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52)
52화
지난밤의 소란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화창한 아침이 밝았다.
쌀쌀하던 날씨가 조금 풀려 옷깃만 잘 여미면 그리 춥지 않은 아침이었다. 일행은 객잔 앞에서 출발하기 전 마차에 말을 채우고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객잔 주인과 점소이가 따라 나와서 손을 거들었다. 간밤의 소란으로 겁을 먹을 만도 한데 설묘금이 떡하니 내민 금전에 그들은 도리어 다가와 굽실거렸다. 돈의 힘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그런 일행에게 질풍도 감군상과 암룡이십사호가 다가왔다. 각자 말 위에 올라타 있었고, 하룻밤 사이에 폭삭 늙어버린 왕오도 손발이 안장에 꽁꽁 묶여 말을 타고 있었다.
이십사호는 슬쩍 장건과 진견의 눈치를 보며 다가와 설묘금에게 말했다.
“크흠. 그럼 설 소저, 부탁하신 대로 이자는 천후성으로 압송하겠습니다.”
“아, 네. 가시는 길 조심하세요.”
“걱정하지 마시지요. 질풍도 감군상 대협께서 함께하시는데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설묘금은 그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어설프게 웃으며 슬쩍 장건의 눈치를 살폈다. 이미 그들의 정체를 아는 사람 앞에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을 보이기가 염치없었던 것인데, 조조의 등에 올라탄 장건은 먼 곳을 바라볼 뿐 특별히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그럼 이만.”
두 사람과 죄수 하나는 그렇게 먼저 떠났다. 설묘금이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니 진견이 허허 웃으며 말을 걸었다.
“많이 아쉽겠소, 설 소저. 괜히 우리 때문에 더 이야기 나누고 싶던 사람을 그냥 보낸 것은 아니오?”
설묘금은 그의 말에 싱긋 웃었다.
“아뇨. 길 가다 이렇게 만나서 신기하긴 했는데, 굳이 더 떠들 만한 건 없더라고요. 우리 대신에 마인을 압송해 주니 감사할 따름이죠.”
진견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초나라의 부활을 꿈꾸며 마공을 수련한 마인이라니.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소. 그 초의 항적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헤치며 패악한 짓을 벌였는데, 단순히 그 힘을 숭상하여 인성을 망치는 마공을 익히고 어린아이를 잡아다 끔찍한 일을 벌이려 하다니···”
“아마 천후성에 배를 정박하고 있던 황군이 움직일 거예요. 그 마인에게서 정보를 캐내고 궁이라는 곳을 박살 내 버리겠죠.”
“불행 중 다행인 일이오.”
“뭐··· 마침 우리가 서하와 함께 있었던 것도 그렇고, 마인을 압송해 줄 사람들도 있었던 것도 그렇고 다행이긴 하네요···”
“출발합시다.”
그때 마차의 정리가 끝난 것을 확인한 장건이 짧게 말했다.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에 탔다. 이 객잔에 올 때처럼 마부는 진하가, 그리고 장건은 마차 옆에서 조조를 타고 따랐다.
마차는 곧 덜그럭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그때 마차에 타고 있던 서하가 빼꼼 마차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뒤를 돌아보았다. 부서진 방의 수리비와 시체 처리를 부탁한 대가로 금전을 받은 객잔 주인과 점소이가 멀어지는 그들을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상인 정신이 뛰어나다면 뛰어나다고 할만한 모습이었다.
장건이 그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
“들어가 있어. 흙먼지 들어간다.”
서하는 객잔을 바라보던 눈을 장건에게 돌리고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가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뭔가 말할 것처럼 입술을 오물거렸다. 하지만 장건이 그 모습에 살짝 놀라서 멍하니 보고 있어서인지, 아이는 잠시 그렇게 입술만 꼼지락대다가 다시 마차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이가 그렇게 들어가 버리자 멍하니 바라보던 장건은 혼자 피식 웃으며 고삐를 툭툭 당겼다. 그러자 조조는 앞으로 가볍게 치고 나가며 왜 혼자 웃냐는 듯 자기 저리를 위로 툭툭 흔들었다. 장건은 녀석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큰일 났는걸. 이러다 정들 것 같은데.”
