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51)
51화
* * *
냉큼 도망치던 왕 적사는 객잔 지붕에서 느꼈던 섬뜩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재빨리 몸을 돌리며 칼날이 모두 부러진 호조를 집어 던졌다. 다급한 와중에도 힘이 실렸는지 위협적인 투척이었다. 물론 장건은 가볍게 튕겨냈지만.
몸을 돌려 멈춰선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장건을 노려보았다. 살기가 뚝뚝 흐르는 눈빛이었다. 장건은 그 눈을 마주 보며 휙 칼을 털었다.
“부하들 다 버리고 도망가려고?”
“···후일을 기약한 후퇴다. 함정에 빠졌으니 일단 살아서 그 정보를 전달해야 할 것 아닌가.”
“함정?”
왕 적사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그럼? 함정이 아니라고 할 셈인가? 지금 이 싸움이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고?”
“함정은 무슨. 그냥 자기 무덤 자기가 판 거지.”
장건은 피식 웃으며 터벅터벅 왕 적사에게 다가갔다.
“됐고, 네가 아는 거나 다 털어놔 봐. 그 궁은 뭐 하는 놈들이고, 대계는 뭐고, 저 꼬맹이는 잡아다가 뭘 하려 했는지.”
왕 적사는 장건의 말을 들으며 그가 다가오는 만큼 뒤로 물러섰다.
“흐. 궁금하지 않다고 한 게 조금 전이건만··· 역시 날 심문할 생각이군. 그게 가능하리라 믿나? 설사 고문을 하더라도 내가 궁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물러나던 그가 갑자기 우뚝 멈췄다.
“···난 쉽게 잡혀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의 눈에서 흐르던 살기가 폭발적인 기세로 흉험해졌다. 동시에 상체에서 울긋불긋 혈관이 일어나며 몸 위로 불그스름한 기운이 일어났다. 그는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위량을 죽인 게 네놈이라고 했었나? 그는 이제 막 신공을 익히고 있었지. 난 그와는 다를 것이야.”
그의 자신만만한 말과 함께 그의 두 손에서 검붉은 불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그렇게 두 손에 불을 피워놓고 두 손을 중단에 둔 채 전신에서 강한 열기를 뿜어냈다. 그 열기가 아직 거리가 있는 장건에게도 닿을 정도였다. 확실히 서위량보다 더 강렬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를 마주한 장건은 그리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따듯하네.”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갑자기 칼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왕 적사는 그걸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냐?”
“주둥이를 움직이려면 일단 살아 있어야지. 칼은 잘못 맞으면 죽잖아.”
대충 맨손으로 상대해준다는 이야기였다. 그에 왕 적사의 두 눈이 부릅떠지고,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우둘투둘 일어나는 혈관에 얼굴까지 시뻘게지자 말 그대로 흉신악살이 따로 없었다.
“네 이놈! 지금 날 무시하는 것이냐!”
장건은 그 외침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아까부터 다가가던 걸음걸이 그대로 왕 적사에게 가까워졌을 뿐이다.
왕 적사는 그 무관심한 모습에 성난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검붉은 불길로 이글거리는 손바닥이 장건의 얼굴을 노렸다.
장건은 그것을 오른쪽을 빙글 돌아 피하며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모아 왕 적사의 옆구리쯤에 푹 찔렀다. 왕 적사는 그 따끔함에 움찔 놀라면서도 가까이 붙은 그에게 연이어 손바닥을 휘둘렀다.
한밤중이었기 때문에 왕 적사의 불타는 두 손바닥은 마치 횃불이나 불붙은 공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 밝지도 않고, 빛이 일정하지도 않은 마공의 불꽃이 어지러이 흔들리며 장건과 왕 적사의 무수한 그림자를 만들고 지웠다.
왕 적사는 확실히 빠르고 강했다. 휙휙 뻗는 두 손은 공기를 찢고, 이글거리는 불꽃은 직후 밀려온 공기를 태우며 뜨거운 열기를 뿜었다. 멀리서 지켜보는 진하와 일행들 눈에는 마치 불타는 뱀 두 마리가 정신없이 장건을 쫓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뱀들은 장건에게 닿지 않았다. 그는 불꽃이 그림자를 밀어내면 마치 그 그림자와 하나인 듯 자연스레 물러나고, 불길이 사그라지면 다가서고, 다시 빛이 다가오면 환상처럼 흩어졌다.
“이게, 무슨···”
왕 적사는 정신없이 그 뒤를 쫓아 장법을 휘두르면서도 혼란에 빠졌다. 그림자에 묻힌 듯, 혹은 그림자 그 자체인 듯 종잡을 수 없이 움직이는 장건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그 와중에 그를 더 짜증 나게 하는 것은 순간순간 빈틈을 파고들어 그의 몸 여기저기를 푹푹 찌르는 손가락이었다.
“제기랄! 제대로 싸워라!”
결국 열이 뻗친 왕 적사는 굳이 장건을 쫓으려 하지 않고 그냥 사방팔방으로 장법을 휘두르며 내력을 쏟아냈다. 그를 중심으로 강한 열기와 불길이 작은 파도처럼 뿜어 나왔다.
