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50)
50화
“···대비하고 있었군. 어떻게 알았지?”
왕 적사는 장건의 차분한 눈빛을 마주 보며 물었다. 그 말투에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짜증은 있을지언정 위기감은 없었다.
“내가 잠귀가 좀 예민해서.”
그는 장건의 짤막한 농담에 헛웃음을 흘렸다.
“잠귀가 예민해? 네놈, 누구냐? 누군데 우리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야?”
“그 행사라는 게 열두 살짜리 꼬마애 납치라면 누가 그냥 두고 보겠나. 그쪽은 이제 유괴 미수범이야.”
왕 적사의 눈가가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느릿한 손으로 자기 복면을 벗어 내렸다. 그 안에는 장건이 예상했던 그대로 상인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화가 나는지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유괴? 구음사혈은 아주 강력한 영약과 뛰어난 고수, 그리고 의원의 손길이 없다면 스물이 되기 전에 죽는다. 그렇게 그냥 죽어버리기 전에 이 세상에 조그만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도록 돕는 게 더 옳은 일이지. 그마저 없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갔음에도 그저 잊혀질 뿐이니. 아니면 뭐, 네놈이 저 소녀를 구해보겠다는 것이냐?”
그는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디며 말을 이었다.
“그래, 밑에 소림사 승려가 함께 있었지. 그럼 어디 소림사 대환단이라도 쓸 생각인가 보군. 지난 황제들이 내놓으라 말해도 목숨을 걸고 버텼던, 그 중놈들의 소중한 보물을 말이야. 허허··· 그게 말이 되나?”
왕 적사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웃긴다는 듯 피식거리며 다시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장건은 그걸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대계大計가 뭐냐.”
다시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려던 왕 적사가 우뚝 멈췄다. 장건이 말을 이었다.
“동부산맥의 원주민 부족에서 정령을 노렸고, 감산에서는 서위량을 통해 그 일대의 시장을 장악하려 했지. 그 이전에는 황야의 마적단들에게 마공서를 뿌렸고. 맞나?”
왕 적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그렇게 굳은 얼굴로 두 눈은 부릅떠 장건을 바라보았다.
“네놈··· 설마 감산에서 궁의 일들을 방해했던 놈이···”
“가는 길마다 자꾸 만나서. 어쩌다 보니.”
잠시 멈춰서서 장건을 부릅뜨고 노려보던 왕 적사의 표정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는 오른발을 뒤로 빼고 장건을 향해 비스듬히 섰다. 그리고 몸 뒤로 숨은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 팔뚝에서 챙-하는 소리와 함께 옷을 찢고 날카로운 칼날 셋이 솟아 나왔다.
그는 그렇게 자기 무기를 꺼내놓고 입을 열었다.
“···우리가 받은 제국의 억압과 오욕의 세월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대계 또한 이해할 수 없음이다. 이름을 남기고 죽는 것과 그저 살아가기만 하는 것의 차이를 모르는 자라면 더더욱.”
그의 엄숙한 말투에도 장건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말할 생각 없나 보군. 사실 나도 크게 궁금하진 않았어.”
그렇게 뚱하게 말한 그는 상대방이 그런 것처럼 왼발을 뒤로 한 발짝 빼고 비스듬히 서서 왼손으로 칼집을 살짝 틀어주었다.
희미한 달빛이 내리쬐는 객잔 지붕 위에서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아래에선 진하와 복면인들의 검이 부딪치는 소리만 날카롭게 울려 퍼질 뿐, 선선히 불어오던 바람마저 그 순간만큼은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때 왕 적사가 밟은 객잔의 나무 천장이 그 발끝에 실린 힘을 견디지 못하고 으직-하는 소리를 냈다. 동시에 시퍼런 빛이 어둑한 객잔 위에서 번쩍 터졌다.
다음 순간 왕 적사와 장건은 뒤바뀐 자리에서 서로를 등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의 정적 후 그들은 다시 서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장건의 칼과 왕 적사의 긴 손톱 같은 칼날이 빛을 반사해 번쩍거렸다.
장건을 노려보던 왕 적사는 흘끔 자신의 호조虎爪를 바라보았다. 세 갈래로 솟아있어야 할 칼날이 둘 뿐이었다. 원래 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할 칼날은 하늘을 휙휙 돌다가 그때서야 툭 떨어져 객잔의 나무 천창에 박혔다.
왕 적사는 그걸 보고 씨익 웃었다.
“···실력이 좋군. 이름이 뭔가?”
“장건.”
“내 이름은 왕오다. 궁원으로서의 나에게 넌 대계의 장애물일 뿐이지만, 무인으로서의 나는 지금 가슴이 뛰는군. 어디 제자냐?”
“네가 그 궁이라는 곳을 말해주면 나도 알려주지.”
왕 적사는 장건의 건조한 대답에 말없이 더 진한 미소만 지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다가, 다시 움직였다. 객잔의 지붕이 두 사람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와자작 하는 소리를 냈다.
