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53)
53화
황야는 이제 없었다.
중원이나 다른 곳이 겨울임에도 신사천의 날씨는 그저 선선한 정도였다. 심지어 약간 습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거기에 염호성에서 출발하여 지난 며칠간 황야를 지나며 보았던 누런 풀과 흙먼지들은 푸르른 초록과 나무, 작은 개울과 강에 지워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푸른 하늘과 뭉글뭉글 피어오른 구름들, 화창한 햇볕과 코를 스치는 소금기 섞인 바람. 해안가는 아직 저 멀리 있지만 벌써 바다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도시가 있었다.
해안선을 타고 온 신대륙 북부 참나무들로 기둥을 세워 크고 높이 세워진 건물에서부터, 구석에 낡은 판자로 대충 얼기설기 엮어진 조그만 판잣집까지. 지난 백 년의 세월 동안 새로운 삶을 찾아서, 내 땅을 위해서, 황금을 바라고, 혹은 그저 도망쳐 온 사람들의 시간을 토대로 삼아 세워진 건물들이 복잡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 난잡한 것인지 융성한 것인지 모를 도시 안에는 수많은 건물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비단옷을 잘 차려입은 중원인이나 낡은 거적을 걸치고 짐을 옮기는 원주민부터 그 반대의 모습도 있었고, 거리에서 음식을 파는 장사치와 수레에 짐을 잔뜩 옮기는 상인도 있었다.
신나서 그들을 구경하던 진서하가 겁을 먹고 마차 안으로 숨어든 것은 그 수많은 사람 중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와 덩치에 새까만 피부를 가진 흑인을 보고 난 뒤였다.
진하는 그런 소녀의 모습과 흑인의 덩치를 보며 말했다.
“어디서 왔을까요? 등에 장검을 멘 것을 보아하니 노예는 아닌 것 같은데···”
“왜, 그쪽도 저 사람이 무섭소?”
마차를 몰던 진하는 그 물음에 옆을 돌아보았다.
“그냥 신기해서 그렇습니다. 저들이 사는 서쪽에서 중원을 오려면 중원에서 신대륙으로 오는 거리만큼은 와야 한다던데, 거기서 다시 한 발 더 내디뎌 이 땅까지 왔다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장건은 슬쩍 웃었다. 겁먹었냐는 말에 진하가 살짝 발끈하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여자는 안 그런 것 같아도 은근히 자존심이 강했다.
“···왜 웃으십니까?”
“그쪽 말이 맞겠다 싶어서.”
장건은 대충 대답해 주고 털털 조조를 몰아 조금 앞서갔다. 진하는 그 뒷모습을 뚱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안 무섭다니까 그렇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방금 그 흑인 무사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그 커다란 갈색 눈과 마주한 그녀는 바싹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얼른 마차를 몰았다.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던 흑인 무사는 킁 하고 코를 한 번 훔치더니 이내 상인과의 흥정에 빠져들었다.
* * *
일행은 일단 중원으로 가는 배편을 찾았다. 그 와중에 진견이 배 하나에 백 수십 명이 바글바글 몰려가는 인간 운송선을 알아보다가 설묘금에게 한 소리 듣는 일도 있었다. 진견은 허허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나 혼자 가는 게 아니었지요. 생각이 짧았습니다.”
사실 설묘금에게 더 신세를 지는 게 부담스러웠던 마음에 그랬던 것이었지만, 그는 진서하를 위해 마음을 바꿨다. 안 그래도 멀고 험한 항해인데 그런 수송선을 타고 가면 아이가 병에 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야 내공을 익혔으니 멀쩡히 왔지만.
설묘금은 조금 더 비싸고 편안한 배편을 찾아서 웃돈까지 줘가며 자리를 구했다. 물론 거기에 그녀와 진하의 자리는 없었다. 그녀들은 중원이 아니라 하와이로 가야 했다.
그녀는 진견에게 표를 내밀며 말했다.
“운이 좋아요. 내일 바로 출발하는 배가 있었어요.”
“이거 참. 설 시주에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정말 고맙소, 설 시주.”
설묘금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띄웠다.
“뭘 이 정도 가지고요. 그럼, 서하를 잘 부탁해요.”
