장건도 그와 눈이 마주쳤다. 말을 잇지 못하는 이환을 대신해서 장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
“꼬맹이, 착하게 살았냐?”
이환은 순간 숨을 들이켜고는 가만히 멈췄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한참을 머뭇거렸다.
“어떻게··· 그게··· 벌써 십 년도 한참 전인데···”
장건은 진서하의 팔을 풀고 알리사를 그녀에게 넘기며 말했다.
“사람 얼굴은 잘 기억하는 편이라. 아버지는 잘 지내냐?”
결국 이환은 푸-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어쩐지 울 것처럼 그렁그렁했다.
“네, 잘 지내시고 말고요··· 재혼도 하셨어요···”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던 장건의 눈이 옆으로 향했다. 거기엔 관량이 약간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던 이환과는 다르게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저도 기억하십니까?”
“그럼. 감산성 꼬맹이. 기루는 여전한지 모르겠군.”
“···객잔으로 업종을 바꿨습니다. 그게 더 장사가 잘되더군요.”
결국은 관량도 머리를 긁적거리며 조금 멍청하게 웃었다. 장건의 눈은 이제 그 옆에 있던 남궁빈에게 향했다. 남궁빈은 곧바로 두 손을 모아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장건이 말했다.
“궁상이 그 친구는 잘 지내나?”
“가주님은 건강하십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 무사님.”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장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다 완성된 모양이군.”
“아직 모자란 점이 많습니다. 개선해야 할 점도 많고요.”
“앞으로 계속 세상과 부딪치며 발전시키면 되겠지. 남궁가는 이제 양지에 있으니까.”
남궁빈은 그 말에 뭔가 벅차오르는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남궁빈까지 인사를 나눈 장건은 그 젊은이들을 쭉 돌아보며 털털 웃었다.
“뭐 하다 이렇게 다 모인 건지 모르겠군. 누가 일부러 모았나?”
“무림의 인연이란 게 다 그런 거지. 어디서 언제 누굴 만나게 될지 모르는 거야.”
장건이 고개를 돌려보니 초췌한 인상의 제규상이 보였다. 제규상은 조금 씁쓸하니 웃으며 물었다.
“···자네, 나도 기억하나?”
“기억 안 나기 힘들지. 내 앞에서 거들먹거리다가 한 주먹에 나가떨어진 친구 아닌가.”
그 대꾸에 제규상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으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그는 아주 즐겁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그때 한 방이긴 했지! 하하하하!”
“지금도 한 방일걸.”
제규상의 웃음이 전염된 것인지 곧 다른 사람들도 함께 웃기 시작했다. 멀리서 달려오던 동서 무림인들에겐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가 없게 만드는 웃음소리였다.
[으음···]그때 웃음소리 탓인지 진서하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알리사가 정신을 차렸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웅얼거리던 그녀는 환히 웃는 얼굴의 진서하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언니!]멀쩡한 알리사의 얼굴을 본 진서하는 장건을 끌어안았던 것처럼 그녀를 확 껴안았다. 진서하가 매달렸던 장건과는 달리 알리사는 그녀의 품 안에 쏙 들어와 안겼다.
“알리사! 정신이 드냐! [괜찮은지 의문!]”
이환이 어설픈 라틴어를 외치며 그녀들에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렇게 진서하에 이어 이환의 얼굴을 본 알리사는 환하게 웃다가, 곧 엉엉 울며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바라보던 장건이 시선을 돌렸다. 동쪽에는 땀을 줄줄 흘리며 숨을 헐떡대는 동부 무림맹 무사들이, 서쪽에는 통일된 복장으로 말을 탄 채 정렬한 서부 무림맹 무사들이 보였다. 그들의 공통점은 각자의 수장들이 모두 멍한 표정으로 장건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 * *
“···네?”
진서하는 멍하니 되물었다. 그러나 장건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난 제자를 받을 생각이 없단다. 이제 슬슬 동쪽으로 여행 갈 계획이라.”
이어진 대답에 진서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녀가 당황하자 그녀 품에 안겨있던 알리사도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와 장건을 번갈아 보았다.
잠시 시간이 지나서야 진서하는 정신을 차렸다.