* * *
진하와 싸우는 복면인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처음에 진견의 발에 맞아 나가떨어졌던 자도 벌떡 일어서 정신을 차리더니 그녀를 협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일곱 명의 협공을 맞이해 전혀 밀리지 않았다. 도리어 상처가 늘어가는 것은 복면인들이었다.
진하의 검이 번쩍이자 복면인들은 몸 여기저기서 피를 뿌리며 주춤 밀려날 뿐이었다. 이어 그녀가 검을 크게 휘두르자 복면인들이 우르르 물러났다. 확 넓어진 자리에서 그녀는 왼손에 역수로 든 검집으로 상단을 가리고, 오른손에 든 검은 앞으로 쭉 뻗으며 멈췄다. 복면인들은 그 곧게 뻗은 검이 마치 화살처럼 자신들을 찌르는 것 같아 움찔거렸다.
진하가 말했다.
“염치없는 새끼들. 그 아이한테 무슨 죄가 있다고 이 지랄이야.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서하 방으로 머리를 들이밀어? 너희들 사지 근맥을 다 끊어서 평생 기어 다니게 해주마. 덤벼!”
그때 복면인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성큼 앞으로 걸어나오며 웃었다.
“하. 기고만장하구나. 보아하니 나이가 많지 않은데, 하긴 젊은 나이에 그 정도 성취를 이뤘으면 그리 오만할 수도 있지. 하지만 오늘 넌 여기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 구음사혈은 우리가 가져갈 것이고.”
“···미친놈. 방금까지 밀리던 게 누구더라?”
진하의 말에 복면인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모두 창을 들어라.”
그러자 조금 전까지 검을 휘두르던 복면인들이 등에 메고 있던 검집을 풀러 검의 손잡이와 결합했다. 그리고 그렇게 길어진 손잡이를 툭 때리자 원래 검집의 길이만큼 한층 더 늘어나며 긴 칼날을 가진 단창이 완성되었다.
“저게 뭔···”
진하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저게 뭔가 하는 순간, 검의 결합과 변환을 마친 복면인들이 그것을 들고 곧장 공격해왔다. 일곱 명이 이 열로 서서 찔러오는 모습이 마치 창 달린 벽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바뀐 공격방식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찌르기를 가볍게 튕겨내고 창의 안쪽으로 파고들며 검을 찔러넣었다. 검 끝이 복면인의 가슴을 노렸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다른 창날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리고 그 후 이어진 연격에 그녀는 주르륵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복면인들은 이후 일곱 개의 팔을 가진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며 그녀를 압박해가기 시작했다. 그들 하나하나보다는 진하의 검이 더 강하고 더 빨랐으나, 정신없이 몰아치는 일곱 창날 앞에서 그녀는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요란하게 움직이는 복면인들과 이리저리 몸을 날리는 진하 때문에 오밤중에 바닥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부서진 창가에서 그걸 지켜보던 진견이 신음을 흘렸다.
“으음. 진하 시주를 도와주어야 할 것 같소.”
“예? 진하를요?”
그 말에 안쪽에 있던 설묘금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헤헤 웃으며 진견을 말렸다.
“에이, 굳이 안 그러셔도 돼요. 진하 혼자 할 수 있어요.”
“···그, 설 시주 눈에는 나와 다른 게 보이시오? 내 흐린 밤눈에는 지금 그녀가 위험한 것만 같은데···”
“지켜보세요.”
진견은 그녀의 그 믿음 가득한 목소리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금 더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한참 뒤로 물러서던 진하의 검이 번쩍 빛나며 그녀 전방의 바닥을 쭉 훑었다. 그러자 그 강력한 검기에 흙과 모래가 터져나가며 짙은 먼지를 피워올렸다.
그 연막에 시야가 차단된 복면인들이 순간 멈칫할 때, 진하는 마치 쏘아진 화살처럼 회전하며 그 흙먼지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다음 순간 먼지를 뚫고 나온 그녀의 모습에 복면인들이 움찔 놀라 움직이려 했으나, 그녀는 이미 그들을 훑고 지나서 바닥에 내려앉은 후였다.
짙게 일어난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에 검에 목이 달아난 시체 셋이 풀썩 쓰러졌다.
지켜보던 설묘금이 다시 웃으며 진견을 돌아보았다. 진견은 놀랍고 멋지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말 맞죠?”
“허허. 그렇구려.”
그때 조금 전 앞으로 나서서 말을 하던 복면인은 동료들의 시체가 후두둑 쓰러지는 것을 보고 급히 외쳤다.
“모두 신공을 일깨워라! 보통 고수가 아니다!”
그 외침에 남은 네 복면인의 눈에서 시뻘건 기운이 줄줄 흘러내리고 몸에도 뚜두둑하는 소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내려앉은 그대로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던 진하는 그걸 보고 신음을 흘렸다.
“진짜 마공 수련자들이었어···흡!”
그녀는 급히 몸을 날려 굴렀다. 그녀가 있던 자리엔 복면인 중 하나가 던진 단창이 텅! 소리를 내며 틀어박혔다. 그 후 몸을 굴려 일어난 진하에게 복면인들이 달려들었다.