진견은 그녀의 말과 표정에 순간 말을 잊었다. 갑작스러운 작별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금방 얼굴을 가다듬었다.
여기까지 함께 오면서 어쩌면 당연하게 그녀가 함께 중원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떠나는 그들을 배웅해 줄 것이라 생각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책의 취재라는 뜻을 가지고 신대륙에 온 사람이었다. 헤어짐은 당연했다.
“···우리 길이 겹치는 건 여기까지였구려. 지난 며칠간 신세를 정말 많이 진 것 같소. 나중에 꼭 우리 소림사에 방문해 주시오, 설 시주.”
조조의 안장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거리며 부둣가 사람들을 구경하던 서하가 그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녀는 희미하게 떨리는 눈으로 어른들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 진견이 설묘금을 향해 손을 합장하고 허리를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서하는 다급히 옆에 서 있던 장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진견을 지켜보던 장건은 대충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말안장에 앉은 그녀를 번쩍 들여 땅에 내려놓았다. 서하는 그렇게 땅에 내려서자 곧바로 달려 설묘금의 품에 풀썩 안겨들었다.
“어어, 서하야?”
그렇게 안겼던 서하는 천천히 얼굴을 들어 설묘금을 올려다보았다. 아이는 울상을 짓거나 엉엉 울지도 앉았다. 그저 맑은 눈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주르륵 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 본 설묘금의 눈가는 금세 붉게 변했다.
“어, 음, 그래. 조금 갑작스럽지? 하지만 헤어질 시간이야, 서하야. 서하는 이제 중원으로 가야 하고, 나는, 음. 나와 진하도 가야 할 곳이 있거든.”
설묘금은 애써 웃으며 서하의 눈가를 손으로 닦아주었다. 그녀는 목이 메여 살짝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 서하야. 영원히 헤어지는 게 아니야. 서하가 소림사에 가 있으면, 내가 꼭 진하랑 같이 찾아갈게. 알았지? 소림사에서 진견 스님 말씀 잘 들으면서 기다리면, 음, 내가 선물도 사서 갈게. 서하 선물은 뭐가 좋을까? 비단옷? 향낭? 큼, 내가, 진짜 예쁜 비단옷 지어 갈 테니까···”
그때 서하의 입이 벌어졌다.
“언제?”
그 순간 부둣가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오직 그들 주변만 뭔가 부드러운 공기로 가득 채워진 듯 고요해졌다. 뱃사람과 상인들의 고함으로 분명 시끌벅적한 장소였으나, 서하의 목소리를 듣는 일행은 그런 소란과 한 발 떨어져 있었다.
잠시 놀란 표정이었던 설묘금은 눈가에 눈물이 잔뜩 고인 그대로 활짝 웃었다.
“···언제 갈 거냐구? 음, 소림사가 있는 하남 숭산은 가을 단풍이 정말 멋지다는 이야기 알아? 나도 어릴 적부터 이야기만 듣고 한 번도 가보질 못했거든. 그러니 이번 가을에 갈게. 신년이 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아마 반년 조금 더 지나야겠네. 우리 서하,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
서하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고개를 끄덕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꼭 만나.”
설묘금은 서하를 꼭 끌어안았다.
“그럼. 꼭 다시 만나야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옆에서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진하도 끌어와 함께 서하를 끌어안았다. 진하는 품 안에서 느껴지는 서하의 온기에 결국 훌쩍거리며 눈물을 보였다.
한바탕 눈물을 보인 설묘금은 눈가를 닦고 일어나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 포권을 하며 말했다.
“오래 함께한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신대륙 무림인에게 알고 싶었던 많은 부분을 알 수 있었어요. 조금 먼 이야기지만 만약 제 책이 나온다면 아마 그 주인공은 장 무사일 거예요.”
장건이 대답했다.
“글쎄. 그럼 책 판매금이라도 좀 나눠주나?”
“그럼요. 나중에 받으러 오세요.”
그는 고개를 살살 흔들며 툴툴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서로를 끌어안고 훌쩍거리는 서하와 진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급한 일 있소? 오늘 저녁은 같이 먹고 가지.”
“···그건 힘들 것 같아요. 저희가 탈 배가 조금 뒤에 출발하거든요.”
-더 늦으면 진짜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사람이 있어서요.