조조는 할 걱정이 없어서 그딴 걱정을 하냐는 듯, 마치 사람이 헛웃음을 짓는 것처럼 푸르륵 투레질을 했다. 장건은 옅게 웃는 얼굴 그대로 눈 앞에 펼쳐진 평원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 마음이 가면 가는 거지.”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장건의 중얼거림에 옆에서 마차를 몰던 진하가 불쑥 되물었다. 쓰고 있던 삿갓을 손으로 잡아 까딱이며 말했다.
“속도를 냅시다. 빨리 움직이면 오늘 저녁도 객잔에서 머물 수 있을 거요.”
“아, 예. 그렇게 하죠.”
새벽의 찬 공기와 아침 햇살의 온기가 뒤섞인 황야의 아침 날씨 속에서, 그렇게 마차와 인마 한 쌍이 옅은 흙먼지를 피우며 서쪽을 향해 달렸다. 그들의 등 뒤에서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덕분에 화창하게 떠오른 태양이 아주 먼 곳까지 그들의 앞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 * *
왕 적사라고 불렸던 왕오는 따듯한 햇살을 맞으면서도 새벽의 찬 공기를 느끼는지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안장에 꽁꽁 묶인 몸으로 그래 봐야 구속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의 눈에 바닥에 쓰러져서 쿨럭 피를 흘리는 자와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가는 자가 보였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같은 소속에 속한 듯 왕오를 압송하고 있었다.
입안의 피를 옆으로 퉤 뱉은 암룡이십사호가 옆구리를 부여잡고 힘겹게 웃었다.
“···젠장. 이딴 식으로 뒈질 줄은 몰랐는데···”
그를 기습했던, 지금 그에게 다가가는 감군상이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비밀조직 요원의 결말이 다 그렇지, 뭐. 감산에서 너희들도 우리 쪽 애들 많이 죽였잖아?”
그 말을 들은 이십사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통보다는 엿 같다는 느낌의 찡그림이었다.
“시발··· 너, 목소리가···”
“목소리? 아, 이거. 백변환환공百變換換功은 체형이나 얼굴은 완벽히 바꿔 주는데 목소리는 못 바꾸거든. 너희 건 목소리까지 바꾼다던데, 혹시 할 줄 알아?”
이십사호는 그, 아니 그녀의 발랄한 목소리를 들으며 애써 다시 웃었다.
“당연히··· 할 줄 알지··· 이 얼굴도 바꾼 얼굴···인데···”
감군상, 혹은 감군상의 얼굴을 훔친 누군가는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오. 혹시 가르쳐 줄래? 가르쳐 준다고 약속하면 살려줄 수도 있어. 물론 우리 쪽으로 전향해야겠지만.”
그 발랄한 목소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근엄한 얼굴을 이십사호가 올려보았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엿이나 먹어··· 너희 손에 죽은··· 신대륙의 백성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순 없지···”
감군상은 그 대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잘났다. 도둑 황제의 자손에게 충성하면서 참 백성을 생각하시네. 참 잘났어.”
“···마공을 익히고··· 항적의 뻘짓을 추앙하는 너희보다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감군상의 칼이 빛살을 그렸다. 직후 잘려 나간 이십사호의 팔이 툭 떨어져 흙바닥을 굴렀다. 엄숙한 표정의 감군상은 휙 칼을 털며 일어섰다.
“전하의 존함은 그리 함부로 불러도 좋은 이름이 아니다, 황제의 개.”