“이미 아시겠지만 알리사는 구음사혈이에요. 지금은 로마의 술법으로 멀쩡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더 지체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될 거예요.”
“그 먹구름 거인이 집어넣은 기운은 모두 정리했다. 그러면서 혈도를 청소했으니 당장 쓰러지는 일은 없을 거다.”
진서하는 그 말에 급히 알리사의 기혈을 살폈다. 확실히 가늘고 약해졌던 기혈이 튼튼해지고, 불안하던 기의 흐름도 안정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아홉 기혈은 완전히 타통되어 있지 않았다.
“그 아홉 혈도를 모두 한 번에 뚫으려면 소림의 대환단 정도는 있어야 한단다. 네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까-”
장건의 말에 진서하가 급히 말을 이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장건이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는 게 먼저였다.
“물론 내가 만든 단약으로 어느 정도 대환단을 대체할 순 있겠지. 하지만 이 아이의 구음사혈은 너와는 조금 다르단다. 그건 이 문신들 때문이기도 하고, 조금 전 있었던 로마악귀의 탓도 있지. 그래서 무작정 단약의 힘을 빌어 기혈을 타통시키면 적잖은 문제가 생길 거야.”
진서하의 눈썹이 안쓰럽게 모였다.
“···스승님도 안된다는 거예요?”
장건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번에 뚫으려 하지 말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하면 된다는 말이야. 옛날 타통 때는 당장 의식이 없는 널 살려야 했으니 그랬던 것이고. 이 아이는 지금 움직이는 데 아무 문제가 없잖냐?”
천천히 무공 수련을 시작하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거기까지 들은 진서하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알리사와 웃고 있는 장건을 번갈아 보다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스승님은 제자를 받으실 생각이 없다면서요?”
장건은 대답 없이 미소를 띤 얼굴로 진서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을 마주 한 진서하의 눈이 점점 커졌다.
“하지만··· 저는··· 저는 아직 한참 모자라는···”
“그 아이, 알리사라고 했지?”
알리사는 자기 이름이 나오자 귀를 쫑긋하며 장건을 바라보았다. 장건은 알리사의 짙푸른 눈을 마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네가 내 제자가 되던 때가 생각나는구나. 딱 그 아이 정도 되는 나이였지. 음, 키는 얘가 조금 더 큰 것 같은데.”
그 미소를 보며 알리사도 불안한 표정을 지우고 스르륵 웃음을 띠었다. 그런 알리사의 얼굴을 본 진서하의 표정에도 어떤 굳은 의지가 떠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장건을 바라보았다.
“···괜찮을까요?”
“뭐가?”
“아직 저는··· 모자란 점이 너무 많아요. 스승님처럼 온갖 무공을 익히지도 못했고, 의술도 배움이 부족하고, 스승님이 하시던 것처럼 대범하지도 못하고, 또···”
장건은 손을 들어 진서하의 코를 튕겼다. 진서하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괜한 소리가 길구나. 알리사를 제자로 받기 싫은 거냐?”
“아뇨, 그건 아니에요. 저는 그냥···”
“그럼 됐다. 이제 검을 뽑을 수 있으니 무공이야 충분하고, 혈을 짚어 지혈할 줄 아니 의술도 그만하면 됐다. 그리고 내가 대범? 저놈한테 그 소리 해봐라. 절대 아니라고 할걸.”
장건의 턱짓에 고개를 돌리니 신검단주 하연에게 항의를 받던 양굉이 문득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마주쳤다. 그는 헤벌쭉 웃으며 손을 흔들다가 하연이 빽 소리를 지르자 뻘뻘 땀을 흘리며 해명을 이어갔다.
그곳에는 동부 무림맹 무사들과 서부 무림맹 무사들이 다 같이 하얀 흙바닥에 둘러앉아 자기들 수장이 상대편 수장과 빽빽 소리 지르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대충 경계를 넘어온 동부 무림맹을 지탄하는 순찰대주 산호로 시작해 로마 범죄자들을 잡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하연의 사과, 둘 사이를 완만하게 넘기려 끼어드는 양굉, 그에게 반갑다며 인사하는 제운성, 이어서 추적대에 몰래 숨어든 양굉에게 항의하는 하연, 쩔쩔매며 사과하는 양굉과 다시 젊은 고수 신검대주를 만나 반갑다는 제운성까지.
