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54)
54화
* * *
중원 호남에는 장壯씨 성을 가진 가문이 하나 있었다.
무슨 고대 세가들처럼 전국시대의 성씨가 이어져 내려온 가문은 아니었고, 그저 몇 대 전 조상부터 장사에 재능이 있어 상행을 통해 가세를 불려온 가문이었다. 물론 그렇게 대를 이어 성세가 내려오니 그 일대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이 될 수는 있었기에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호남에서 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그렇게 가문이 커지는 와중에도 특별히 뛰어난 관리나 황군을 배출하지는 못해서, 뒤에선 그저 장사치 가문, 돈 놀음하는 돈놀이꾼 정도로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러니 처음 장건이 무공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을 때 가문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잘 지냈느냐?”
찻잔을 앞에 두고 한참이나 망설이던 장운이 그렇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십 년도 넘어서 다시 만난 동생에게 한다는 말이 고작 잘 지냈느냐니.
“그냥저냥 삽니다.”
하지만 팔짱을 끼고 내리깐 눈으로 찻잔을 바라보던 장건은 그리 짧게 대답했다. 장운은 그 대답을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핥으며 머뭇거리다가 찻잔을 들어 마셨다.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장건은 찻잔을 내려다보는 시선 그대로 말했다.
“양 부인은 잘 계십니까.”
그 질문을 들은 장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양 부인이라니, 네 어머니다. 어찌 그리 부르는 게냐?”
“그분이 그리 불러달라 했던 거 기억 안 나십니까.”
장운은 장건의 대답에 뭐라 말은 못 하고 머뭇거리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널 배 아파 낳은 어머니인데 어찌 그리···”
그의 한숨 섞인 중얼거림에 장건은 두 눈을 감았다. 눈꺼풀에 가려진 시야에 이십 년도 더 전에 듣고 보았던 순간이 그려졌다. 화려한 비단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여인이 두려움과 혐오감, 슬픔과 혼란스러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다.
‘몸은 내 배에서 나왔으나 그 알맹이는 귀신이니,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앞으로 넌 날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양 부인이라 부르거라··· 그 몸뚱이나마 낳아준 것에 일말의 고마움이라도 느낀다면 말이야.’
“···어머니는 정정하시다. 요즘엔 막내 신랑감을 찾느라 바쁘시지.”
그 말에 장건은 눈을 뜨고 장운을 바라보았다.
“그 녀석이 벌써···”
“벌써라니? 연이 나이가 스물셋이다. 오히려 좀 늦었지.”
“···입군入軍은요?”
장운은 막냇동생 이야기가 나오자 어색함이 조금 풀리는지 허허하고 작은 웃음을 지었다.
“입군은 무슨. 세 번이나 봐서 세 번 다 떨어졌다. 아버지가 막둥이라고 너무 봐줬어. 차라리 장사라도 가르쳤어야 했는데··· 열여섯에 첫 시험을 보고 마지막 시험까지 햇수로 구 년이다. 그동안 무공만 익혔는데 황군은 못 들어갔으니 그 재주를 어디에 쓰겠냐?”
“연이 정도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장건은 장씨 가문의 셋째 장연을 떠올렸다. 장운과 장건보다 늦게 태어난 늦둥이에다가 막내딸이라는 간판도 달고 있어서 온 가족의 귀여움을 다 받던 아이였다. 장건의 머릿속에 무공을 익히며 히죽 웃던 소녀의 모습과 그가 가문을 떠나던 밤 어떻게 알았는지 따라 나와 훌쩍이며 인사를 하던 모습이 스쳤다.
“그리 세 번이나 떨어졌으면 얌전히라도 있지, 그 녀석이 만날 하는 소리가 뭔 줄 아느냐? 경직된 황군이 자신의 가치를 못 알아봐 준다는 게야. 오래된 고집과 관습으로 똘똘 뭉쳐서 자기 무공의 깎아내린다는 거였지.”
장건은 장연의 구시렁거림을 들으며 옅게 웃었다.
“연이 성격에 얌전히 혼인하진 않을 텐데요.”
“그래서 어머니도 신경 많이 쓰신다고 하더라. 가문보다 잘 생기고 착한 놈으로 구한다고. 고 녀석 성격에 처음엔 난리를 피워도, 정작 남자가 마음에 들면 신나서 혼인을 앞당기려 할걸?”
“그렇군요···”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하던 장운은 슬쩍 장건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하늘이 도우셨는지 이렇게 만났으니 하는 말인데··· 연이가 식을 올릴 때, 너도 올 거지? 아니, 기왕이면 이번에 내가 중원으로 돌아갈 때 같이 가자. 같이 돌아가면 아버지와 가문의 어른들도 좋아하실 게다.”
