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32)
32화
* * *
장건은 연초를 입에 물고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은 먼지도 아침 안개도 없는 텅 빈 하늘을 홀로 가득 채워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거기엔 모호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뚜렷한 선명함만 가득했다. 대충 상자에 걸터앉아 그 광경을 보며 연초 한 대를 물고 있으니 장건은 지금 가슴 속에 가득 차는 것이 아침의 희망인지 반복되는 매일의 덧없음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밤새 객잔의 불을 모두 끈 마을 사람들은 장건처럼 뭔가를 깔고 앉거나 아니면 그냥 바닥에 널브러져 아침이 밝아오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조용함을 보자니 방금까지 소리를 지르며 물을 길어오고 뿌리던 게 거짓말인 것만 같았다. 장건은 입에 문 연초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흐-하고 뱉었다. 연기가 그의 입에서 스르르 뿜어져 나왔다.
그때 문득 시선이 느껴져 옆으로 눈을 돌리니 꼬마 점소이 호룡이 얼굴에 검댕을 잔뜩 묻히고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녀석은 장건의 뚱한 질문에도 대답을 안 하고 한참이나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장건만큼이나 뚱하게 말했다.
“아저씨 그거예요?”
“···그게 뭔데?”
“그거 있잖아요. 약한 사람, 억울한 사람, 착한 사람을 돕는 무사. 악당을 물리치는 사람.”
장건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그게 뭔데?”
호룡은 잠시 팔짱까지 끼고는 기우뚱 머리를 갸웃거렸다. 단어가 생각나질 않는 것처럼 같았다. 녀석은 그러다가 갑자기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아, 맞아. 그거요, 협객. 아저씨 협객이에요?”
“내가 왜 협객인데?”
“···나쁜 놈들 물리치고 불 끄는 것도 도와주고··· 아줌마도 살려주고 나도 살려줬잖아요. 그리고 살려줬으니 돈 달라는 소리도 안 하고요.”
장건은 손가락 사이에 연초를 끼워 입에서 떼며 말했다.
“돈 달라는 말을 아직 안 한 것일 수도 있지.”
“아, 그럼 아줌마한테 은전 준비하라고 할까요?”
호룡의 말에 장건은 다시 웃으며 대답했다.
“됐어 인마. 그 돈으로 객잔이나 수리하라고 해. 다 타서 새로 짓다시피 해야겠던데.”
“···그럼 협객 맞네요? 돈 안 받는 거잖아요.”
녀석의 집요한 질문에 장건은 툴툴 웃다가 남은 연초를 쭉 빨아들였다. 그리고 툭 손가락을 튕겨 불씨를 털어내고 한 번 더 튕겨서 버렸다. 그렇게 연초 하나를 다 피운 장건은 옷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객은 얼어 죽을. 그런 거 아니다.”
그는 멀뚱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호룡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터벅터벅 물을 길어놓은 통으로 다가가 손을 씻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던 고 노인에게 다가갔다.
허벅지에 붕대를 감고 앉아있던 고 노인은 다가오는 장건을 보고 허둥지둥 일어나려 했다. 장건이 그런 고 노인의 어깨를 부드럽게 내리누르고 옆에 있던 상자를 집어와 깔고 앉았다.
“앉아 계시오.”
“아, 아니 그래도··· 마을의 은인이신데···”
장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됐고. 서위량이 사는 곳이나 좀 알려주시오.”
“···정말 찾아가실 생각이십니까?”
놀란 고 노인의 얼굴에도 장건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와 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소. 그의 아들이 내 손에 죽었으니까.”
고 노인의 두 눈이 더 커졌다. 서위량의 무사들이 어젯밤 날뛴 이유가 바로 앞에 앉아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표정은 금방 가라앉았다.
“잘하셨습니다. 서상정은 서위량 아들답게 난폭하고 사람을 함부로 하던 놈이었지요. 목장 사람 중에는 그놈에게 욕을 본 처녀들도 있었으니 죽어 마땅한 놈이었습니다.”
“···마을에 불붙고 그쪽 다리에 칼 맞은 건 결국 나 때문인데, 원망스럽진 않소?”
장건의 질문에도 고 노인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을 붙인 것도 내 다리에 칼질한 것도 오중서와 그놈의 부하들이었습니다. 장 무사님은 이 늙은이와 마을을 구해주신 분이지요. 무사님을 원망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노인은 천천히 미소를 지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혼자서 서위량의 저택으로 가신다는 것은···”
“마무리를 해야지.”
고 노인은 장건의 담담한 말과 표정에 본인도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제가 안내하지요. 중간에 언덕도 있고 얕은 강도 건너야 해서 안내자가 있어야 할 겝니다.”
“그 다리로?”
“이 정도는 젊을 적 들소에 치였을 때 비해선 아무것도 아니지요!”
장건의 반문에 고 노인은 버럭 대답하며 훌쩍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노인은 똑바로 서자마자 에구구 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는 무안한 얼굴로 장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옅게 웃은 장건은 그냥 길이나 가르쳐달라 말하려 했다. 그때 누군가 끼어들었다.