그들은 의도적으로 진서하 일행과 장건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며 각자 맞이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물론 수장들이 논의를 거치는 와중에도 다른 무사들은 장건을 흘끗거리고 있긴 했다. 그가 보인 소금 평원의 질주와 마지막 벼락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특히 동무림맹의 주술사들은 반쯤은 공포에, 반쯤은 경외감에 휩싸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진서하의 눈이 장건에게로 돌아왔다. 그 눈을 바라보며 장건이 말했다.
“형님 집에 그동안 만든 단약과 이런저런 무공을 정리해둔 서책이 있을 거다. 서책은 나중에 구경이나 한 번 해보고, 단약은 네가 직접 상태를 봐가며 먹이도록 해. 그럼 될 거다.”
장건이 툭툭 옷깃을 정리하며 하는 말에 진서하의 눈이 슬며시 그렁그렁해졌다.
“···그럼 이렇게 또 헤어져요?”
장건은 하하 웃었다.
“이 녀석아, 너도 이제 어른이잖아. 이 정도로 울면 어떡하냐?”
“오 년 만에 만났는데 금방 헤어지잖아요. 스승님은 슬프지 않으세요?”
울먹거리는 제자의 모습에 장건은 녀석의 머리를 매만져주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지. 그리고 내가 동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언젠가 한 바퀴 돌아 다시 만나지 않겠냐?”
“···금방 오실 거죠?”
장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다가 정 멀다 싶으면 되돌아오마.”
진서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왕 가는 거 로마를 지나서 파사국도 거치고, 중원까지 거쳐서 하와이도 지나오세요. 멀리멀리 세상을 다 돌아보고 오세요. 대신, 그 후엔 다신 떠나지 않으시는 거예요?”
장건은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한창 투닥거리던 동서 무림맹 간부들이 그 웃음소리에 말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한바탕 크게 웃은 장건은 몸을 돌려 조조에게 다가갔다. 조조는 괜히 진중한 척 먼 곳을 바라 보고 서 있었는데, 그 옆에는 검은 말 한 마리가 땡글땡글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조는 장건이 다가오자 괜히 한번 푸르륵 투레질을 했다. 그 모습에 검은 말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안장에 오른 장건이 다가오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진서하와 알리사, 이환, 관량, 남궁빈까지. 무림의 새로운 청년고수들이었고, 새로운 협객들이었다. 장건처럼 이들도 방랑하며 부딪치고 사랑하며 어른이 될 것이다. 장건은 자신의 이야기가 무명협이 되었던 것처럼 이 아이들 또한 새로운 무림의 이야기를 엮어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 무림맹 무사들에게서 말 한 마리를 얻어온 제규상이 다가왔다.
“어이. 동쪽으로 간다며?”
“그 말은 어디서?”
“그냥 달라니 주더군.”
고개를 돌려보니 이쪽을 바라보던 제운성이 가볍게 손인사를 하는 것이 보였다. 장건은 피식 웃으며 눈인사를 했다.
조조의 고삐를 잡고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며 서쪽 하늘이 불그스름해지고 있었다. 잠시 그 노을을 바라보던 장건이 시선을 돌려 진서하와 젊은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던 장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작별 인사했다.
“그럼, 잘들 지내라.”
그가 툭툭 고삐를 당기자 조조는 앞발을 들며 길게 울부짖더니 훌쩍 동쪽으로, 이제 검푸르러져 언뜻 별이 빛나기 시작한 하늘 아래로 달리기 시작했다.
소금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멀어지는 장건의 뒷모습을 많은 사람이 지켜보았다.
신검단주 하연은 그가 어릴 적 만나던 그 무사가 맞는지 물어보질 못해 아쉬워했고, 산호는 그가 십오 년 전 무공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역시 대외적으로 황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제운성은 조금 시야를 돌려 진서하와 젊은이들을 바라보았다. 특히 진서하에게 주목했는데, 장건의 제자이니 그녀의 무공이 아주 뛰어나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친해지면 나쁠 것 하나 없어 보였다. 이미 옛날에 한번 그랬던 것처럼.
