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38)
38화
* * *
“아가씨, 제발. 이렇게 무작정 따라가서 뭘 어쩌시려고요?”
호위무사 진하는 차마 잡지는 못하고 그저 바짝 붙으며 말했다. 그 말에 앞서가던 사람이 뒤를 돌아보며 슬쩍 삿갓을 들었다. 삿갓 아래에는 눈처럼 하얀 얼굴이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너도 봤잖아, 진하. 그들이야말로 내가 찾던 신대륙 고수들이라니까!”
“겨우 주먹질 두어 번 하는 걸 본 것이 전부 아닙니까. 그것만으로 실력을 모두 짐작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언제는 서 있는 자세와 걷는 걸음만 봐도 고수와 하수를 구분할 수 있다며?”
“그것도 가까이서 자세히 지켜보았을 때 이야기죠. 그리고···”
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이곳까지 오면서 신대륙 고수라는 작자들의 실태를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처음 칼질 딱 한 번 외에는 별 볼 일 없는 칼잡이일 뿐입니다.”
“흥, 진하도 그 칼질 한번은 위험하다며? 그리고 그 한 번이 멋진 거라니까. 메마른 황야에서의 결투! 단 일 합으로 결정 나는 삶과 죽음! 거침없이 죽어 나자빠지는 악당들과 무자비한 주인공! 악인은 모조리 죽이고 시체를 털어라!”
진하는 손을 들어 이마를 매만졌다. 이 철부지를 어찌해야 할지 감당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냥 철부지라면 종아리라도 때려서 집으로 끌고 갈 텐데. 하지만 그녀의 호위 대상에게 그런 일을 벌이면 당장 진하의 목부터 매달릴 터였다.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큰 삿갓과 검은 피풍의를 뒤집어쓴 두 사람. 그들 중 총총 앞장서는 소녀는 유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 하와이 태수 연하상과 그의 군사들이 꺼멓게 죽은 안색으로 찾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인물은 일찌감치 후계 구도에서 멀어져 안락한 황궁 생활을 하던 중 저잣거리를 떠돌던 동전 닷 닢짜리 소설에 푹 빠져 버린 괴짜였다.
“아! 그 두 사람은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두건을 쓴 쪽은 아무리 봐도 소림승이었어. 칼을 찬 쪽은 아마 이 도시의 해결사이지 않을까? 중원에서부터 요괴를 쫓아온 소림무승과 그를 돕는 신대륙 무사? 그럼 지금 이 도시의 어둠을 헤매는 요괴가 있다는 걸까? 아앗! 설마 마가의 후예를 쫓아서? 초패마왕 항우의 후예가 아직도! 어쩌면 그 후예가 여인일지도!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비정한 칼잡이들의 싸움! 그리고 배신과 사랑!”
앞서가며 혼자 망상에 빠져가는 유설을 보며 진하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아··· 청화 이년을··· 죽였어야 했는데···”
청화는 유설에게 제일 처음 닷 닢 소설을 소개해준 시녀였다. 아마 지금쯤 그녀도 그들을 찾아 천후성이나 신사천을 헤매고 있지 않을까.
하와이에서 배를 타고 신사천에서 내린 그들은 곧장 동쪽으로 길을 잡고 한참 동안 운송 마차만 탔다. 이 도시 염호성에 도착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술집 한쪽 구석에 처박혀-무림의 사건은 모두 객잔이나 술집에서 벌어진다는 유설의 주장에 따라-마시지도 못할 술을 시켜놓고 시간을 죽이던 그들은, 정말 뭔가를 탐문하고 다니다가 결국 싸움까지 벌이는 장건과 진원상을 발견하고 냉큼 뒤를 따라 나온 것이다. 진하는 이 말괄량이가 그 두 무림인을 쫓아가서 뭘 어쩌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부디 대뜸 싸움이라도 거는 것은 아니기만 바랄 뿐이었다.