조금 전과는 반대의 상황이 나왔다. 아까는 진하가 복면인 개개인보다 더 강한 내력과 속도로 그들을 밀어붙였다면, 지금은 그녀가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며 힘겹게 몸을 피했다. 아직 다치지는 않았으나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그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진견이 창가에 발을 걸쳤다.
“이젠 진짜 도와야 할 듯하군.”
“···네. 그래야겠네요.”
그 옆으로 설묘금도 따라 나오려 했다. 하지만 진견이 손을 뻗어 그걸 막았다.
“기다리시오. 설 시주는 아이를 지켜주시오.”
설묘금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진서하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침대 위에 앉아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는 재울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둔감한 아이라도 치고받고 싸우는 와중에 잠을 잘 리가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스님이 지켜주세요. 지금은 제가 조금 더 팔팔하잖아요?”
두 팔을 다친 진견이 무리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에 진견은 고개를 저으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
“삿된 번뇌에 휩싸인 중생을 구원하는 건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 땡중이 할-”
그때 위에서 뭔가가 휙, 하고 창가를 지나 떨어졌다. 진견과 설묘금이 반사적으로 그를 확인하자 그 떨어진 뭔가가 객잔의 차양을 박살 내며 땅에 처박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왕 적사였다.
동시에 객잔 위에서 휘리릭 떨어져 진하 옆에 내려서는 사람도 있었다.
“···장 무사.”
“벌써 반이나 줄었군.”
진하는 가볍게 자기 옆에 내려선 장건을 보고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객잔 옥상과 그를 번갈아 보았다. 그 높이가 삼 장을 넘어 사 장 가까이 되는데 장건은 너무 가뿐하게 내려선 것이다.
“어떻게···”
그에 진하가 의문을 드러내려 할 때, 조금 전 나무 차양을 부수며 처박혔던 왕 적사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벌떡 일어섰다. 오른팔에 차고 있던 호조는 세 갈래가 모두 부러져 있었고 웃옷은 모두 찢어져 맨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상태로 몸 여기저기 피를 흘리고 있으니 패잔병이 따로 없었다.
그는 그렇게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장-건! 이노옴!”
그러나 그 처절함에 비해 장건은 시큰둥해 보였다.
“음. 역시 몸 하나는 튼튼하군.”
진하와 싸우던 복면인들은 후다닥 물러서 왕 적사에게 다가갔다. 그들 중 아까부터 입을 열던 자가 다가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훅훅 호흡을 가다듬던 그는 다가온 부하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기운을 보고 물었다.
“신공을 깨웠느냐?”
“예. 저 여인의 무공이 보통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황군이나 무림맹인 듯합니다.”
왕 적사는 피 섞인 침을 바닥으로 퉤 하고 뱉었다.
“너무 성급했군. 좀 더 저들을 조사해봤어야 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젠 모조리 죽이는 수밖에요.”
그 말에 왕 적사는 자기 부하를 바라보았다. 원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흑사의 지위를 지닌 그는 마공을 일깨운 사람답게 벌써 호흡이 거칠어지고 눈가에는 살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거기에 입에선 짐승처럼 으르릉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니 흔히 말하는 사악한 마인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 모두 수준 낮은 마공을 익혔기 때문이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그는 굳은 얼굴로 장건과 진하를 가리켰다.
“그래. 그 수뿐이지. 좋다, 가라. 빈틈을 만들어라!”
그 외침에 으르렁거리던 네 복면인이 잘 훈련된 사냥개처럼 와락 달려들었다. 그에 장건은 양손으로 칼을 잡으며 말했다.
“오른쪽 둘을 맡으시오.”
“에, 예?”
그는 진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복면인들을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어둑한 밤이었기 때문인지 달려가는 그의 모습이 엿가락처럼 쭈욱 늘어나서는 그 잔영은 그대로 달려오던 복면인 둘을 스쳐 지났다. 그가 휘두른 칼은 번뜩이는 빛이 되어 마치 아무런 저항이 없다는 것처럼 그들의 몸을 통과했다.
그러나 그 직후 와락 터져 나온 붉은 피는 살갗을 훑고 지나간 차가운 칼날을 증명했다.
“이런!”
그 모습에 진하가 얼른 뒤따라 달렸다. 나머지 복면인 둘이 자신들을 그냥 지나가는 장건을 보고 그 등 뒤에 창을 찔러넣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들도 진하의 검에 등을 찔려야만 했다.
급한 마음에 검기까지 일으켜 복면인 둘을 베어 넘긴 진하가 검을 털었다. 그리고 장건이 왜 급히 움직였는지 알 수 있었다. 왕 적사는 부하들을 돌격시키고 뒤따라오지 않았다. 그는 도망치고 있었다.
“···뭐 하는 새끼야.”
진하는 훌쩍 멀어진 왕 적사의 등과 빠르게 그 뒤를 따라가는 장건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그렇게 도망가 놓고 벌써 장건에게 다 따라잡혔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