장건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 그들이 좋아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그저 가문의 기대를 저버리고 가출한 놈이라 욕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더 껄끄러운 것은 양 부인을 만나는 것이었고. 그래서 장건은 주제를 돌렸다.
“상행을 신사천까지 넓히신 겁니까?”
장운은 그 모습에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부두에서 만나 어찌어찌 상회까지는 끌고 왔건만 단번에 선을 긋는 것이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는 글러 먹은 것 같았다.
“···많이 늦었지. 다른 상인들은 진즉부터 이 신대륙 상품을 가져다 팔고 있었는데. 우리도 이제 해상무역에 조금 더 신경 쓸 참이다. 이 신사천 지점은 그 시작이고. 이 상회 건물을 다 지은 것도 얼마 안 됐다.”
장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돈벌이에는 귀신같았던 가문이 늦게나마 신대륙 상거래에도 끼어드는 게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원래는 천후성에 지점을 내려 했는데, 거기는 황군의 입김이 세 이익을 많이 보기 힘들더구나. 그래서 그쪽에 뇌물로 절반을 뜯기느니 여기서 북쪽 항로를 쓰고 무림맹에 보호비를 내는 편이 더 나을 듯하여 위치를 정했지···”
장운은 그 후에도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서인지 이런저런 푸념을 털어놓았다. 신사천 상행조합의 텃세가 심하다든지, 무림맹의 맹원들이 너무 딱딱하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장건은 앞에 놓인 찻잔을 비우며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 장운이 다시 할 말이 없어질 때쯤에야 입을 열었다.
“연이 소식은 잘 들었습니다. 내가 혼인 축하한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운은 그가 떠나는 걸 말리고 싶어 벙긋거렸으나 결국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럼.”
장건은 작게 머리를 숙이고 방을 나서려 했고, 그를 잡지 못한 장운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눈을 꾹 감았다. 그때 장건이 손대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장운과 비슷한 나이대의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방문을 열었다가 문 앞에 선 장건을 보고 활짝 웃었다.
“어머. 어디 가시려고요, 도련님?”
장운의 아내였다. 장건은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아, 그게. 이제 가보려고···”
“가다니요? 식사 준비 다 해놓았는데요?”
“식사요?”
그녀는 웃는 낯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래요, 도련님.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인데 벌써 가려고요? 갑작스럽긴 해도 제가 솜씨를 좀 부려 보았으니 식사는 하고 가세요.”
장건은 잠시 망설였다. 차라리 장운이 그리 말했으면 분명히 선을 긋겠는데, 차마 형수에게까지 그리 차갑게 굴기는 힘들었다. 장운의 부인 염 씨는 장씨 가문에 시집오고 나서 장건을 마치 친동생처럼 대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장건은 그녀의 미소를 보고 결국 마주 웃었다.
“그럼, 한 끼만 얻어먹어 볼까요.”
“한 끼 정도로 되겠어요? 밥 많이 지어놓았으니까 마음껏 먹어요.”
결국 장건은 그렇게 살짝 늦은 점심을 얻어먹고, 이후에는 함께 차를 마시며 염 씨와 담소를 나누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니 자연스레 해가 지고 저녁 먹을 때가 되었다.
“아! 저녁 식사하셔야죠?”
“그, 저는 이제···”
염 씨는 뭐라 말로 붙잡지 않았다. 그저 입가에 미소를 지우고 마치 진짜 갈 생각이냐 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을 마주 본 장건은 끝내 가보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저녁까지 얻어먹어야 했다.
한 상 잘 차려놓은 식사를 마치니 염 씨는 또 자연스레 상회의 방 하나를 정리해 장건의 잠자리까지 마련해 두었다. 결국 장건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나서야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건 뭐, 마인이나 현상범은 죽어라 팰 수라도 있지···”
다음날 일어나 짧은 심법을 수련하고 밖으로 나오니 염 씨의 하인이 씻을 물과 갈아입을 옷까지 싹 준비하고 있었다. 씻고 나선 곧바로 염 씨와 장운, 그리고 장운의 어린 두 남매와 둘러앉아 아침 식사를 해야만 했다.
조용히 밥을 먹던 장건은 슬쩍 염 씨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
“어머! 그러고 보니 도련님,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이제 네 살 난 딸아이의 입에 직접 수저를 물려주던 염 씨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장건은 떠난다고 말하려던 것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예, 뭐. 도울 게 있다면야···”
염 씨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게 지금 상회 건물이 아직 완전히 정리가 끝나지 않아서요. 이 사람이랑 상회 사람들이랑 오늘 좀 바쁠 것 같아요. 나도 한 손 보태야 하고요. 그런데 문제는 오늘 우리 상이, 영이의 유모가 몸이 좋질 않아서 나오질 못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오늘 낮 동안만 아이들을 좀 봐줄 수 있을까요?”