장건은 그를 피해 뒤로 휙 공중제비를 돌아 멀어져서는 가볍게 내려섰다. 그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왕 적사의 시선에도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무영보無影步라고 하면 되려나?”
“무슨 개소리냐!”
그 중얼거림을 들은 왕 적사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장건을 향해 달려들어 두 손을 내질렀다. 그 손바닥에 분노로 일어난 내공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장건은 그 장법이 코앞까지 다가오는 동안에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가, 다음 순간 촛불 꺼트리는 것처럼 훅, 흐려졌다.
허공에 내력을 토해낸 왕 적사는 재빨리 몸을 돌려 사라진 장건을 찾았다. 그는 왕 적사의 뒤로 이 장쯤 떨어져 등을 보이고 있었다.
“이놈! 끝까지 제대로 싸울 생각이···”
그 등판을 바라보고 다시 달려들려던 왕 적사는 뭔가 알 수 없는 기분에 멈칫했다. 그는 그렇게 굳어서 부르르 떨다가, 갑자기 웩하고 피 한사발을 토했다.
“꺼헉··· 이게··· 무슨···”
그는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자신의 상체 여기저기에 붉게 달아오른 반점들이 보였다. 모두 장건의 손가락에 찔렸던 자리였다.
“끄흑!”
왕 적사는 풀썩 주저앉았다. 점점 전신의 근육이 경직되고 있었다. 동시에 기혈을 흐르던 내공도 갑자기 제멋대로 움직이며 흩어져갔다. 그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왕 적사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 앞으로 장건이 터벅터벅 다가왔다. 이미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왕 적사는 겨우 눈동자만 들어서 그를 바라보았다. 장건은 그 눈을 보며 오른손을 주억거렸다.
점혈은 자신의 내공으로 상대의 기혈을 막아 이상을 일으키는 수법이었다. 혈점 하나나 둘을 짚는다고 그렇게 되지는 않고, 적어도 기혈 다섯 이상을 짚어야 조금씩 유의미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게다가 각 혈을 짚는 시간 사이가 길어지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문제점도 있어서 실제 싸움에서는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다. 창칼을 들고 서로의 목숨줄을 노리는데 그 혈 수십 곳 짚을 시간이나 여력이 어디 있겠는가. 마혈이니 수혈이니 하나만 짚으면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점혈법은 적어도 장건이 이 세상에서 배우기엔 없었다.
“내···몸에···무···슨···짓···”
왕 적사가 잘 벌어지지도 않는 입으로 겨우 말을 꺼냈다. 아마 혀도 굳어갈 텐데 대단하다면 대단한 의지였다.
“구음사혈이라고 했나? 난 절맥이라고 부를 줄 알았는데. 뭐, 사혈이든 절맥이든 무슨 상관이야.”
탁탁 손을 턴 장건은 품에서 연초를 꺼냈다. 벌써 많이 피워서 주머니 안에 연초는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장건은 아끼는 기색 없이 종이에 연초를 말았다.
장건은 진서하의 혈맥을 치료하며 기혈의 모양이 변하거나 뒤틀리면 몸에 특이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 예전 계곡 원주민들을 통해 보았던 활짝 열린 전중혈과 그 때문에 내공이 흩어지고 신비한 힘이 생길 수 있음도 알았다. 기혈의 세계는 단순히 내공이 일어나고 흐르는 것을 넘어 좀 더 복잡한 차원으로 넘어갈 여지가 있었다. 그리고 장건은 그를 이미 알고 있던 점혈법과 결합해 작은 성과 하나를 이뤘다.
장건은 연초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며 왕 적사라 불리던 자를 바라보았다.
불꽃처럼 흐르던 그의 내공은 지금 장건이 뒤틀어버린 기혈들로 흩어져 있었다. 영구적인 장애는 아니고 그저 장건의 내공에 묶여 잠시 이상한 모양이 된 것이다.
그러나 진서하의 아홉 혈도에 고여 가던 생명력처럼, 그 때문에 왕 적사의 내공이 장건이 짚은 전신 혈도로 흩어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람을 태워죽일 수 있을 열기가 갈라져 작은 온기 덩어리 수십 개로 나뉜 모습이었다.
연초를 입에서 떼며 후하고 연기를 뿜은 장건이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부들부들 떠는 왕 적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고문을 해도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지? 그럼 한번 보자.”
장건은 말을 마치자마자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모아 왕 적사의 가슴팍을 푹 찔렀다. 그가 구상한 점혈법의 마지막 혈점이었다.
그리고 그 직후, 왕 적사의 부들거림이 격해졌다. 동시에 살짝 벌어진 입에서 주르륵 침이 흐르고 고통에 찬 눈동자가 벌벌 떨다가 못해 위로 휙 돌았다. 거기에 그가 마공을 깨울 때처럼 그의 몸에서 뚜두뚝 뚜둑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진하가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저게 뭡니까?”
“분근착골分筋錯骨.”