“끄으윽··· 엿 같은 새끼··· 시발··· 기습만 아니었으면···”
“왜? 내가 기습할 줄 정말 몰랐어?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거 알았잖아. 그래서 날 경계하고 있었고.”
이십사호는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이를 악물었다. 감군상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십사호는 하와이의 연 태수가 계획한 작전을 따라 질풍도 감군상을 섭외해 여기까지 이끌고 왔지만, 그 여정에서 약간의 의심을 하게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 감군상은 현상범 하나를 쫓다가 기도를 다쳐 정말 걸걸거리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십사호도 그가 말수 적은 것을 이해했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말수가 적은 것을 넘어 아예 벙어리가 되었다. 이십사호가 그걸 확실히 느낀 것이 어젯밤 객잔에서 대화할 때였다. 그가 공주의 명에 별다른 불복 없이 천후성으로 이동하려 한 것에는 그 벙어리가 된 감군상에게서 수상함을 느끼고 공주와 떼어놓기 위해서였다.
“···언제, 언제 바뀐 거냐? 거의 종일 붙어 다녔는데···”
“궁금해?”
감군상은 일그러진 이십사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아까 그가 그런 것처럼 씨익 웃었다.
“안 알려줄 거야.”
이어진 그녀의 칼질에 이십사호의 머리가 툭 떨어져 흙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감군상은 냉혹한 얼굴로 굴러다니는 이십사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스륵 몸을 돌려 여전히 몸을 떨고 있는 왕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 위에 묶여있는 그를 보며 허리에 손을 짚으며 놀리듯 말했다.
“왕 적사?”
“···누구십니까?”
“모용산산.”
왕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모, 모용세가의 귀인이셨군요. 펴, 평소 모용세가의 공명정대함과 위업을 흠모해왔습니다. 제가 적사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모용 가주님의 업적을 들으며 자라왔기 때문에···”
“닥쳐 봐, 좀.”
“아, 예, 예···”
감군상은 벌벌 떠는 왕오를 보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이게 무슨 헛짓거리니. 네가 아니었다면 황제의 딸에게 계속 접근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기회는 정말 두 번 다시 없었을 거란 말이야. 그 계집애가 하와이를 떠나 몰래 신대륙에 왔다는 정보를 알아내려고 얼마나 많은 자원이 들어갔는지 알아? 거기에 태수의 계획을 알아내는 데에도?”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명령에 따라···”
그 순간 번쩍 움직인 그녀의 칼에 왕오가 타고 있던 말의 목이 잘려 나갔다. 덕분에 안장에 묶인 왕오는 털썩 주저앉는 말 사체에 그대로 깔려버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살려주십시오!”
감군상은 차가운 눈으로 깔린 왕오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염치도 없는 놈이군. 흑사 하나를 포함해 부하 일곱을 잃어놓고도 살길 바라는 것이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놈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장건, 그 장건이라는 놈 말입니다!”
감군상의 얼굴이 묘해졌다. 왕오는 그걸 보고 다시 외쳤다.
“이번 일은 중간에 정보가 샜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고수가 구음사혈을 지키고 있었겠습니까? 어쩌면 그놈도 황궁의 고수일지 모릅니다! 교위, 아니 어쩌면 비장군 급의 고수일지도요! 한낱 뱀에 불과한 제가 어찌 그런 고수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살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정말 억울하기 때문인지 왕오는 나름대로 열변을 토했다. 그게 통한 것인지 감군상은 잠시 망설이며 뭔가 생각하다가 말했다.
“···확실히 꽤 고수이기는 했지. 네 말대로 비장군은 아니더라도 선임교위는 될지도. 하지만 황군에서 네가 당한 것 같은 봉맥술을 만들었다는 정보는 없다.”
“혹 새로 만들어낸 무공일지도···”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면 황군이 아니던가.”
왕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고수가 황군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당장 무림 맹주도 황군 고수가 아니지만 대단한 고수이니까.”