남궁빈은 남궁의 검이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감격하고 있었고, 관량은 집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환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서 다시 한번 협객을 꿈꿨다.
알리사는 정확히 뭐가 어떻게 돌아간 건지는 잘 몰라도, 진서하와 헤어지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 옆에선 검은 말이 그렁그렁 눈물이 떨어질 듯한 눈으로 조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진서하는, 언젠가 돌아올 스승의 뒷모습을 눈 안에 한가득 담았다.
* * *
시간이 흘러 동서부 무림맹의 충돌로 야기될 듯하던 로마인들 습격 사건은 자연스럽게 묻혔다.
어쩔 수 없었다. 동부 무림맹에서 벌어진 맹주의 강력한 숙청으로 추장 출신 원로들이 힘을 잃었고, 그러면서 주전파가 힘을 잃은 탓이었다. 애초에 서부 무림맹에선 내부의 균형 덕분에 전쟁을 벌이자는 의견이 약했다.
여전히 신대륙의 무림 여기저기에선 악인과 살인마들이 날뛰었지만, 그들을 막고자 하는 젊은 협객들 또한 많아 양민들의 안전을 지켰다. 전날과 크게 다를 것 없어보이는 무림은, 아주 조금씩이지만 나아져 가는 듯 보였다.
우애성 또한 지난날 로마인들의 난동으로 반反로마의 분위기가 흘렀으나, 이후 로마 상인들의 무지막지만 선물과 시장에 풀린 값싼 물량의 힘으로 그런 기세는 금방 사그라졌다. 거기엔 굳이 먼 바다 건너 대륙과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로마 원로원의 뜻이 깔려 있었다. 만신전 일부가 반발했지만, 영웅을 잃은 그 소수는 힘을 얻지 못했다.
그런 깊은 사정을 뒤로하고 우애성의 항구는 오늘도 수많은 범선과 일꾼들의 움직임으로 소란스러웠다.
그곳에서 세 남자와 말 한 마리가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하··· 내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다 들었다. 혼자 신나서 날뛰다가 서하를 놓쳤던 거라며?”
양굉은 발끈했다.
“아니 시발! 그럼 나도 로마놈들 술법은 처음 봤는데 거기서 어쩌겠소!”
하지만 그의 반발은 다음 순간 장건의 손에 뒤통수를 얻어맞으며 끝났다.
“···맞소. 전부 내 잘못이오···”
“알면 됐다.”
“···크흑.”
둘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던 제규상이 말문을 열었다.
“진짜 갈 건가?”
“왜? 뭐 아쉽나?”
장건의 되물음에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굳이 뭐하러 그런 낯선 땅까지 가느냐 이거지. 사실 자네 실력이면 무림에 전설처럼 돌던 이름을 진짜가 되게 할 수 있을 텐데.”
“전설?”
제규상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제일인.”
장건은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크게 웃었다. 옆에 있던 양굉도 허허 웃고 있었다. 제규상은 그런 장건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뭐 말실수라도 했나?”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웃겨서.”
그렇게 말한 장건은 조조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배가 출발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배를 향해 다가가는 장건의 모습에 잠시 머뭇거리던 양굉이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소, 장 형.”
그 말에 장건도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한바퀴 도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도, 네가 늙어죽기 전에는 돌아올거다. 영원히 헤어지는 것처럼 굴지 마.”
“···그래도.”
약간 먹먹한 양굉의 표정에 장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나도 재밌었다.”
그는 양굉과 제규상, 그리고 그 뒤쪽 세상을 보며 말했다.
“또 보자.”
그 옆에 조조도 인사하듯 푸르륵, 고개를 까딱거렸다. 이후 몸을 돌린 장건은 머뭇거림 없이 배에 올랐다.
얼마 후 그들을 태운 배는 동쪽으로 떠났다. 새로운 여정이었다.
작가의 말
증기기관차를 등장시키지 못해 아쉬워 시작한 외전이 꽤 길어졌습니다.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여기서 이만 글을 마칩니다. 긴 후기는 나중에 제 서재에 따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