장건은 겉으로 말하는 것 밑에 아주 작게 깔린 이중음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공주의 가출이면 황제의 포고문이 붙어도 이상한 것 없는 일이었다. 그 문제를 감추고 봉합한다고 하와이의 관리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어느 정도 예상이 갔다.
그는 설묘금에게 마주 포권을 해주었다.
“잘 가시오.”
이후 진견과 다시 한번 인사를 나눈 설묘금은 훌쩍거리는 진하를 겨우 이끌고 점점 멀어져갔다. 서하는 뚝뚝 흘리던 눈물을 지우고 찡그림 하나 없이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어른스러움 같기도, 혹은 다음에 그녀들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침착함 같기도 했다.
어쨌든 남은 세 사람은 두 여인이 사라진 부둣가의 사람들 틈새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 * *
설묘금, 유설은 슬쩍 진하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장건 일행과 헤어진 지 한참인데 아직도 붉은 눈가로 훌쩍이고 있었다. 한번 터진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하지만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진하는 안 그런 척하면서도 서하를 제일 살뜰히 보살피며 신경을 썼다. 비슷한 이름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서하를 새로 생긴 막냇동생쯤 여긴 것이다.
“그만 울어. 나중에 소림사에서 만나면 되잖아.”
유설은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거리는 것을 느끼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진하는 빨간 눈가를 샐쭉하니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 가을이요? 그게 가능하겠어요? 당장 장안으로 돌아가면 근신 처분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일 텐데요?”
“···그, 글쎄? 연 태수랑 어떻게 잘 처리하면 아버님 모르게 끝나지 않을까?”
“아가씨도 못 믿는 이야기 하지 마세요.”
유설은 그 매서운 태도에 곤란한 듯 웃다가 말했다.
“봐봐, 진하. 너무 걱정하지 마. 이번에 돌아가면 내가 아버님께 부탁 하나를 할 거거든?”
“···가출 후 돌아가서, 부탁을 하시겠다고요? 제정신이세요?”
“왜? 오빠들이나 언니들보다는 낫지. 후계자 자리를 꿰차겠다며 나서서는 무공은 안 익히고 온갖 뻘짓을 하는 그 사람들보다는 훨씬 가벼운 잘못 아니야?”
진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 몰랐다. 유설이 닷 푼 소설에 빠져 난리를 피워봐야 가출이지만, 그녀의 형제들은 권력을 위해 정적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으니까.
“···뭘 부탁하시려고요?”
“음. 적당한 관직을 받아서 신대륙으로 돌아오려고. 이제 놀고먹지 않고 일하겠다는 거니까 아버님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진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쩍 벌렸다. 그러나 유설은 그 얼굴을 보며 천연덕스레 히죽 웃을 뿐이었다.
* * *
두 여인이 떠난 일행은 객잔을 잡았다. 배의 출발이 내일 아침이니 하룻밤 묶을 곳이 필요했다. 더 쓸모가 없는 마차는 장건이 가서 적당한 값에 팔아치웠다. 설묘금이 사준 것이기도 하니 중원까지 가져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너무 비쌌다.
다섯이 먹던 식사를 셋이 하자니, 식탁 위가 아주 조용해졌다. 살갑게 굴던 설묘금이 없어서인지 진견은 말이 없었고, 장건도 식사하며 말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서하는 오늘 낮에 입을 열기 전까지는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소녀였으니 당연했다. 결국 식사를 마치고 서하를 방으로 올려보내 재울 때까지 세 사람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이후 장건은 마지막 남은 연초를 태우려 1층에 남았다. 그런데 불을 붙이기 전 진견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또 연초를 태웁니까?”
장건은 아직 불붙지 않은 연초를 슬그머니 내리며 대답했다.
“이게 마지막이오.”
진견은 그 대답에 허허 웃더니 점소이를 불러서는 술을 시켰다. 장건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중은 술 마시면 안 되는 걸로 아는데.”
“술? 무슨 소리요? 난 곡차를 시켰소이다, 곡차.”
너무 뻔뻔해 보이는 진견의 표정과 대답에 장건은 툴툴 웃었다. 확실히 진견은 처음 만났던 첫인상보다 훨씬 부드럽고 조금은 뻔뻔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 사제가 그랬던 것처럼 괜찮은 사람이기도 했다.