왕오의 중얼거림에 대답해 주었던 감군상은 곧 고개를 슬슬 저으며 말을 이었다.
“됐다. 어쨌든 지금 내가 해결할 문제는 아닌 것 같군.”
그 말을 들으며 왕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아무래도 당장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이대로 궁으로 되돌아가더라도 임무를 실패한 죄를 물어 고통을 받겠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는 입을 열어 살려줘 감사하다는 말을 꺼내려 했다.
그보다 조금 빠르게 감군상의 칼이 그의 목을 잘랐다.
“아, 뭐 할 말 남았었나?”
그녀가 그리 말해봐야 왕오는 이미 목이 잘려 죽은 후였다. 그녀는 굴러다니는 왕오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고는 여태 타고 왔던 말 위에 올라탔다. 동시에 코밑에 붙어 있던 수염을 확 잡아 뜯었다. 그리고 얼굴을 마구 매만지며 안장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자 근엄한 남자의 얼굴과 건장한 체형이던 그녀는 천천히 여인으로 변신해갔다.
“장건, 장건이라. 어디서 그런 놈이 튀어나왔을까. 진짜 황군은 아닌 것 같았는데···”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말을 몰았다. 햇빛을 정면으로 받아 눈이 부시자 그녀는 말안장에서 삿갓을 꺼내 썼다. 그녀는 그렇게 동쪽으로 멀어져갔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는 목이 잘린 시체 둘과 말 한 마리만 싸늘하게 식어갔다.
* * *
진서하가 꺄르르 웃었다. 신나게 달리던 조조가 앞발을 들고 서서 갑자기 눈높이가 훌쩍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아이라면 겁을 먹고 비명을 지를 텐데, 담이 큰 녀석이었다. 물론 조조도 지난 며칠간 그녀를 태우고 다니며 그걸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서하는 정말 용감한 것 같습니다. 제가 서하와 같은 상황이었으면 저러기 힘들었을 것 같군요.”
마부석에 팔짱을 끼고 앉아서 그들을 바라보던 장건은 슬쩍 고개를 돌려 진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조를 타고 주변을 달리는 서하를 대견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강한 녀석이지. 아직 말은 못 하지만.”
“글쎄요. 이젠 말을 못 하는 것인지, 일부러 안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장건은 피식 웃었다.
객잔에서의 소란 이후 장건과 일행은 쭉 신사천을 향해 달렸다. 중간중간 객잔이나 집을 빌려 숙식을 해결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혹시나 또 습격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리고 서하는 그동안 조조와 친해져서, 장건이 낮 동안 조조의 안장에 타본 것이 벌써 이틀이 넘었다.
둘은 며칠이 아니라 몇 년을 서로 알고 지낸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달렸다. 아마 그건 조조가 서하에게 잘 맞춰준 것도 있겠지만, 혈을 치료하며 드러난 그녀의 재능이 일부나마 발현된 모습이기도 했다.
장건은 그 둘을 보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이러다가 저 녀석도 뺏기겠는데.”
“하하하, 그러면 조조는 더 기뻐할 것 같군요.”
“당연한 일이라 뭐라 반박할 것도 없겠소.”
그렇게 진하와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덜그럭대는 마차의 진동에 몸을 싣고 있는데, 갑자기 저 멀리 언덕 위로 올라갔던 서하와 조조가 뭘 봤는지 이쪽으로 달려왔다. 물론 장건은 그녀가 뭘 보았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마차 옆으로 달려온 서하는 숨을 작게 헐떡이면서 반짝거리는 눈으로 장건과 진하를 바라보았다. 장건은 웃었다.
“그래. 이제 보일 때가 되었지.”
곧이어 마차도 서하가 올랐던 언덕 위에 오르게 되었다. 저 멀리 해안가를 가득 채운 건물의 숲과 연안에 정박한 배들, 그리고 잘 닦인 도로와 수많은 사람이 보였다.
신사천新四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