장건은 연초를 입에 물며 그리 대답했다. 진하는 그 살벌한 이름에 흠칫 놀라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거기서 연초를 태우고 있는 사람은 그녀가 며칠간 함께 여행하며 보았던 소녀와 은근히 잘 어울려주던 묘하게 자상한 남자가 아니라, 이 신대륙 황야의 무자비한 낭인이었다.
그때 객잔 방에 있던 설묘금이 나타났다. 객잔 안에서는 객잔 주인과 다른 손님들이 깨어났는지 불이 켜지고 작은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야?”
진하는 반사적으로 다가오는 설묘금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벌벌 떨고 있는 왕 적사에게서가 아니라 장건과 그녀 사이를.
“왜 그래?”
“···아닙니다, 아가씨. 그저 저 마인이 위험할까 싶어서···”
설묘금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까지 날뛰던 마인은 지금 흙바닥에 꿇어앉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진하는 차마 잠시지만 장건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하기 힘들어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때쯤 왕 적사의 입에서 침과 거품이 아니라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연초를 태우며 그를 바라보던 장건은 그제야 다시 한번 왕 적사의 혈을 짚었다.
“켁, 크헥··· 끄으···사, 살려줘···”
장건인 몸의 경직이 풀려 버겁게 숨을 내쉬는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제 털어놓을 마음이 드나.”
왕 적사, 왕오는 거뭇해진 눈으로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장건이 다시 손을 드는 것을 보고 결국 입을 열었다.
“···궁은, 궁宮일 뿐이다··· 저 미치광이 진시황을 물리치신, 중원의 진짜 주인 초패왕 전하의 궁전··· 그 아래 한 제국에 핍박받고 억눌리던 자들이 모였으니···”
그가 꺼낸 말에 진하와 설묘금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장건은 그걸 흘끔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대계는?”
“···대계는··· 사공蛇公께서 준비한··· 초楚의 부활을 위한 계획이다···”
“그게 정확히 뭔데.”
왕오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대계에 있어··· 뱀들은 그저 하나의 장기 말일 뿐··· 대계의 전체적인 그림은 사공만 알고 계신다···”
“그럼 꼬맹이를 납치해서 뭘 할지도 몰랐다는 거냐?”
“···대계의 일부로서 필요했다는 건 안다··· 아마··· 구음사혈의 특징을 연구하려는 목적으로···”
장건은 연초의 재를 툭 털며 씁쓸히 웃었다.
“그럼 이름을 남기니 어쩌니 했으면서 너도 아는 건 별로 없었군.”
“···이 목숨 바쳐 한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얼마든지···”
그는 고개를 푹 떨구며 그리 중얼거렸다. 장건은 그것이 정말 그의 의지일지, 아니면 그저 주입된 사상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굳이 더 물어볼 마음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연초의 마지막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툭 튕겨 버린 장건은 설묘금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눈썹을 찡그리다가, 장건이 자신을 바라보자 입술을 말아 넣으며 두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마주 보았다.
장건이 말했다.
“그쪽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에, 예? 제, 제가요? 제가 어떻게···”
“그 암룡대니 어쩌니 하는 이들. 내가 불러와도 괜찮겠소?”
진하의 안색이 싸악 창백해졌다. 그녀는 장건과 설묘금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설묘금, 유설은 장난스레 넘기려던 표정을 지우고 굳은 얼굴이 되었다.
“···나와 그들의 대화를 들었군요. 어떻게 들었죠? 이중음을 알고 있었나요?”
“난 굳이 황군과 얽히고 싶지 않소. 어쨌든 이렇게 마인을 잡아줬으니, 훈장 같은 것 대신에 그냥 신사천까지 가는 길 조용히 갑시다.”
유설은 뭐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결국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건은 그런 공주와 호위무사를 두고 객잔을 향해 걸었다.
등불을 나온 주인과 점소이가 객잔 앞에 널린 복면인들의 시체를 보고 기겁을 하는 게 보였다. 얼마 없는 객잔의 손님들은 각각 창문을 열고 이게 무슨 소란인가 살펴보고 있었고, 객실을 나와 아래로 내려온 손님도 있었다. 진견은 죽은 복면인들을 보며 합장을 하고 염불을 외우고 있었으며, 그 옆에 진서하가 바짝 붙어 있다가 장건을 발견하고 총총 다가왔다.
장건은 다가온 서하를 보고 말했다.
“이제 그만 자러 가.”
서하는 그 말에 멀뚱멀뚱한 눈으로 그를 올려보다가 시키는 대로 자러 가지는 않고 도리어 툭툭 그의 옷깃을 당겼다. 같이 가자는 것 같았다. 그 눈빛에 장건이 주변을 둘러보니 공주와 그녀의 호위무사는 왕오를 처리하느라 바쁜 것 같았다. 당장 지금 그녀의 손짓에 암룡대원과 질풍도 감군상이 헐레벌떡 달려 그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 내가 재워야겠네.”
잠시 생각하던 장건은 서하의 머리를 대충 헝클어주고는 손을 잡고 함께 객잔으로 들어갔다.
객잔과 그곳의 소란 위로 옅은 빛을 내리쬐던 달과 별들은 안으로 사라지는 그들이 아쉬운지 살짝 더 기우뚱해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