술이 나오자 진견은 자신의 손으로 장건의 잔과 자신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그걸 훌쩍 들어선 말했다.
“앞으로 장 무사의 평안을 위하여.”
장건은 옅게 웃으며 받았다.
“항해가 순조롭기를.”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은 두 사람은 이내 훌쩍 잔을 들이켰다. 그런데 깔끔히 술을 넘긴 장건과는 다르게 진견은 금세 벌게진 얼굴로 쿨럭거렸다. 장건이 그걸 보며 다시 어이가 없어서 웃자니 진견도 켁켁대며 웃었다.
“이, 이거, 생각보다 엄청 맛이 없구려.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는 게요?”
“글쎄. 나도 풍류는 잘 몰라서.”
장건은 그렇게 대답하며 자기 손으로 잔을 채웠다. 진견에게 슬쩍 내미니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잔을 뒤집어 덮었다. 생각보다 훨씬 별로였던 모양이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식사할 때처럼 별다른 말 없이 한참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늦은 저녁 그들처럼 조용히 술을 마시는 사람과 큰 소리로 웃어가며 작은 소란을 피우는 사람, 그냥 잠이 오질 않아 시간을 죽이는 사람 등등이 객잔 1층 여기저기에 보였다.
그때 장건이 고개를 들어 객잔 계단을 바라보았다. 서하가 뚱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장건은 입 모양으로 물었다.
왜?
서하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역시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졸려.
그게 무슨 뜻일까 잠시 생각하던 장건은, 그게 지난번 습격이 있던 객잔에서처럼 그녀가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켜달라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입매를 길게 늘이며 작게 한숨을 내쉰 장건은 훌쩍 일어났다. 그리고 진견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럼 이만.”
서하가 내려온 것을 본 진견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건은 계단을 두세 개씩 훌쩍훌쩍 오른 장건은 서하를 훌쩍 집어 들어 어깨에 들쳐메고 방으로 올라갔다. 침대에 들어간 서하는 이후 밤 내내 장건과 함께 있겠다는 듯 똘망똘망 눈에 힘을 줬지만, 오래지 않아 게슴츠레해져선 깜빡거리다가 곧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엔 그것 때문에 골이 났는지 식사를 하는 내내 장건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결국 그리 떨어지려 하질 않아서 부두의 배까지 가는 동안엔 장건이 그녀를 업고 가야 했다.
그들이 타고 갈 커다란 배가 보이자 장건이 등 뒤를 향해 말했다.
“다 왔다.”
하지만 서하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물론 장건이 천천히 그녀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계속 자는 척 할 순 없었다. 끝내 서하는 등뒤에 배를 두고 장건과 마주 봐야 했다.
장건은 서하가 뚱한 표정으로 바닥만 보는 모습에 슬쩍 웃었다. 그리고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을 걸었다.
“헤어질 시간이야.”
그 말에 서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장건은 그녀의 코를 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너무 아쉬워할 필요 없어. 살다 보면 또 언젠가 만날 수도 있겠지.”
“···또 봐?”
장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대로 된 기약도 아니었건만, 서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조금 표정이 밝아졌다. 덕분인지 그녀는 장건과 헤어져 배에 오르는 동안 울지 않았다. 갑판에 올라 그를 바라보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배는 곧 출발했다.
장건은 멀어지는 갑판 위에 그들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서하와 진견도 마주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서하가 갑자기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손을 내렸다. 그리고 이후 부두에서 유일하게 그 소녀의 얼굴을 본 장건은 혼자서 푸하하 크게 웃었다.
서하는 장건을 향해 메롱, 혀를 내민 것이다.
이후 그 배가 만을 빠져나가 수평선 너머로 멀어지는 동안 장건은 한참이나 그곳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잠깐이었지만 그도 정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남은 아쉬움을 담아 가벼운 한숨을 내쉰 그는 객잔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제 일거리라도 알아볼 시간이었다.
그때 누군가 불쑥 말을 걸었다.
“장건? 너 장건이냐?”
장건이 고개를 돌려보니 웬 서른 중반의 남자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장건이 나이 먹으면 꼭 그렇게 생겼을 것처럼 꼭 닮은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