그때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그 신대륙 무사는 누굴까? 혹시 유명한 무림인일까? 천룡검사 백사경? 질풍도 감군상? 아니야, 그 두 사람 무기는 너무 유명하잖아. 그 사람은 그냥 칼 하나 차고 있던데. 그럼 혹시? 무명협? 무명협일까? 황야를 떠돌며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그저 협을 행할 뿐이라는 그 무명협! 크···! 진하! 너도 말 좀 해봐. 어떻게 생각해? 그 사람이 별호가 있을-”
“물러서십시오, 아가씨.”
진하는 유설을 멈춰 세우고 자신의 몸으로 가로막으며 앞으로 나섰다. 조금 떨어져 두 무림인을 쫓다가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선 것이 방금 전이었다. 골목이 복잡한 것이 어쩌면 놓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상황은 진하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골목에 횃불 하나 없어 밤하늘 별만이 주변을 밝히던 중, 밤 구름이 걷히며 서늘한 달빛이 골목 안으로 스며들었다.
진하의 손길에 어리둥절 물러나던 유설의 눈에 달빛을 받아 천천히 장막이 걷히듯 드러나는 저쪽 골목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곳엔 한 남자가 비스듬히 서서 왼손으로 허리의 칼집을 붙잡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쫓아가던 무림인, 장건이었다.
“안녕하시오.”
그는 뭐 하나 흥분할 것 없다는 듯 차분한 태도로 인사했다. 진하는 그 인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자기도 모르게 마주 인사할 뻔했다. 하지만 그의 손에 잡힌 칼집을 보며 인사말을 겨우 목구멍 안으로 구겨 넣을 수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유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골목 저편에서 그림처럼 나타난 장건의 모습에 진하 옆구리 사이로 쑥 머리를 내밀고는 두 눈을 초롱초롱 떠가며 냉큼 인사를 건넸다.
“아가씨! 뭐 하시는 거예요!”
“왜? 인사한 거잖아?”
“아니 지금 그럴 상황이에요?”
“그럼? 싸울 거야? 왜?”
진하는 말문이 막혔다. 싸우게 될까? 그건 아직 몰랐다. 그들은 아직 아무도 칼을 뽑지 않았다. 그때 장건이 다시 말을 걸었다.
“난 장건이라고 하오. 그쪽은?”
“아! 난 설이라고 해요! 이쪽은 진하!”
장건은 그녀의 명랑한 태도에 옅게 웃으며 가볍게 머리를 까딱였다.
“만나서 반갑소.”
선선히 웃어주는 그 모습에 유설은 씨익 웃더니 슬쩍 진하를 지나쳐 앞으로 나섰다. 진하가 곤란하다는 듯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나도 만나서 반가워요, 장건. 우리가 따라가던 걸 눈치챈 건가요?”
장건은 다시 고개를 까딱였다.
“내가 사람 기척에 좀 예민해서.”
“이거 참. 사실 얼른 따라가서 붙잡으려 한 건데 장건이 너무 빨라서요. 아! 다른 분은 어디 계시죠?”
“아미타··· 큼큼. 저는 여기 있습니다. 진원상이라고 합니다.”
반대쪽 골목에서 진원상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진하는 표정이 싹 굳으며 왼손으로 검집을 잡았다. 지금 그녀와 유설은 골목 앞뒤로 포위된 것이다. 만약 두 사람이 못된 마음을 먹고 기습했다면 진하는 큰 낭패를 보았을지 몰랐다. 그녀는 목숨을 바쳐 유설을 지켜야 했으니까.
뒤에서 등장한 진원상은 반사적으로 합장을 하려다가 꼼지락대며 자세를 풀었다. 장건이 그 어설픈 모습에 슬쩍 웃고 있자니 유설이 쓰고 있던 삿갓을 벗어 내리며 말했다.
“몰래 뒤를 따라온 건 죄송해요. 하지만 진하와 내가 무슨 나쁜 마음을 먹었던 건 아니에요.”
“밤중에 뒤를 따라오던 사람이 악의는 없었다··· 그래, 무슨 일인지 말이나 해보시오.”