“내가 안내할게요.”
고개를 돌려보니 객잔 주인 여 씨가 서 있었다. 그녀는 방금 씻었는지 얼굴과 손이 깨끗하고 축축했다. 고 노인이 그녀를 말렸다.
“이 녀석아, 너 어젯밤에 죽을 뻔했어. 근데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
“녀석은 내가 나이가 몇인데 녀석이에요? 그리고 어제 저분 처치가 어찌나 좋았는지 지금은 멀쩡해요. 서위량 저택은 나도 아니까 내가 안내할게요.”
“그래도 이 녀석아. 객잔도 정리해야지···”
여 씨는 허리를 짚고 살짝 삐딱하니 서며 대답했다.
“다녀와서 할게요. 뭐 같이 싸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길 안내만 하는 건데요, 뭐.”
“저 녀석 두고 가도 괜찮겠소?”
그녀는 갑작스러운 장건의 질문에 고개를 돌려 어느새 다가온 호룡과 눈을 마주쳤다. 아이는 불안할 만도 하건만 멀뚱히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눈을 잠시 마주 보던 여 씨는 다시 장건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밤새 누워서 쉰 건 나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좀 쉬어야 해요.”
결심이 선 대답에 장건은 일어섰다.
“말은 있소?”
“한 마리 있죠. 불이 객잔에서 꺼져서 마구간에서 잘 있어요.”
장건은 곧장 한쪽에서 쉬고 있던 조조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고 노인이 다시 곡소리를 내며 일어나려 했다.
“그, 식사라도 좀 하고 좀 쉬다가···”
“시간 더 끌어봐야 뭐하겠소. 식사는 마무리하고 와서 하지.”
조조의 안장에 훌쩍 올라탄 장건은 여 씨가 말을 가져오는 동안 잠시 청수촌을 돌아보았다. 참 별것 없는 곳이었다. 다른 개척마을처럼 높고 화려한 건물 없이 오래된 나무집들만 옹기종기 모여 나름 의원이네, 포목점이네, 간판을 달아둔 모양새들. 그리고 중원의 착취를 피해 도망 와서 또다시 당하면서도 끝내 살아가는 질긴 삶들.
“가죠.”
말을 타고 다가온 여 씨가 그렇게 말했다. 장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호룡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그와 여 씨를 번갈아 보는 것이 안 그런 척했지만 불안한 것 같았다.
장건이 녀석에게 말했다.
“걱정 마라. 네 아줌마는 금방 돌아올 거니까.”
그저 말뿐일 뿐이었지만 호룡은 곧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장건은 여 씨를 돌아보며 말했다.
“안내하시오.”
여 씨는 고개만 끄덕이고 먼저 말을 달려 나갔다. 장건은 그 뒤를 따라 조조의 고삐를 몰아갔다. 그들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과 반쯤 탄 객잔, 그리고 방금까지 바라보았던 청수촌의 건물들이 시야의 뒤편으로 사라져갔다.
장건과 여 씨는 말을 타고 청수촌의 북쪽으로 빠져나갔다. 마을을 벗어나자 곧바로 완만한 언덕들과 마른 풀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며 그들을 반겼다. 두 사람과 말 두 마리는 땅에서 누런 먼지를 일으키며 그 위를 달렸다.
잠시 달리던 장건은 조조의 속도를 조금 높여 여 씨 옆에 붙어 물었다.
“얼마나 걸리겠소?”
“정오가 되기 전에 도착할 거에요. 근데 진짜 혼자 가는 건가요?”
“누가 또 있소?”
여 씨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서위량에게 남은 무사가 스물에 가깝고 서위량 본인도 고수라던데요. 괜찮겠어요?”
장건은 지금 그가 가지 않으면 화가 난 서위량이 마을에 보복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녀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는 조조의 안장에 매두었던 삿갓을 끌러 머리에 쓰며 대답했다.
“지금 안 싸우면 서위량은 돈으로 날 쫓겠지. 차라리 조금이라도 세력이 줄었을 지금이 기회요.”
“···진짜 지원군도 없이 혼자 갈 생각이군요. 난 당신이 그건 줄 알았는데요.”
“그거?”
여 씨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부모자식도 아닌데 호룡과 하는 행동이 비슷한 그녀였다.
“아, 그거요. 암행 황군. 정체를 숨기고 신대륙을 돌아다닌다는 황군.”
“왜 내가 암행 황군이라고 생각했소?”
그녀는 말을 몰아가는 중에도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신대륙에는 황제를 싫어하는 이가 많았다. 애초에 그의 군대와 통제를 피해 도망친 신대륙이니 당연할지 몰랐다.
“그야, 혼자 다니는 젊은 고수에, 양굉이랑 일하잖아요.”
엉뚱하게 튀어나온 이름에 장건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양굉? 양굉이 왜?”