“···애들을 봐달라고요?”
염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바라보던 장건이 슬쩍 장운의 얼굴을 확인하니, 그는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밥만 먹고 있었다. 거기에 이번에는 아이들에게 눈을 돌려보니 열 살 난 아들 장상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네 살 난 장영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을 돌아보며 잠시 망설이던 장건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낮 동안만이라면 그렇게 하죠.”
염 씨는 활짝 웃었다.
“오후엔 아이들 유모가 나올 수 있다더라고요. 그때까지만 좀 부탁할게요, 도련님.”
“큼큼. 좀 부탁하마.”
옆에서 듣고만 있던 장운도 그리 말했다. 그렇게 장건은 장운의 아이들을 잠깐 맡게 되었다.
* * *
장운의 집은 상회 뒤편에 지어진 별채였다. 원래라면 거기서 장운 혼자 지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염 씨는 그렇게 아이들과 몇 년 동안 떨어지면 아비 얼굴을 까먹고 말 것이라는 이유로 아이들을 이끌고 여정에 따라붙었다.
결과적으로는 장운도 기뻐했다. 아무리 새로운 사업 확장을 위해서라지만 가족과 한참이나 떨어져 몇 년에 잠깐씩만 만나는 건 그도 사절이었다. 물론 염 씨의 행동에는 아직 건장하게 살아서 집안을 이끄는 장운의 아버지와 어머니 염 부인의 강압적인 손길에서 아이들을 지키려는 생각도 있었다. 장상이 어릴 때부터 총명한 모습을 보이자 가주와 염 부인이 아이를 엄하게 교육하려 한 것이다.
장건은 의자에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는 장상과 장영을 마주 보았다. 장상은 약간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장영은 작은 인형 하나를 끌어안고 멀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벼운 한숨을 내쉰 장건이 말했다.
“뭐, 하고 싶은 거 있냐?”
얼른 대답한 것은 장상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하고 싶은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가 진짜 우리 삼촌이에요?”
“그래.”
장상의 눈이 더 초롱초롱해졌다.
“고모 말로는 삼촌이 엄청 고수라던데요.”
“···연이가?”
장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무공 한 번 보여주면 안 돼요?”
장건은 그 기대감 가득한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어제 헤어진 진서하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 아이들을 붙잡고 차마 소꿉놀이라도 할 자신은 없었던 장건은, 차라리 그냥 잠시 광대가 되는 편이 낫겠다 싶어 별채 마당으로 아이들을 이끌고 나왔다. 이후 데리고 나온 아이들을 의자에 앉혀놓은 장건은 마당 구석에 놓여있던 빨래 장대를 가져와 마당 한가운데에 세웠다.
그리고 옅게 웃으며 말했다.
“잘 봐.”
그 자리에서 아무런 도움닫기 없이 뛰어오른 장건은 휘리릭 공중제비를 돌아 방금까지 제 손으로 세웠던 장대 위에 올라섰다.
“와!”
“우와!”
일 장 반은 되는 장대 위에 한 발로 올라선 장건은 진짜 광대처럼 그 위에서 두 손을 활짝 펼쳐 보였다. 누군가 무공을 익힌 자가 그 모습을 보았으면 두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제자리에서 한 번에 뛰어 그 높이를 올라간 도약력도 물론 놀라웠지만, 더 대단한 것은 장대가 땅에 박혀 있는 것이 아니란 점이었다.
마치 평지 위에 올라가 있는 듯한 지금 장건의 모습은 굳건하면서도 유연한 전신의 힘과 균형감각이 이뤄낸 묘기였다.
이어서 그는 갑자기 기우뚱 넘어졌다. 두 아이가 깜짝 놀랄 때, 그는 떨어지지 않고 장대 위에 거꾸로 섰다. 뒤집힌 상태에서 발등을 장대 끝에 걸쳐 매달린 것이다. 장영은 그게 재밌었는지 깔깔 웃었다.
장건은 그 이후에도 장대 하나를 이용해 이런저런 묘기를 보여주었다. 대부분 무슨 차력단에서나 볼법한 장난들이었다.
그렇게 짧은 공연을 마무리한 장건이 장대에서 내려와 두 아이를 향해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장상이 먼저 박수를 쳤고, 장영은 자기 오라비를 따라 어설프게 손뼉을 쳤다.
그때 두 아이의 것이 아닌 박수가 장건의 등 뒤에서 짝짝 울렸다.