유설은 하얀 얼굴 그대로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신대륙의 고수들을 만나기 위해 왔어요. 왜냐면, 그들의 무용담을 듣고 모아서 책으로 엮을 생각이거든요!”
옅게 웃고 있던 장건의 표정이 멍해졌다. 이 아가씨가 지금 뭔 소리지?
“···책?”
“네! 책이요! 지금 중원에서는 이곳 신대륙의 이야기들이 유행한다는 거 아시나요?”
“유행? 이곳 이야기가?”
“그래요! 무림맹주의 제자로 수많은 악당과 마인을 물리친 천룡검사 백사경! 신사천과 감산성을 배경으로 종횡무진 협객행을 벌인 질풍도 감군상! 그리고 신사천 너머 동쪽 개척마을을 떠돌며 이름도, 보수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협을 행하여 사람을 구하는 무명협까지!”
장건의 입이 조금 더 벌어졌다.
“지난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신대륙에서 피어나고 졌던 수많은 영웅과 지금 새롭게 태어나고 있을 영웅들의 이야기! 단순히 미화된 전기소설이 아니라 진짜 이 땅의 무림인들!”
유설은 진하가 잡기도 전에 총총 장건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저는 미화가 좀 심한 다른 전기소설과는 다르게 이 땅의 진짜 무림인들 이야기를 모아 중원에서 출판할 거예요. 아마 장안의 유행을 휩쓸어 버릴걸요? 그럼 난 부자가 되는 거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장건도 돈을 좀 만지게 되는 거죠!”
이야기를 들은 장건은 물론이고 그녀의 계획을 알게 된 진하도 맹한 얼굴이 되어 멍청히 유설을 바라보았다. 진원상만 애매하게 웃으며 상황 돌아가는 걸 파악하려 했다.
잠시 멍하니 유설을 바라보던 장건은 피식 웃어버렸다.
“···소설에 쓸 이야기를 찾아 이 신대륙으로, 그것도 동쪽 끝자락에 있는 도시로 왔다는 말이오? 그리고 방금 나와 저 친구가 싸움질하는 걸 보고 우리 이야기가 듣고 싶다는 것이고?”
유설은 대답 없이 크게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생글거리는 얼굴과 발랄한 태도를 보니 화도 나질 않았다. 결국 장건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도시 외곽에 객잔 하나가 있소. 거기 삼층 짜리 객잔은 그거 하나뿐이니 찾기도 쉽겠지. 난 지금 거기서 묵고 있소.”
유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럼···?”
“오늘 밤은 할 일이 있으니 내일 낮에 거기서 보도록 하지.”
유설은 뭔가 해냈다는 듯 혼자 아자! 하는 기합을 작게 내지르더니 장건과 진원상에게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그때 뵐게요! 오늘 밤 하실 일이 뭔지는 몰라도 잘 되길 바랄게요!”
그리고는 굳은 표정의 진하를 이끌고 총총 골목을 벗어났다. 진원상은 저편 골목 너머로 멀어지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장건 옆으로 다가왔다.
“아미타불.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나도 잘 모르겠군··· 혹시 방금 들은 별호들, 들어보셨소?”
“천룡검사니 질풍도니 하는 것 말이지요? 아니요. 사형제들에게도 들어본 적 없습니다. 설 소저가 말하는 걸 보니 유명한 사람들인가 본데요. 모르십니까?”
장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신대륙에 온 지 벌써 몇 년인데 그런 이름들은 들어본 적 없소. 아무래도 이 땅에 환상이 조금 많은 사람인 것 같은데. 내일 만나면 무슨 소릴 할지 모르겠군.”
진원상은 장건에겐 이제 숨길 생각도 없는지 두 손을 합장하며 웃었다.
“아미타불, 장 무인의 전기소설이라. 나중에 저도 꼭 읽어봐야겠군요.”
장건은 그냥 피식 웃었다. 잠시 유설과 진하가 멀어지는 걸 바라보던 그는 곧 몸을 돌려 앞장섰다. 진원상이 얼른 그 뒤를 따라붙었다.