“···양굉이 예전에 도시 쪽에서 황실의 일을 했다는 건 어두운 쪽에선 꽤 유명한 이야기인데요. 몰랐나요?”
“몰랐소.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았소?”
여 씨는 약간 머뭇거렸다.
“···이 일대에서 유일한 객잔인 덕분에 이것저것 주워들은 게 많죠. 그 이것저것 덕분에 짭짤한 수입도 생기고요.”
장건은 묘하게 웃었다. 객잔에서 정보를 모으고 어둠의 경로에서 그걸 파는 정보상은 어딘가 그에게 익숙한 모습이었다. 하오문이니 개방이니 하는 그것. 하지만 정작 중원에선 등장도 하지 않은 존재였다.
“황실이 그 사기꾼에 도둑놈을 어디에 썼다는 것이오?”
“그것까지는 잘 몰라요. 그냥 양굉이 그 황실 일을 하고도 살아남았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에도 황군에게 척살 당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당신 말대로 사기꾼이나 도둑들 사이에선 유명하죠.”
“그런 악명에도 무림맹에 쫓기지 않는군.”
“보아하니 현상금이 생기면 꼬박꼬박 내는 모양이던데요. 애초에 교수형 당할 일은 하질 않거나 들키질 않고요.”
장건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양굉에 대해 생각하면서였다. 그는 양굉에게서 무공은 보잘것없지만 뭔가 묘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다음에도 또 만나게 되면 좀 족쳐봐야 할 것 같았다.
“난 황군이 아니요. 해볼까 생각도 했는데, 좀 알아보니 군대 두 번 가는 느낌이라 구역질이 나더군.”
“···군대를 두 번 가요?”
여 씨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건의 나이는 많이 쳐도 이십 대 후반이었다. 그나마도 너저분한 수염 때문이고, 그걸 정리하면 훨씬 나을 듯 보였다. 군대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간다는 말은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런 게 있소. 저 강을 건너야 하는 것이오?”
“아, 맞아요.”
둘은 옅은 강을 건너고 곧 넓은 들판과 여트막한 동산까지 두어 개 넘어 저 멀리 소들이 잔뜩 보이는 언덕에 올라섰다. 소들은 모두 나무 울타리 안에 갇혀 있었다.
여 씨가 그걸 보며 말했다.
“···원래 여기엔 들소가 많았어요. 하지만 길들질 않아서 다 죽이거나 멀리 쫓아버린 덕분에, 이쪽 목장에서는 풍족한 풀을 먹은 소를 키워낼 수 있었죠. 감산성에 가장 많은 소를 팔아치우는 곳이 저 목장이라는 거 아나요?”
장건은 대답 없이 울타리에서 눈을 떼고 그 너머에 있는 저택을 바라보았다. 그 저택 밖으로 나와서 꾸물거리는 사람들을 확인한 그가 말했다.
“이제 돌아가시오.”
그 단호한 말에 여 씨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거렸다. 그녀는 잠시 후에야 장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날 구해줘서, 그리고 호룡이를 구해줘서요.”
“그럼 다음엔 특실이나 싸게 빌려주시오.”
그녀는 장건의 농담에 잠시 멍하다가 가볍게 웃었다.
“좋아요. 객잔 잘 정리해서 기다리고 있죠. 천후성 객잔 못지않게 꾸며놓을 테니까 기대하라고요.”
장건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말을 되돌렸다. 장건은 그녀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곧 서위량의 저택을 향해 말고삐를 끌었다. 조조는 장건의 뜻에 따라 너무 급하거나 느리지 않은 속도로 나아갔다. 여 씨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그가 이미 언덕 너머로 나아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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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가 느긋한 속도로 나무 울타리 옆을 지나니 그 안에 있던 소들이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장건을 바라보았다. 우물우물 되새김질하는 녀석이나 투두둑 똥을 싸는 놈이나 장건을 뭐가 지나가니 본다는 듯 멀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소 울타리를 지나자 밖으로 나와 있는 칼잡이들이 있었다.
정오의 햇빛이 서늘해지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쨍하니 두 눈을 찌르고 있었다. 저택을 등 뒤에 두고 반원을 그리고 선 칼잡이들과 그 한가운데 의자를 꺼내놓고 앉아있는 중년인도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삿갓을 쓴 장건만 그 넓은 챙 그림자 안에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가볍게 뛰던 조조는 어느새 천천히 걸었다. 장 내에 스물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장건과 조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초를 태우는 놈, 뭔가를 질겅질겅 씹는 놈, 통을 하나 깔고 앉아 달달 다리를 떠는 놈까지 인상 험한 놈들이 모여서 다가오는 장건을 노려보았다.
조조의 걸음이 멈췄다. 그 위에 앉아있던 장건은 슬쩍 삿갓을 들어 자신을 노려보는 중년인, 아마 서위량으로 짐작되는 남자를 마주 보았다. 그는 입에 연기가 올라오는 짧은 곰방대 하나를 물고 분노로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장건을 노려보고 있었다.
장건이 말했다.
“기다리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