“이제 어디로 갑니까? 그 염공이라는 분을 찾는 겁니까?”
“그래야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오. 듣기로 염공 소리를 듣는 장인은 몇 없으니까.”
두 사람은 그 길로 일단 가장 가까운 소금가마를 찾았다. 염호성의 소금가마는 밤에도 소금물을 끓이고 굽느라 불이 꺼지지 않도록 점검하는 인원이 돌아가며 불을 보고 있었다. 장건은 그들을 붙잡고 동전 한 닢씩 쥐여주며 물었다.
“머리는 하얀데 몸은 청년 못지않은 염공 어르신이 한 분 계시지 않소?”
“백발에 청년? 아, 장 염공 어르신?”
장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소금을 정말 잘 굽는다는데.”
“아 물론이지. 그분하고 그분 직원들이 구운 소금이 정말 훌륭하지.”
“혹시 그분 밑에서 일하려면 어디로 가야겠소?”
동전을 받고 대답을 해주던 인부는 미심쩍다는 눈으로 장건과 진원상을 훑어보았다.
“···인부나 하실 분들 같지는 않은데···”
“물론 인부나 하진 않을 생각이오. 소금 굽는 법을 배워서 내 가마를 차릴 생각이지.”
인부는 장건의 대답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푸헐헐 웃었다.
“이 사람아, 자기 가마 가지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나? ···뭐어. 굳이 사서 고생을 하겠다는데 내가 말릴 건 없지. 우리 가마 왼쪽으로 쭉 가서 사거리가 나오면 오른쪽으로 꺾게. 거기서 다시 쭉 가면 가마가 한 곳 있지. 거기야. 좀 걸어야 할 것이네. 그리고 기왕이면 내일 아침쯤에 찾아가게. 지금은 예의가 아니고 낮에는 한창 바쁠 와중이니까.”
장건은 대답 없이 감사 표시로 동전 한 닢을 더 튕겨주고 성큼성큼 앞장섰다. 진원상이 그 뒤를 따라붙었다. 인부가 알려준 길을 잠시 걷던 진원상은 갑자기 흘끔 장건의 눈치를 보았다. 그게 너무 눈에 띄어서 모른 척하기도 힘들었다.
“무슨 문제 있소?”
진원상은 자신을 보지도 않고 묻는 장건의 질문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잠시 망설이던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제가 어디의 제자인지 이미 짐작하신다고 하셨지요.”
“그랬지. 머리를 파르라니 깎아야 하는 곳이지 않소. 평생 여자도 멀리해야 하고.”
“···그런데 제가 어찌 소소를 찾는지 묻지는 않으시는군요.”
장건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 우리 만난 지 이제 반나절쯤 되지 않았소? 모든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정도의 사이는 아직 아닌 듯한데. 우리 거래는 간단하오. 난 그쪽이 찾는 여인을 찾아주고, 그쪽은 나한테 돈을 주는 것.”
하지만 말을 멈췄던 장건은 잠시 후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니 궁금하긴 하군. 말해줄 수 있겠소? 어디 딴 데 가서 소문을 퍼뜨리진 않을 테니까.”
거리를 두는 듯하던 장건의 말에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짓던 진원상은 이어진 질문에 그와 비슷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인적이 드문 길가를 장건과 천천히 걸어가며 푸르스름 밝은 밤하늘의 달을 올려보았다.
“···소소와 저는 어릴 적 소꿉친구였습니다. 같은 마을에 바로 옆집 친구였지요.”
하남 남부 산골 쪽에서 살던 그들은 작은 마을에 가난한 살림이었으나 마을 사람들 서로서로 도우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중에서 진원상과 양소소는 마을 아이 중에서도 서로 꼭 붙어 다니며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녔다.
“배부르지 못했고 얼굴에 흙이나 묻히고 다니는 시절이었지만, 그때만큼 행복했던 기억이 없습니다. 여름날 내 앞을 앞장서 나아가던 그 양 갈래머리 꼬마의 뒷모습과, 흔들리는 나무, 풀잎들, 축축한 숲 바닥에서 올라오는 묘하게 시원한 향기, 날 돌아본 소소의 밝은 미소···”
그때 과거를 추억하며 편안하던 진원상의 미소가 씁쓸해지기 시작했다.
“···난 내가 소소와 결혼해 가정을 꾸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죠. 소소의 나이가 차자 그녀의 부모님이 소소를 도시 쪽 부유한 남자와 결혼시켰거든요··· 소소는···”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굳었다.
“그때 소소는 나에게 도망치자고 했습니다. 둘이서 어디 멀리 도망가 산골짜기에서라도 살자고. 하지만··· 하지만 난 자신이 없었어요··· 소소를 데리고 잘 살아갈 자신이···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적어도 도시의 남자는 재산이 많은 사람이라 소소 배를 굶기지는 않을 것 같았죠.”
그렇게 양소소는 결국 도시 쪽 남자와 결혼해 떠났고, 그녀를 데리고 떠나지 못했던 진원상은 자신의 나약함에 진저리를 치며 절벽에서 떨어져 죽으려 했다. 하지만 그때 그곳을 지나던 혜원이라는 노승이 있었다. 노승은 절망에 빠진 청년을 설득하고 거둬 자신의 제자로 들였고, 이미 스물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공에 상당한 재능이 있었던 것인지 진원상은 몇 년 만에 차기 방장을 바라보는 소림승이 되었다.
그리고 편지가 왔다.
“···소소의 편지였습니다. 신대륙으로 떠나기 전에 고향을 찾았다가 제가 출가한 것을 알고 본사로 편지를 보낸 것이었죠. 별것 없는 신변잡기였습니다. 어디 볼 것이 많더라, 딸애를 낳았는데 정말 예쁘더라 하는 식이었죠. 그리고 그 후에도 가끔, 정말 가끔 신대륙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다행히 신대륙에도 본사로 참배를 오는 시주가 꽤 있는 덕분에 그렇게라도 인편에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는군요.”
편지 속에서 양소소는 행복해 보였다. 그녀는 드넓고 아름다운 신대륙의 풍경과 낯설지만 신비한 식생, 그 안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편지에 길게도 적어 보내왔다. 그 편지가 옛 연인에게 보낸 것인지, 그저 소꿉친구에게 보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으나 진원상은 상관 없었다. 그저 그녀가 잘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나마 그녀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문제는 가장 최근의 편지였다. 평소 단정하던 것과 달리 엉망진창의 필체로 도착한 편지에는 사실 사는 게 너무 힘겹고 버티기 힘들다는 이야기, 딸이 오랫동안 아팠다는 이야기, 남편이 자신을 때리고 함부로 한다는 이야기 등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 편지라는 이야기도.
그 편지를 받은 진원상은 더 이상 수행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부처께서는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포함해 속세에서의 모든 구속을 벗어던지고 해탈의 경지를 이루셨습니다. 저 또한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당연히 그런 번뇌를 벗어야 하지만··· 그게 부처의 가르침이건만··· 차마 저는··· 차마···”
진원상은 어느새 말을 하며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장건은 그의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도 한참이나 아무런 대꾸 없이 그저 한 발짝 앞장서 나아갔다. 그러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진원상이 거기에 흠칫 놀랄 때 장건은 옅게 웃던 얼굴 그대로 뒤돌아보았다.
“다 왔소. 그 염공 할아범이 먼저 왔을지 봅시다.”
“···예, 예. 봐야지요. 소소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지요.”
장건의 얼굴을 바라보던 진원상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눈가를 닦는 그는 잠깐 사이에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잠시 그가 정리하길 기다리던 장건은 다시 앞장서 걸었다. 그들은 낮은 담장을 지나 가마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우뚝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술집에서 만났던 백발노인이 이글거리는 가마 앞에 작은 술상을 차려놓고 앉아 있었다.
“···기어코 찾아오셨군. 하여간 소금 굽는 놈들은 죄다 입이 싸서 문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